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의 모든 챕터: 챕터 151 - 챕터 160

174 챕터

제151화

정우진은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기댄 채 목울대 아래에 햇살이 드리워졌다. 그 모습은 실로 고귀할 따름이었다.방금 회의실에서 얼굴을 굳혔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여기 있는 서류들 싹 다 처리해.”신시아는 그의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바라봤다.그녀는 커피를 내려놓고 무심코 서류들을 훑어봤는데 모두 자잘하고 중요치 않은 내용이었다.하지만 여전히 묵묵히 서류들을 챙겨 들었다.“대표님, 저 조수 한 명 받을 수 있을까요?”정우진은 늘씬한 손가락으로 커피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몇 초간 고민한 후에야 넌지시 입을 열었다.“그래, 그럼 비서실에서 한 명 뽑아.”“감사합니다, 대표님.”신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챙겨서 나갔다.그녀는 이은수를 조수로 선택했다.이은수는 주로 정우진이 던져주는 자잘하고 중요치 않은 ‘골칫거리’들을 처리하는 역할을 했다.그 외에도 정우진이 커피를 타라고 하면 그녀가 타서 이은수에게 시켜 가져다주었다.이은수는 비서의 모든 업무를 거의 다 처리해주며 신시아에게 꽤 큰 도움이 되었다.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팀원들과 회의를 진행할 때 몇 번이나 중단되어야만 했다.매번 정우진이 트집을 잡았으니까.처음에는 사소한 문제들을 끄집어내서 이은수에게 대신 처리하라고 넘겼는데 나중에는 오직 신시아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냈다.그 결과 비서 업무에 얽매인 그녀 때문에 팀 전체의 진행이 더뎌졌다.신시아는 어쩔 수 없이 야근했다.오후 내내, 팀원 몇 명이 정계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다시 검토했고 구창 그룹 사람들과 첫 소통 후 프로젝트 협력안을 일부 조정했다.신시아는 조정된 내용을 다시 검토하고 몇 군데를 수정하여 구창 그룹 담당자에게 이메일로 보냈다.메일을 전송하기 바쁘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하선재가 보낸 카톡이었다.[신 비서가 정계 프로젝트를 맡았어?][네.]신시아의 답장에 하선재는 방긋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잘 부탁해!]정계 관련 프로젝트는 구창 그룹의 사활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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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화

어둑한 복도, 정우진의 입술 끝에서 담뱃불이 위태롭게 점멸했다.희미한 불빛이 그의 이목구비를 비췄지만, 표정만큼은 어둠 속에 잠겨 읽어낼 수 없었다.워낙 압도적인 존재감이라 신시아는 복도 끝의 정우진을 단번에 알아챘다.한 번 닿은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대표님.”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사무실 문을 닫고서 정우진에게 다가갔다.플랫슈즈를 신은 탓에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핏이 예쁜 원피스는 그녀의 늘씬한 몸매를 더욱 돋보였다. 마치 대학생처럼 생기발랄하고 풋풋한 모습이었다.“그래.”정우진이 나직이 대답했다. 얇은 입술에서 뿜어낸 담배 연기가 그의 얼굴을 감쌌다.표정만으론 좀처럼 기분을 가늠할 수 없는 이 남자, 고개를 푹 숙인 채 담배만 피워댔다.몇 초간 싸늘한 정적이 흐르고 신시아가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안에 탄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던졌다.정우진은 미동도 없이 담배를 태웠다. 분명 이질적인 풍경이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그 모습이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마치 줄곧 그곳에 있어야 할 사람처럼 말이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던 찰나, 뼈마디가 선명한 손이 문을 덥석 막아섰다.신시아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남자가 들어서는 순간, 비좁은 공간은 온통 그의 체취로 잠식되었다.쌉싸름한 담배 향과 서늘한 침향이 뒤섞인 낯설고도 진한 향기였다.그녀는 구석으로 물러나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했다.엘리베이터는 아래로 내려갔고 둘 사이에 정적만이 흘렀다.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정우진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곧이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그래, 유라야.”“오빠, 아직 집에 안 갔어?”휴대폰 너머로 은유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일이 좀 남아서 회사에서 야근했어.”은유라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말을 이었다.“우리 벌써 며칠이나 못 봤는지 알아? 언제 나 보러 올 거야?”“내일 데리러 갈게.”“오케이!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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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당연히 들어가야죠.”