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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作者: 블루
혜니는 이를 악물고 보고서를 다시 확인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 두 번이나 더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시계가 밤 9시 반을 가리킬 때가 되어서야, 겨우 보고서 검토를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확인해도 결과는 같았다.

오류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혜니는 보고서를 챙겨 다시 대표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보고서를 정중히 올려놓았다.

“검토 끝났습니다.”

인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보고서를 한 번 훑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미안해. 윤 비서. 내가 잘못 본 것 같다.”

혜니는 할 말을 잃었다.

‘잘못 봤다고?’

‘그 한마디 하려고 나를 이 시간까지 붙잡아 둔 거야?’

속에서는 열불이 치밀었지만, 혜니는 가까스로 표정을 눌러 참았다.

그때 인우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늦었네. 내가 데려다주지.”

“괜찮습니다. 저 차 있습니다.”

혜니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혜니는 인우가 더 붙잡기라도 할까 봐, 거의 도망치듯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

밤 10시 정각.

혜니는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강변에 자리한 고급 레스토랑 바 안으로 들어섰다.

은은한 조명이 실내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창가 쪽 자리에는 오늘 혜니의 맞선 상대가 먼저 와 앉아 있었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금테 안경을 쓴 얼굴에는 단정한 분위기가 어려 있었고, 전체적인 인상도 무척 온화하고 점잖아 보였다.

“정우진 씨 맞으시죠?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늦었어요.”

혜니는 정우진을 향해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윤혜니 씨, 앉으세요.”

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사적으로 의자를 살짝 빼 주었다.

“늦은 시간이라 배고프실 것 같아서, 버섯 수프와 빵을 먼저 주문해 뒀습니다.”

말이 끝나기 전에 직원이 따뜻한 수프와 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우진은 곧 메뉴판을 혜니에게 건넸다.

“더 보시고, 드시고 싶은 것 편하게 주문하세요.”

혜니는 메뉴판을 받아 들고, 평소 좋아하던 음식 몇 가지를 가볍게 주문했다.

진한 버섯 향이 감도는 수프를 한입 떠먹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 속을 부드럽게 데웠다.

혜니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점수를 더했다.

‘배려심 있는 사람이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혜니는 곧 알 수 있었다.

정우진은 외모만 괜찮은 남자가 아니었다.

아는 것도 많았고, 말투도 차분했다.

대화를 주고받는 방식 역시 꽤 세련되어 있었다.

분위기가 막 좋아지려던 그때.

강한 존재감을 머금은 그림자가 테이블 위로 드리워졌다.

곧이어 낮고 무거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 비서.”

혜니는 숟가락을 든 손이 굳었다.

“대표님?”

혜니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한 박자 내려앉는 듯했다.

‘한인우가 왜 여기에 있어?’

인우는 혜니를 보지도 않았다.

그저 느긋하게 값비싼 수트 소매를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소매 끝에는 사파이어가 박힌 커프 링크스가 반짝이고 있었다.

5년 전, 혜니도 넉 달 치 월급을 모아 인우에게 비슷한 디자인의 커프 링크스를 사 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인우는 한 번도 그것을 착용하지 않았다.

아마 너무 싸구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잠시 후에 접대 자리가 있어. 윤 비서, 나랑 같이 가.”

인우의 말투에는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힘이 실려 있었다.

“대표님, 지금은 퇴근 후입니다.”

혜니가 조심스럽게 짚었다.

“대표 비서 업무 규정 제7조 2항.”

인우가 그제야 눈을 들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에는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대표가 퇴근하는 시간이 비서의 퇴근 시간이다.”

그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내가 다시 읽어 줘야 하나?”

혜니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술 위로 희게 질린 자국이 번졌다.

혜니는 고개를 돌려,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정우진 씨, 정말 죄송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

혜니의 몸이 그대로 허공에 떴다.

시야가 뒤집히고,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인우가 혜니를 단번에 어깨에 둘러멘 것이다.

단단한 어깨가 몸을 눌러 와 아플 정도였다.

“뭐 하는 거야! 내려놔, 한인우!”

