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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벽에 기댄 것들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2 21:24:04

경화제가 '오래 기댄 벽'이라 부른 자리는, 봄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얇아졌다.

순검이 섭정왕에게 온전히 돌아가고, 채운 상궁이 물러나고, 방준이 변방으로 옮겨 간 뒤였다. 자녕궁에 기대어 있던 것들이, 하나씩 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숙비는 그 떨어져 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옥반지 없는 손으로 식은 차를 만졌다.

자녕궁의 봄은, 여느 처소보다 조용했다. 드나드는 발이 줄었고, 향도 예전처럼 사르지 않았다. 오래 권세를 두르던 처소가, 권세를 하나씩 벗고 있었다. 식은 차에서는 향이 오르지 않았다. 향을 사르지 않는 처소의 차는, 오래 두어도 향이 없었다.

그러나 벗은 자리마다, 숙비는 무엇을 남길지 골랐다. 다 벗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녀에게는 하나의 옷이었다.

*

숙비는 무너지지 않았다.

떨어져 나가는 것들을 붙잡지도 않았다. 붙잡으면, 붙잡는 손까지 함께 떨어졌다. 대신, 남은 것을 더 깊이 감췄다.

"고모님."

설련이 오랜만에 자녕궁에 들었다. 제 발로 든 걸음이었다.

숙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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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4. 촛불이 다 타도록

    마지막 촛불 하나가, 이제는 익숙해진 안채를 낮게 밝히고 있었다.가례의 첫 밤과는, 다른 밤이었다. 그때는 서로가 낯설었다. 무엇을 숨기고 무엇을 열어야 할지 몰라, 손끝 하나가 조심스러웠다. 오늘 밤은, 두 사람 사이에 숨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두 생의 비밀까지 다 꺼내 놓은 뒤였다.숨길 것이 없는 밤은, 더 뜨거웠다.*위지헌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맥이 뛰는 자리였다. 그 맥이 빨랐다. 그를 향해 뛰고 있었다. 위지헌은 그 뛰는 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손끝으로, 그 박동을 하나씩 세듯이."…부군."월령이 낮게 불렀다. 그 두 글자가, 그의 안에서 오래 눌러 둔 무언가를 무너뜨렸다.그가 고개를 숙여, 그 맥이 뛰는 자리에 입술을 대었다. 월령의 어깨가 떨렸다. 무서움이 아닌 것에 떠는 떨림이었다. 그 떨림을, 위지헌은 입술로 고스란히 받았다.*입맞춤은, 처음에는 봄볕처럼 옅었다.그러나 옅은 것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기울일 때마다, 입맞춤이 조금씩 깊어졌다. 옅던 것이 짙어지고, 짧던 것이 길어졌다. 월령은 숨을 어디서 쉬어야 할지 몰라, 그의 옷깃을 쥔 손에만 힘을 주었다.옷고름이 풀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비단이 낮게 숨을 내쉬는 것 같은 소리였다.월령은 저도 모르게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촛불이, 붉게 물든 귓불을 비췄다. 열어도 된다고 스스로 말해 놓고도, 몸은 아직 오래된 수줍음을 다 벗지 못했다.위지헌은 그 붉은 귓불에 입술을 대었다."부끄러우냐.""…네.""부끄러워도 된다."그가 낮게 말했다."오늘은, 부끄러운 것까지 다 나에게 보여도 된다."*그의 손이, 풀린 옷고름을 따라 그녀의 어깨를 지났다.전장에서 굳은살이 박인 손이었다. 겨울에 덴 화상 자국 위로, 새 흉이 얹힌 손. 그 거친 손이, 그녀의 살결 위에서는 유난히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러우면서도, 오늘은 거두지 않았다.늘 한 뼘을 남기던 사람이었다. 문밖에 서고, 손을 뻗기 전에 멎고, 닿기 전의 거리를 지키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3. 비 갠 뒤

