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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作者: 블루
‘내가 취한 건가?’

샴페인 한 잔 마셨다고 이럴 리가 없었다.

혜니는 접시를 내려놓고 서둘러 인우를 찾았다.

인우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때 키 큰 남자 하나가 갑자기 혜니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저랑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

혜니는 남자를 피해 지나가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웃으며, 휘청이는 혜니의 몸을 덥석 붙잡았다.

“좀 취하신 것 같은데요. 제가 정원에 모시고 나가서 바람 좀 쐬게 해 드릴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는 혜니의 허리를 감싸 쥐었다.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혜니를 억지로 후문 쪽으로 끌고 갔다.

후문 밖은 정원과 귀빈 휴게실로 이어져 있었다.

혜니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제대로 버틸 힘조차 나지 않았다.

“놔요!”

혜니는 힘껏 남자를 밀어냈지만,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밀어도 소용없었다.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남자의 다른 손이 혜니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읍... 읍읍...!”

혜니는 공포에 질려 버둥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혜니를 그대로 끌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정원 쪽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심윤모가 그 장면을 스치듯 보았다.

윤모의 눈빛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여자, 누가 물고 갔다.”

통화가 끝난 지10초도 지나지 않아, 인우가 서늘한 기운을 몰고 뛰쳐나왔다.

“어디야?”

윤모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 휴게실로 들어갔어.”

윤모는 곧장 달려가려는 인우의 팔을 붙잡았다.

“설마 이렇게 빨리 그 여자한테 넘어갈 생각은 아니지? 예전에 네가 그 여자 아버지 때문에 목숨까지 잃을 뻔했던 거, 잊었어?”

“그런데 그 여자는 너한테 이혼하자고 난리 치고, 가난하다고 버렸잖아.”

인우는 윤모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쉽게 나를 갖게 해 줄 생각 없어.”

인우는 한마디를 더 던졌다.

“뒷일은 네가 처리해.”

인우는 곧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혜니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누구야! 저리 가! 놓으라고!”

인우는 망설임 없이 방문을 걷어찼다.

쾅!

문이 거칠게 열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인우의 이성이 그대로 끊어질 듯했다.

흰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혜니를 소파 위에 짓누르고 있었다.

한 손은 이미 혜니의 긴 드레스 자락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인우는 분노한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남자의 멱살을 움켜쥔 채 몇 차례 주먹을 날리자, 남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혜니야!”

인우는 곧장 혜니에게 다가가 일으키려 했다.

혜니의 뺨은 비정상적으로 달아올라 있었고, 눈빛은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그녀는 인우를 보자 구명줄이라도 붙잡은 사람처럼, 실은 유일한 해답을 찾은 사람처럼 그에게 매달렸다.

“자기야...”

혜니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인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어 남자의 턱끝에 입술을 묻고, 약하게 깨물었다.

세지는 않았지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간지러운 자극이었다.

이어 혜니의 뜨거운 숨결이 아래로 내려가... 인우의 목덜미에 닿았다.

흐트러진 움직임 하나하나가 위험할 만큼 노골적인 신호처럼 보였다.

인우의 심장이 거세게 흔들렸다.

4년이었다.

혜니가 인우의 턱에 입을 맞춘 것도, 벌써 4년 전 일이었다.

인우는 몸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고, 낮게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혜니! 지금 네가 뭘 하는지 알아?”

인우는 혜니를 떼어 놓으려 했다.

목소리에는 꾸짖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혜니의 흐려진 이성이 아주 잠깐 돌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혜니는 다시 인우에게 바짝 달라붙어, 두 팔로 그의 단단한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인우의 가슴팍에 비비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이상해... 너무 힘들어...”

인우의 머릿속이 요란하게 울렸다.

‘약을 탄 건가?’

‘빌어먹을...’

인우는 낮게 욕설을 삼키고, 곧장 자신의 정장 재킷을 벗어 혜니를 빈틈없이 감쌌다.

그대로 혜니를 품에 안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밖에는 이미 윤모가 경호원 두 명과 함께 서 있었다.

