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남편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Chapter 51 - Chapter 60

76 Chapters

53화

로제가 탑 꼭대기에서 엘런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바로 그 시각.“크윽…! 막아라! 전열을 정비해!”아르센 황궁의 북문 일대는 이미 치열한 전쟁터였다.벨라리스가 풀어놓은 신형 화약의 위력은 드라켄의 정보망을 상회하고 있었다.폭음이 터질 때마다 성벽이 무너져 내렸고, 흙먼지와 비명이 시야를 가렸다.“폐하! 적의 화력이 너무 거셉니다! 이대로 진입하다간 아군 피해가 막심할 겁니다!”부관이 다급하게 외쳤다.카시안은 말 위에서 전황을 훑었다.냉정하게 계산해야 했다.본국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지만, 지금 당장 저 화망을 뚫고 들어가면 드라켄의 정예 기사들도 절반은 잃는다.‘한 명을 구하기 위해, 내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걸 수는 없다.’그것은 황제로서의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었다.하지만.‘그렇다고 저 여자를 죽게 둘 것인가?’카시안의 시선이 멀리 솟아 있는 탑을 향했다.분명, 이미 엘런의 손길이 로제에게 미쳤을 것이다.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초조함이 이성을 갉아먹었다.결단의 시간은 짧았다.“전군, 들어라.”카시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전장의 소음을 뚫고 명확하게 울렸다.“현 시간부로 진격을 멈춘다.”“폐하?”“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화력을 분산시켜라. 무리해서 진입하지 말고 성 밖에서 포위망만 유지한다.”그것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한 철수 명령이었다.동시에, 로제를 구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뜻으로도 들렸다.부관이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단, 나는 들어간다.”카시안이 말배를 걷어찼다.“폐하! 위험합니다! 혼자서는…!”“상관없다. 내 목숨은 내 것이니.”카시안은 부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화염 속으로 뛰어들었다.황제로서의 의무는 다했다.군대는 뒤로 물렸다.지금부터 움직이는 것은 드라켄의 황제가 아니라, 한 여자를 탐내는 사내 카시안뿐이었다.[다닥, 다닥!]그는 말을 몰아 무너진 성벽을 뛰어넘었다.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쳐내며, 오직 탑을 향해 직진했다.‘제발… 늦지 마라.’그때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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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드라켄 황궁, 겨울의 문턱.하늘은 잿빛이었고, 거대한 흑요석 성벽 위로 날 선 싸락눈이 휘몰아치고 있었다.철혈의 제국이라 불리는 이곳의 공기는 잔혹하고 무거웠다. 하지만 오늘 아침, 그 무거운 공기를 뒤흔드는 소문이 회랑을 타고 빠르게 번졌다.“폐하께서 무언가를 주워 오셨다는군.”“주워 왔다니? 전리품인가?”“아니, 피투성이가 된 여인이라네. 숨이 턱에 닿을 듯 말을 몰아 오셨어.”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색에는 일절 관심 없이 오직 정복에만 미쳐 있던 냉혈한 황제가, 원정길에서 여자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니.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그때였다.황궁의 정문이 열리고, 차가운 북풍과 함께 거대한 마기(魔氣)를 뿜어내는 그림자가 들이닥쳤다.[저벅, 저벅.]피와 눈이 엉겨 붙은 군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카시안이었다.검은 제복 위로 눈이 내려앉았지만, 그는 털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품에는 핏빛으로 물든 하얀 드레스 자락에 꽁꽁 감싸인, 믿을 수 없이 가냘픈 체구의 여인이 안겨 있었다. “폐, 폐하! 당장 의사를 부를까요?”시종장이 기겁하며 달려 나왔지만,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황실 주치의를 내 방으로 보내. 그 외의 새끼들은 내 반경 백 보 안으로 접근하지 마라.”사나운 짐승이 제 암컷을 지키듯 위협적인 기세였다.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훔쳐보았다. 카시안의 단단한 팔 사이로, 상처 입은 여인의 창백하고 마른 손이 툭 떨어져 흔들렸다.황제는 그 여인을 안고, 궁의 가장 은밀한 곳으로 향했다.지하의 포로 수용소도, 타국 왕족을 대우하는 화려한 귀빈실도 아니었다.황제의 침실과 내실로 연결된, 역대 황제들이 자신의 가장 탐욕스러운 욕정을 푸는 '정부(情婦)의 밀실'이었다.[쾅.]문이 거칠게 닫혔다.드라켄의 지독한 눈보라 속으로, 아르센의 겁없는 새가 완벽하게 갇히는 순간이었다...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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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창문 틈으로 새벽의 잿빛 빛줄기가 스며들었다.