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7월 중순.본격적인 한여름이 시작되면서 남들은 다들 휴가다, 여행이다 하여 한껏 들떠 있는 시기가 돌아왔다.나 역시 그들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크게 웃을 일 없었던 내 인생에서도 제법 들뜬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해외 출장이라니. 차준호와 복잡 미묘한 사이라고는 해도, 별개로 일본 방문은 생애 처음이라 마냥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그때 외근에서 돌아온 허기찬 실장이 나를 보며 부러움 가득한 눈빛으로 슬쩍 말을 건넸다.“완전 좋겠다, 신 비서. 아주 제대로 호강하겠어. 오늘 인트라넷 공지 떴던 걸?”국내에서도 차준호와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고, 좋은 공연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는데. 나는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 비행기 이번에 태어나서 처음 타봐요.”그 말에 허기찬은 너무 놀란 나머지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진짜? 거짓말! 그럼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제주도도 안 가봤어?”“사정상 못 갔어요.”이런 게 뭐라고. 막상 말을 하려니 좀 부끄러웠다. 하지만 안 가본 걸 가봤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머쓱하게 고개를 숙이자, 때마침 대표실 문이 열리며 차준호가 걸어 나왔다.“허 실장, 신 비서 괴롭힌 거야? 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지?”갑작스러운 차준호의 등장에 허기찬은 당황해서 싱겁게 하하 웃으며 얼버무렸다.“아, 아닙니다! 괴롭히긴요! 신 비서가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고 하길래 그냥 놀라서요.”내 말을 들은 차준호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기찬을 다시 찌릿 노려보았다.“허 실장이 제주도도
더운 7월이었다.어제 강소희가 CH-컴퍼니에 다녀간 이야기를 아직도 나이가 제일 많은 JW에서 방출된 하영이 떠들어 댔고 그 다음 나이가 많은 연두가 데뷔하면 JW 걸그룹 애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준다며 들떠 있었다.세나는 가쁜 숨을 내쉬며 정수기에서 종이컵에 물을 받아 목을 적셨다.그 둘은 청소도 하지 않고 제일 늦게 들어온 자신이 막내라며 계속 허드렛일만 시켰다. 심지어 회사에 청소 담당 용역 직원도 있는데 말이다.10층 연예인 전용 휴게실. 곧 연예인이 되는데 그게 대수랴. 휴게실 이름 만으로도 그래도 벅찬 세나는 청소를 하다 땀을 식히며 유리창 아래를 내려다 보며 물을 마셨다.눈앞에 펼쳐진 번화한 풍경을 보며 고개를 나직하게 끄덕였다. 그래도 원하는 길을 잘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달랬다.그러고는 휴대폰을 열어 팬카페에 도국에게 보내는 글- 게시판에 글을 썼다.[DG 오빠, 저 3dri예요. 연예인 되는 길이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네요. 하지만 데뷔하고 나면 오빠 꼭 만날 수 있겠죠? 저는 지금 꿈을 이루는 중이에요. 꼭 오빠 얼굴 방송국에서 볼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그렇게 메시지를 남겨둔 세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이곳은 텅 비어 있었지만, 기왕 하영이 시키고 간 거 제대로 깨끗하게 치워놓고 싶었다.오늘은 여기 10층과 이곳 앞에 복도, 사무실 앞까지 깨끗하게 빗자루로 쓸고 대걸레로 닦아 놓으라고 하영과 연두가 지시했었다.힘겹게 빗자루를 쓸고 있던 그때, 누군가 세나의 등 뒤에서 자신을 불러 세웠다."세나 양, 여기는 청소기로 하는 게 낫지 않아요?"늘씬하고 매끄러운 몸매에, 단정하고 근사한 흰색 원피스 차림이라니. 심지어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은 채였다. 찰랑거리는 갈색 긴 머리를 뒤로 가볍게 넘기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강소희는 차준호 앞에 서서 뭐라고 언성을 높이려던 참이었고, 차준호는 대표실 책상에 앉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그때 내가 차 쟁반과 혹시 몰라 패드를 들고 들어서자, 차준호의 눈빛이 허기찬의 경고대로 순식간에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왜 신 비서가 들어왔지? 허 실장은?”나는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집어삼켰다. 지금까지 차준호를 보아오면서 저렇게 눈빛에 노골적인 화를 품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나를 향한 분노인지, 아니면 불청객 강소희를 향한 분노인지 모를 차가움에 온몸의 털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어머, 비서가 차 시중드는 건 당연한 일이지. 토끼 비서님. 저기 위에 잘 좀 놓아봐요.”마치 귀족 부인이 시녀를 대하듯 강소희가 손가락 끝을 툭 튕기더니, 나를 깔보는 표정으로 비꼬았다.그러고 보면 우리 회사에 온 손님에게 내가 직접 차 시중을 들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차준호는 손님을 맞이할 때 대부분 밖에서 식사를 하거나 외근을 나갔던 기억만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하지만 나는 회사에서 거액의 연봉을 받는 엄연한 직장인이자 차준호의 개인 비서였다. 이런 응대 업무 역시 내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네, 알겠습니다.”나는 차분하게 다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강소희를 여자의 시선이 아닌, 그저 회사에 방문한 손님으로 치부하며 건조하게 굴었다.“강소희, 넌 손님이 아니야. 나가.”“하긴 난 손님이 아니라 더 특별한 사람이지. 그런데 왜 자꾸 내 전화 씹어? 내 성격 시한폭탄인 거 몰라? 언론에 확 다 말해버릴까 보다!”강소희는 대체 왜 저토록 독기를 품은 채 차준호에게 매달리는 걸까.