    그날 형장에서 본 얼굴을, 위지헌은 다 기억하지 못했다."비가 굵었다. 얼굴들이 다 젖어 뭉개져 있었다. 다만…"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한 사람이, 울지도 피하지도 않고 서 있었다. 다들 비를 피해 고개를 숙였는데, 그 하나만 고개를 들고 형장을 보고 있었다.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월령은 그 말을 마음에 눌러 두었다.우는 척도, 피하는 척도 하지 않고 형장을 지켜보던 하나. 그 얼굴이 누구인지, 위지헌도 아직 온전히 떠올리지 못했다. 두 생을 건너온 기억은, 굵은 비 속에서 자꾸 흐려졌다."천천히 떠올려 보세요."월령이 말했다."급할 것 없어요. 이번에는, 시간이 많으니까요."*비밀을 다 꺼내 놓은 뒤로,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달라졌다.월령은 더 이상, 무서운 밤에 혼자 숨을 삼키지 않았다. 위지헌은 더 이상, 아는 것을 모르는 척 물어 주지 않아도 되었다.낮에, 월령이 왕부 마당의 살구나무 아래에 섰다. 꽃이 진 자리에, 푸른 열매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부군.""말해라.""전생에, 이 왕부에는 안 살아 보셨죠?""…없다.""그럼 이 집에서 봄을 세는 건, 부군도 저도 처음이네요."위지헌이 그녀를 보았다. 두 생을 산 두 사람에게, 처음인 봄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이 이상하게, 그의 가슴을 데웠다.*청아가 그 곁에서 살구를 올려다보며 재잘거렸다."아가씨, 이 살구 익으면 정과 만들어요. 왕야도 단 거 좋아하세요?""…글쎄. 부군, 단 거 좋아하세요?"위지헌은 잠깐 말을 골랐다."…모른다.""어머, 두 생을 사셨는데 단 걸 좋아하는지 아직 모르세요?"청아가 그렇게 말하고, 제 입을 손으로 막았다. 월령이 웃음을 터뜨렸다. 위지헌의 입가도, 오래 움직였다.두 번 산 봄에도 알지 못한 것이, 아직 많았다. 단 것을 좋아하는지 같은, 작고 사소한 것들이. 이번 봄에는 그런 것부터, 하나씩 알아 갈 참이었다.위지헌은 그 사소함이 좋았다. 두 생을 건너온 무거운 것들 사이로, 단 것을 좋아하는지 같은 가벼운 것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2. 어긋난 봄

    이튿날 밤, 위지헌은 그 남은 하나를 마저 꺼냈다.두 사람이 다 아는 비밀 위에, 어긋난 조각 하나가 놓였다.*"네가 산 지난 생과, 내가 산 지난 생이… 똑같지 않다."위지헌이 낮게 말했다.월령은 그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두 생이, 다르다는 말씀이세요?""큰 줄기는 같다. 너는 열여덟에 폐위되었고, 어머니를 잃었고, 형장으로 갔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같다."위지헌의 목소리가, 거기서 조금 낮아졌다."다만 내가 기억하는 그날은… 네가 아는 그날과 다르다."*"그날, 나는 너를 데리러 갔다."월령의 숨이 멎었다."지난 생에, 나는 북에 있었다. 네가 형장으로 간다는 소식을 늦게 들었다. 나는 말을 몰아 도성으로 달렸다. 봄이 오기 전에, 너에게 닿으려 했다.""…그런데요.""늦었다."위지헌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내가 형장에 닿았을 때, 이미 끝나 있었다. 봄비가 내리고 있었고, 붉은 옷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월령은 그 말 앞에서, 오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두 생을 통틀어, 가장 무서웠던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혼자라는 것이었다. 폐위되던 날도, 어머니를 잃던 날도, 형장으로 끌려가던 날도,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죽음보다 무서웠다.그 무서움의 한복판으로,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두 번째 생에 와서야 알았다.*지난 생에, 그녀는 아무도 저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고 여겼다.폐위되고, 어머니를 잃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곁에 아무도 없었다. 세상에 저 혼자 버려졌다고, 그렇게 눈을 감았다.그런데 그 봄, 한 사람이 북에서 말을 몰아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모른 채, 눈을 감는 동안."…저는, 그걸 몰랐어요."월령의 목소리가 떨렸다."아무도 안 온 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무서웠어요. 마지막까지, 혼자인 줄 알았어요.""안다."위지헌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친 왼팔이 아니라, 두 팔로."그래서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 봄이 오기 전에 네 곁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1. 나도 두 번 산다