혜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공중에 뜬 두 다리가 허둥지둥 버둥거렸다.

우진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다 혜니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서야, 온몸이 움찔 굳었다.

한인우.

소문으로만 듣던 A국 금융계의 거물.

수십 조 원대 자산을 손에 쥔 남자였다.

...

혜니는 끌려가는 내내 버둥거렸다.

하이힐이 발끝에서 벗겨질 듯 흔들렸고, 몇 번이나 날아갈 뻔했다.

그렇게 혜니는 인우의 어깨에 둘러 메인 채, 사람 하나 없는 전망 테라스까지 끌려 들어갔다.

“가만히 있어!”

낮게 가라앉은 경고가 혜니의 귓가에 떨어졌다.

인우는 크고 단단한 손으로 혜니의 엉덩이를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툭 쳤다.

그러고서야 조심스럽게 혜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혜니는 완전히 폭발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긴 혜니가 인우를 향해 소리쳤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일부러 이러는 거 맞지?”

인우는 위에서 내려다보듯 혜니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널 구해 준 거야. 방금 그 남자, 너랑 안 맞아.”

“맞고 안 맞고가 너랑 무슨 상관인데? 지금 넌 그냥 내 상사야. 내 사생활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인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제멋대로인 말투로 선언했다.

“내 눈에 거슬리면, 넌 누구와도 결혼 못 해.”

인우는 태유그룹을 막 인수하자마자 혜니가 저렇게 잘 지내는 꼴을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었다.

‘내가 전처 복을 이렇게까지 불려 준 셈인가?’

먼저 이혼하자고 한 사람은 혜니였다.

혜니는 사랑이 식었고, 더는 인우를 사랑하지 않는다며 잔인하게 인우를 버렸다.

그러니 인우는 혜니가 마음먹은 대로 행복해지는 꼴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혜니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자기는 보란 듯이 결혼해도 되고, 남들은 평생 혼자 살라 이거야?’

“나 피곤해. 지금은 일 못 해.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내일 바로 날 해고해.”

혜니는 이를 악물고 말을 뱉었다.

온 힘을 다해 인우를 뒤로 밀쳐 낸 뒤, 혜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망 테라스를 빠져나갔다.

...

밤바람이 혜니의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혜니의 마음까지 어지럽게 흔들어 놓았다.

혜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인우가 떠나던 날, 하늘은 유난히 잔뜩 흐려 있었다.

인우는 혜니에게 5억 8천만 원이 들어 있는 통장과 120㎡짜리 아파트 한 채를 남겨 두었다.

그것이 당시 두 사람이 가진 전 재산이었다.

혜니가 눈을 떴을 때, 손목에는 남 홍마노 팔찌 하나가 채워져 있었다.

인우가 단 한 번도 몸에서 떼어 놓지 않던 물건이었다.

반은 새하얗고, 반은 붉게 물든 팔찌였다.

혜니는 은행나무 아래에 누운 채 목 놓아 울었다.

가을바람에 휩쓸린 낙엽들이 허공을 맴돌다 흩어져 내려, 마치 혜니를 그대로 묻어 버리려는 것만 같았다.

인우를 쫓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었다.

혜니는 알았다.

인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뒤 집으로 돌아온 혜니는 이틀 밤낮을 고열에 시달렸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대학 4년 동안의 뜨거운 연애.

그리고 2년의 결혼 생활.

그 모든 시간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인우의 어머니는 여러 번 혜니에게 이혼을 강요했다.

인우가 백씨 가문의 외동딸 백조라와 정략결혼을 하면, 백씨 가문이 인우의 사업을 크게 밀어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혜니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위독하던 날, 인우는 외지에 나가 연락이 끊겼다.

무려 사흘 밤낮 동안.

그때 혜니의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사진 속 인우는 고급스러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두 눈은 감겨 있었고, 침대 옆에는 흰색 하이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혜니는 그 순간 생각했다.

인우가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이제 이 남자는 깨끗하지 않다고.

