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Chapter 271 - Chapter 280

358 Chapters

271. 함께 세는 봄

위지헌이 돌아온 이튿날 아침, 왕부의 안채에 오랜만에 두 사람의 상이 마주 놓였다.청아가 죽 그릇을 들이며, 자꾸 위지헌의 왼팔을 훔쳐보았다."왕야, 그 팔… 많이 다치셨어요?""얕다.""아가씨는 얕지 않다고 하시던데요."청아가 그렇게 말하고,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월령이 옅게 웃었다. 위지헌의 입가도, 조금 움직였다.죽 그릇에서 김이 올랐다. 넉 달을 북에 있다 돌아온 사람에게,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놓이는 아침이었다.위지헌은 그 죽을 다 비웠다. 북에서는, 찬 주먹밥을 말 위에서 삼키던 아침이 많았다. 따뜻한 것을 앉아서 먹는 아침이, 그에게는 오랜만이었다.'따뜻한 것을 준비해라.' 지난겨울, 그가 윤백에게 이르던 말이었다. 이번 봄에는, 그 따뜻한 것이 그의 앞에 놓였다. 준비하라 이르지 않아도, 곁에 있는 사람이 있었다.*상을 물린 뒤, 월령이 그의 왼팔에 감긴 천을 새로 갈았다.북에서 여러 번 감았다 풀린 천이었다. 마른 피가 눌어붙어 있었고, 새 살이 아직 덜 찬 자리가 있었다."…군의가 뭐라 했어요.""며칠 팔을 크게 쓰지 말라 했다.""그런데 사흘을 말을 달려 오셨네요."월령의 손이 천을 감다 잠깐 멎었다. 위지헌은 그 멎은 손을 내려다보았다."네가 세는 봄에, 늦지 않으려 했다."월령은 대답 대신, 천의 매듭을 한 번 더 여몄다. 여미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지난겨울 그가 그녀의 찬 손을 데우고 싶어 하던 것을, 이번에는 그녀가 그의 상처를 감는 것으로 갚고 있었다.북에서 여러 사람이 감았을 천이었다. 그러나 그 천을 이렇게 오래, 매듭 하나까지 여며 감는 이는 없었을 것이었다. 위지헌은 그 오래 걸리는 매무새를, 재촉하지 않고 다 받았다.*낮에, 월령은 방첩 장부를 그의 앞에 폈다.지난겨울부터 홀로 적어 온 장부였다. '연' 아래, 석중과 절터와 방준과 채운 상궁과 동쪽 처소가 한 줄씩 적혀 있었다. 그 줄들 위로, 바깥 매듭이 하나씩 풀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혼자, 이만큼을 세었구나."위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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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적련초의 밭

마른 적련초 한 송이는, 여전히 왕부의 상 위에 있었다.월령은 그 꽃을 버리지 않았다. 겨눈 자가 보낸 것이라, 그 안에 겨눈 자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적련초는 아무 데서나 자라는 꽃이 아니었다. 독을 품은 꽃이라, 기르는 밭도 따로 있었다. 그 밭을 찾으면, 이 꽃을 꺾어 보낸 자의 냄새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강무진이 며칠, 저잣거리 약재전을 돌았다.적련초는 약으로도, 독으로도 쓰였다. 아주 적게 쓰면 열을 내렸고, 조금 많으면 사람을 잠들게 했고, 그보다 많으면 잠에서 깨지 못하게 했다.약으로 쓰는 적련초는 관에 등록된 밭에서만 났다. 그 밭은 도성 남쪽, 한 상단이 관에 삯을 내고 부치는 약밭이었다.강무진이 낮게 옮겨 왔다."그 약밭을 부치는 상단이, 독고가의 곁가지입니다."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곡식과 소금을 흔들던 붉은 실이, 약과 독도 함께 쥐고 있었다. 사람을 먹이는 것과, 사람을 재우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한 상단의 밭에서 함께 자랐다.떳떳한 것과 독이 한 밭에 자라면, 독을 캐낼 때 떳떳한 것까지 함께 뽑혔다. 그래서 그 밭은, 함부로 갈아엎을 수 없었다. 겨눈 자는 그것까지 셈하고, 그 밭을 골랐다. 관에 삯을 내고 부치는 떳떳한 이름 뒤에, 독을 숨겨 두었다.*월령은 그 밭의 이름을 듣고, 전생을 떠올렸다.전생에, 어머니를 죽인 적련초도 이 밭에서 났을 것이었다. 그때는 그 꽃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가 죽고 저 자신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그 꽃의 밭을 물을 겨를이 없었다.이번에는, 그 밭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같은 밭에서 난 같은 꽃이, 두 생에 걸쳐 어머니를 겨누고 있었다. 전생에는 그 꽃이 어머니의 약사발에 들었고, 이번에는 마른 채로 경고가 되어 왔다.*위지헌은 그 밭의 이름을 듣고, 눈이 서늘해졌다."밭을 덮치랴.""아니요."월령이 말했다."밭을 덮치면, 저들은 밭이 발각된 것만 알고 물러나요. 그리고 어머니의 약사발은, 밭이 아니라 사람의 손을 거쳐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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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순검이 돌아오다