커튼 자락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침대맡에 앉은 사내의 검은 제복 위로 맹수의 것 같은 거대한 그림자가 춤을 췄다. 카시안은 밤새도록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침대 위, 창백하게 질린 여자의 얼굴과 이불 밖으로 드러난 하얀 어깨에 집요하게 박혀 있었다.그때였다.“…으, 음….”로제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카시안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눈이 떠졌다. 희미한 초점. 텅 빈 동공.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처럼, 혹은 모든 것이 지워진 백지처럼 혼란스러운 눈빛.어젯밤부터 철저하게 계산해 둔 완벽한 연기의 시작이었다.그녀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거대한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밤새 한숨도 안 자고 지켜본 건가. 지독하네 정말.’동시에, 이불 아래에서 스치는 생경한 감각에 로제의 숨이 턱 막혔다.어젯밤 의식이 흐릿할 때 카시안이 자신의 피 묻은 드레스를 찢은 것은 알았지만, 속옷 한 장 남기지 않고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 상태로 만들어 두었을 줄은 몰랐다.로제가 순간적인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찰나, 카시안의 붉은 눈동자가 이불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헐벗은 맨어깨와 쇄골을 핥아내리듯 노골적으로 훑었다.“…당신은….”목소리는 갈라져서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것 만큼은 연기가 아니라, 그 압도적인 시선이 주는 긴장감 때문이었다.“…누구시죠?”카시안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그는 대답 대신, 마른 입술을 축이며 침대 위로 상체를 바짝 숙였다. 뜨거운 숨결이 로제의 맨어깨에 닿을 만큼 아찔한 거리였다.“너는.”그의 붉은 눈이 집요하게 그녀를 파고들었다.“네 이름이 기억나나?”이름?로제는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어당겨 가슴을 가리며, 짐승 앞에 던져진 먹잇감처럼 겁에 질린 척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이불 아래 숨겨진 주먹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드디어 막이 올랐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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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달칵.]의사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다시 혼자가 된 로제는 텅 빈 방 안을 차갑게 훑었다.방금 전까지 불쌍한 척 떨리던 눈동자에서 가련함이 거짓말처럼 증발하고, 서늘한 이성이 번뜩였다.‘아르센의 황후를 인질로 잡은 게 아니라, 기억을 잃은 블랑으로 만들어 곁에 둔다?’내 정체를 만천하에 까발려 서연합의 환심을 사고, 아르센을 동시에 짓밟을 명분으로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기어이 내게 '백지'라는 이름을 씌워 이 은밀한 뒷방에 가뒀다.로제의 입가에 조소 어린 미소가 번졌다.‘카시안, 당신답지 않게 왜 이리 멍청한 수를 뒀어.’대륙을 삼킬 맹수가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정치적 카드를 버렸다.황제로서의 이성보다 사내로서의 욕망이 앞섰다는 증거.나라는 여자 자체에 지독하게 감겨버렸다는, 아주 명백하고도 치명적인 약점 노출이었다.‘나를 백지로 만들어 완전히 지배하고 싶으신 모양인데.’로제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창밖의 눈보라보다 더 시리게 빛나는 은회색 눈동자가 거울 속에 있었다.그녀는 카시안이 지어준 이름을 입안에서 느릿하게 굴려보았다.“블랑….”그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좋아. 기꺼이 그 오만한 착각에 맞춰드리지.”정체가 들통나면 전리품이 될 거란 두려움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그가 내게 새 이름을 주고 세상으로부터 나를 숨겼다는 건, 그만큼 나를 잃고 싶지 않다는 갈증이다.하지만 사내의 마음이란, 제아무리 황제라 한들 곧 부러질 마른 나뭇가지처럼 위태롭고 얄팍한 법.그 불확실한 감정에 내 거대한 야망을 길게 기댈 수는 없다.그가 내게 흥미를 가지는 것을 넘어서서, 나를 온전히 통제하지 못해 더 미칠 듯이 애가 닳고 목말라하도록 만들어야 해.황제의 총애가 식기 전인 3개월.그 짧은 시간 안에 나는 저 남자의 이성을 완벽하게 마비시키고, 두 제국을 집어삼키고 세울 내 왕국의 무기로 만들 작정이었다.‘당신이 나를 주웠다고 생각하겠지만, 글쎄. 목줄이 채워진 건 과연 어느 쪽일까.’살아남겠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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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저녁이 되자, 방 안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시녀들이 다시 들어와 저녁상을 차렸다.