인우가 돌아왔을 때, 인우는 그저 일이 바빴다고만 말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혜니는 이혼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혜니의 눈가는 무섭도록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끝내 눈물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한인우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

다음 날, 혜니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인우의 호출이 내려왔다.

혜니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자, 책상 뒤에 앉아 있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인우의 전체적인 모습은 전보다 더 깊고 선명해져 있었다.

값비싼 정장은 넓은 어깨와 군살 없이 탄탄한 허리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인우는 의자 등받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자세는 한가로워 보였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은 정면으로 밀려왔다.

마침내 인우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평온했고, 온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오늘부터 윤 비서 직책을 내 수석 비서로 조정했으니...”

“24시간 대기.”

‘이건 또 뭐야?’

‘기선 제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혜니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웃는 듯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대표님, 정말 후하시네요. 설마 월급을 세 배로 주시려는 건가요?”

인우는 포개고 있던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긴 손가락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불만 있어?”

“4년 못 본 사이에 실력은 그대로인데, 사장과 흥정하는 법은 배웠네.”

“과찬이십니다.”

혜니는 완벽한 업무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그냥 궁금해서요. 대표님이 지금 공과 사를 구별 못 하고 사적인 원한을 푸시는 건지, 아니면 저 없이 사는 동안 자기 생활을 돌보는 능력이 이 정도로 떨어지신 건지.”

인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어딘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걸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 한다고 하나?”

인우는 의자를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 나온 인우가 한 걸음씩 혜니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걸 적재적소에 사람을 쓰는 거라고 하는데.”

인우가 혜니의 앞에 멈춰 섰다.

익숙한, 맑고 서늘한 시트러스 향기가 혜니의 숨결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혜니는 차갑게 웃었다.

곧바로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벗어, 책상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그럼 지금부터 그만두겠습니다.”

“감당 못 하겠네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면, 피하면 그만이었다.

혜니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거기 서!”

인우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인우는 서랍에서 서류 한 부를 꺼내 혜니 앞으로 툭 던졌다.

“제대로 봐.”

혜니는 서류를 집어 들고 몇 장 넘겨 보았다.

머릿속이 윙 하고 울리더니 그대로 터질 것 같았다.

‘젠장!!!’

‘완전히 덫에 걸렸잖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악덕 자본가.”

인우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혜니는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잘생긴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한입 물어뜯고 싶었다.

결국 혜니는 씩씩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대로 유리문에 머리를 들이받고 말았다.

쾅!

인우는 놀라서 바로 달려왔다.

따뜻한 손이 혜니의 붉어진 이마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자기야.”

인우의 입에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혜니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자기야?’

‘무슨 개뿔...’

“저리 가!”

혜니는 인우를 힘껏 밀쳐 내고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한인우는 분명 나를 일부러 모욕한 거야!’

예전에 두 사람이 연애하던 시절, 인우는 늘 혜니를 그렇게 불렀다.

‘자기’라고.

‘저 남자... 이제는 저렇게 번듯하게 성공해 놓고, 그런 기억까지 꺼내 나를 놀리는 거지.’

...

오후가 되자, 업무 단톡방에 새 메시지가 하나 올라왔다.

인우가 보낸 메시지였다.

게다가 혜니를 따로 태그까지 해 두었다.

주소 하나.

연락처 하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쓸데없는 말은 단 한 글자도 없었다.

혜니는 체념한 듯 가방을 움켜쥐고, 곧장 택시를 잡아 그 주소로 향했다.

차 안에서도 머릿속은 계속 윙윙거렸다.

반년 전 재계약한 근로계약서에 경업금지 약정이 끼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일방적으로 퇴사하면 회사에 43억 원대의 위약금을 물어내야 했다.

혜니의 평생을 갈아 넣어도 갚을 수 있을지 모를 돈이었다.

혜니는 지금 미칠 듯이 울적했다.

어렵게 도착한 곳은 수리 옥션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숨이 턱 막힐 만큼 비싼 물건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물건을 넘겨받는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람 피 말리는 과정이기도 했다.

직원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벨벳 상자 하나를 혜니 앞에 밀어 놓았다.