신시아도 하선재가 혼자 올 줄은 몰랐다.그녀는 팀원들을 이끌고 룸으로 들어갔다.“나 인기 장난 아니에요. 왜 자꾸 선보라고 하는 건데... 누가 그래요? 나 엄청 튼튼하거든요. 엄마 할머니 되는 거 시간문제에요. 못 믿겠으면 내일 바로 집에 한 명 데려가요?”하선재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친 채 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제스처마다 묘하게 삐딱하고 반항적인 분위기를 풍겼다.발소리가 들리자 그는 뒤돌아보며 말했다.“됐어요. 이제 일 봐야 해요.”하선재는 전화를 끊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열댓 명의 사람들을 훑어봤다.“어쩐지 이렇게 큰 룸을 예약했더라니 팀원들을 다 불러 모은 거야?”이 말에는 신시아와 단둘이 식사하고 싶다는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이은수를 비롯한 일행은 하선재에게 인사를 건네려다 민망해졌다.“일 때문에 만나는 자리이니 당연히 모두 나와야죠.”신시아는 그에게서 몇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그제야 이은수 일행도 마저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안녕하세요...”사람들이 제각각 인사를 마친 후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는 모양새가 어딘가 어색하고 뻣뻣했다.반면 하선재는 삐딱한 자세로 건성건성 대답하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그의 양옆은 텅 비어 있었고 맞은편에는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신 비서는 이쪽 와서 앉아.”하선재가 옆자리 의자를 툭툭 치며 말했다.“내가 죄인이야? 집단 심문이라도 받게.”신시아는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들고 그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선재 쪽으로 가까이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하지만 그때 이 남자가 손을 휘저었다.“다들 그냥 앉아 있어요. 신 비서만 오면 돼.”이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 말에 다시 앉았다.“대표님, 마침 다 모였는데 구창 그룹의 프로젝트 담당자들도 불러서 같이 식사하는 건 어떨까요?”신시아의 제안에 그는 손목시계를 쳐다봤다.“이 시간대엔 다들 식사를 마쳤을 거야. 옆방에 애프터눈 티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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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으악!”하선재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재빨리 일어나 신시아의 몸을 두 손으로 받쳤다.그녀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하선재의 품에 쓰러졌다. 남자는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한편 신시아는 숨을 참았다. 고른 호흡조차 힘겨워 좀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어렵게 일 핑계 대고 밖으로 끌어냈더니 뭐가 그리 급해서 도망치려고 들어?”하선재는 혼비백산한 듯 말했다.“누가 널 잡아먹는대?”신시아는 겨우 마음을 추스르며 그의 손목을 짚고 일어섰다.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지만, 이 남자의 말을 듣자 다시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어졌다.“제발 좀 진지해질 수 없어요?”그녀가 진심으로 화난 것을 보더니 하선재는 혀를 쯧쯧 차고 금세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막 시시한 농담을 던지려던 찰나, 문득 입구에 드리운 두 개의 그림자를 발견했다.하선재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잠시 굳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더욱 활짝 피어났다.“여자들은 원래 나쁜 남자한테 더 끌리는 법이잖아. 신 비서 나 같은 스타일은 별로야? 그럼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데? 정우진 같은 성인군자? 금욕적인 스타일?”정우진을 언급하니 그녀는 머리가 더욱 지끈거렸다.한시라도 빨리 그 남자와 선을 긋고 싶은 마음에 신시아가 쏘아붙였다.“그건 더 별로예요!”하선재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문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이제 막 발견했다는 듯이 말했다.“어라? 정 대표! 이게 무슨 일이래? 설마 아까 신 비서가 한 말 다 들은 건 아니겠지?”신시아는 구겨진 치마를 정리하다가 그의 말을 듣고 온몸이 굳어졌다.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룸 입구에 정우진이 서 있었고 그의 앞에는 휠체어를 탄 은유라도 함께했다.은유라는 놀란 표정으로 정우진의 얼굴을 돌아봤다.“여기서 프로젝트 미팅한다고 해서 잠깐 들러봤어.”정우진은 한 손으로 은유라의 휠체어를 밀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방금 신시아가 한 말은 듣지 못한 듯했다.