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로맨스 / 아내 대행 / Chapter 81 -الفصل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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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فصول

81. 그럼에도, 너라서

그날 저녁. 시아는 조용히 캐리어에 짐을 싸고 있었다.소리 하나 없이 옷을 개고, 서랍을 열어 정리한 작은 물건들을 넣었다.무심히 던져진 인형 하나, 도윤이 생일이라며 사다 준 머플러 하나,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 그 모든 것이 짐이 아닌 기억이었다.거실로 나오자, 도윤이 마주 앉아 있었다.“…도망치는 거야?”시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지켜주고 싶어서 그래.”“누가 누구를?”“내가 널.”“…넌 지금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 하고 있는 거 알아?”“도윤아…”“네가 그런 말 하면 난 너를 포기할 수가 없어지잖아.”그는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로 시아를 바라봤다.한 번도 그렇게 간절하게, 누군가를 바라본 적 없다는 듯.“사람들이 뭐라든, 네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금의 너는… 나랑 함께 웃고, 밥 먹고, 같은 이불 속에서 잠든 사람이야.”“…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네가 나를 그렇게 기억하게 되는 게.”시아의 목소리는 떨렸다.“언젠가… 너도 날 미워하게 될까 봐. 그게 더 끔찍해.”도윤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끝으로 백시아의 눈가를 어루만졌다.“…난 널 미워할 수 없어.”“왜?”“사랑하니까. 넌 나한테,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다는 걸 느끼게 해준 사람이니까.”시아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결국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러면 나한테도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줘.”“무슨 뜻이야.”“나… 잠깐만 사라질 거야. 영영은 아니야.”도윤의 손이 멈췄다.“잠깐이면… 돌아오는 거지?”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도윤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며칠 뒤. 도윤은 조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형. 그냥… 그 사람 놓아줄 수 있어?”'놓아주는 게, 그 사람을 더 아프게 하는 거일 수도 있어.'“그래도… 기다릴게. 언젠가, 그녀가 돌아오면 그땐 말 안 할 거야.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그녀 안에 뭐가 있는지, 내가 다 알 것 같으니까.”진혁은 아무 말 없이 그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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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놓지 못한 마음

시아는 오늘도 어김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책을 정리하고, 조용한 구석에 앉아 신문을 훑고, 점심이면 따뜻한 국물이 있는 식당에 들른다.그녀의 하루는 조용하고 단조로웠고, 그 단조로움이야말로 그녀가 선택한 가장 안전한 삶의 방식이었다.'더 이상 누구의 감정을 휘두르지도, 휘둘리지도 않는 삶.누군가를 속이지도, 속이지 않아도 되는 하루.하지만 그날따라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기척이 자꾸 신경을 거슬렀다.계속해서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시선은 뜨겁고, 조심스러우며, 무언가를 삼키는 듯했다.시아는 일부러 그 방향을 외면했다.고개를 돌리면, 혹시 정말 그가 서 있을까봐.그를 다시 보면 자신이 먼저 무너질까봐.도윤은 다가서지 않았다.그저 멀리서, 그녀가 웃는 모습, 창밖을 바라보는 모습,작은 일에도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그녀가 살아 있고, 아프지 않고,스스로의 이름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하지만…그녀가 어느 날, 혼자 벤치에 앉아 잠깐 고개를 떨군 순간.그 짧은 동작 하나가 도윤의 심장을 쥐어짜듯 조였다.'아직도… 그녀는 아프구나.'그제야 도윤은 이런 방식의 사랑은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결코 온전한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다음 날.시아는 작은 꽃집 앞에서 멈췄다.무심히 진열된 화분들 사이,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아, 그때…’그녀의 가슴속 어딘가가 먹먹하게 쿵 내려앉았다.자신의 과거를 상징하던 그 꽃.그녀가 잊으려 했던 모든 시간을 하나의 색으로 응축한 듯한 강렬한 붉은색.그런데 그 옆에 놓인 작은 쪽지가 그녀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나는 여전히 널 사랑해. 지금의 너를, 있는 그대로.'그 문장은 그의 것이었다.시아는 손끝을 떨며 쪽지를 주워 들었다.그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녀에게 닿았다.“…백시아.”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그곳에, 그가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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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사라지지 말아요

