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로맨스 / 아내 대행 / Chapter 21 -الفصل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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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누군가, 보고 있다

도윤은 퇴근길이 점점 불편해지고 있었다.늘 지나던 골목, 익숙했던 담벼락, 언제나 조용하던 아파트 복도.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그를 감시하는 ‘누군가’를 품고 있는 듯했다.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현관문을 두 번 확인했고, 창문마다 커튼을 내렸다.그리고 거실 중앙에 놓인, 그녀가 남기고 간 붉은 장미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누구지. 왜 지금 와서…”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시아의 과거는 단지 '연쇄살인' 네 글자로 정의될 수 없는 무언가였다는 걸.그녀가 죽이려 했던 남자들. 그 이름들과 연관된 조직들.그는 그들이 아직 끝내지 않았다는 걸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회사 메일함을 열자 익명의 파일이 하나 도착해 있었다.보낸 이는 없었다. 제목도 없이, 첨부파일 하나만.그는 주저하다 마우스를 클릭했다.그 순간 화면이 암전되더니 도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사진이 떴다.출처를 알 수 없는 CCTV 캡처.그가 피규어 가게에 들어가는 장면,병원에서 나온 장면,그리고 무심코 장미 조화를 닦는 모습까지.그의 손끝이 얼어붙었다.“……미친.”그는 전율을 느꼈다.자신이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이 단순한 감정이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로 다가왔다.한편, 백시아는 교도소 식당에서 어제 마주쳤던 여자와 다시 마주쳤다.그녀는 밥을 먹지도 않고 구석에 앉아있었다.시아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무화 쪽이죠?”그녀는 놀라지도 않고 말했다.“무화는 없어졌다고 생각했겠지.”“하지만 조직은 사라지지 않아. 흐름만 바뀌었을 뿐이야.”“이제는, 당신 때문에 깨진 판을 다시 짜려 해.”“그리고 그 열쇠가 밖에 있는 그 남자야.”백시아의 표정이 무너졌다.“그 사람은 아무 상관없어.”“아니. 그 사람이 '당신의 감정'을 흔든 시점부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아니게 된 거야.”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리고 백시아의 어깨를 스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도윤 이도윤. 맞지?”그 이름 하나에 백시아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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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숨은 칼날

시아는 독방에서 나오자마자 의도적으로 화장실 청소 자원을 자처했다.감시의 사각지대를 알기 위해, 교도소 내부 구조를 손끝으로 다시 체득하기 위해서였다.그녀의 눈은 좁은 복도 하나,CCTV 한 대의 방향, 교도관의 순찰 시간표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5분. 사각. 그때, 움직일 수 있어.”다음 날 새벽. 시아는 의도적으로 빨래를 들고 금지된 통로 앞을 지나쳤다.예상대로 문신녀가 다시 나타났다.“안에서 뭐 할 수 있다고 생각해?”시아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너도 잘 알잖아.”“너, 아직 그 눈빛 있구나. 사람 죽이던 때 그 표정.”“아직 안 죽였잖아. 그게 중요한 거야.”그녀는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조직 놈들이 날 이 안에 묶어두려는 이유, 안 봐도 뻔하지.”“그 남자 때문이야. 도윤.”문신녀의 얼굴이 굳었다.“그 사람 건드리면… 나도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덫을 치려면 제대로 쳐. 나한테 설렁설렁 다가왔다간, 반쯤 물려 죽을 수도 있으니까.”도윤은 경찰서 회의실에서 조진혁과 함께 USB의 파일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재석은 최근 몇 년간 대포폰을 최소 3개 이상 썼어요.거점은 경기 남부에 있고, 추적하려면 내부 협조가 필요해요.”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팀장이 정보를 내려줬는데… 뭔가 이상해.”“뭐가요?”“우리가 알아낸 정보보다, 저쪽에서 먼저 알고 있었던 것 같아.”“정보가 새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누군가, 경찰 내부에서 무화 잔당과 손잡고 있어.”그 순간. 진혁의 폰에 알림 하나가 떴다.[익명 제보: 경찰청 내부자 명단_추정]파일을 열자 5명의 실명이 적혀 있었다.그중 한 명 도윤이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이 사람, 저희 회사 보안 팀장이랑 같이 술 마셨던 사람입니다.”“……우리보다 한발 빠르단 얘기네.”진혁은 이를 악물었다.“당장 보호조치 들어가야겠어. 당신도 혼자 다니지 마요. 절대로.”그날 밤. 도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형광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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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증거 없는 고백