강소희는 요즘 들어 차준호 생각만 하면 심장이 찌릿하게 아파와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지금도 몸이 안 좋을 텐데, 계속 저렇게 과로하고 있는 거 아니야?’자신이 잘 아는 성형외과 원장을 차준호의 동생에게 소개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 지경까지 치달을 줄은 몰랐다.동생을 위해 제 살을 떼어주는 피부 이식을 단행하질 않나, 급기야 췌장이 굳어가는 시한부 판정까지 받질 않나. 차준호를 둘러싼 모든 잔혹한 현실이 강소희의 목을 서서히 죄어오고 있었다.어린 시절부터 차준호는 그녀 인생의 전부였다. 바라보기만 해도 눈부시게 빛나는 그 남자를 온전히 가슴에 품고 싶어서, 유복한 집안으로 입양까지 갔다. 대한민국 최고 연예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피눈물 나는 독기를 품고 살았고,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름답게 뜯어고쳤다.그런데 왜. 대체 왜 그리도 차준호는 자신을 혐오하며 피하기만 하는 걸까.전 국민이 다 아름답고 도도하다며 칭송해도, 차준호의 눈에는 아직도 자신이 서쪽 동네 가난한 판자촌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그 허접하고 못난 어린아이로만 보이는 걸까. 서러움과 독기가 핏빛처럼 치밀어 올랐다.“나랑 얘기해. 안 그러면 여기서 다 터뜨리든가.”“너랑 할 이야기 없어. 불여우 강소희 씨.”불여우라니. 속으로 기가 차 코웃음을 치며 대표실 문을 넘어서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대표님, 일정 브리핑은 어떻게 할까요.”차갑고 서늘하게 떨어지는 여자의 목소리에 강소희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닿았다.배우라고 해도 믿을 법한 단아하고 고운 얼굴.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억 원을 들여 뜯어고친 자신과 달리,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에 타고난 이목구비만으로 분위기를 압도하다니.
6월의 무더위 속, 차준호와 묘하게 어수선한 주말을 보내고 맞이한 월요일 아침.허기찬도 자리를 비운 터라 나는 한층 더 무거운 마음으로 회사로 향했다. 토요일에 그와 정갈하게 식사를 마쳤지만, 개운치 않은 만남이라 도무지 잔상이 지워지지 않았다.아무리 연애에 둔한 나라도, 지금 그와 나 사이를 흐르는 공기가 단순한 대표와 비서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오늘은 그가 따로 옷을 보내주지 않았다. 토요일에 미리 건네주었던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서니, 아침부터 작렬하는 태양이 지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CH-컴퍼니 사옥에 도착해 탁 트인 로비로 들어서자마자 풍겨오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절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땀을 식히며 한숨을 돌리던 바로 그때, 로비 저편에서 우르르 발소리가 들려왔다. 회사에서 다시 야심 차게 추진 중인 걸그룹 연습생 네 명이 로비를 가로질러 뛰어가는 중이었다.“어?”역시나 네 명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건 단연 세나였다. 세나는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지 서둘러 일반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세나가 잘되어야 차준호도 마음을 놓을 텐데. 걸그룹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 차준호는 회사 주력인 게임 사업에 온전히 에너지를 쏟아부을 터였다.나는 세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응원하듯 불끈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격려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사원들의 나직한 수군거림이 밀려왔다.“어머나, 오늘도 저 비서님 스타일 완벽하다.”“집도 세종동이래. 대박, 완전 금수저인가 봐.”“잘생긴 대표님도 매일 가까이에서 보고, 진짜 출근할 맛 나겠다.”엉뚱하게 부풀려진 소문에 괜히 귀끝이 화끈거리며 뜨거워졌다.