인우가 나오자, 윤모는 재빨리 객실 키카드 하나를 인우의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위층에 내가 잡아 둔 객실 있어. 일단 올라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은유가 친구 몇 명을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휴게실로 들이닥쳤다.

은유는 문을 거칠게 밀어 열었다.

애초에 불륜 현장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은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은유가 매수했던 남자는 옷이 엉망이 된 채, 치욕스러운 꼴로 소파에 묶여 있었다.

그때 은유의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민 대표. 수를 써도 상대를 봐 가면서 써야죠.”

윤모가 어느새 은유의 뒤에 서 있었다.

그 눈에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호랑이 수염을 건드리는 건, 꽤 위험한 일이라서...”

은유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은유는 급히 윤모에게 다가붙으며, 익숙한 수법을 쓰려고 했다.

“심 대표, 우리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못 본 걸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미안한데요.”

윤모는 냉담하게 은유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제가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민 대표, 아주 제대로 대형 사고를 쳤어요.”

윤모가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데려가.”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즉시 앞으로 나섰다.

비명을 지르는 은유는 그대로 끌려 나갔다.

...

최상층 프레지덴셜 스위트.

인우가 혜니를 부드러운 침대 위에 내려놓자마자, 혜니는 덩굴처럼 인우에게 달라붙었다.

가만있지 못하는 작은 손이 남자의 넥타이를 마구 잡아당겼고, 다른 손은 셔츠 안쪽으로 파고들어 단단한 복부 위를 헤맸다.

인우의 관자놀이가 거세게 뛰었다.

이마 옆으로 힘줄이 불끈 솟았다.

인우는 이성을 뚫고 올라오려는 충동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혜니의 흐트러진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낮게 소리쳤다.

“윤혜니, 똑바로 봐! 내가 누구인지...”

그 한마디에 혜니의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혜니는 흐릿한 눈을 들어, 애써 초점을 맞췄다.

눈앞에 있는 얼굴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사랑했고, 미워했고, 끝내 잊지 못했던 얼굴.

혜니의 눈동자가 세게 흔들렸다.

인우였다.

눈앞의 남자는 한인우였다.

‘안 돼!’

혜니는 더는 인우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다시 그와 어떤 식으로든 이어지고 싶지 않았다.

혜니는 데인 사람처럼 인우를 밀쳐 냈다.

비틀거리며 욕실로 뛰어 들어간 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혜니는 샤워기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자, 흐려졌던 정신이 조금은 돌아오는 듯했다.

혜니는 무릎을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음장 같은 물줄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적셨다.

하지만 몸속에서 치미는 이상한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마치 수많은 벌레가 살갗 아래를 물어뜯는 듯 괴로웠다.

너무 힘들었다.

혜니는 몸을 웅크린 채 끝내 무너져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 뒤, 밖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이어 욕실 문이 열리고, 인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물 아래에서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는 혜니.

울음에 숨조차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그 모습을 본 인우의 가슴이 이유 없이 욱신거렸다.

인우는 알았다.

혜니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차라리 이런 식으로 자신을 괴롭힐지언정, 다시 인우와 관계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우는 다가가 샤워기를 잠갔다.

넓은 목욕타월을 집어 들어 혜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감싼 뒤,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인우는 혜니를 밖에 있는 소파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혜니는 겨우 힘을 조금 되찾았다.

갈라진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한인우, 이 방에서 나가.”

“지금 당장.”

인우는 위에서 내려다보듯 혜니를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스쳤다.

“윤혜니, 너는 아직 내 침대에 올라올 자격 없어.”

인우는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약이야.”

조금 전 윤모가 가져다준 것이었다.

오는 길에 뒤에서 일을 꾸민 사람이 누구인지도 함께 전해 들었다.

혜니는 약병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곧장 집어 들어 알약을 꺼낸 뒤, 망설임 없이 입안에 털어 넣었다.

물도 없이 억지로 삼킨 알약에 목이 따끔하게 아팠다.

인우는 그런 혜니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젖은 옷 갈아입어.”

“내일 일정 중요해. 병가 내줄 생각 없으니까.”

말을 마친 인우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조금의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곧장 방을 나섰다.

...

혜니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계속 공중에 떠 있던 마음이 그제야 제자리로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인우는 떠났다.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얽히면 안 됐다.