서울중앙지법 사무국.경수 변호사는 묘한 웃음을 띠며 서류 한 장을 넘겼다.“사형 일정 재검토 신청서입니다.단, 피고인 측 변호인 사임 이후 공식적인 변론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건 이례적이지만 배경은 충분하죠.”그의 책상 위엔 두꺼운 서류철.그 안엔 정리된 피고인 백시아의 정신 감정 결과와 5건의 살인사건, 그리고 그녀가 저지른 범행 장면을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스틸 컷들이 담겨 있었다.이 모든 걸 정리해 넘긴 사람,권재석.그는 백시아의 사형 집행을 앞당기기 위해 로비와 여론전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이고 있었다.그의 이유는 간단했다.“감정이 생기면, 괴물도 사람이 돼버리거든.”“그 전에 죽여야 돼. 진짜 괴물이 되기 전에.”그 시각, 교도소.시아는 이령과의 약속대로 자신의 최초 살인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넘겼다.다섯 건의 공식적인 범행 외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여섯 번째,혹은 첫 번째로 불러야 할 그 사건.“열여섯. 계부였어.”“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 그 누구에게도.”이령은 묵묵히 들었다.“경찰한테 넘기면, 무죄를 주장할 근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시아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난 무죄가 아니야. 그 인간을 죽인 것도, 그 이후 다섯 놈을 죽인 것도 내가 선택한 거였으니까.”“그냥, 이제 내가 쥐고 있는 칼자루가 누굴 향하고 있는지만 명확하게 보여주려는 거야.”도윤은 그날, 자신의 책상 위에 경고성 사진 한 장이 놓인 걸 발견했다.사진 속엔 시아가 수감복을 입고 걷고 있는 모습,교도소 담장 바깥에서 몰래 찍은 저해상도 사진.“누구지… 누가 이걸…”진혁은 이 사실을 접하자마자 경찰 내부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우리 안에도… 조직과 손잡은 놈이 있어.”“그리고 너, 이제부터는 진짜 조심해야 해. 백시아가 가진 정보가 조직의 숨통을 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여자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다 너에게 달려 있어.”그날 밤, 시아는 교도소 창살 너머로 달을 올려다봤다.눈 아래 붉게 그은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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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이송차 안에서

새벽 4시 10분.철문이 두 번 열리고, 경비 조명이 천천히 꺼졌다.백시아는 수갑과 족쇄를 찬 채, 검은색 호송복을 입고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왔다.숨이 흰 안개처럼 입 밖으로 터졌다.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주차장엔 군용 트럭에 개조한 호송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조수석 쪽 문이 열리고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처음 보는 인물. 하지만… 시선을 마주한 순간, 백시아는 알아차렸다.“조직이 보낸 놈이네.”남자는 대꾸 없이 뒷문을 열어 시아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하지 마. 어차피 넌 오늘 이송되지 않아.”문이 닫히고 엔진이 켜졌다.하지만 차는 정문으로 가지 않았다.5분. 10분.방향이 달랐다.위치는 남쪽이어야 했지만, 차는 서쪽 외곽도로로 빠지고 있었다.백시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수갑의 연결고리를 비틀었다.몇 주간 준비해온 작업.징벌동 안에서 손톱 틈으로 감춰 들여온 얇은 와이어.그녀는 미세하게 철사를 회전시켜 고리를 푼 뒤, 손을 묶은 채 정좌했다.숨이 천천히 빨라졌다.“이 차 안에서 죽을 수도 있겠군.”“하지만 적어도 누굴 죽이기 위해 나가는 건 아니야.”그 시각, 도윤은 눈을 가린 채 철제 의자에 묶여 있었다.재석은 탁자에 앉아 작은 나무상자를 하나 꺼냈다.상자 안엔 여섯 개의 지문이 찍힌 카드.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비어 있었다.“이제 너 하나만 남았어.”“이걸로 금융 거래도 되고, 신분 세탁도 돼.이 여섯 명 모두 내 밑에서 움직이다 필요 없어져서 죽인 놈들이지.”그는 마지막 지문칸을 톡톡 두드렸다.“이 칸엔 백시아가 들어올 거였어.”“하지만, 네가 바뀌었지.”도윤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얼굴은 푸르고, 입술은 터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살아 있었다.“당신은 끝이 없는 사람 같네요.”“사람을 고르고, 이용하고, 망가뜨리고, 그러고도 아무 일 없단 듯 숨 쉬죠.”“하지만 그 여자는, 그 망가짐 속에서 어떻게든 사람답게 살아보려 했어요.”“그게 제가 그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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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름 없는 여자