창밖에서 희미하게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이 백시아의 침실 벽을 타고 내려왔다.그녀는 등을 돌린 채 이불을 끌어안고 누워 있었지만, 눈은 감기지 않았다.심장은 요란하게 뛰고 있었고, 귓가에 자꾸만 도윤의 목소리가 맴돌았다.‘같이 혼란스러워요, 우리.’그 말이… 그저 따뜻해서 무서웠다.혼란이란 건 늘 그녀 혼자의 몫이었는데.그것마저 나눠주겠다는 사람 앞에서 백시아는 쉽게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새벽 세 시. 그녀는 결국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었고,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그때였다.문득,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아파트 맞은편 골목 어귀. 가로등 밑 어둠 속에 실루엣 하나가 잠깐 스쳤다.‘…설마.’그녀는 단숨에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렸다.가슴이 벌떡 뛰었다.누군가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직감은, 늘 틀리지 않았다.시아는 곧장 침대 밑에서 작은 금속 상자를 꺼냈다.그 안엔 버리지 못했던 것들. 도망치는 삶 속에서유일하게 지니고 다녔던 ‘필요한 무기’들이 있었다.칼. 현금. 그리고, 과거의 흔적들. 그녀는 칼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뚜껑을 닫았다.“안 돼… 이번엔 그렇게 하지 마.”다음 날 아침. 도윤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백시아 집 앞을 찾았다.문을 두드리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가 나왔다.눈 밑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그녀는 커튼 틈 사이로 밖을 두리번거렸다.“…무슨 일 있었어요?”도윤의 물음에 시아는 고개를 젓고는 그를 안으로 들였다.거실로 들어선 도윤이 묻는다.“진짜 괜찮아요?”“…아니요.”그녀는 조용히, 허탈하게 웃었다.“이상하죠? 나 같은 사람이 지금은 이 평범한 하루가 무서워요.”도윤은 그녀 옆에 앉았다.시아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도윤 씨… 내가 또 사라지면 어쩌려고 그래요?”“…안 사라질 거잖아요.”“만약, 정말로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이 되면요?”도윤은 시아의 손을 잡았다.그녀의 손끝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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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모르는 척, 그럴 수 있다면

폐가 안쪽, 시간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도윤의 발소리는 고요한 공기 속에서 너무 크게 울렸다.조진혁과 백시아,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그 순간, 서늘한 긴장이 방 안을 감쌌다.“…도윤.”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설 만큼 조심스러웠다.도윤은 미동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 눈엔 믿기지 않는 마음, 감정의 파편들, 그리고…서서히 무너져내리는 어떤 확신이 담겨 있었다.“말해줘.”그의 목소리는 낮고, 떨림 없이 담담했다.그게 더 아프게 다가왔다.“저 사람이랑… 이 집이랑… 그리고… 그 USB. 다 뭐야?”시아는 눈을 피했다.진혁이 눈치를 채고, 조용히 뒤로 한 발 물러섰다.하지만 도윤은 그의 존재를 무시한 채, 그녀에게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너… 나랑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솔직했던 적 없지?”그 말에 백시아의 어깨가 움찔했다.그녀는 무언가를 삼키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처음엔 그냥,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어. 근데… 같이 살다 보니까, 너한테서 도망치고 싶지가 않았어.”도윤은 고개를 떨궜다.“근데 이제 보니까… 도망친 건 나였네. 너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나.”시아의 눈가에 조용히 눈물이 고였다.그녀는 손끝으로 USB를 쥔 채, 불안하게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그 USB엔… 내가 살면서 숨긴 것들이 있어. 처음부터 널 속였고, 거짓말로… 네 옆에 있었어.”“왜?”도윤의 질문은 짧았지만, 그 안엔 수천 개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왜 그랬는데.”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답했다.“살고 싶었거든.”그 말은 고백 같기도, 변명 같기도 했다.“살고 싶었는데, 그 방법을 몰랐어. 그러다가… 너를 만났어.”“…….”“그래서 미안했어. 네가 자꾸 다정할수록 네가 자꾸 나를 걱정할수록, 숨고 싶었어.”시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근데 나, 이제 안 숨을래. 도망도 안 칠 거야. 네가 원하면… 이제 다 말할게.”순간, 조진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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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끝을 향한 산책

“너 아직도 착각하더라? 사람 하나만 죽이면 끝날 줄 알았지.”그는 천천히,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총이 아니었다. 작은 사진 한 장.그 사진 속엔 시아가 피를 묻힌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눈을 감는다.“…그걸 어디서…”“널 지켜보고 있었다면 믿겠어?”도윤이 그녀 앞으로 나선다.“지금 뭐하는 겁니까.”“당신, 아무것도 몰라. 이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그림자의 말에 도윤은 밀려드는 불안을 느꼈지만 눈빛만큼은 흐트러지지 않았다.“알아. 알고도 옆에 있어.”그 순간, 그림자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린다.“…그럼 당신도 공범이겠군.”시아가 도윤의 팔을 붙잡았다.“가지마.”“괜찮아.”도윤이 조용히 속삭인다."지켜줄게."어둠은 짙어졌고, 끝났다고 믿었던 과거가다시 그들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지켜줄게."도윤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떨림이 없진 않았다. 시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그녀의 숨은 점점 더 가늘어졌다.그림자는 도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거리감은 단 몇 발자국."도윤 씨, 비켜요."시아가 조용히 말했다.하지만 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팔로 그녀를 감싸듯 섰다."이 사람 누구야. 이름이라도 말해.""그냥… 지나가야 했던 사람 중 하나야. 내가 지나쳤어야 했던."도윤은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그림자를 바라봤다."사진, 그거 어디서 났죠.""당신, 이 여자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도 옆에 있는 건가?""그걸 당신이 왜 묻죠. 경찰도 아닌데."그림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비틀렸다."넌 아직 이 여자 몰라. 널 데리고 어디까지 떨어질지 몰라."시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표정은 말할 수 없이 단단해져 있었다."그만해."그림자는 정지된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넌 아직도 너 자신이 뭘 만들었는지 모르지. 나 같은 놈이 생긴 이유, 너야."그녀의 눈동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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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붉은 장미 아래