“윤혜니 씨,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혜니의 시선이 인수인계서 맨 아래로 내려갔다.

낙찰가란에 적힌 금액을 확인한 혜니는 그대로 숨이 막혔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112억 3천만 원.

혜니의 심장이 세게 오그라들었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심정지가 올 뻔했다.

펜을 쥔 손끝까지 떨렸다.

이걸 들고 가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혜니는 그대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다음 생에는 소나 말로 태어나 평생 갚아야 할지도 몰랐다.

혜니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받아 들었다.

두 손으로 꼭 끌어안은 모습이 마치 세상에 하나뿐인 보물을 품은 사람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건 정말 보물이 맞다.

혜니는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 남은 인생의 자유를 반납해야 할까 봐 무서웠다.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혜니는 상자를 품에 안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앉아 있었다.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이렇게 비싼 목걸이면, 한인우가 어떤 여자한테 주려는 거겠지?’

‘부자들 세계는 진짜 다르네. 한 번에 112억 3천만 원이라니.’

혜니는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두 사람이 아직 돈이 없던 시절, 인우가 혜니에게 주던 선물은 전부 몇십만 원짜리 작은 물건들이었다.

가장 비쌌던 건 결혼반지였다.

인우가 오랫동안 돈을 모아 겨우 산 반지.

가격은 딱 3천만 원이었다.

이혼하던 날, 혜니는 인우가 보는 앞에서 그 반지를 아파트 아래 화단으로 세게 던져 버렸다.

단호하고, 미련 하나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하지만 나중에 혜니는 결국 못난 사람처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 화단의 흙을 전부 뒤지다시피 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지금 혜니에게 남은 건...

인우가 떠나던 날 남기고 간 남 홍마노 팔찌뿐이었다.

그게 얼마나 값나가는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팔찌는 혜니와 목숨을 나눈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혜니는 절대 인우에게 돌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은 인우가 남기고 간 유일한 물건이었다.

인우와 이어진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 팔찌는 혜니가 가장 힘겨웠던 4년을 버티는 동안, 늘 곁에 있었다.

평생 돌려줄 일은 없을 것이다.

회사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 5시 반이었다.

혜니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표정을 가다듬었다.

인우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인우는 여전히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조명 아래 드러난 옆얼굴의 윤곽은 유난히 차갑고 단단해 보였다.

“대표님, 말씀하신 목걸이입니다.”

혜니는 묵직한 벨벳 상자를 인우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임무 완료였다.

그런데 인우가 고개를 들더니, 무심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오늘 저녁 만찬에 같이 참석해.”

인우는 덧붙였다.

“가서 옷 갈아입고 와. 좀 섹시한 걸로.”

‘섹시?’

‘노출이라도 하라는 거야?’

인우는 혜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노출하라는 뜻 아니야. 윤 비서는 그렇게 값이 나가지 않으니까.”

혜니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순간, 진심으로 인우의 입을 영원히 막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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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30화

