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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피의 기억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1 12:56:54

시아는 악몽 속에 있었다.

꿈 속의 거리는 낯익었다.

도망치듯 달리던 그 길, 어두운 골목 끝에… 피에 젖은 구두가 떨어져 있었다.

그녀의 발끝엔 끈적이는 무언가가 묻어 있었고,

검붉은 액체가 한 방울, 두 방울,

또각또각 그녀가 걷는 자리에 선홍의 점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 피 위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그만… 그만해, 시아야…”

어디선가,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 도윤이 피를 흘리며 웃고 있었다.

그의 손엔 그녀가 감쌌던 칼이 들려 있었다.

“내가, 네가 가진 걸 대신 짊어져줄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 혼자 울지 마.”

그 말은 꿈이었지만, 현실보다 더 깊게 심장을 찔렀다.

시아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도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서 몸을 웅크린 시아가 억눌린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시아 씨… 괜찮아요? 악몽 꿨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 목울대까지 차올라서 심장은 벌써 수백 미터를 달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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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내 대행   10. 손을 내민 바보의 용기

    같은 시각. 도윤의 회사.신작 발표를 마친 개발팀은 잠깐의 휴식 시간에 접어들고 있었다.도윤은 책상 앞에 앉아 오늘 아침 백시아가 건넨 커피를 떠올렸다.“당신 오늘 조금 웃었어요.”“내가요?”“응. 눈꼬리가 조금 올라갔었어요.”도윤은 그 말이 온종일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때였다. 모니터에 알림창이 떴다.동료인 재민이 개발 서버 테스트를 하던 도중,시아의 이름이 출력된 로그를 실수로 눌러버린 것이다.도윤은 깜짝 놀라 창을 닫으려다,파일 제목에 눈이 멈췄다.[전과 조회 기록 백00]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리고, 그 기록을 본 재민이 뒤에서 어색하게 웃었다.“어… 이거, 테스트하다 잘못 들어간 거야.형 여자친구 이름이랑 똑같아서 깜짝 놀랐네.”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속으로는 심장이 무너지는 듯 뛰고 있었다.그녀의 전과.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 과거.‘…내가 생각한 것보다,훨씬 더 깊은 데서 온 사람일지도 몰라.’그러나 그는 마우스를 움직여 로그를 닫았다.보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길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그녀가 나를 믿게 될 그 순간까지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그날 밤. 시아는 조용히 칼을 꺼내 들었다.그건 오래전에 감춰두었던 첫 살인 때 사용했던 칼은 아니었지만그녀에게 유일하게 자신이라 부를 수 있는 물건이었다.부엌의 형광등 아래에서 칼날은 희미하게 빛났고, 그녀의 눈빛은 다시 차가워졌다.“내가 누군지 알고 다가오는 거라면 감당할 준비는 하고 와야지.”그녀는 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눈동자는 흐르지 않는 눈물로 가득했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나는 백시아. 그리고, 연쇄 살인마.”거울 속의 그녀가 살짝 웃었다.그날 밤, 백시아는 침대맡 스탠드도 켜지 않은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도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곁에서 느릿한 숨소리가 귓가를 스쳤지만 그녀는 그 숨결에 의지하지 못했다. 침묵. 그녀가 살던

  • 아내 대행   9. 그림자 위에 그림자

    사진은 낱장으로 흔들리고 있었다.백시아는 손끝을 다쳐도 느끼지 못할 만큼 의식이 멀어져 있었다.사진 속, 자신의 표정은 익숙했다.그녀는 웃고 있었고, 누군가의 품에 기대 있었다.그리고, 그 웃음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존재가,이제야 자신을 향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언제부터…”그녀는 낮게 중얼였다.그 순간 등 뒤에서 창문이 흔들렸고, 바람이 몰아쳤다.봉투 안에는 또 하나의 종이가 있었다.검은색 볼펜으로 적힌 다섯 글자.“기억하지?”그 말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협박이었다. 그리고 선언이었다.밤이 되어서야 도윤이 돌아왔다.지친 얼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현관을 열자 거실에서 앉아 있는 백시아와 눈이 마주쳤다.“돌아왔어요.”“…응.”그녀의 대답은 짧았다.그러나 그의 눈엔 보였다.그녀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는 걸.그는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그는 먼저 말을 꺼냈다.“시아 씨.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무 일도.”“거짓말.”그의 대답은 단호했다.그 말에, 시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오늘, 어떤 남자가 와서 말했어요. 당신에 대해 진짜로 아는 게 뭐냐고.”백시아는 눈을 들었다.“뭐라고 대답했어요?”“내가 아는 건 당신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게 전부라는 것.”그녀는 눈을 감았다.그 순간, 모든 말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나… 언젠가 당신을 해칠지도 몰라요.”“그래도, 나는 듣고 싶어요.”“…뭐를요.”“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왜 그렇게 외롭게, 자신을 숨기고 있는지.”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마치 말하면 끝날 것처럼.모든 것이 무너질 것처럼.하지만 도윤의 눈동자는 조용했다.재촉하지 않았고, 비난하지도 않았다.“계부가 있었어요. 엄마가 재혼하면서 데려온 사람.”시아의 목소리는 마치 아주 오래된 테이프처럼 거칠고 느렸다.“그 사람은… 나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어요.쓰레기처럼 다뤘고, 장난