아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호화로운 만찬이었다.하지만 시녀들은 블랑의 눈치를 보며 접시를 내려놓기 무섭게 도망치듯 나갔다.[달칵.]그리고 곧이어, 진짜 주인이 들어왔다.카시안이었다.그는 제복 상의를 벗고 헐렁한 실크 셔츠 차림이었다.전쟁터의 살기는 씻어냈지만, 태생적인 위압감은 여전했다.“식사는 입에 맞나.”그는 블랑의 맞은편에 앉으며 턱짓했다.“……아침보다는 낫군요.”블랑은 냅킨을 무릎에 펴며 담담하게 대꾸했다.카시안의 입매가 비틀렸다.“시녀들을 혼내줬다지? 내 명예를 들먹이면서.”“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블랑은 나이프를 들어 고기를 썰었다.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폐하께서 주워온 물건이 흠집 투성이에 먼지구덩이 속에 있다면, 사람들은 주인의 안목을 의심할 테니까요.”“호오.”카시안은 와인잔을 기울이며 그녀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기억을 잃고도 죽지 않는 저 꼿꼿함.역시, 자신이 탐낼 만한 여자였다.“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옷가지와 화장품. 그리고 읽을 책을 좀 주세요.”블랑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이런 바람으로 폐하를 맞이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가장 무해하고 순진한 눈빛으로.하지만 속셈은 달랐다.‘정보가 필요해. 신문, 지도, 그리고 서연합의 구도를 알 수 있는 책 그리고 병법.’하지만 겉으로는 예쁜 옷을 조르는 철없는 여자처럼 보일 것이다.카시안이 딱 좋아할 만큼만.카시안은 피식 웃었다.“좋아. 내일 최고급으로 들여놓지.”“감사합니다.”..식사는 침묵 속에 이어졌다.블랑은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체할 것 같았지만 먹어야 했다.체력을 회복해야, 이 남자에게 쓸모 있는 무기가 될 테니까.식사가 끝나고 시종들이 상을 물렸다.방 안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숨이 막힐 듯 끈적한 긴장감이 흘렀다.블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카시안에게 다가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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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쏴아아아.]벽면에 장식된 사자 머리 조각상의 입에서 얼음장 같은 물줄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근육 위로 쏟아져 내렸다.카시안은 두 손으로 욕실 벽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하반신에 핏대가 설 만큼 몰린 통증이 찬물 속에서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하… 미치겠군.’거친 숨을 내쉬며, 그는 방금 전의 상황을 곱씹었다.자신의 허벅지 위에서 바들바들 떨던 가녀린 몸.서툰 손길로 단추를 풀던 하얀 손가락.하지만 카시안이 떠올린 건 그 발정 난 상황만이 아니었다.‘기억이 없다라.’카시안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차가운 물줄기 속에서도 그의 붉은 눈동자는 섬뜩할 정도로 이성적인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연기가 어설프군, 로제.’정말 기억을 잃은 백지상태라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렇게 빨리, 논리적으로 적응할 수 없다. 시녀들을 단숨에 제압하던 그 서늘한 기세와 권위는 하루아침에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하지만 그는 뻔히 보이는 그 발칙한 거짓말을 기꺼이 묵인해 주기로 했다.‘그래. 아르센의 황후 로제는 죽었다.’그녀가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내 품에서 살아남기 위해 ‘블랑’이라는 가죽을 뒤집어쓰겠다고 자처한다면. 기꺼이 그 장단에 맞춰줄 용의가 있었다. 어차피 과거의 기억 따위, 내게는 방해물일 뿐이니까.차라리 잘됐다.모든 것을 잃고 생사조차 불분명한 전남편을 여전히 신경 쓰는 황후보다는, 살기 위해 내게 다리를 벌리고 매달리는 영리한 여우가 훨씬 맛이 좋을 테니까.벽에 박힌 푸른 마석을 누르자, 쏟아지던 물줄기가 뚝 끊겼다.거울 속에 비친 사내의 얼굴에는 짐승 같은 소유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어디 한번 끝까지 속여 봐.’그는 수건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네 그 앙큼한 거짓말이 내 침대 위에서 언제까지 갈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거짓말쟁이 여우의 가면을 벗겨 먹어 치우는 건, 생각보다 훨씬 자극적인 유희가 될 것 같았다.홀로 남겨진 블랑은 카시안의 체온이 닿았던 손목을 천천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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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에도 아이린의 손끝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그녀의 시선은 창밖에 펼쳐진 드라켄의 황량하고 웅장한 풍경이 아닌, 무릎 위에 펼쳐진 재정 보고서에 고정되어 있었다.