창밖으로 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도윤의 집 작은 거실에 앉아,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테이블 위, 뜨거운 차가 김을 피우고 있었지만,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다.시아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커튼 사이로 스며든 어둠이 그녀의 얼굴에 겹겹이 그림자를 씌웠고, 도윤은 조용히 그 맞은편에 앉아 눈을 떼지 못했다.“…그날도, 비가 왔어.”시아가 조용히 말했다.“처음 사람을 죽인 날. 그리고, 당신을 만난 날도.오늘까지… 비가 오는 날은 늘 나한테 뭔가를 가져가.”그녀는 천천히 눈을 들었다.도윤은 그 시선을 마주했다.“내가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알아요?”“…아니요.”“당신이 나를 포기하는 거야.”그 말에, 도윤의 손이 천천히 움찔했다.“난 내가 한 일들을… 절대 잊을 수 없어.사람들이 내 이름을 들으면, 경멸하거나 혐오할 거야. 그런데도…”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갔다.“당신만큼은… 나를 사람으로 대해줬잖아.처음부터 끝까지, 날 여자라고 불러준 유일한 사람이었어.”도윤의 눈이 붉어졌다.“그래서 무서워. 그게 언젠가 깨질까 봐.내가 만든 이 가짜 세계에서, 당신도 결국 날 떠날까 봐.”그는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사람은 누구나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나도 그랬고. 하지만…”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밖에서는 천둥이 멀리서 울리고 있었다.“백시아 씨. 당신은 지금까지 혼자 견뎌온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나랑 같이 견뎌봐요.”시아는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같이?”“같이 무서워하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끝을 봐요. 혼자 두지 않을게요.”시아는 가만히 도윤을 바라보다, 조용히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정말, 후회 안 할 거예요?”“이미 하고 있어요. 당신을 이렇게 늦게 알아봤다는 걸.”그 순간, 시아의 눈에서 천천히 눈물이 떨어졌다.말 없이 흘러내리는 그것은, 그동안 쌓였던 죄책감과, 두려움과,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의 잔해들이었다.그리고 그 눈물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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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비 내리는 도주

도윤의 SUV는 밤을 가르듯 도로 위를 내달렸다.앞유리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쉴 새 없이 퍼부었다.와이퍼가 바삐 움직였지만 시야는 흐릿했고, 마음은 더 흐려졌다.운전대를 쥔 도윤의 손끝은 젖은 것처럼 차갑고 단단했다.백시아는 조수석에서 말없이 그를 지켜보다가, 이제는 뭔가를 말해야 할 때라는 듯 입을 열었다.“한참 전이야. 처음 날 노리기 시작한 건.”도윤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그 남자… 조직이랑 연관 있어요?”시아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예전… 잠깐 발을 담갔던 조직. 거기서 중요한 인물을… 없앴어.그 뒤로 날 추적하던 놈들이 있었고, 대부분은 정리했는데… 한 놈이 끝까지 살아남았던 거야.”그녀의 눈빛이 거칠어졌다.“그게… 방금 그 남자야.”도윤은 이를 악물며 운전대를 더 세게 쥐었다.“왜 말 안 했어요. 이런 위험이 있다는 거…”“말했으면 같이 가겠다고 했을 거잖아.”시아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당신은 자꾸 나를 감싸려 해. 하지만 그게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몰라.”그 말에 도윤은 브레이크를 밟았다.차가 어두운 국도 옆, 작은 휴게소 앞에 멈춰 섰다.“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하는지, 당신은 정말 모르겠어요?”도윤은 그녀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내가 선택했어요. 당신의 그림자까지 안고 가겠다고.”시아는 그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손끝이 떨리고, 마음이 요동쳤다.“…왜 하필 나야. 이렇게 엉망인 사람인데.”“엉망인 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당신을 보고 나서야…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꼈어요.”말끝에 고요가 내려앉았다.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고, 백시아는 문득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에, 아주 오래된 시간 뒤에 터져 나오는 것 같은 미소였다.그 순간.“쾅!”차량 뒷유리가 산산조각이 났다. 총성이었다.도윤은 재빨리 시아를 눌러 엎드리게 하고,몸을 숙인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갔다.“시아 씨! 이리로!”그녀도 이미 권총을 손에 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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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마지막 경계