서울 시립병원 중환자실.흰 커튼 너머, 폐소독기의 알람이 조용히 울렸다 꺼졌다.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 누구도 다급하지 않았다.이미 알고 있는 싸움의 끝이었기에.백시아. 호흡기와 링거에 의지해 겨우 생명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상태는‘회복 불가’.의학적으로 더는 시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의사는 조용히 말했다.그 곁에, 도윤이 앉아 있었다.하루 전까지 그를 감시하던 경찰은 모두 물러났다.그는 참고인에서 ‘무관한 일반인’으로 변경되었고, 어떠한 진술도, 증언도 거부했다.“그 여자를 압니까?”조진혁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었을 뿐이었다.“그 사람… 모릅니다.”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도윤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 곁을 지켰다.밥도 거의 먹지 않았고, 잠도 들지 못한 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한 번이라도. 정말 한 번만이라도. 그녀가 눈을 뜨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며“시아야…”“이름이었구나. 처음으로 네가 말해줬던…”“나는 아직도 그날 생각해. 그 황당했던 첫 키스. 그리고, ‘로또 맞았다 생각하라던’ 그 말.”“넌 나한테 재앙이었어. 그런데 왜 이렇게도 그리운 거야.”그는 이마를 침대에 붙인 채 조용히 울었다.그로부터 며칠 후, 진혁은 권재석의 사망 이후 경찰 내부 인사에 대한 수사 결과를 정리했다.“강력 4팀장 박주한, 서울서부서 강력계 이윤석, 경기남부 정보계 신영우 모두 권재석의 라인에 있었던 인물들입니다.”그는 자료를 언론에 공개했다.대가성 수사 조작, 사망자 수 조작, 피의자 고문.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시아’라는 이름은 한 줄만 언급되었다.[모든 기록은 소거되었으며, 그녀의 존재는 사라졌음.]그날 저녁, 진혁은 경찰서 자신의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작은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그 종이는 누군가의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고, 다 적지도 못한 글자들이 삐뚤게 흘러내리고 있었다.[나는 괴물이에요. 그게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맨 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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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녀가 사라진 방

도윤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현관의 잠금장치가 덜컥, 소리를 내며 닫히는 소음이 낯설게 들렸다.집 안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했다.마치 이 공간이 애초에 두 사람의 삶을 품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시아가 떠난 자리. 그녀의 신발이 사라졌고, 화장대 위에 늘 가지런히 놓여 있던 립스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욕실 선반에 걸려 있던 칫솔도 없었다.심지어 세탁기에 돌려놓은 속옷조차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정말, 다 가져갔네.”도윤은 멍하니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그녀의 체취는 아직 집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시트에 남은 은은한 향수 냄새,냉장고 안에 덩그러니 남은 그녀가 사다 놓은 맥주 두 캔,테이블 구석에 놓인, 그녀가 메모하다 마른 포스트잇 한 장.그는 손끝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글씨는 없었다. 단 한 줄도 쓰이지 않은 노란색 메모지.그녀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이별이란 단어조차 남기지 않은 채.시간이 흐를수록, 도윤은 점점 자신의 감정이 무뎌지는 걸 느꼈다.슬픔도, 분노도, 허무함도 하나로 뭉개진 채,그저… 그녀가 남긴 공백만이 그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었다.회사는 이미 휴직계를 냈다.출근할 수 없었다. 아니, 출근해도 버틸 수가 없었다.그녀가 앉았던 식탁 자리에 불 꺼진 채로 앉아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폰 화면을 내려놓았다.그는 컴퓨터를 켰다.이상하게도, 그가 마주한 모니터 화면이 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출구처럼 느껴졌다.‘너를 기억해야겠다.’‘그렇지 않으면, 나는 끝없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그날 밤, 도윤은 한 줄씩 코딩을 시작했다.초라한 비주얼 노벨 형식의 미니 게임.게임 속의 주인공은 이름 없는 여자였고,그녀는 아무 말 없이 어느 날 그의 삶에 들어왔다가 또 조용히 떠났다.그녀가 했던 말, 웃었던 얼굴, 화냈던 목소리.그 모든 기억을 대사로, 스프라이트로, 배경 이미지로 옮겨 담았다.“그쪽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텐데?”“1년만 딱. 진짜 결혼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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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풍경 너머, 숨겨진 체온