하선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훑어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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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갑자기 이름이 호명되자 신시아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몰랐어요. 두 분 사이가 좋은 건 굳이 제가 언급할 일이 아니죠.”“그래?”하선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은근히 비꼬았다.“난 못 믿겠는데. 그동안 정 대표가 유라 뒤통수 한번 안 쳤을까?”신시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그럴 리가 있겠어요?”이때 은유라가 정우진의 팔짱을 끼며 환하게 웃었다.“우리 오빠는 약속은 확실하게 지키는 사람이거든요. 저랑 함께하기로 한 이상 절대 미안한 짓 안 해요.”별안간 신시아의 머릿속에 지난번 그 키스가 떠올랐다.아니, 키스라기보다는 정우진이 그녀의 목을 거칠게 빨아 키스 마크를 남겼던 일 말이다.그건 은유라를 배신한 일이 아닐까?마음이 안 흔들렸다 해도 최소한 행동으로는 선을 넘은 건데...“얼른 먹어. 식으면 맛없어.”정우진은 어느덧 은유라의 밥그릇 위에 산더미처럼 음식을 쌓아 올렸다.은유라는 그 살뜰한 보살핌을 받으며 느릿하게 식사를 이어갔다.한편 신시아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아래로 그림자를 드리워 눈빛 속의 쓸쓸함을 감췄다.“정 대표, 유라랑 언제쯤 결혼할 생각이야?”하선재는 여전히 다리를 흔들며 능글맞은 미소를 띠었다.정우진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정작 시선은 신시아에게 닿아 있었다.“때 되면 알려줄게.”정우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결혼하고 애 낳아서 한 집안 세 식구가 단란하게 살아가겠네...”하선재는 ‘한 집안 세 식구’라는 말에 유독 힘을 실었다.옆에서 듣고 있는 신시아는 가슴이 철렁거리고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그녀가 용기를 내어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은유라가 불쑥 입을 열었다.“오빠... 나 그만 먹을래. 입맛 없어.”바로 직전까지 맛있게만 먹던 그녀가 무슨 일인지 갑자기 표정이 이상해졌다.은유라는 창백한 얼굴로 수저를 내려놓았다.정우진이 섬뜩한 눈길로 하선재를 쏘아보자 그 역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미소가 굳었다.“그래? 그럼 집에 데려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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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정우진은 침묵했다.한참 후, 은유라가 코를 훌쩍이며 그를 돌아봤다.“오빠, 아까 제대로 못 먹었지? 딴 데 가서 좀 더 시켜 먹을까? 이따가 또 일해야 하잖아.”정우진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아니, 괜찮아. 나도 별로 입맛 없어.”은유라는 입술을 깨물었고 얼굴에는 자책감이 역력했다.원래도 무거웠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더 숨 막히는 침묵으로 변했다.정우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이내 감정을 숨기려는 듯 시선이 깊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애써 가벼움을 가장했다.“다리 재검진은 언제야? 그때 같이 가 줄게.”“그래.”은유라는 그가 던진 화제를 조용히 따라갔다.“며칠 뒤야. 그때 가서 전화할게.”“알았어. 이만 집에 데려다줄게.”정우진은 시동을 걸고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차는 천천히 은씨 저택을 향해 나아갔다.잠시 후, 집 앞에 도착하자 정우진이 그녀를 차에서 안아 내려 휠체어에 앉혔다.“안까지 같이 들어가자.”“아니야, 나 혼자 갈 수 있어.”은유라는 그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일해야 하잖아. 얼른 회사로 돌아가.”정우진이 신시아를 제 사무실로 불렀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은유라의 가슴 한구석이 무겁게 내려앉았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몸이 불편해 백영 그룹을 매일같이 드나들 수 없는 처지였다.정우진은 더 고집하지 않고 몸을 돌려 차로 돌아갔다.막 시동을 거는데 은유라가 차창을 두드렸다.남자는 마지못해 차창을 내리고 옆얼굴의 날카로운 턱선을 드러냈다.준수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은유라는 심장이 마구 쿵쾅댔다.“오빠, 나...”그녀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끝내 입을 떼지 못했다.“돌아가서 푹 쉬어. 아무 생각 하지 말고.”이에 정우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은유라는 잠시 침묵했다.“그렇지만...”“약속했잖아. 이건 비밀이야.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정우진은 대뜸 그녀의 말을 끊고 달래는 듯하면서도 진지한 투로 이어갔다.“알았어.”은유라는 또다시 눈가가 붉어졌지만 애써 억눌렀다.“운전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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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별일 없어요. 