설령... 혜니가 아직도 인우를 내려놓지 못했다고 해도.

심지어 인우 하나 때문에 지난 4년을 버텼다고 해도.

하지만 혜니의 어머니는 인우를 뼛속 깊이 미워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일이 놓여 있었다.

이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때 인우가 떠난 뒤, 인우의 어머니는 백씨 가문 사람들을 부추겨 혜니와 혜니의 어머니를 N시에서 쫓아내려 했다.

백조라, 그 미친 여자는 혜니 모녀를 거의 죽을 만큼 몰아붙였다.

백씨 가문이 나중에 온 가족을 데리고 해외로 떠나지 않았다면, 혜니는 지금까지도 N시에 다시 발을 들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일을 제대로 정리하기 전까지, 혜니는 절대 다시 인우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을 생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인종이 울렸다.

혜니가 문을 열자, 문밖에는 인우의 비서 진정이 서 있었다.

“윤 비서님, 대표님께서 전해 드리라고 하신 옷입니다. 잠시 후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혜니는 옷을 받아 들고 재빨리 갈아입은 뒤, 방을 나섰다.

차에 앉은 혜니의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대체 누가 약을 탄 거야?’

‘한인우가 제때 오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때 핸드폰에 실시간 검색어 알림 하나가 떠올랐다.

[수인주얼리 창립자 민은유, 성매매 알선 혐의로 체포. 방사성 원석 사용 의혹까지 불거져 회사 긴급 압수수색.]

‘성매매 알선’이라는 표현은 너무도 절묘했다.

댓글창은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혜니의 가슴이 세게 내려앉았다.

‘설마... 한인우가 한 건가?’

‘나 대신 복수해 준 거야?’

말도 안 됐다.

혜니는 곧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추측이 퍽 우스워졌다.

고작 전처일 뿐이었다.

지금의 한인우에게 혜니 같은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밤 인우가 혜니에게 준 건... 단지 약 한 알이었다.

...

다음 날 오전 8시 반, 혜니는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을 매단 채 회사로 돌아왔다.

비서실은 온통 꽃밭이었다.

수십 송이도 아니고, 수십 다발의 꽃이 저마다 다른 종류와 색으로 비서실 곳곳을 화려하게 채우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진한 꽃향기가 가득했다.

혜니의 책상 위에는 최상급 줄리엣 로즈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 한 다발만 해도 혜니 월급 몇 달 치는 가볍게 넘길 만한 가격이었다.

혜니는 누가 보냈는지 바로 눈치챘다.

한기안이 또 온 것이다.

미나가 다가와 혜니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저 금수저 도련님, 너 쫓아다닌 지 1년도 넘었지? 아직도 마음 안 흔들려?”

혜니는 잠깐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응. 생각은 해 보는 중이야.”

이제 인우가 돌아왔다.

혜니가 그동안 새 인연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아직 인우를 내려놓지 못해서라는 걸 들키면 안 됐다.

그걸 알면 한인우 콧대가 하늘을 찌를 게 뻔했다.

새연은 꽃다발을 보며 진심으로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다음엔 현금으로 보내 달라고 해. 이게 다 돈인데, 며칠만 지나면 금방 시들 거 아니야.”

“너희가 알아서 처리해.”

혜니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꽃에 꽂힌 카드조차 볼 생각이 없었다.

기안이 써 보내는 서툰 연애편지는 매번 웃음이 나올 만큼 어설펐다.

기안은 1년여 전, 혜니가 예전 대표를 따라 접대 자리에 나갔다가 알게 된 사람이었다.

그 뒤로 한기안은 혜니에게 완전히 꽂혀 버렸다.

틈만 나면 선물을 보내고, 연락하고, 어떻게든 혜니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마치 혜니를 꼭 공략해야 할 목표물로 정해 둔 사람처럼.

그때 미나가 벨벳 상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상자 안에서 별 모양 다이아몬드 팔찌를 꺼내 혜니 앞에서 흔들었다.

미나의 표정이 무너졌다.

“이것도 처리하라고? C사 최신 컬렉션 팔찌잖아. 이름도 ‘내 마음의 별’이라는데? 이거 1억 1천만 원대야.”