뭘 또 옷까지 갖춰 입고 오라니.고급 음식을 먹으려면 드레스 코드라도 필요한 것일까.심지어 그는 전담 기사와 차까지 보내주겠다고 했다.기묘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지만, 나는 한사코 거절한 채 혼자 택시에 몸을 실었다.차준호가 보내줄 차라면 보나 마나 묵직한 고급 세단일 터였다. 그런 거대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호텔 입구에 내린다면, 그렇고 그런 여자로 보일 것 같아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어느덧 도착한 C호텔.하지만 탁 트인 유리문 너머 로비로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한 채, 나는 호텔 정문의 근사한 소나무와 잘 가꿔진 조경 사이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사실 회사에 입사한 이후부터 나는 줄곧 알 수 없는 위화감과 아찔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차준호는 정말 나를 단순히 일 잘하는 비서로만 대하고 있는 게 맞을까?그의 다정한 시선, 가끔 닿을 듯 말 듯 스쳐 지나가던 묵직한 체온, 그리고 나를 이곳으로 부른 진짜 의도까지.그렇다고 친구들에게 남자가 주말에 호텔로 오라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냐고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황급히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남자가 여자를 호텔로 부르는 이유’ 따위를 내 손으로 검색하자니 꼴이 너무 우스웠다. 괜히 옆에서 산책하던 투숙객들이 내 휴대전화 화면이라도 볼까 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어쩌나. 이제야 아차 싶었다. 단칼에 거절했어야 했나?하지만 그저 고생한 비서에게 근사한 식사 한 끼 대접하겠다고 한 것뿐인데, 나 혼자 너무 앙큼하고 과하게 김칫국을 마시는 건 아닌가 싶어 머릿속이 어지럽게 꼬여갔다.바로 그때였다.Rrr, Rrr-.화면에 차준호라는 세 글자가 찍혔다.“여보세요.”– 신하늘, 뭐 상상했어?나지막하고 묵직한 그의 음성에 심장이 순식간에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
종일 정신 없다가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았다.커피에 의지해온 탓일까. 카페인의 날카로운 자극이 현기증을 부추겼다.그가 왜 하필 기억을 잃은 걸까.3년치 기억만 사라지다니. 비극 같으면서도 우습게 느껴졌다.빌어먹게도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카메라 군단이 다시 몰려들었다. 간신히 버티던 나는 기계적인 목소리로 답변했다.그런데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고미주와 강진욱의 대화에 일순 어깨가 흠칫거려졌다.[강 박사님, 차 대표는 언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나요?][네, 최종 검사가 끝나는 대로 오늘
이아준은 통화 도중, 수면 위로 떠오르는 신하늘과 도국과의 옛 기억 속에 깊게 잠겼다.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강남의 이면, 세종동 서쪽 끝자락에는 시간이 멈춘 듯한 빈민가가 있었다. 그곳에 위치한 ‘하늘 보육원’은 세 사람의 유년이 뿌리내린 곳이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나이도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유일한 세계이자 가족이었다.이아준은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보육원 앞마당에 버려진 신세였다.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고도 변덕스러웠다. 뒤늦게 그가 국내 최고 재벌가인 L그룹의 잃어버린 혈통임이 드러났고, 하루아침에
[1월 1일, 재벌가 차준호와 톱여배우 강소희! 둘만의 밀월여행이었나· 강원도에서 추락 사고!][CC그룹 후계자 차준호·한류스타 강소희! 과연 현재 상태는?][사고 직후 불거진 비밀 연애 의혹· 관계자들은 어떤 입장을···][과연 차준호와 강소희 사고에 관한 진실은 무엇인가!]새해의 태양이 채 떠오르기도 전,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차준호는 강소희를 자신의 세단에 태운 채 1월 1일 새벽 강원도 산길을 달리던 중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십여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했다.단순한 교통사고인지, 범죄와 연관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