북의 승전이 조정에 오른 지 며칠 뒤, 경화제가 섭정왕의 순검을 온전히 돌려주었다.봄 한 철 반쯤 나누어 두었던 도성 순검이, 이제 다시 섭정왕의 것이 되었다. 이번에는 지나가듯 가볍게 돌려주는 말이 아니었다. 어전에서, 백관이 보는 앞에서였다.위지헌은 그 순검패를 두 손으로 받았다.*정무가 끝난 뒤, 경화제가 위지헌을 사석으로 불렀다.황제와 섭정왕이 아니라, 형과 아우가 마주 앉는 자리였다."북은, 걷었느냐.""창은 걷었습니다. 그러나 그 창을 쥐여 준 손은, 남에 있습니다."경화제는 차를 한 모금 들었다."안다."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에, 지난봄 어전이 비워 둔 결재 칸의 뜻이 다 들어 있었다."짐이 순검을 나누어 둔 것도, 결재를 미룬 것도, 그 손을 낚으려는 미끼였다. 네가 없는 동안, 그 손이 어디까지 뻗는지 보았다."위지헌은 형의 얼굴을 보았다.보고도 움직이지 않던 침묵이, 게으름이 아니라 낚싯대였다. 형은 오래, 그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그 손의 이름을, 폐하께서는 아십니까."위지헌이 물었다.경화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찻잔을 내려놓고, 창밖의 봄을 잠깐 보았다."이름은,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다만, 그 손이 오래 기댄 벽은 안다."자녕궁이었다.경화제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다만 '오래 기댄 벽'이라는 말로, 그 자리를 가리켰다. 황제조차 그 벽을 함부로 무너뜨리지 못했다. 벽을 무너뜨리면, 벽에 기댄 다른 것들도 함께 무너졌다."서두르지 마라."경화제가 말했다."벽은 한 번에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기댄 것을 하나씩 떼어 내는 것이다. 네 부인이, 그 떼어 내는 일을 잘하더구나."위지헌의 눈이 잠깐 움직였다.형은, 월령이 남에서 한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같은 무렵, 삼황자부의 등잔은 여전히 늦도록 켜져 있었다.위명서는 자녕궁의 셈에서 반걸음 물러선 뒤로,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다. 고모의 그늘을 벗었으나, 아직 스스로 무엇을 쥘지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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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말하지 못한 것