    “강제후 본부장, 본인이 직접 정예 인력으로 팀원 다섯 명 더 뽑으면 돼.”제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은 진지했다.“네, 대표님.”인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새연에게 향했다.“소 비서는 프로젝트팀 지원을 맡아. 모든 진행 상황은 대표실로 직접 보고하고.”“네, 대표님.”새연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확 번졌다.회의실 안은 조용했다.남성도 프로젝트는 투자 규모만 수천억 원대에 달하는 사업이었다. 인우가 태유그룹을 맡은 뒤 처음으로 추진하는 대형 프로젝트였으니, 중요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혜니는 인우가 제후를 밀어내기는커녕 오히려 중책을 맡길 줄은 몰랐다.마지막으로 인우가 발표했다.“이달 말, 프로젝트팀 전원은 남성도로 현장 답사를 간다.”회의가 끝나자 혜니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그래도 회사 일에 사감은 안 섞었네. 그 정도 그릇은 되나 보지.’...비서실로 돌아오자 새연은 행복한 새처럼 거의 뛰어오를 기세였다.“너무 좋아! 앞으로 강제후 본부장이랑 마주칠 일이 많아지겠네!”새연은 들뜬 얼굴로 혜니의 팔을 붙잡았다.“혜니야, 화 안 나지?”새연은 옆에 있던 미나도 바라보았다.“미나야, 너도 화 안 나지?”새연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사무실에 제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혜니는 웃었다.“화 안 나. 프로젝트 잘 따라가.”미나는 아쉬운 얼굴로 턱을 괴었다.“대표님... 완전 사랑의 큐피드 아니야? 사람들 인연 이어주려고 내려오신 줄 알았네. 내 인연은 언제쯤 이어주시려나?”혜니의 가슴이 세게 움츠러들었다.‘아, 속셈이 여기 있었구나.’인우는 새연과 제후를 엮어 주려는 것이었다.‘쯧쯧, 그 미친놈...’미나가 다시 물었다.“혜니야, 내일 네 생일이잖아. 어떻게 보낼 거야?”“다 같이 회전식 레스토랑 가자. 내가 맛있는 거 살게.”혜니가 웃으며 말했다.“진짜?”새연이 맨 먼저 벌떡 일어났다. 손발 다 들어 찬성하는 표정이었다.그때 내선 전화가 울렸다.혜니는 전화를 받았다. “네, 알겠습니다.”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9화

    혜니의 머리가 3초쯤 정지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망했어! 사람을 잘못 봤어!”‘왜 하필 제후 씨였어?’혜니는 제후의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물방울이 매끄러운 턱선을 따라 굴러내리더니, 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셔츠 깃 안으로 스며들었다.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그 존재감은 화면을 뚫고 나올 만큼 강했다.경서는 옆에서 거의 넋을 놓고 있었다.혜니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뜨거운 기운이 목덜미에서 귓가까지 번졌다.“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혜니는 겨우 목소리를 되찾고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저는 다른 사람인 줄 알고...”제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물을 한 번 닦아 냈다. 검은 눈동자는 조용히 혜니를 바라보고 있었다.눈빛은 깊었다. 감정을 읽기 어려웠지만, 혜니는 제후가 분명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다.누가 갑자기 물벼락을 맞고 기분이 좋겠는가?“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혜니는 그 말만 남기고 곧장 침실로 뛰어갔고, 장롱을 뒤져 새 목욕타월을 꺼냈다. 이어 다시 바람처럼 돌아와 제후의 품에 밀어 넣었다.“빨리 닦으세요! 감기 걸리면 어떡해요!”수건은 크고 부드러웠다. 막 빨아 햇볕에 말린 듯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제후는 수건을 받아 들었다.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을 닦는 동작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했다.제후가 움직일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공기 중으로 번졌다.아카시아꽃 향기였다.맑고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기였다.“괜찮습니다. 오히려 시원하네요. 오늘 밤이 조금 후텁지근했거든요.”제후의 첫마디는 혜니의 죄책감을 절반 이상 씻어 냈다.물기에 젖은 제후의 목소리에는 살짝 낮은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깊고 듣기 좋았다.제후는 머리를 반쯤 말린 뒤, 수건을 팔 위에 걸쳤다. 시선은 혜니에게 닿아 있었다.“혜니 씨가 답장이 없어서 걱정됐어요. 무슨 일 생긴 건 아닌가 해서 올라와 봤고요. 다음부터는 꼭 도어락 화면 확인하고 문 여세요.”“네...”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8화

