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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 말하지 못한 것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2 21:23:10

봄비가 오는 밤이었다.

월령은 그 비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빗소리는, 전생의 어떤 밤을 자꾸 불러왔다.

형장의 밤도, 비가 왔다. 붉은 옷을 입고 끌려가던 길에, 빗물이 옷을 적셨다. 그 붉은 옷은, 비에 젖어 더 붉었다.

이번 생의 봄비는 그저 봄비였다. 그런데도 그 소리를 들으면, 월령은 자꾸 붉은 옷의 무게를 떠올렸다.

전생의 그 밤을, 월령은 오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두 생을 살았다는 것은 입 밖에 내는 순간, 미친 사람의 말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늘, 무서운 밤이면 혼자 삼켰다. 삼킨 것이 몸 어딘가에 쌓여, 봄비 오는 밤마다 무겁게 가라앉았다.

*

위지헌이 그 곁에서 깨어 있었다.

"비가, 무섭느냐."

"…비가 아니라, 비 오는 밤이요."

월령이 낮게 말했다.

위지헌은 그녀를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 다친 왼팔이 아니라, 성한 오른팔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낮게 말했다.

"그러나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된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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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98. 바람개비

    노예원은, 받드는 자리를 오래 견디지 못했다.봄이 다 가기 전, 그 여인이 무리수를 두었다.궁 안에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섭정왕비가 가례를 올린 지 한 철이 넘도록 후사가 없으니, 몸에 흠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었다.그 소문의 자취를 따라가자, 안쪽 처소의 상궁이 나왔다. 노예원이 그 상궁을 통해, 소문을 흘린 것이었다.*소문은, 노예원의 조바심에서 나왔다.측실 자리로는 그 여인의 야심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정비의 자리를 흔들려 했다. 정비에게 흠이 있으면, 그 자리가 비고, 그 빈자리를 제가 노릴 수 있으니까.그러나 그 소문이, 도리어 노가의 명분을 깼다.노가는 여식을 '후사를 돕는 측실'로 바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그 여식이 정비의 자리를 흔드는 소문을 냈다면, 노가의 뜻은 돕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었다.명분과 야심의 어긋남이, 소문 하나로 드러났다.소문 하나가, 노가의 명분을 스스로 겨눴다. 노예원이 정비 자리를 흔든 순간, 노가가 내세운 '돕는 자리'라는 말이 거짓이 되었다. 겨눈 자의 수가, 겨눈 자를 향해 돌아간 셈이었다.*월령은 그 소문을, 흔들리지 않고 받았다.황후의 다회에서, 월령은 나긋하게 말했다."요즘 궁에, 제 몸을 두고 소문이 돈다지요. 소문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저보다 마마들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그 말에, 여러 눈이 노예원에게로 갔다."후사를 돕겠다는 자리에서 나온 소문이라면, 그 자리는 돕는 자리가 아니라 흔드는 자리겠지요. 저는 다만, 그것이 궁금할 뿐입니다."노예원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노가의 명분이 흔들리자, 가장 먼저 발을 뺀 것은 배중곤이었다.바람 따라 줄을 옮기는 원로였다. 노가의 명분이 거짓으로 드러날 낌새가 보이자, 그는 슬그머니 노가에게서 발을 뺐다."후사는… 서두를 일이 아니지요. 섭정왕 저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며칠 전까지 후사를 나라의 근심이라 하던 입이, 이제 서두를 일이 아니라 했다.노경의 얼굴이, 그 바람개비 앞에서 굳었다.*노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97. 비 오는 얼굴