“북부 광산의 채굴량이 전월 대비 15%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제국군으로 들어가는 납품 단가는 동결 상태죠.”맞은편에 앉은 가문의 집사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아이린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펜 끝으로 숫자를 그었다.“황제 폐하께서 전쟁을 준비 중이시니까. 지금은 단가를 올릴 때가 아니라, 공급량을 늘려 대체 불가능한 의존도를 높여야 할 때야. 그래야 나중에 청구서를 들이밀 때 거절하지 못하지.””역시... 공녀님의 안목은 탁월하십니다.”아이린은 무미건조한 칭찬을 흘려들으며 보고서를 덮었다.아이젠 공작가.드라켄 제국에서 생산되는 철의 7할을 쥐고 있는 북부의 주인.전쟁광인 황제 카시안에게 군대가 '팔다리'라면, 아이젠 가문은 그 팔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혈관이었다.피가 돌지 않으면 사지는 괴사한다.그것이 아이린이 가진 확신이자 오만이었다.“그나저나, 황궁의 소문 들으셨습니까?”집사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적국 아르센에서 데려온 볼모 말씀이십니까?”“네. 폐하께서 그 여자에게 푹 빠져 최고급 화장품과 드레스를 사들였다고 합니다. 이름이 블랑… 라고 했던가요.”아이린의 푸른 눈동자가 처음으로 서류에서 떨어져 허공을 응시했다.하지만 그 눈에 담긴 건 질투나 분노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그것은 마치, 재고 관리에 실패한 창고를 바라보는 공장장의 눈빛이었다.“비효율적이네.”그녀가 짧게 내뱉었다.“"아무리 전쟁 승리 기념으로 챙긴 전리품이라 해도, 유지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면 폐기하는 게 맞아. 감정 놀음에 빠져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인 우리 가문을 기다리게 하다니.”그녀는 장갑을 고쳐 꼈다.그녀에게 황후의 자리는 사랑의 결실이 아니었다.그것은 자신의 철광산과 황제의 군사력을 결합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인수합병 계약서였다.“가서 확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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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블랑은 카시안의 품에 편안하게 안긴 채, 아이린을 빤히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연합이라면서요. 반대로 말하면 한 나라가 아니니까 서로 떨어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뭐라고요?”“가장 좋은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거라던데. 그게 안 되면, 적의 동맹부터 끊어내야지요.”블랑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그 수십만 병력이 다 똑같은 마음은 아닐 거 아니에요. 대장 노릇 하고 싶은 놈, 돈만 밝히는 놈, 다 섞여 있을 텐데.”블랑은 카시안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비싼 돈 들여서 우리 군사 피 흘리게 할 필요 있나요? 그놈들끼리 의심하게 만들어서 안에서부터 무너뜨려요. 이간질 시키라고요. 굳이 폐하의 손을 더럽히지 말고.”순간 방 안에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적의 결속을 먼저 깨트리는 완벽한 이간책.아이린은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고, 카시안의 눈매가 짙게 휘어졌다.“……호오.”카시안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걸렸다.방금 그 말은, 기억을 잃은 평범한 처녀의 입에서 나올 발상이 아니었다.정치와 전술의 핵심을 꿰뚫는, 오직 군림해 본 지배자만이 알 수 있는 완벽한 [파훼법].‘기억은 없다면서 속은 그대로 아르센의 앙큼한 여우로군.’ 카시안은 제 품에 파고들어 영악하게 수를 던지는 이 여자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아이린이 붉어진 얼굴로 뭐라 반박하려 입을 달싹이던 찰나였다.“아, 머리야…….”블랑이 카시안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미간을 찌푸렸다.“시끄러워서 머리가 다 울리네. 이제 그만 나가주지 그래요?”“……뭐? 감히 누구한테 혀를 놀려!”“전 그저 규칙을 지키라는 거죠.”“규칙?”아이린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블랑은 타오르는 아이린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아치며, 한층 더 관능적인 목소리로 속삭였다.“여기가 뒷방이라면서요. 황제의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 심지어 황후도 이곳만큼은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다고 하던데.”