    “한 번만 더 답장해 봐. 내일 바로 강제후를 N시에서 사라지게 만들 테니까.”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파괴력은 엄청났다.혜니는 인우를 바라보았다. 충격과 불신이 눈에 가득 차올랐다. 이어 말없이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이 남자가 어떻게 내가 제후 씨랑 메시지 주고받는 걸 안 거지?’혜니는 차 안을 둘러보았다. 숨겨진 카메라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인우의 속셈이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설마 그런 식으로 회사 일에 사적인 감정을 섞는 사람은 아니겠지.”“맞아.”인우는 이를 악문 듯 두 글자를 밀어냈다. 눈 밑의 음산한 기운은 더 짙어졌다.“강제후 본부장은 태유그룹의 핵심...”“윤혜니.”인우가 차갑게 혜니를 바라보았다.“강제후 편드는 말 한마디만 더 해 봐.”혜니는 화가 나 온몸이 떨렸다.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개X끼! 나한테만 이러지.’“앞으로 강제후랑 거리 둬.”인우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내가 정한 선 넘을 생각 하지 말고.”“왜?”혜니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 네가 내 뭐라도 돼?”“내가 가졌던 여자는 아무나 건드릴 수 없어.”인우가 차갑게 웃었다.“설령 내가 버렸다고 해도 남들이 주워 갈 자격은 없지.”그 말은 혜니에게 평생 다시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뜻처럼 들렸다.혜니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혜니는 갑자기 차갑게 웃었다.“그래? 그런데 어떡하지. 지난 4년 동안, 나... 남자 꽤 많이 만났는데?”인우의 손이 거칠게 뻗어 와 혜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눈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그 농담 재미없어.”인우는 제대로 화가 나 있었다.차가 갑자기 멈췄다. 김 기사가 또 한 번 큰 싸움을 막아 낸 셈이었다.“놔!”혜니는 힘껏 뿌리쳤지만 빠져나갈 수 없었다.인우가 갑자기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고개를 숙인 인우는 혜니의 새하얀 어깨를 그대로 깨물었다.“한인우, 너 변태야? 아프다고!”혜니가 소리쳤다.김 기사는 놀라 허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7화

    “네가 시범 보여 달라며? 행동이 말보다 설득력 있잖아.”인우는 원하는 대로 됐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혜니는 말문이 막혔다.“한 대표님, 안녕하십니까.”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두 사람 뒤에서 들려왔다.인우와 혜니가 함께 고개를 돌렸다. 혜니는 깜짝 놀랐다.‘제후 씨가 왜 여기 있어?’‘혹시 방금 봤나?’제후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팔짱을 낀 채 두 사람 곁에 서 있었다. 여자는 정교한 메이크업에 우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천 대표, 안녕하십니까.”인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한 대표, 보내 주신 투자 계획안은 잘 검토했습니다.”천리야는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인우는 천리야의 말을 성의 있게 들었다. 이어 몇 가지 전문적인 용어로 답했다.혜니는 몹시 민망했다. 지금 이 와중에도 혜니는 여전히 인우의 품 안에 붙잡혀 있었다.마지막에 인우가 제후를 향해 말했다.“천 대표님께 잘 응대해 주세요. 태유그룹의 진심과 성의를 충분히 느끼실 수 있도록.”“네, 대표님.”제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눈동자 깊은 곳에는 억눌린 감정이 스쳤지만, 제후의 표정에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인우는 혜니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혜니는 뒤돌아볼 용기조차 나지 않고, 뒤통수가 화끈거렸다.인우는 혜니를 테라스로 데려갔다. 이어 난간과 두 팔 사이에 혜니를 가둔 채 내려다보았다.“한인우, 일부러 그런 거지?”“뭘 일부러 해?”인우는 모르는 척 물었다. 인우의 얼굴이 혜니 가까이 다가왔다. 또 기습이라도 할 것 같은 거리였다.혜니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지. 이 사람... 제후 씨가 나한테 고백한 걸 어떻게 알아?’사실 인우는 혜니가 밤에 국수 한 그릇을 끓였고, 그 위에 청경채가 몇 줄 올라갔는지까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진정이 사진까지 찍어 보냈기 때문이었다.‘감히 다른 남자한테 국수를 끓여 줘?’하나하나 다 기억해 둘 작정이었다. 나중에 한꺼번에 모아서 벌을 줄 생각이었다.“놔.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6화