봄비가 오는 밤이었다.월령은 그 비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빗소리는, 전생의 어떤 밤을 자꾸 불러왔다.형장의 밤도, 비가 왔다. 붉은 옷을 입고 끌려가던 길에, 빗물이 옷을 적셨다. 그 붉은 옷은, 비에 젖어 더 붉었다.이번 생의 봄비는 그저 봄비였다. 그런데도 그 소리를 들으면, 월령은 자꾸 붉은 옷의 무게를 떠올렸다.전생의 그 밤을, 월령은 오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두 생을 살았다는 것은 입 밖에 내는 순간, 미친 사람의 말이 되었다.그래서 그녀는 늘, 무서운 밤이면 혼자 삼켰다. 삼킨 것이 몸 어딘가에 쌓여, 봄비 오는 밤마다 무겁게 가라앉았다.*위지헌이 그 곁에서 깨어 있었다."비가, 무섭느냐.""…비가 아니라, 비 오는 밤이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위지헌은 그녀를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 다친 왼팔이 아니라, 성한 오른팔로."말하지 않아도 된다."그가 낮게 말했다."그러나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된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너를 다르게 보지 않는다."월령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빗소리가, 창밖에서 계속 내렸다. 그 소리 아래에서, 오래 삼켜 온 이야기가 목 끝까지 올라왔다.위지헌은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넉 달을 북에 있다 돌아온 사람의 팔에서는, 아직 찬 바람 냄새가 옅게 났다. 그 냄새가 이상하게, 월령의 마음을 가라앉혔다.무서운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그 팔이 충분히 단단했다.*"…왕야.""말해라.""제가,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해도 될까요.""들으마."월령은 한참 숨을 골랐다. 목 안이 말라, 첫 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이 이야기를 하면, 위지헌이 그녀를 미친 사람으로 여길지도 몰랐다. 두 생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많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다르게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말을 믿기로 했다.믿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믿었다가 아니면, 남는 것은 더 큰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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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오래된 봄

위지헌은 오래 말을 골랐다.그녀가 두 생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 용기가 필요했듯, 그에게도 오래 묻어 둔 이야기 하나를 꺼내는 데 숨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빗소리가, 조금 잦아들어 있었다.*"경화 칠년의 봄이었다."위지헌이 낮게 말했다."나는 그때, 진북 관문에서 첫 전장을 치르고 있었다. 어렸고, 이겼으나 외로웠다. 이긴 자리에서도,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경화 칠년. 밀서에 그녀의 이름과 그의 이름이 함께 적힌, 그해였다.그해 봄을, 월령도 어렴풋이 알았다. 지난가을 국청에서 밀서가 열리던 날, 예부 상서가 '경화 칠년 내봉'이라 읽었다. 그때 월령은 제 이름이 왜 그렇게 어린 해에 함 안에 들었는지 알지 못했다.이제, 그 까닭을 듣고 있었다.*"전장 근방의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다. 말발굽에 짓이겨진 살구꽃잎 하나가 내 소매에 붙어 있었다. 아무도 그것을 떼어 주지 않았다. 다들, 나를 무서워했으니까."위지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런데 아주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겁도 없이 다가와 그 꽃잎을 떼어 주었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저씨는, 외로운 사람이네.'"월령의 숨이 멎었다."…그 아이가.""너였다."그 말을 하는 위지헌의 목소리에, 오래된 것이 실려 있었다. 여러 해를 홀로 품어 온 봄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저 혼자 꺼내 보던 봄.월령은 두 생을 혼자 삼켰고, 위지헌은 한 생을 혼자 품었다. 두 사람 다, 오래 혼자였던 사람이었다.*월령은 그 봄을 기억하지 못했다.너무 어렸다. 전장 근방의 마을과 일찍 진 살구꽃, 아버지의 말안장에 붙은 진흙만 드문드문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검은 갑주의 젊은 장수가 있었다는 것은, 기억에 없었다.그러나 위지헌은, 그 봄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나는 그 뒤로, 오래 너를 지켰다. 네가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밀서에 네 이름이 적힌 것도, 내가 청한 일이었다. 외로운 사람이라고 불러 준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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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아는 손으로