    '연'의 향을 다시 맡은 밤부터, 위지헌의 기억이 조금씩 또렷해졌다.향은, 잠긴 기억을 여는 열쇠 같았다. 남쪽 절터의 향, 안쪽 처소의 향. 같은 향을 이번 생에 다시 맡자, 지난 생 형장의 비 오는 얼굴이 조금씩 살아났다. 잊어서 흐려진 얼굴이 아니었다. 너무 아파서 묻어 둔 얼굴이었다. 향 하나가, 그 묻어 둔 자리를 건드렸다."…떠올랐다."어느 밤, 위지헌이 낮게 말했다.*"그 사람은, 여인이었다."월령이 고개를 들었다."비를 맞으며 형장을 지켜보던 그 사람. 남정네가 아니었다. 궁의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상궁도, 후궁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의 옷이었다."월령의 손끝이 식었다.궁의 옷을 입은 여인이, 붉은 꽃을 들고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그 여인이, 지난 생의 '연'이었다.'연'은, 궁 안에서 왔다.궁 안의 여인이라면, 순검이 닿지 않는 자리에 있었다. 위지헌의 칼도, 왕부의 눈도 함부로 들지 못하는 내명부. '연'이 두 생에 걸쳐 얼굴을 감출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 있었다. 그 자리는, 사내들의 손이 닿지 않는 자리였다.*"그 여인이, 어떤 얼굴이었어요."월령이 낮게 물었다.위지헌은 오래, 그날을 떠올렸다."울지 않았다. 미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오래 해 온 일을 마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붉은 꽃을 코에 대고, 조용히 한 가지 일을 끝낸 사람처럼."월령은 그 말을, 오래 마음에 새겼다.미워서 죽인 것이 아니었다. 오래 이어 온 일을 마치듯 죽인 것이었다. 대를 이어 온 자리가, 그 여인의 손에서 한 매듭을 지은 것이었다.*그 말을 하는 위지헌의 얼굴에, 오래된 것이 스쳤다."내가, 그 얼굴을 조금만 더 일찍 떠올렸다면.""부군.""지난 생에 그 여인을 먼저 보았다면. 너를… 늦지 않게 데리러 갔을지도 모른다."월령은 그의 손을 잡았다. 두 손으로."부군은 늦지 않았어요.""늦었다. 형장에 닿았을 때…""이번 생에는, 늦지 않았어요."월령이 그의 말을 잘랐다."지난 생의 늦음을, 이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96. 노예원의 무리수

    받드는 자리에 오래 머물 여인이 아니었다.다회가 있고 며칠 뒤, 노예원이 움직였다.궁 안의 한 처소가, 섭정왕비를 청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총애를 잃은 늙은 후궁의 처소였다. 봄이 가기 전, 오랜만에 여는 작은 다회라 했다.월령은 그 청을 받고, 잠깐 멎었다.그 처소는, '연'의 실이 옮겨 간 안쪽 처소였다.*월령은 그 청을 물리지 않았다.'연'의 실이 옮겨 간 자리를, 제 눈으로 볼 기회였다. 다만 혼자 들지 않았다. 강무진이 왕부 사람 몇을 그 처소 근처에 두었다.늙은 후궁의 처소에 드니, 뜻밖에 노예원이 먼저 와 있었다."섭정왕비마마. 오셨습니까."노예원이 곱게 맞았다. 받드는 자리를 익히겠다던 여인이, 오늘은 손님을 맞는 안주인처럼 굴었다.월령은 그 어긋남을 눈에 담았다.*다회가 무르익을 무렵, 노예원이 낮게 말을 건넸다."마마. 섭정왕 저하께서, 요즘 정무로 바쁘시다지요. 후사를 돕는 자리가 있다면, 저하의 짐을 조금 덜어 드릴 수 있을 텐데요."여전히 측실 자리를 미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말을 '연'의 처소에서 하고 있었다.월령은 처소를 둘러보았다.늙은 후궁은 자리에 없었다. 처소를 빌려준 벽만 있고, 주인은 없는 자리였다. 그 빈자리에서, 노예원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노가가 이 처소를 제 자리처럼 쓴다는 뜻이었다.'연'의 안쪽 처소와, 노가가 이어져 있었다.*월령은 그 다회에서, 말을 아꼈다.다만, 처소의 향을 기억해 두었다. 남쪽 절터에서 나던 향과, 같은 향이 이 처소에도 옅게 배어 있었다.노가의 여인이 손님을 맞는 처소에, '연'의 향이 배어 있었다. 노가와 '연'이, 이 처소에서 한자리에 있었다.월령은 그 향을 코끝에 담고, 처소를 나섰다.노예원은 측실 자리를 미는 미끼였고, 그 미끼를 이 처소로 부른 것은 '연'이었다. 미끼와 부리는 자가, 이 처소에서 겹쳐 있었다.*그 밤, 강무진이 낮게 옮겨 왔다."그 처소에 드나드는 상궁 하나가 있습니다. 낮에는 늙은 후궁을 모시고, 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95. 노예원의 자리