그만 물어요, 엄마.”은유라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손연경이 혀를 찼다. 신시아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해 은유라가 한없이 작아진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이다.“너랑 우진이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인데 느닷없이 신시아 같은 애가 왜 튀어나온 건지, 쯧쯧.”...신시아가 구창 그룹 관계자들과의 프로젝트 미팅을 마치고 나오니 벌써 오후 3시 반이었다.그녀는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곧장 맨 위층 대표이사실로 향했는데 올라오기 바쁘게 임정현을 만났다.“신 비서님, 대표님께서 회의실로 오라고 하십니다.”신시아는 손목시계를 봤다. 오후 4시에 예정된 임원진 회의는 최소 2시간은 걸릴 터였다.“임 비서님, 이따가 다른 일정 있으세요?”“대표님 회의를 수행해야죠.”임정현은 회의에 필요한 서류들을 툭툭 쳤다.그때 신시아가 녹음 펜을 하나 꺼냈다.“이거 들고 들어가 주세요. 회의 끝나고 제가 가지러 올게요. 회의 내용 요약해서 퇴근 전까지 대표님께 메일로 보고하겠습니다.”그녀는 아래층에도 처리할 일이 산더미였다.임정현도 그녀가 바쁜 걸 잘 알기에 녹음 펜을 받아 들고 중얼거렸다.“대표님도 참! 이렇게 빡센 업무를, 그것도 두 가지씩이나 신 비서님께 동시에 맡기시다니...”“그럼 수고해주세요, 임 비서님.”신시아는 그에게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사무실로 돌아와 잠시 업무를 보는데 내선 전화가 울렸다.“올라와.”정우진의 감미로운 중저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낮게 깔린 음성에는 불쾌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신시아는 펜을 더 세게 움켜잡다가 잠시 뒤 수중의 일을 내려놓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녀가 대표이사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안에 들어서자 정우진은 금테 안경을 쓴 채 업무에 몰두하고 있었다.안경 너머로 번뜩이는 매서운 눈빛이 신시아를 훑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곧장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회의는 왜 빠졌지?”그 짧은 눈짓 한 번에 신시아는 목이 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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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정우진이 시계를 들여다보자 어느덧 밤 여덟 시 반이었다.둘은 아직 저녁도 먹지 못했는데 그녀는 묵묵히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몇 번이나 뻐근한 어깨와 목을 주무르면서도 퇴근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잠든 신시아의 얼굴에는 그 고집스러움이 사라졌고 섬세한 피부 위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밝은 조명 아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녀의 숨결에 맞춰 살짝 움직이며 뺨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남자의 차갑던 시선이 어느새 한결 부드러워졌다.특히 머리카락 한 올이 코끝을 간지럽히자 잠결에도 연신 코끝을 비비적대는 그녀의 모습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일렁였다.정우진은 마디가 선명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귀 뒤로 넘겨주었다.손끝에 닿은 그녀의 부드러운 감촉이 정우진의 심장을 세게 때렸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오던 그때, 신시아가 나지막이 끙 소리를 냈다.정우진은 마치 감전된 듯 손을 거두고 눈빛은 다시 차가워졌다.“퇴근해.”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챙기고 성큼성큼 나갔다.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고 그 소리와 함께 신시아도 서서히 잠결에서 깨어났다.텅 빈 맞은편 자리, 그녀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앉았다.‘퇴근해.’귓가에 맴도는 소리는 꿈인가 싶었다.신시아는 정신을 가다듬고 재빨리 서류를 챙겨 퇴근했다.17층 사무실에서 정계 프로젝트 관련 서류를 몇 개 처리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1시가 다 되었다.오는 길에서 김지원의 전화를 받았는데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아니, 정우진 그 인간 대체 어쩌자는 거야?”김지원은 그녀가 현재 두 가지 업무를 병행하느라 매일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고된 업무 강도에 늘 노심초사했다.“아무리 임신 중기라고 해도 이렇게 무리하는 게 어디 있어?”신시아도 정계 프로젝트를 맡은 것이 이런 상황을 초래할 줄은 몰랐다.“프로젝트가 안정되면 좀 나아질 거야. 길어서 한 달이야.”한 달 뒤면 팀워크도 다져질 테고 초기 프로젝트 기획안도 윤곽이 잡히리라 생각했다.“그래도 산부인과 검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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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화