바로 그때, 인우가 비서실로 들어왔다.

인우의 뒤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함께 있었다.

여자의 분위기와 차림새만 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자기 회사를 직접 이끄는 여성 CEO처럼 당당한 기세가 있었다.

혜니는 재빨리 탕비실로 들어갔다.

새연도 뒤따라 들어오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니의 팔을 톡 건드렸다.

“방금 그 예쁜 여자분, 혹시 우리 미래 사모님 아니야?”

“누가 알아?”

혜니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처음엔 백씨 가문 아가씨가 나오더니, 이번엔 분위기 좋은 여자까지 등장했네.’

‘앞으로 또 몇 명이 더 나올지 모를 일이고.’

‘역시 남자는 돈이 생기면 변하는 법이야.’

...

잠시 뒤, 혜니는 커피 두 잔을 들고 대표실로 들어갔다.

대표실 안에서는 인우와 남주비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인우는 느긋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있었다.

지나치게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주비가 웃으며 말했다.

“비서 세 분이 전부 미인이네. 인기도 대단한 것 같고. 아까 비서실에 꽃이랑 팔찌가 아주 화려하던데... 우리 한 대표가 굳이 태유그룹을 인수한 이유가 여기 있었네.”

주비와 인우는 조금 전 비서실에 가득한 꽃다발과 반짝이는 팔찌를 모두 본 뒤였다.

인우가 가볍게 말했다.

“일부러 돌아와서 놀리려고?”

말투에는 옅은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난 네가 조금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주비가 미소를 지었다.

“네가 도망갈까 봐, 잡으러 돌아왔지.”

“한 대표님, 커피입니다.”

혜니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허리를 숙인 뒤, 커피 두 잔을 각각 인우와 아름다운 주비 앞에 내려놓았다.

그때 주비가 불쑥 물었다.

“윤혜니 씨예요?”

혜니는 잠깐 멈칫했다가 곧바로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주비는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남주비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뭐야, 현 여친이랑 전처 친목이라도 하자는 건가?’

“안녕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혜니는 예의 바른 미소를 억지로 지어 보이고 몸을 돌렸다.

“이번엔 N시에 오래 있을 생각이야? 안 떠나?”

주비가 다시 물었다.

“안 떠나.”

인우의 잘생긴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이번에는 일부러 돌아온 것이었다.

혜니를 위해서.

인우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 지독한 단맛에 하마터면 영혼이 빠져나갈 뻔했다.

‘윤혜니, 일부러 이랬지.’

“네 ‘동생’도 N시에 돌아온 것 같더라. 요즘 J시에서 움직임이 꽤 심상치 않아. 뭔가 크게 준비하는 것 같아.”

주비가 당부했다.

“그놈이 일으킬 수 있는 바람은 없어.”

인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SP그룹은 영원히 그놈 손에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인우가 사실 F국 SP그룹의 후계자라는 것을.

그곳은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최상위 재벌가였다.

혜니조차 그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인우는 SP그룹에 들어가지 않았다.

인우는 주비의 도움으로 첫 투자금을 확보했고, 타고난 사업 감각과 재능만으로 단 4년 만에 수십 조 원대 국제 금융 그룹인 HY캐피탈을 키워 냈다.

인우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사생아를 집으로 데려왔다.

분노한 어머니는 어린 인우를 데리고 N시로 떠났다.

그 뒤로 인우는 줄곧 N시에서 자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혜니를 만나, 서로를 알고 사랑하게 되었다.

인우는 자신의 힘으로 혜니에게 미래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창업을 선택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사업이 채 자리 잡기도 전에 혜니는 인우를 포기했다.

인우를 자신의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지금 혜니는 후회하고 있을까?

...

30분쯤 지나, 주비가 먼저 자리를 떴다.

인우는 직접 주비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돌아오는 길에 인우가 낮게 불렀다.

“윤 비서.”

혜니는 고개를 들고 곧장 인우를 따라 대표실로 들어갔다.

혜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귀한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대표님, 목걸이입니다. 확인해 보세요. 흠집은 없습니다.”

“음.”