    월령은 노예원이 스스로 드러날 자리를, 황후의 봄 다회에 마련했다.내명부의 여인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노가가 여식을 섭정왕의 후사를 돕는 자리에 바치겠다 한 뒤였으니, 노예원도 그 다회에 들 자격이 생겼다.월령은 그 자리에서, 노예원에게 낮은 자리를 권했다.*"노 소저는, 섭정왕의 후사를 돕는 자리를 청하셨다지요."월령이 나긋하게 말했다."후사를 돕는 자리는, 정비 아래에서 정비를 받드는 자리입니다. 소저께서 그 자리를 원하신다니, 오늘은 제 곁에서 내명부의 법도를 익히시면 좋겠습니다."정비를 받드는 자리. 월령은 그 말을, 여러 사람 앞에서 분명히 했다.노예원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노예원은 정비를 받드는 자리를 익히러 온 것이 아니었다.그 자리를 빼앗으러 온 여인이었다. 그런데 월령이 여러 사람 앞에서, '내 곁에서 나를 받드는 법을 익히라'고 한 것이었다.받들겠다 답하면, 정비 아래의 자리를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었다. 받들 수 없다 하면, 후사를 돕는 자리를 청한 노가의 명분이 거짓이 되는 셈이었다.어느 쪽을 답해도, 노예원은 걸렸다.*노예원은 오래 답하지 못했다.곱게 웃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 걷혔다. 그 여인은 재색과 야심을 갖추었으나, 여러 사람 앞에서 자리의 높낮이를 정해 오는 말에는 익숙하지 않았다."…소녀는."노예원이 겨우 입을 열었다."소녀는, 저하의 후사를 돕고자 왔을 뿐입니다.""그럼, 제 곁에서 익히시지요."월령이 옅게 웃었다."받드는 법부터."*다회가 끝난 뒤, 노예원이 물러나며 처음으로 월령에게 말을 걸었다.곱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섭정왕비마마. 오늘의 자리는, 마마께서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자리는… 늘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지요.""압니다."월령이 나긋하게 답했다."자리는 바뀌지요. 다만, 자리를 바꾸는 건 그 자리를 탐내는 마음이 아니라, 그 자리를 감당하는 사람이에요. 소저께서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어디까지인지는, 소저 자신이 가장 잘 아시겠지요."노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94. 빈 자리가 없는 곳

    섭정왕이 야연에서 측실을 물린 뒤로, 노가는 물러서지 않았다.물러서기는커녕, 명분을 더 키웠다. 섭정왕의 후사가 없는 것이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나라의 근심이라는 말을, 배중곤을 통해 조정에까지 흘렸다.문벌의 오랜 법도를 앞세운 말이라, 정면으로 반박하기 어려웠다. 월령은 그 말이 조정에 퍼지는 것을 며칠 지켜보았다. 급히 막으면, 도리어 그 명분에 힘이 실렸다.*며칠 뒤, 월령은 그 명분의 뿌리를 다시 헤아렸다."부군. 저들이 후사를 명분으로 삼는 건, 후사가 없어서가 아니에요.""그럼.""후사가 없는 '지금'을 노리는 거예요. 만약 저와 부군 사이에 후사가 생기면, 측실을 들일 명분이 사라져요. 그러니 저들은, 후사가 없는 지금 서둘러 노가의 여인을 들이려는 거예요."위지헌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연'이 서두르는 까닭이, 거기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대가 이어지기 전에, 먼저 노가의 실을 끼워 넣으려는 것.*"그럼, 저들의 명분을 어떻게 무르지."위지헌이 물었다.월령은 잠깐 생각했다."명분으로 명분을 무를 수는 없어요. 후사가 없다는 건 사실이니까요. 다만…"그녀가 낮게 말했다."저들이 든 명분이, 저들에게 돌아가게 할 수는 있어요.""어떻게.""노가가 여식을 섭정왕의 후사를 위해 바친다 했잖아요. 그런데 노가의 여식은, 후사를 돕는 자리를 바라고 온 게 아니에요. 정비 자리를 바라고 왔어요. 그 둘은 달라요."*월령은 그 다름을 짚었다.문벌이 내세운 명분은 '후사를 돕는 측실'이었다. 그러나 노예원이 원하는 것은 '섭정왕비의 자리'였다. 측실로 만족할 여인이 아니었다.측실 명분으로 들어와, 정비 자리를 노리는 여인.그 야심이, 노가의 명분과 어긋나 있었다. 명분은 낮은 자리를 말하는데, 야심은 높은 자리를 노렸다. 그 어긋남을 드러내면, 노가의 명분이 스스로 무너졌다.*"저들이 '후사를 돕는 자리'라 말하게 두고요."월령이 낮게 말했다."노예원이 그 낮은 자리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저들 스스로 드러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93. 집에서 하는 질투