도윤은 새벽이 다 가기 전에 집을 나섰다.커피를 마시지도 못했고, 양말도 짝이 맞지 않았다.손엔 폰 하나만 들려 있었다.목적지는 단 하나였다.‘서울 종로구 모처’그녀의 마지막 접속이 찍힌 위치.IP가 허술하게 남긴 흔적 하나로 도윤은 그 좌표를 좁혔다.실제로 그가 갈 수 있는 건 좁디좁은 반경 수백 미터 정도였지만,그걸로 충분했다.그 정도 거리만 있어도, 그는 백 번이고 걸을 수 있었다.해가 막 떠오르던 시각,그는 오래된 한옥이 점점 사라져가는 동네의 골목 끝에 서 있었다.햇살은 건물 사이로 낡은 간판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대림문방구’, ‘순대국밥’, ‘세탁소’모두 20년은 되어 보이는 간판들.도윤은 그런 가게들 사이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그의 눈은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뒷모습의 잔상, 그녀의 향기, 혹은 그가 만든 게임에 나왔던 배경과 닮은 벽지 무늬.무언가 하나만이라도 그녀와 닮았다면 멈춰 서서 오래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 그는 발견했다.‘사진 속 풍경.’그녀가 프로필 이미지로 등록했던, 흐릿한 사진 속 골목. 기울어진 벽, 녹슨 철문, 빨간 소화전.그 모든 게 지금 눈앞에 그대로였다.그는 마치 숨이라도 멎을 것처럼 천천히 다가갔다.골목 끝에 오래된 벤치가 있었고, 그 벤치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작은 종이컵. 절반쯤 식은 듯한 커피.그리고 컵 옆에, 누군가의 손글씨가 적힌 메모지 하나.‘잘 있죠?’흔들리는 손으로 도윤은 종이컵을 들었다.아직 따뜻했다.그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봤다.사람 그림자도, 발자국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분명 방금 전까지 누군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그녀였을까. 진짜로. 바로 이 자리에서, 그는 그녀의 체온을 느낀 것이다.그날 밤, 도윤은 그 종이 메모를 자신의 방 벽에 붙여두었다.창가 쪽, 햇살이 가장 먼저 닿는 위치.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그 글씨를, 도윤은 수백 번쯤 읽었다.‘잘 있죠?’짧은 문장이었다.그런데 그 안에는 수백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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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그림자 속의 타자

“그럼… 나도 여기 있어요. 기다릴게요.”도윤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 문장은 채팅방 위에 조용히 떠 있었고,그날 이후로도 그는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로그인했다.그리고 사흘 뒤, 마침내 채팅창 위에 다시 깜빡이는 문구가 떴다.[상대방이 입력 중입니다...]한 줄. 두 줄. 그리고 잠시 멈춤.도윤은 숨도 쉬지 못하고 그 문장을 기다렸다.화면 위, 단어들이 한 글자씩 타닥타닥 올라왔다.“오래 기다렸죠?”단 세 글자. 그런데 그 안에, 너무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익숙했다.시아의 말투, 문장의 길이, 끝에 붙이지 않는 마침표. 모든 게 그녀 같았다.그러나 동시에, 낯설었다.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타자를 쳤다.“시아예요?”잠시의 정적. 그리고 이어진 대답.“...맞아요. 하지만 지금은 그 이름으로 살지 않아요.”“왜 돌아왔어요?”“그냥… 당신이 아직 거기 있나 보고 싶었어요.”도윤은 목이 말랐다.손바닥엔 식은 땀이 들러붙었고, 심장은 말도 안 되게 뛰고 있었다.“만날 수 있을까요?”이번엔 대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입력 중이라는 표시만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꺼졌다.그 순간 그는 직감했다.화면 너머에서, 누군가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그리고 그 망설임은 백시아 특유의 것이 아니었다.몇 시간 뒤, 도윤은 채팅방 서버 로그를 추적했다.그리고 예상과 달리 IP는 예상보다 복잡하게 세탁되어 있었다.그건 백시아가 쓸 법한 흔적이 아니었다.너무 프로페셔널했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녀를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짙게 들었다.도윤은 노트를 펼쳐 이전까지 자신이 정리했던 모든 계정, 로그인 기록, 접속 시간대, 메모의 필체, 사진의 프레임을 다시 검토했다.모든 퍼즐 조각은 하나의 진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존재가… 진짜 그녀일 리가 없다.’그날 밤, 도윤은 단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5월 5일. 그날 우리가 했던 약속, 기억해요?”그건 시아만이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단순한 날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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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그녀를 숨긴 방