인우는 고개만 한 번 끄덕였을 뿐,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혜니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어 오늘 일정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보고가 끝나자, 인우가 입을 열었다.

“저녁 7시와 9시 약속은 취소해. 대신 출항 일정 잡아.”

“네. 함께 승선하실 손님은 어느 분으로 안내해 드리면 될까요?”

혜니는 진지하게 메모했다.

“오늘 밤, 윤 비서가 나랑 가.”

인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혜니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비서가 세 명이나 있습니다만...”

“내가 대표라는 말을 이마에 새겨야, 윤 비서가 내 일정을 대신 정하려 들지 않을 건가?”

인우가 눈을 들어 혜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참지 못한 듯 한마디 더 했다.

“내 업무 지시를 비서가 골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네, 알겠습니다.”

혜니는 가까스로 참아 냈다.

그러다 다시 말했다.

“대신 작은 요청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말해.”

‘말하긴 뭘 말해?’

‘잘난 척은...’

‘사람을 아주 쥐어짜는구나.’

혜니는 속으로 욕을 삼키고, 겉으로는 침착하게 말했다.

“오늘 오후에 한 시간만 일찍 퇴근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저녁 출항 일정에 동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인우는 의외로 선선히 대답했다.

‘설마... 또 소개팅인가?’

‘지난번엔 뒤로 미루더니, 이번엔 앞으로 당겼나?’

인우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한 번 제대로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군.’

“그럼 대표님, 전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

오후 4시, 혜니는 조금 일찍 회사를 빠져나왔다.

딸기 스티커가 잔뜩 붙은 작은 2인승 전기차, 르노 트위지를 몰고 곧장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이 차는 1년 전, 나래와 함께 대형마트에 갔다가 경품 행사에서 당첨된 것이었다.

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 뒤에야 혜니는 부랴부랴 운전면허를 땄다.

나래가 딸기를 좋아해서 혜니는 차 겉면을 전부 딸기 스티커로 도배해 버렸다.

멀리서 보면 작은 딸기 한 알이 도로 위를 굴러가는 것 같았다.

한편, 인우는 마침 계약식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섰고, 그 옆 차선에 혜니의 커다란 딸기가 나란히 섰다.

김 기사가 먼저 알아보고 말했다.

“어? 저거 윤 비서님 아닙니까? 차가 참 개성 있네요.”

혜니는 오늘 오후에 굳이 한 시간 조퇴하겠다고 했었다.

차창이 내려가자, 인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직 퇴근 시간도 아닌데, 저렇게 급하게 나가는 이유가 뭐지?’

‘소개팅이라도 가는 건가?’

‘그렇게 급해?’

초록불이 켜지자, 작은 딸기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대로 좌회전을 했다.

오른쪽 깜빡이를 켠 채로.

인우는 말없이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 운전 솜씨에 인우의 잘생긴 얼굴이 한층 더 싸늘해졌다.

“계약식은 취소해. 저 차 따라가.”

‘예전에 이 여자에게 내가 가진 재산을 전부 남겨 주고 떠났는데...’

‘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저렇게 된 걸까?’

‘차도 저렇고, 옷도 전부 브랜드가 아니고... 쯧...’

롤스로이스는 혜니의 차를 따라 어느 사립 어린이집 앞까지 갔다.

인우의 표정이 굳었다.

‘어린이집?’

‘여긴 왜 온 거지?’

그는 점점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잠시 후, 혜니가 어린이집 문 앞에서 한 어린 여자아이를 품에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더니 아이의 볼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둘은 누가 봐도 몹시 가까워 보였다.

‘저 아이가... 윤혜니의 딸이라고?’

인우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호흡마저 평소처럼 고르지 않았다.

그때 나래가 갑자기 외쳤다.

“아빠! 잘생긴 아빠!”

혜니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기 뒤에 서 있는 인우를 본 순간, 머릿속이 윙 하고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한인우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인우는 혜니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낮게 물었다.

“윤혜니.”