[밥 한 끼로 은혜를 다 갚을 순 없죠.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예요. 시아 씨가 한가할 때 꼭 알려주세요.]장건우는 깍듯하고 예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신시아는 더 이상 답장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더니 이내 피로감에 휩싸여 단잠에 빠졌다.그 후 며칠간 그녀는 17층과 맨 위층을 오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다행히 정우진이 괴롭힌 게 아니라 단순히 업무량이 많았을 뿐이었다.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녀는 꼬박 사흘 동안 정우진을 마주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신시아는 매번 회의록을 정리할 때마다 임정현을 통해 녹음 펜을 챙겼고 회의가 끝나면 내용을 요약해 정우진의 이메일로 발송했다.가끔 있는 식사 자리 역시 임정현이 동행했다.그러던 어느 날, 신시아가 임정현을 찾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가 오혜린에게 붙잡혔다.“신 비서, 건우가 그러던데 신 비서가 건우 어머니께 의사 소개해줬어?”이에 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아 네, 마침 아는 분이 있어서요.”오혜린은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난 인맥이 없어서 막막했는데 신 비서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네. 건우가 언제 시간 괜찮으면 같이 식사하고 싶다고 꼭 좀 여쭤보래.”“아니요, 괜찮아요. 보다시피 저 지금 진짜 정신없이 바쁘잖아요.”신시아는 매일같이 위아래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비서실 직원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낱낱이 지켜봐 왔다.별안간 오혜린이 말을 이었다.“내일 맨 위층 모든 부서가 야유회를 갈 거야. 외곽에 있는 리조트인데 자유 시간이 많으니까 그때 건우더러 오라고 할게.”“아니...”“그럼 그렇게 하는 거로 정하고 지금 바로 건우한테 전화할게.”오혜린은 그녀에게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며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신시아가 쫓아가려는데 마침 정우진이 사무실에서 나왔다.남자의 익숙한 체취가 코를 찌르자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대표님.”“응.”정우진은 쌀쌀맞게 대답하고는 그녀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이에 신시아는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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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신시아도 격식 같은 건 내려놓고 싶었지만 장건우와 너무 친한 사이가 아닌지라 반말이 힘들었다.그녀는 웃으며 간신히 대답했다.“그래, 그럼.”두 사람은 2층 창가 자리에 앉았고 장건우가 종업원에게 손짓하여 메뉴를 주문했다.“나 이 식당 좀 알아봤는데 시그니처 메뉴 몇 가지가 괜찮더라. 여기 다녀간 손님들이 꽤 많이 추천했어.”장건우는 메뉴판을 신시아 앞에 놓으며 시그니처 메뉴들을 가리켰다.신시아는 무심코 훑어본 후 메뉴판을 다시 돌려주었다.“난 가리는 거 없으니 편하게 주문해.”“그래.”장건우는 그녀가 여전히 예의를 차리는 것을 눈치채고 바로 주문했다.“음료는 뭐로 할까?”“그냥 물 마시면 돼. 온수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네, 손님. 금방 내오겠습니다.”종업원은 곧바로 대답했다.장건우가 주문을 마치고 메뉴판을 돌려준 뒤, 종업원은 먼저 온수 두 잔을 내왔다.장건우는 조심스럽게 그녀 앞으로 한 잔 내밀었다.“내가 좀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지만, 엄마 일로 다시 한번 만나서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어.”신시아는 두 손으로 그가 건넨 물잔을 받았다.“아주머니가 괜찮으시면 다행이지.”장건우는 자세를 다잡고 자신의 잔을 들고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술 대신 물로 건배 한 번 할까?”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제법 각 잡으며 말했다.이에 신시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본인도 꽤 진지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장건우는 그녀보다 더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 같았다.“그럼 우리 이 잔 비우면 다시는 그 일 언급하지 말자.”그녀는 장건우와 잔을 부딪쳤다.자신이 너무 진지했음을 깨달았는지 장건우가 표정을 조금 풀었다.“좋아. 더는 언급하지 말자. 너 요즘 정계 프로젝트를 맡아서 구창 그룹 사람들과 협력한다며?”장건우는 선뜻 화제를 돌렸고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정계 프로젝트는 꽤 인지도가 높아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업계에서는 백영 그룹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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