적재장에 조용히 퍼지는 총성의 여운.핏방울이 빗물에 섞여 천천히 콘크리트를 타고 흐른다.조진혁은 권총을 쥔 채 무표정하게 쓰러진 남자를 바라봤다.그의 어깨엔 총알이 깊게 박혀 있었고, 의식은 흐릿해져 있었다.“움직이지 마. 구조 요청할 거니까.”그가 낮게 말하자 남자는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너… 그녀가 누군지… 몰라…”진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그가 찾던 실루엣이, 적재장 뒷문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검은 셔츠 자락, 빗속에 흔들리는 젖은 머리카락,그리고 그 뒤를 따라붙는 이도윤의 그림자.숨을 고르며, 조진혁은 총을 내렸다.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방금 자신이 쏜 총탄이 살인을 막은 건지, 아니면 도망을 도운 건지,그는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백시아.”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입 밖에 냈다.그 이름이, 그의 입술을 타고 무겁게 떨어졌다.이름 하나에 담긴 수많은 단서들.연쇄 살인, 붉은 장미, 사라진 기록들,그리고 지금 이 눈앞의 여자가 그 모든 퍼즐을 완성시키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조진혁이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눈은 분명 죄책감이 아니라… 슬픔이었다.한참을 달린 후, 버려진 컨테이너 속에서 둘은 숨을 돌렸다.도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손을 짚은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시아는 한 손으로 그의 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고마워요. 안 다쳐서.”“…저 사람… 조진혁 형사예요.”도윤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우리 첫 만남 때도… 병원 근처에 나타났던 사람. 그때부터 날 지켜보고 있었어요.”시아는 눈을 감았다.그리고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어요. 그 사람, 끝까지 나를 따라올 거라고.”도윤은 시아를 바라봤다.비에 젖은 눈동자 속, 흔들리는 눈빛.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손을 조용히 감싸쥐며 말했다.“그 사람도 알아요. 당신이 누군지.”시아의 눈썹이 꿈틀였다.하지만 도윤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그리고도, 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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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진실을 마주한 자리

“얼굴이 많이 변했네.”서늘한 어둠이 눌러 앉은 창고 안, 조진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눈빛은 식었고, 손끝은 담배 하나 없이 허공을 말아 쥐고 있었다.그의 눈에 비친 백시아는, 더는 예전의 여자가 아니었다.혹은…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제대로 본 적 없었는지도 몰랐다.시아는 조용히 문을 닫고 안으로 걸어들어왔다.그녀의 발끝은 조용했지만, 마음은 거세게 울고 있었다.“이제야… 내 앞에 제대로 서네.”진혁은 한참을 응시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작은 USB였다.“여기, 네가 남긴 조각들이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그 남자, 이도윤에 대한 것도.”시아의 손이 멈칫했다.그 이름이 스쳐간 순간, 숨이 걸렸다.“도윤이는 상관없어.”“정말?”조진혁은 조용히 웃었다.그 웃음은 냉소와 안타까움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널 처음 쫓기 시작했을 때, 그 남자… 단순한 방패막일 줄 알았어. 근데 말이야. 그 남자, 지금 널 진심으로 사랑해.”시아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그 말이… 숨이 막히게 무거웠다.하지만 더 무거운 건 그 사랑이 자신에게 너무 과분하다는 자각이었다.“도윤이한테… 아무 짓도 하지 마. 부탁이야.”“그 부탁을 들을 이유가 있을까?”진혁은 고개를 기울였다.말투는 무심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널 놓아주는 순간, 수사도, 내 커리어도, 그리고… 내 자신도 무너져.”시아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앞에 섰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 예전엔 익숙했던 그 거리에서 이제는 낯설 만큼 다른 감정이 어지러이 맴돌았다.“그럼… 날 데려가.”시아는 입을 열며, 두 눈을 똑바로 들이밀었다.“내가 끝내야 해. 내가 만든 죄, 내가 끌고 간 길, 내가… 끝내야 후회가 덜할 것 같아.”진혁은 그 눈빛을 피하지 못했다.한참을 그렇게 마주보던 그는, 이윽고 몸을 돌렸다.“…네가 정한 마지막이라면, 그 끝은 내가 보증하지.”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조용히 한 줄 눈물이 턱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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