  • 아내 대행   8. 피의 기억

    시아는 악몽 속에 있었다.꿈 속의 거리는 낯익었다.도망치듯 달리던 그 길, 어두운 골목 끝에… 피에 젖은 구두가 떨어져 있었다.그녀의 발끝엔 끈적이는 무언가가 묻어 있었고,검붉은 액체가 한 방울, 두 방울,또각또각 그녀가 걷는 자리에 선홍의 점이 새겨졌다.그리고,그 피 위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그만… 그만해, 시아야…”어디선가,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백시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어둠 속, 도윤이 피를 흘리며 웃고 있었다.그의 손엔 그녀가 감쌌던 칼이 들려 있었다.“내가, 네가 가진 걸 대신 짊어져줄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 혼자 울지 마.”그 말은 꿈이었지만, 현실보다 더 깊게 심장을 찔렀다.시아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도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옆에서 몸을 웅크린 시아가 억눌린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시아 씨… 괜찮아요? 악몽 꿨어요?”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숨이 목울대까지 차올라서 심장은 벌써 수백 미터를 달려온 것처럼 뛰고 있었다.“물 가져올게요.”그가 자리를 뜨려 하자, 시아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그 손은 너무도 차가웠다.“…가지 마요.”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도윤은 멈췄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꿈에서, 당신이 피를 흘렸어요. 내가… 그 피 위에 서 있었어요.”도윤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꼭 안았다.그녀의 등은 말라 있었지만, 어딘가 젖은 감촉이 느껴졌다.감정이, 그녀의 피부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나는 괜찮아요. 피도 안 흘릴 거고, 어디 안 가요.”“…그렇게 단정하지 마요. 난 그런 보장이 없는 사람이에요.”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절망을 담아 말했다.그 시각 진혁은 또 다른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작은 시골 병원. 노인 환자를 돌보고 있는 여의사 한 명.이름은 윤명숙. 과거 시아가 한동안 맡겨졌던 그룹홈의 보육사였다.진혁은 사진을 내밀었다.“이 아이, 기억하시죠?”그녀는 사진을 보며

  • 아내 대행   7. 첫 번째 밤

    시아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이도윤의 손을 놓지 않은 채,등을 돌려 누운 채, 눈만 뜬 채.도윤의 체온은 따뜻했다.숨결은 규칙적이었고, 무언가를 믿는 사람처럼 평온했다.그런 도윤을 보며 시아는 더욱 불안해졌다.‘내가 이런 걸 가질 수 있는 사람인가.’그녀는 알고 있었다.이건 잠시의 꿈이라는 것을.이도윤은 결국, 자신의 어둠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것을.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게 부서질 거라는 것도.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하지만 눈꺼풀 뒤에서 떠오른 것은 이도윤의 얼굴이 아니라, 그날 밤이었다.2009년 여름. 덥고, 끈적한 밤.어린 시아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창틀을 붙잡은 손은 떨렸고, 몸은 멍투성이였다.거실에선 계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었다.욕설이 섞인 텔레비전 소리가 귀를 때렸다.그녀는 조용히 주방으로 갔다. 칼을 꺼냈다. 작은 과도였다.떨리는 손. 그러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살인을 했다.칼을 든 손으로, 자신을 짓밟던 괴물을 찔렀고 붉은 피는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그 피 위에, 그녀는 쓰러졌고,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그때의 눈. 그때의 침묵. 그때의 냄새.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시아 씨?”도윤의 목소리에 시아는 돌아왔다.“…네?”“무슨 꿈 꿨어요? 갑자기 숨이 거칠어서…”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냥… 과거 생각이 좀 났어요.”도윤은 잠결에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지금은 괜찮아요. 여긴… 아무도 없어요.”그 말이 그녀를 더욱 무너뜨렸다.‘여긴 아무도 없어…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야.’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그러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고 있었다.한편, 경찰서.진혁은 백시아의 첫 살인을 재조사 중이었다.당시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었지만, 현장 기록에서 수상한 점은 수두룩했다.그 중 하나. 거실 테이블 위, 장미 한 송이.붉은 조화.당시 경찰은 그저 집 안 장식이라 판단했지만 진혁은 알고 있었다.