그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 아이를 몰래 낳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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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30화

    “강제후 본부장, 본인이 직접 정예 인력으로 팀원 다섯 명 더 뽑으면 돼.”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은 진지했다.“네, 대표님.”인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새연에게 향했다.“소 비서는 프로젝트팀 지원을 맡아. 모든 진행 상황은 대표실로 직접 보고하고.”“네, 대표님.”새연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확 번졌다.회의실 안은 조용했다.남성도 프로젝트는 투자 규모만 수천억 원대에 달하는 사업이었다. 인우가 태유그룹을 맡은 뒤 처음으로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였으니, 중요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혜니는 인우가 제후를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중책을 맡길 줄은 몰랐다.마지막으로 인우가 발표했다.“이달 말, 프로젝트팀 전원은 남성도로 현장 답사를 간다.”회의가 끝나자 혜니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래도 회사 일에 사감은 안 섞었네. 그 정도 그릇은 되나 보지.’...비서실로 돌아오자 새연은 행복한 새처럼 거의 뛰어오를 기세였다.“너무 좋아! 앞으로 강제후 본부장이랑 마주칠 일이 많아지겠네!”새연은 들뜬 얼굴로 혜니의 팔을 붙잡았다.“혜니야, 화 안 나지?”새연은 옆에 있던 미나도 바라보았다.“미나야, 너도 화 안 나지?”새연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무실에 제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혜니는 웃었다.“화 안 나. 프로젝트 잘 따라가.”미나는 아쉬운 얼굴로 턱을 괴었다.“대표님... 완전 사랑의 큐피드 아니야? 사람들 인연 이어주려고 내려오신 줄 알았네. 내 인연은 언제쯤 이어주시려나?”혜니의 가슴이 세게 움츠러들었다.‘아, 속셈이 여기 있었구나.’인우는 새연과 제후를 엮어 주려는 것이었다.‘쯧쯧, 그 미친놈...’미나가 다시 물었다.“혜니야, 내일 네 생일이잖아. 어떻게 보낼 거야?”“다 같이 회전식 레스토랑 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살게.”혜니가 웃으며 말했다.“진짜?”새연이 맨 먼저 벌떡 일어났다. 손발 다 들어 찬성하는 표정이었다.그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혜니는 전화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9화

    혜니의 머리가 3초쯤 정지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망했어! 사람을 잘못 봤어!”‘왜 하필 제후 씨였어?’혜니는 제후의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물방울이 매끄러운 턱선을 따라 굴러내리더니, 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셔츠 깃 안으로 스며들었다.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그 존재감은 화면을 뚫고 나올 만큼 강했다.경서는 옆에서 거의 넋을 놓고 있었다.혜니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뜨거운 기운이 목덜미에서 귓가까지 번졌다.“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혜니는 겨우 목소리를 되찾고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저는 다른 사람인 줄 알고...”제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물을 한 번 닦아 냈다. 검은 눈동자는 조용히 혜니를 바라보고 있었다.눈빛은 깊었다. 감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혜니는 제후가 분명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누가 갑자기 물벼락을 맞고 기분이 좋겠는가?“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혜니는 그 말만 남기고 곧장 침실로 뛰어갔고, 장롱을 뒤져 새 목욕타월을 꺼냈다. 이어 다시 바람처럼 돌아와 제후의 품에 밀어 넣었다.“빨리 닦으세요! 감기 걸리면 어떡해요!”수건은 크고 부드러웠다. 막 빨아 햇볕에 말린 듯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제후는 수건을 받아 들었다.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을 닦는 동작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했다.제후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공기 중으로 번졌다.아카시아꽃 향기였다.맑고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기였다.“괜찮습니다. 오히려 시원하네요. 오늘 밤이 조금 후텁지근했거든요.”제후의 첫마디는 혜니의 죄책감을 절반 이상 씻어 냈다.물기에 젖은 제후의 목소리에는 살짝 낮은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깊고 듣기 좋았다.제후는 머리를 반쯤 말린 뒤, 수건을 팔 위에 걸쳤다. 시선은 혜니에게 닿아 있었다.“혜니 씨가 답장이 없어서 걱정됐어요. 무슨 일 생긴 건 아닌가 해서 올라와 봤고요. 다음부터는 꼭 도어락 화면 확인하고 문 여세요.”“네...”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8화