    옆에 있던 남자 하나가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한 대표님 품에 들어온 분답네요.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십니다.”혜니는 담담하게 한마디했다.“저는 그냥 한 대표님 비서입니다.”혜니는 곧바로 인우와 선을 그었다.인우가 혜니의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더했다.“잠시 실례하겠습니다.”인우는 혜니를 데리고 사람이 적은 구석으로 향했다.혜니는 바로 자신의 허리에 두른 인우의 큰 손을 떼어 냈다.“이렇게 붙잡지 마. 불편해.”인우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누가 너한테 이렇게 입으래?”혜니는 어이가 없었다.‘무슨 뜻이야?’“이거 네가 진 비서님 시켜서 보낸 드레스 아니야? 난 또 나가서 접대라도 하라는 줄 알았지.”인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인우는 그저 진정에게 가장 최신 디자인의 드레스 한 벌을 골라 혜니에게 보내라고 했을 뿐이었다.그런데 빌어먹을 진정이 이렇게 몸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옷을 골랐을 줄은 몰랐다.그 시각, 침대 옆에 앉아 나래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정은 갑자기 몸을 떨었다.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인우의 눈이 가늘어졌다.‘이 계집애, 좀 더 성숙해졌네. 나무토막 같던 애가 제법 여자가 됐어.’인우는 외투를 벗었다. 체온과 은은한 시더우드 향기가 배어 있는 재킷이 그대로 혜니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자신감은 어디서 나와? 네가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누가 널 쳐다본다고.”혜니는 말문이 막혔다.“한 대표는 시력이 꽤 안 좋나 봐. 나한테 한 번에 100억 원을 부르다니.”혜니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윤혜니, 나 지금 네 상사야.”인우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흥.’‘말로 안 되니까 이제 직급으로 누르겠다 이거지.’‘진짜 엿 같네.’“대표님께서 이렇게 급하게 부르신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혜니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꼭 혜니여야 한다던 그 급한 일이 대체 뭔지 들어나 보자는 뜻이었다.인우는 느릿하게 소매 끝을 정리했다.“난 다른 여

  • 전남편은 ‘나’바라기   제25화

    혜니는 나래의 머리를 말려 주고 옷까지 입혔다. 그런 뒤 따뜻한 우유를 한 병 데워 나래가 침대에 누워 혼자 안고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그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야 혜니는 체념한 사람처럼 방으로 향했다.10분 뒤, 다시 모습을 드러낸 혜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급스러운 금빛 슬립 드레스는 혜니의 가늘고도 균형 잡힌 몸매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는 느슨하게 틀어 올려져, 곧고 예쁜 어깨와 목선이 드러났다.혜니는 8센티미터 굽의 하이힐을 신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칼끝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혜니는 진정에게 주의할 점을 몇 가지 꼼꼼히 일러 준 뒤에 문을 열고 나갔다.집 아래에는 검은색 롤스로이스가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혜니가 차 문을 열자 김 기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제발 오늘 밤에는 문 세게 닫지 말아 주십시오, 윤 비서님.’‘또 그러시면 제가 수리비 청구서를 받아야 합니다.’‘그때는 정말 보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혜니는 핸드폰을 꺼내 경서에게 카톡을 보냈다.[나 한인우한테 잡혀서 강제로 끌려가는 중이야. 조금 있다가 집으로 와서 나래 좀 봐 줘.]경서는 곧바로 책상을 뒤엎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미친! 그 쓰레기... 사람 맞아? 너 오늘 교통사고 났다며?]혜니는 입꼬리를 희미하게 당긴 뒤 답장을 썼다.[본인이 그러더라. 나 아니면 안 된대.][우웩! 완전 가스라이팅이잖아! 내가 사람 데리고 구하러 갈게!]경서의 답은 바로 도착했다.혜니는 화면을 바라보며 마음 한쪽이 따뜻해졌다.[오지 마.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나래나 좀 봐 줘.][알았어.]...차는 결국 한적하고 은밀한 프라이빗 멤버십 클럽 앞에 멈췄다.입구에는 낮고 묵직한 블랙 골드 톤의 대문이 있었다. 간판 하나 없었고, 유니폼을 입은 도어맨들만 양쪽에 공손히 서 있었다.혜니는 도어맨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카펫을 밟고, 구불구불 이어진 복도를 지나갔다.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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