블랑의 시선이 아이린의 빳빳한 드레스를 위아래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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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블랑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런데, 그녀의 맨살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카시안의 손길이 일순간 멈칫했다.그의 커다란 손가락이 블랑의 얇은 흉곽, 갈비뼈의 윤곽이 드러날 정도로 마른 허리를 아프지 않게 쓸어내렸다.맹수처럼 번들거리던 그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으며, 입꼬리가 비틀렸다.“기억을 잃었다더니.”카시안이 그녀의 맨어깨에 코를 묻은 채 나른하게 중얼거렸다.“병법에는 꽤나 밝은가 봐, 블랑?”비꼬는 것이 아니었다. 먹잇감을 탐색하는 포식자의 흥미.“시골 처녀가 알기에는 지나치게 전문적인 지식이지. 안 그래? 대답해 봐.”블랑은 마른침을 삼켰다.흥미를 끄는 데 집중하느라 과하게 나갔다.여기서 변명하려 들거나 시선을 피하면 끝이다.블랑은 카시안의 목에 제 얇은 팔을 두르며, 그의 귓가에 뻔뻔하게 속삭였다.“살려고 한 말이에요.”“살려고?”“주치의한테 들었어요. 황제의 정부라는 건, 방패가 사라지면 뼈도 못 추리는 자리라고. 방금 전 그 공녀가 절 벌레 보듯 보는 거, 폐하도 아시잖아요.”블랑은 자신의 맨살을 매만지는 카시안의 손등을 꽉 쥐었다. 철저히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계산인 척.“난 내 목숨줄 쥔 사람이 야만족들과 정면으로 싸우다 망하는 꼴 보기 싫어요. 그래서 훈수 좀 둔 거고, 그게 다예요.”카시안은 잠시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마치 그녀의 앙큼한 거짓말을 낱낱이 해부하는 듯한 눈빛이었다.하지만 그는 기꺼이 이 발칙한 속임수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내 목숨이 네 목숨줄이다라…. 꽤 꼴리는 변명이군.’카시안은 짧은 실소를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동시에, 그가 침대 위로 흘러내린 두꺼운 이불을 끌어당겨 헐벗은 블랑의 몸을 목끝까지 단단히 감싸버렸다. 시야가 캄캄해질 만큼 거친 손길이었다.“……폐하?”“안 봐도 뻔할 정도로 앙상하군.”이불 너머로 불만이 가득 찬,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뼈다귀를 안는 취미는 없다고 했을 텐데.”굴욕을 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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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전신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낯설었다.푸석했던 은발은 최상급 오일로 윤기가 흘렀고, 앙상했던 쇄골 아래로는 드라켄의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순백의 실크 드레스가 흘러내렸다.블랑, 아니 로제는 자신의 모습을 냉정하게 뜯어보았다.‘확실히 돈이 좋긴 하네.’시녀들은 그녀의 몸에 향유를 바르며,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를 다루듯 조심스러워했다.어제까지만 해도 식판을 던지듯 놓던 이들이었다.이 모든 변화는 카시안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되었다.[내 옆에 두기에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로제는 새끼손가락으로 붉은 연지를 덜어 입술에 꾹 눌러 찍었다.거울 속 여자의 입술이 핏빛으로 번졌다.‘포장지.’그래, 이 화려한 치장은 일종의 포장지였다.황제가 주워 온 전리품이 싸구려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아주 값비싼 포장지.로제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비릿한 헛웃음을 삼켰다.‘원래 계획대로라면…….’지금쯤 이혼 서류를 황제 면전에 던지고, 이름도 신분도 필요 없는 남쪽 휴양지에서 햇살이나 쬐고 있었어야 했다.3년 전으로 회귀했을 때, 그녀가 다시 살아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다.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도, 황후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다시 한번, 내 인생을 온전히 내 손으로 설계해 보는 것.이번 생만큼은 완벽하게 도망칠 자유를 완성하는 것.그것뿐이었는데.‘감히.’로제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서연합과 벨모어.그 오만한 것들이 전쟁이라는 흙발로 내 식탁을 엎어버렸다.내가 공들여 쌓아 올린 시간, 계산해 둔 탈출 경로, 그리고 ‘이쯤이면 되었다’고 판단했던 모든 조건을 짓밟았다.이대로 도망친다면, 평생 찝찝함이 발목을 잡을 것이다.억울해서라도 떠날 수가 없다.‘착각하지 마. 애국심 따위가 아니니까.’제국이 망하든, 황제가 죽든, 알 바 아니었다.나는 이 지겨운 판의 플레이어가 아니라, 관객석으로 빠져나갈 예정이었으니까.하지만 내 관람석을 부순 건 용서할 수 없다.그러니 이건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내 자유를 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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