  • 아내 대행   6. 전과의 고령

    창밖으로 빗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7월의 여름비는 뜨겁고, 질척였다.백시아는 창문에 손을 대고 있었고,그 손끝에서 천천히, 무언가가 안쪽으로 흘러들어오는 듯했다.도윤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어깨가 오늘은 유난히 좁아 보였다.그 말없이 흔들리는 등 너머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비 오는 날은… 좋았어요.”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시끄러워서. 내 안에 있는 목소리를 가릴 수 있으니까.”“그 목소리… 지금도 들려요?”백시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가끔. 아주 조용할 때, 나를 부르죠. 다시 돌아오라고. 예전처럼, 그날처럼…”그녀의 음성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가 깨진 채 섞여 있었다.도윤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팔을 뻗을까, 망설이다가 그녀의 옆에 가만히 섰다.“돌아오지 마요.”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바라봤다.“지금 이 순간, 여긴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에요.”시아는 그의 눈을 보았다.그 눈은 겁 없이 그녀를 향해 있었고, 그것이 그녀를 더 두렵게 했다.“나, 너무 많이 망가졌어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 아니에요.”“그건 내가 판단해요.”도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나는… 감당하고 싶어요. 그게 당신이라면.”그녀는 눈을 감았다.고요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이도윤 씨는, 이상한 사람이에요.”그 말은 거절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 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조용하고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그 시각, 진혁은 경찰서에서 낡은 서류 하나를 펼치고 있었다.2009년. 사망자: 백근수.사망원인: 질식사.처리: 자살로 종결.진혁은 눈썹을 찌푸렸다.현장 사진엔 분명히 붉은 조화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당시엔 아무 의미 없는 장식이라 여겼다.그러나 지금, 그건 서늘한 시그니처였다.“첫 번째야… 분명히.”그는 중얼였다.“이게 시작이었어. 그리고 그녀는…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지.”그는 다음 서류를 펼쳤다.고등학교 상담 기록.백시

  • 아내 대행   5. 그녀 안의 불씨

    조용했다. 아침인데, 기이하게 조용했다.이도윤은 평소보다 일찍 깼다.빛은 여전히 커튼 뒤에 숨어 있었고, 시아의 방문은 닫혀 있었다.그는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노크를 할까 망설이다, 그냥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싱크대에 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하나는 씻은 흔적이 없었다.그녀가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것이다.'무슨 생각을 하면서 밤을 지새웠을까.'도윤은 조용히 커피를 내렸다.한 잔은 자신의 것. 그리고 다른 한 잔은 시아의 컵.그녀는 아직도 자기만의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그러나 그 어둠이 이제는 그에게도 익숙해지고 있었다.시아는 방 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올라왔고,창문에 맺힌 습기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다들… 얼마나 멀쩡한 척하며 살고 있을까.'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그러나 그중 누군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바라보며 커피를 내리고 있을 것이다.그게 이도윤이라는 남자였다.그는 너무 맑았다.너무 순해서, 그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더럽고 더럽다는 걸 끝없이 자각하게 된다.‘이대로… 내가 이 사람 옆에 있어도 될까.’시아는 손끝으로 창문을 문질렀다.자신의 손가락 자국이 습기 위로 선명하게 남았다.그 흔적처럼, 그녀의 과거도 점점 세상에 드러나고 있었다.서울 경찰청. 강력 4팀 회의실. 진혁은 칠판 앞에 섰다.그의 손엔 오래된 수사기록이 들려 있었다.“이건… 다섯 번째 피해자가 아니라, 첫 번째 피해자와 관련이 있습니다.”그는 자료를 꺼내 들었다.2009년. 한 중년 남성. 의문의 질식사.당시 사건은 자살로 종결됐다.그러나“이 사건 현장에도 조화가 있었습니다.붉은 장미, 똑같은 조화. 보고서에는 우연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게 우연일 리가 없죠.”동료 형사가 물었다.“피해자는 누굽니까?”“이름은 백근수. 딸이 하나 있었어요. 17세. 이름은 백시아.”순간, 회의실의 공기가 식었다.“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용의자와 이름이 같습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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