봄비가 그친 이튿날부터, 월령은 심가의 손을 하나씩 바꾸기 시작했다.어머니 곁의 손이었다. 부엌에 드는 손, 약을 달이는 손, 대문을 여닫는 손.내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심가를 지킨 사람들은 그대로 두고, 그 곁에 아는 사람을 하나씩 더 붙였다. 낯선 손이 끼어들 자리를, 미리 채워 두는 것이었다.*이번에는, 위지헌도 함께 움직였다.순검이 온전히 돌아온 뒤였다. 지난겨울처럼 그림자로만 지킬 필요가 없었다. 그는 심가가 드나드는 약방과 곡식전을, 순검의 이름으로 조용히 살피게 했다."밭을 덮치지 않고도, 길을 지킬 수 있다."위지헌이 말했다."네가 남에서 홀로 세던 것을, 이제 순검이 함께 센다."월령은 그 말에 잠깐, 지난겨울을 떠올렸다.지난겨울, 그녀는 순검 없는 왕부에서 홀로 길을 지켰다. 이번 봄에는, 순검이 그 길을 함께 지켰다. 같은 길인데, 지키는 사람이 늘어 있었다.지난겨울에는, 그녀가 세는 것을 아무도 함께 세지 않았다. 강무진이 그림자로 도왔으나, 결정은 늘 그녀 혼자의 몫이었다. 이번 봄에는, 그 결정 곁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혼자 지던 무게가,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월령은 어머니에게, 이번에도 다는 말하지 않았다.다만, 심가에 새로 든 사람들을 어머니께 인사시켰다."어머니, 이 아이는 청아의 사촌이에요. 부엌 일을 도울 거예요.""이 사람은, 강 서방이 아는 약재상이고요."유씨는 딸이 왜 사람을 이렇게 붙이는지, 이제 어렴풋이 알았다. 무언가로부터 딸이 저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네가 애쓴다."유씨가 낮게 말했다."애쓰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계셔야, 제가 봄을 세니까요."유씨는 그 말끝을 다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딸의 손을 한 번 잡았다. 두 생을 건너 살아 있는, 어머니의 손이었다.유씨는 새로 든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물었다. 이름을 알면, 낯선 사람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월령은 그 물음을 막지 않았다. 어머니가 곁의 사람들 이름을 다 알수록, 낯선 얼굴 하나가 더 도드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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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벽에 기댄 것들

경화제가 '오래 기댄 벽'이라 부른 자리는, 봄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얇아졌다.순검이 섭정왕에게 온전히 돌아가고, 채운 상궁이 물러나고, 방준이 변방으로 옮겨 간 뒤였다. 자녕궁에 기대어 있던 것들이, 하나씩 벽에서 떨어져 나갔다.숙비는 그 떨어져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옥반지 없는 손으로 식은 차를 만졌다.자녕궁의 봄은, 여느 처소보다 조용했다. 드나드는 발이 줄었고, 향도 예전처럼 사르지 않았다. 오래 권세를 두르던 처소가, 권세를 하나씩 벗고 있었다. 식은 차에서는 향이 오르지 않았다. 향을 사르지 않는 처소의 차는, 오래 두어도 향이 없었다.그러나 벗은 자리마다, 숙비는 무엇을 남길지 골랐다. 다 벗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옷이었다.*숙비는 무너지지 않았다.떨어져 나가는 것들을 붙잡지도 않았다. 붙잡으면, 붙잡는 손까지 함께 떨어졌다. 대신, 남은 것을 더 깊이 감췄다."고모님."설련이 오랜만에 자녕궁에 들었다. 제 발로 든 걸음이었다.숙비는 그 조카를 오래 보았다."넘어졌느냐.""아니요."설련이 낮게 답했다."넘어지지 않아서 왔습니다. 고모님이 넘어지실까 봐."숙비의 손이, 찻잔 위에서 잠깐 멎었다.지난겨울 손을 놓겠다던 조카였다. 붙잡지 않고 놓아주었더니, 제 발로 서서 도로 걸어 들어왔다. 놓아준 것이 잃은 것이 아니었다. 숙비는 그것을, 뒤늦게 알았다.*월령은 그 무렵, 한 가지를 다시 헤아렸다.'연'은 자녕궁에 기대어 있었으나, 자녕궁이 곧 '연'은 아니었다.숙비의 손이 하는 일은 눈에 보였다. 내명부의 문, 옥반지, 향. 그러나 '연'의 손은 보이지 않았다. 성 밖 절터에서 향을 대고, 북의 흑령에게 셈을 쥐여 주고, 남쪽 약밭에서 독을 길렀다.숙비가 벽이라면, '연'은 그 벽 뒤에 숨은 무엇이었다.벽을 무너뜨려도, 그 뒤의 무엇은 다른 벽을 찾아 옮겨 갈 것이었다.월령이 '연'을 처음 장부에 적을 때는, 그것이 자녕궁의 다른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을 따라갈수록, 자녕궁은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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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마르지 않은 것