    “한 번만 더 답장해 봐. 내일 바로 강제후를 N시에서 사라지게 만들 테니까.”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파괴력은 엄청났다.혜니는 인우를 바라보았다. 충격과 불신이 눈에 가득 차올랐다. 이어 말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 남자가 어떻게 내가 제후 씨랑 메시지 주고받는 걸 안 거지?’혜니는 차 안을 둘러보았다. 숨겨진 카메라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인우의 속셈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설마 그런 식으로 회사 일에 사적인 감정을 섞는 사람은 아니겠지.”“맞아.”인우는 이를 악문 듯 두 글자를 밀어냈다. 눈 밑의 음산한 기운은 더 짙어졌다.“강제후 본부장은 태유그룹의 핵심...”“윤혜니.”인우가 차갑게 혜니를 바라보았다.“강제후 편드는 말 한마디만 더 해 봐.”혜니는 화가 나 온몸이 떨렸다.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개X끼! 나한테만 이러지.’“앞으로 강제후랑 거리 둬.”인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내가 정한 선 넘을 생각 하지 말고.”“왜?”혜니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네가 내 뭐라도 돼?”“내가 가졌던 여자는 아무나 건드릴 수 없어.”인우가 차갑게 웃었다.“설령 내가 버렸다고 해도 남들이 주워 갈 자격은 없지.”그 말은 혜니에게 평생 다시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처럼 들렸다.혜니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혜니는 갑자기 차갑게 웃었다.“그래? 그런데 어떡하지. 지난 4년 동안, 나... 남자 꽤 많이 만났는데?”인우의 손이 거칠게 뻗어 와 혜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눈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그 농담 재미없어.”인우는 제대로 화가 나 있었다.차가 갑자기 멈췄다. 김 기사가 또 한 번 큰 싸움을 막아 낸 셈이었다.“놔!”혜니는 힘껏 뿌리쳤지만 빠져나갈 수 없었다.인우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고개를 숙인 인우는 혜니의 새하얀 어깨를 그대로 깨물었다.“한인우, 너 변태야? 아프다고!”혜니가 소리쳤다.김 기사는 놀라 허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7화

    “네가 시범 보여 달라며? 행동이 말보다 설득력 있잖아.”인우는 원하는 대로 됐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혜니는 말문이 막혔다.“한 대표님, 안녕하십니까.”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 뒤에서 들려왔다.인우와 혜니가 함께 고개를 돌렸다. 혜니는 깜짝 놀랐다.‘제후 씨가 왜 여기 있어?’‘혹시 방금 봤나?’제후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 곁에 서 있었다. 여자는 정교한 메이크업에 우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천 대표, 안녕하십니까.”인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한 대표, 보내 주신 투자 계획안은 잘 검토했습니다.”천리야는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인우는 천리야의 말을 성의 있게 들었다. 이어 몇 가지 전문적인 용어로 답했다.혜니는 몹시 민망했다. 지금 이 와중에도 혜니는 여전히 인우의 품 안에 붙잡혀 있었다.마지막에 인우가 제후를 향해 말했다.“천 대표님께 잘 응대해 주세요. 태유그룹의 진심과 성의를 충분히 느끼실 수 있도록.”“네, 대표님.”제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눈동자 깊은 곳에는 억눌린 감정이 스쳤지만, 제후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인우는 혜니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혜니는 뒤돌아볼 용기조차 나지 않고, 뒤통수가 화끈거렸다.인우는 혜니를 테라스로 데려갔다. 이어 난간과 두 팔 사이에 혜니를 가둔 채 내려다보았다.“한인우, 일부러 그런 거지?”“뭘 일부러 해?”인우는 모르는 척 물었다. 인우의 얼굴이 혜니 가까이 다가왔다. 또 기습이라도 할 것 같은 거리였다.혜니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지. 이 사람... 제후 씨가 나한테 고백한 걸 어떻게 알아?’사실 인우는 혜니가 밤에 국수 한 그릇을 끓였고, 그 위에 청경채가 몇 줄 올라갔는지까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진정이 사진까지 찍어 보냈기 때문이었다.‘감히 다른 남자한테 국수를 끓여 줘?’하나하나 다 기억해 둘 작정이었다.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벌을 줄 생각이었다.“놔.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6화