폐쇄된 모텔이었다.서울 외곽, 지하철에서도 두 번 갈아타야 닿을 수 있는 오래된 주택가 뒷골목. 밤이면 불도 거의 켜지지 않는,이름조차 바랜 간판 위에 페인트 자국만이 누군가의 손길을 증명하고 있었다.도윤은 허리를 숙여 간신히 닫힌 철문을 밀었다.낡은 문짝은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그가 들고 온 건 작은 LED 손전등, 레코더에 저장된 GPS 로그 좌표, 그리고 백시아의 흔적을 기록한 노트.그는 203호 앞에 멈췄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방은 작았다. 오래된 침대와 벽걸이 거울, TV는 전원이 끊긴 지 오래였다.창문은 테이프와 검은 천으로 덧대져 있었고,공기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엔 ‘사람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서랍엔 아직 종이컵과 녹차 티백이 있었고, 욕실에는 사용 흔적이 남은 칫솔,그리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가닥.시아의 것이 분명했다.도윤은 손전등으로 방을 샅샅이 훑었다.그리고 침대 프레임 밑, 낡은 신발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그 안에는 종이 몇 장, 소형 MP3 하나,그리고 손목에 차는 의료용 경보 밴드가 있었다.그는 조심스럽게 MP3의 전원을 켰다.작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짧은 숨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오늘도… 여전히 밖에선 발소리가 들려요.”“누군가 나를 계속 찾고 있어요. 하지만 도윤… 그건 당신이 아니겠죠.당신이 내게 닿으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나는 괜찮아요. 지금은 그냥, 조용히… 살아 있기만 하고 싶어요.”말이 끝날 즈음, MP3는 삐걱거리며 꺼졌다.그 순간이었다. 문 밖에서 아주 작게, 철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도윤은 순간 몸을 움츠리고, 숨을 죽였다.들고 있던 손전등의 불빛을 껐고, 방 안은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다.누군가… 이곳이 비워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잠시 후, 문 손잡이가 조용히 움직였다.‘따르륵’잠금장치는 걸려 있었지만, 그 움직임은 분명히 의도적이었다.도윤은 가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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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방패에서 진심으로

“시아를… 지키는 사람입니다.”“…지킨다고요? 누굴?”“백시아요. 당신이 지금 그렇게 애타게 찾고 있는, 그 사람.”도윤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남자는 미소도, 적대감도 없이 마치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태연했다.“그녀가 도윤 씨에게 돌아가길 원했다면 지금쯤 당신 앞에 있었겠죠.”“…그럼 지금은?”“숨고 싶어 했어요. 살아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않게.”“그럼 당신은 지금 그녀를 감금이라도 하고 있다는 건가요?”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나는 단지, 그녀가 스스로를 지키게 해준 것뿐입니다.당신이 다가가면 그녀는 다시 모든 걸 잃게 돼요.”도윤은 참았던 분노를 삼켰다.“그녀는… 도망친 게 아니에요. 살고 싶었어요. 그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눈 말이었어요.”남자는 도윤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래서…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나요?”“…네.”“그럼 지켜보는 것도 사랑이라는 걸 이제부터 배우셔야 할 겁니다.”그 말만 남기고, 남자는 조용히 사라졌다.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펜션 거실엔 여전히 정적만이 가득했다.그러나 도윤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그리고 그 남자의 말처럼, 나를 떠올리기만 하면서 살아 있는 걸까.’도윤의 손엔 여전히 시아의 손글씨가 담긴 종이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그 문장을 다시 읽는 순간, 마치 그녀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기억해. 진짜 위험은 너를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너를 계속 못 본 척하는 사람이야.”그녀는 지금도 그 '위험'을 견디며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지켜보는 것도 사랑이라…”펜션을 떠나는 길목, 도윤은 스스로 되뇌었다.그 말은 얼핏 들으면 낭만처럼 들렸지만, 실상은 방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백시아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살아 있었고,그녀를 ‘지킨다’는 자는 결국 그녀를 감시하고,어딘가에 가두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정말… 널 지킨다는 게 그녀를 외롭게 만든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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