겨눈 자가 다시 손을 뻗은 것은, 살구가 열매를 굵히던 무렵이었다.이번에는, 마른 꽃이 아니었다.심가의 약방에 새 약재 한 봉지가 들었다. 어머니가 봄마다 달여 먹던 보약의 재료였다. 늘 드나들던 약재상의 이름으로 온 봉지였다.다만, 그 봉지를 받은 것은 강 서방이 붙여 둔 아는 약재상이었다.지난 열흘, 심가의 약방에는 아는 얼굴 하나가 늘 앉아 있었다. 강무진이 붙여 둔 약재상이었다. 오는 약재를 받고, 가는 약을 살피는 자리였다.늘 앉아 있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 아무 일 없던 날들이, 오늘 하루를 위한 것이었다.*아는 약재상은, 그 봉지를 바로 달이지 않았다.늘 오던 약재상의 이름이었으나, 봉지를 가져온 아이가 낯설었다. 그 약방의 심부름 아이는 왼 뺨에 점이 있는 아이였는데, 이 봉지를 가져온 아이에게는 그 점이 없었다.이름은 같았으나, 심부름 온 얼굴이 달랐다.아는 사람만이 알아볼 다름이었다. 약재상은 그 봉지를 달이는 대신, 강무진에게 보냈다.작은 다름이었다. 이름은 같고, 봉지도 같았다. 겨눈 자는 아는 약방의 이름까지 훔쳐 올 만큼 촘촘했다. 그러나 심부름 아이의 얼굴 하나까지는, 훔쳐 오지 못했다.큰 것을 다 갖춘 함정이, 작은 얼굴 하나에서 어긋났다. 아는 사람을 심어 둔 값이, 거기 있었다.*강무진이 그 봉지를 왕부로 가져왔다.월령이 봉지를 열었다. 보약의 재료 사이에, 낯선 잎 몇이 섞여 있었다. 마르지 않은, 붉은 기가 도는 잎.적련초였다.마른 채로 경고를 보낸 자가, 이번에는 마르지 않은 것을 보냈다. 어머니의 약사발에, 그 잎이 들 뻔했다.전생과 같은 길이었다. 전생에 어머니는, 이런 잎이 든 약을 먹고 죽었다. 이번 생에는 그 잎이 약사발에 들기 전에, 아는 손에 걸렸다.월령은 그 붉은 잎을 오래 보았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전생에는, 이 잎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 어머니가 이미 없었다. 이번 생에는, 이 잎이 약사발에 들기 전에 그녀의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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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 이름 하나