    야연에서 돌아온 밤, 왕부의 안채에 두 사람만 남았다.월령은 겉옷을 벗고, 머리의 비녀를 뽑았다. 백옥과 살구나무. 검은 머리가 어깨 위로 풀려 내렸다.위지헌이 그 모습을 보다가, 낮게 물었다."이제, 질투를 하려느냐.""…네."월령이 낮게 답했다."집에 가서 한다고 했으니까요."*월령은 그의 앞에 앉았다."오늘, 그 노가의 여인이 부군께 잔을 올릴 때요.""들었다.""손끝이, 부군 앞에 오래 머물렀어요. 저는 그걸 봤어요."위지헌은 그녀를 보았다. 두 생을 건너온 책사가, 야연의 셈을 다 읽고 돌아와서는, 정작 집에서는 잔을 올리던 손끝 하나를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그게, 질투냐.""…네. 아주 작은 질투요."월령의 귓불이, 옅게 붉어졌다.*위지헌은 그 붉은 귓불을 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 여인이 잔을 올리는 동안, 나는 한 사람만 보았다.""…누구요.""네 옆자리를."위지헌이 낮게 말했다."그 여인의 손끝이 얼마나 오래 머물든, 내 눈은 네 옆자리로 갔다. 야연 내내, 나는 그 자리만 보았다."월령의 눈에, 물기가 옅게 고였다. 질투를 하러 앉았다가, 도리어 마음이 뜨거워졌다.위지헌은 그 고인 물기를 손끝으로 훔쳤다. 질투하러 앉은 사람의 눈물을 닦는 손이, 유난히 다정했다."울지 마라. 오늘은 네가, 질투하는 날인데.""…이게 다 부군 때문이잖아요."월령이 그렇게 말하고,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밀면서도, 그 어깨를 붙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부군.""말해라.""오늘 여러 사람 앞에서, 빈자리가 없다고 하셨잖아요.""했다.""그 말이… 저는, 오늘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았어요."월령이 그의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전생에 저는, 곁에 아무도 없이 죽었어요. 그런데 이번 생에는, 부군이 여러 사람 앞에서 제 자리가 곁을 다 채웠다고 말해 줬어요. 그게… 자꾸 뜨거웠어요."위지헌은 그녀를 끌어안았다.*"령아."둘만 남은 밤의 이름이었다."그 여인이 노리는 것은, 내 곁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8. 장부

    아이의 이름은 은호였다.은매가 처음 그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는 거의 소리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은호야. 그 두 글자가 입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은매는 다시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울지는 않았다. 동생이 깰까 봐 참는 울음이었다.은호는 작았다.일곱 살이라 들었지만, 마른 몸은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손목에는 회색 실이 묶여 있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기침을 참을 때마다 혀끝으로 이를 쳤다. 딱, 딱. 작은 소리는 방 안 사람들의 숨을 매번 붙잡았다.왕부 의원은 은호의 맥을 짚고 오래 말이 없었다.청아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7. 온기

    회색 실은 따뜻한 물 위에 놓이자 조금씩 풀어졌다.청아는 작은 사기 대접에 손을 얹고 앉아 있었다. 물이 식지 않도록 대접 아래에 천을 두 겹 깔았고, 옆에는 깨끗한 마른 수건을 세 장이나 준비해 두었다. 평소 같으면 필요보다 많은 준비라며 스스로 민망해했을 아이가,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은매는 그 앞에서 숨만 쉬었다.실은 동생의 손목에 있던 것과 같았다. 어미가 낡은 속곳 자락을 꼬아 만들었다던 빛. 희지도 검지도 않은 회색. 약하게 한 번, 세게 한 번 묶는 버릇까지 같았다.하지만 손은 없었다.그 사실이 방 안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6. 길목

    북문으로 가는 역참길은 대연의 목처럼 길고 단단했다.경성에서 북쪽 변경까지 이어지는 길은 처음에는 넓고 평평했다. 황실의 마차와 호부의 군량 수레가 오가야 했으므로, 돌은 깊게 박혔고 길가에는 관목이 낮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러나 하루만 더 올라가면 길은 곧 좁아졌다. 산기슭이 다가오고, 바람은 말의 갈기 사이로 칼끝처럼 스며들었다.그 길을 아는 사람들은 북문로라 불렀고, 장부를 쓰는 사람들은 병량 제삼로라 적었다.같은 길이었다.누구에게는 남편과 아들을 삼키는 길이었고, 누구에게는 창고의 숫자가 줄어드는 줄이었다.은매의 동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5. 안쪽

    은매가 사라졌다는 말은 밤공기보다 먼저 월령의 손끝에 닿았다.청아는 거의 뛰어오다시피 했으나, 마지막 몇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숨은 목구멍에서 가늘게 부서지고 있었고, 치맛자락에는 서원당 뒤뜰의 젖은 흙이 묻어 있었다.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열쇠가 삐져나와 달빛을 받았다."제가 문을 잠갔습니다."청아가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분명히 안에서 잠그고, 바깥 고리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월령은 먼저 아이의 손을 보았다. 열쇠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짓말하는 손이 아니었다. 너무 놀라 제 잘못을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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