    옆에 있던 남자 하나가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한 대표님 품에 들어온 분답네요.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십니다.”혜니는 담담하게 한마디했다.“저는 그냥 한 대표님 비서입니다.”혜니는 곧바로 인우와 선을 그었다.인우가 혜니의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더했다.“잠시 실례하겠습니다.”인우는 혜니를 데리고 사람이 적은 구석으로 향했다.혜니는 바로 자신의 허리에 두른 인우의 큰 손을 떼어 냈다.“이렇게 붙잡지 마. 불편해.”인우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누가 너한테 이렇게 입으래?”혜니는 어이가 없었다.‘무슨 뜻이야?’“이거 네가 진 비서님 시켜서 보낸 드레스 아니야? 난 또 나가서 접대라도 하라는 줄 알았지.”인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인우는 그저 진정에게 가장 최신 디자인의 드레스 한 벌을 골라 혜니에게 보내라고 했을 뿐이었다.그런데 빌어먹을 진정이 이렇게 몸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옷을 골랐을 줄은 몰랐다.그 시각, 침대 옆에 앉아 나래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정은 갑자기 몸을 떨었다.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인우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계집애, 좀 더 성숙해졌네. 나무토막 같던 애가 제법 여자가 됐어.’인우는 외투를 벗었다. 체온과 은은한 시더우드 향기가 배어 있는 재킷이 그대로 혜니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자신감은 어디서 나와? 네가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누가 널 쳐다본다고.”혜니는 말문이 막혔다.“한 대표는 시력이 꽤 안 좋나 봐. 나한테 한 번에 100억 원을 부르다니.”혜니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윤혜니, 나 지금 네 상사야.”인우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흥.’‘말로 안 되니까 이제 직급으로 누르겠다 이거지.’‘진짜 엿 같네.’“대표님께서 이렇게 급하게 부르신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혜니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꼭 혜니여야 한다던 그 급한 일이 대체 뭔지 들어나 보자는 뜻이었다.인우는 느릿하게 소매 끝을 정리했다.“난 다른 여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5화

    혜니는 나래의 머리를 말려 주고 옷까지 입혔다. 그런 뒤 따뜻한 우유를 한 병 데워 나래가 침대에 누워 혼자 안고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그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야 혜니는 체념한 사람처럼 방으로 향했다.10분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낸 혜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급스러운 금빛 슬립 드레스는 혜니의 가늘고도 균형 잡힌 몸매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는 느슨하게 틀어 올려져, 곧고 예쁜 어깨와 목선이 드러났다.혜니는 8센티미터 굽의 하이힐을 신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칼끝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혜니는 진정에게 주의할 점을 몇 가지 꼼꼼히 일러 준 뒤에 문을 열고 나갔다.집 아래에는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혜니가 차 문을 열자 김 기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제발 오늘 밤에는 문 세게 닫지 말아 주십시오, 윤 비서님.’‘또 그러시면 제가 수리비 청구서를 받아야 합니다.’‘그때는 정말 보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혜니는 핸드폰을 꺼내 경서에게 카톡을 보냈다.[나 한인우한테 잡혀서 강제로 끌려가는 중이야. 조금 있다가 집으로 와서 나래 좀 봐 줘.]경서는 곧바로 책상을 뒤엎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미친! 그 쓰레기... 사람 맞아? 너 오늘 교통사고 났다며?]혜니는 입꼬리를 희미하게 당긴 뒤 답장을 썼다.[본인이 그러더라. 나 아니면 안 된대.][우웩! 완전 가스라이팅이잖아! 내가 사람 데리고 구하러 갈게!]경서의 답은 바로 도착했다.혜니는 화면을 바라보며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오지 마.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나래나 좀 봐 줘.][알았어.]...차는 결국 한적하고 은밀한 프라이빗 멤버십 클럽 앞에 멈췄다.입구에는 낮고 묵직한 블랙 골드 톤의 대문이 있었다. 간판 하나 없었고, 유니폼을 입은 도어맨들만 양쪽에 공손히 서 있었다.혜니는 도어맨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카펫을 밟고, 구불구불 이어진 복도를 지나갔다.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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