봉지를 보낸 자를 따라가는 데에는, 강무진의 걸음이 다시 나섰다.봉지는 심가가 늘 쓰던 약방의 이름을 훔쳐 왔다. 그 이름을 훔치려면, 그 약방의 살림을 아는 사람이라야 했다. 심부름 아이의 이름과 얼굴까지 아는 사람.강무진은 그 약방을 드나든 자들을, 며칠 세었다.쫓는 것과 세는 것은 달랐다. 쫓으면 상대가 알아챘고, 세면 알아채지 못했다. 강무진은 약방 건너 국숫집에 다시 앉았다. 드는 자와 나는 자를, 하루하루 헤아렸다.지난겨울 심가 담 밖에서 하던 일과, 같은 일이었다. 그림자로 사는 자는 늘, 같은 자리에 오래 앉는 것으로 제 몫을 했다.*며칠 뒤, 강무진이 낮게 옮겨 왔다."그 약방에 봄부터 드나든 자가 하나 있습니다. 약재를 대는 사람인데, 남쪽 약밭에서 온다 합니다."남쪽 약밭. 독고가 곁가지가 부치는, 적련초가 나는 밭이었다.봉지는 그 약밭에서 온 자가, 약방의 이름을 훔쳐 심가로 보낸 것이었다. 밭과 심가 사이에, 그 자 하나가 서 있었다.그 자 하나를 잡으면, 어머니를 겨눈 길 하나는 끊겼다. 그러나 월령은 길 하나를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 길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끝까지 거슬러 오르고 싶었다.월령은 그 이름을 장부에 적었다. '연' 아래, 남쪽 약밭에서 온 약재상 하나가 더해졌다.*"그자를 잡으랴."위지헌이 물었다.월령은 잠깐 생각했다.그자를 잡으면, 어머니를 겨눈 손 하나는 끊겼다. 그러나 그자는 밭에서 온 약재상일 뿐이었다. 석중처럼, 목이 매인 손일 것이었다. 잡아도, '연'의 얼굴은 여전히 벽 뒤에 있었다."잡되, 조용히 잡아요."월령이 말했다."그리고 그자가 밭에서 누구의 명을 받는지, 그것부터 물어요. 밭에서 심가로 온 길을 거슬러 오르면, 벽 뒤의 얼굴에 한 걸음 가까워져요."*강무진이 그 약재상을 조용히 확보했다.옥에 가두지 않았다. 석중처럼, 잡은 것도 놓은 것도 아닌 자리에 두었다.그자는 처음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제 목숨이 걸린 것이 아니라 제가 부린 명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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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연을 잇는 자

밭을 관리하는 어른의 이름을 따라, 강무진이 남쪽 약밭에 그림자를 붙였다.이레를 지켜본 뒤, 강무진이 왕부에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번 약방 골목에서 보였던 서두름이 다시 있었다."밭의 어른과, 절터의 어른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강무진은 두 얼굴을 다 보았다. 절터의 어른은 마르고 키가 컸고, 밭의 어른은 작고 다부졌다. 생김이 닮은 데가 하나도 없었다. 부자도, 형제도 아니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를 '연'이라 불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 이름으로 부르고, 그 사람도 스스럼없이 그 이름에 답했다.*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성 밖 절터에서 향을 대던 '연 어른'과, 남쪽 약밭에서 붉은 잎을 챙기던 '밭 어른'이, 서로 다른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같은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한 얼굴이 아니었다. 두 얼굴이, 같은 이름을 나누어 쓰고 있었다."…'연'은, 이름이 아니었어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자리였어요."*강무진이 밭에서 주운 한 가지를 내놓았다.붉은 실로 묶은 낡은 명부였다. 그 첫 장에, 작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연을 잇는다.'명부를 묶은 붉은 실은, 오래된 실이었다. 색이 바랜 자리가 있었고, 여러 번 손을 탄 자국이 있었다. 안의 이름들도, 한 사람이 적은 것이 아니었다. 오래된 먹으로 적힌 이름 위에, 새 먹으로 적힌 이름이 덧대어 있었다.이름을 물려주듯, 명부도 물려받았다. 앞의 연이 적다 물러나면, 뒤의 연이 그 명부를 이어 적었다. '연'은 사람과 함께 죽는 이름이 아니라, 명부와 함께 이어지는 이름이었다.연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이어 가는 자리였다. 앞의 연이 물러나면, 뒤의 연이 그 자리를 이었다. 얼굴은 바뀌어도, 이름은 남았다. 그래서 잡아도 잡아도, '연'은 늘 다음 얼굴로 옮겨 갔다.월령이 지난겨울부터 쫓던 하나의 얼굴은, 처음부터 없었다.*"이 자리가, 언제부터 이어져 왔지."위지헌이 물었다.강무진은 답하지 못했다. 밭의 어른도, 절터의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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