    '연'이 대를 잇는 자리라는 것을 안 뒤로, 월령은 며칠 밤을 뒤척였다.한 얼굴을 잡으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얼굴 너머로 이어지고 있었다. 두 생에 걸쳐 끊이지 않은 자리. 그 뿌리가 어디까지 닿는지, 그녀는 아직 다 보지 못했다.위지헌은 그 뒤척임을 곁에서 오래 보았다.*그 밤, 위지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령아."낮에는 부르지 않는 이름이었다. 둘만 남은 밤에만, 그가 낮게 부르는 이름."…네, 부군.""지난번, 네가 두 생을 살았다 했을 때. 내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월령이 고개를 들었다. 그날 밤, 그가 삼킨 말이 있었다. 눈 안쪽에서 스치기만 하고, 끝내 나오지 않은 말."그 이야기를, 오늘 하려 한다."위지헌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낮았다. 촛불이 그 목소리 위에서 잠깐 흔들렸다.*"나도, 이 봄을 두 번 산다."월령의 숨이 멎었다.방 안의 촛불이, 그 한마디 위에서 다시 흔들렸다. 월령은 제가 잘못 들었나 했다. 그러나 위지헌의 눈은, 농이 아니었다."…왕야도, 회귀를.""그래."위지헌이 낮게 말했다."나도 한 번 산 봄을, 다시 살고 있다. 너처럼."월령의 눈에서,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흘렀다. 두 생을 홀로 삼킨 비밀이었다. 세상에 저 하나뿐인 줄 알았던 짐이었다. 그런데 그 짐을, 곁의 사람이 똑같이 지고 있었다.혼자가 아니었다. 두 생을 건너온 자리에, 혼자 선 것이 아니었다.오래 혼자 지던 무게가, 그 한마디에 반으로 줄었다. 아니, 반보다 더 줄었다. 같은 무게를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짐은 절반보다 더 가벼워졌다.월령은 오래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혼자가 아니어서 울었다. 위지헌은 그 울음을 재촉하지 않고 다 받았다. 두 생을 홀로 삼킨 사람의 울음이 어떤 것인지, 그도 알았으니까.*"…언제부터 아셨어요."월령이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처음부터."위지헌이 말했다."네가 심가의 대문을 처음 나설 때부터, 나는 알았다. 이 봄이 두 번째라는 것을. 그리고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80. 연을 잇는 자

    밭을 관리하는 어른의 이름을 따라, 강무진이 남쪽 약밭에 그림자를 붙였다.이레를 지켜본 뒤, 강무진이 왕부에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번 약방 골목에서 보였던 서두름이 다시 있었다."밭의 어른과, 절터의 어른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강무진은 두 얼굴을 다 보았다. 절터의 어른은 마르고 키가 컸고, 밭의 어른은 작고 다부졌다. 생김이 닮은 데가 하나도 없었다. 부자도, 형제도 아니었다.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를 '연'이라 불렀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그 이름으로 부르고, 그 사람도 스스럼없이 그 이름에 답했다.*월령은 그 말을 오래 들었다.성 밖 절터에서 향을 대던 '연 어른'과, 남쪽 약밭에서 붉은 잎을 챙기던 '밭 어른'이, 서로 다른 얼굴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같은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한 얼굴이 아니었다. 두 얼굴이, 같은 이름을 나누어 쓰고 있었다."…'연'은, 이름이 아니었어요."월령이 낮게 말했다."자리였어요."*강무진이 밭에서 주운 한 가지를 내놓았다.붉은 실로 묶은 낡은 명부였다. 그 첫 장에, 작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연을 잇는다.'명부를 묶은 붉은 실은, 오래된 실이었다. 색이 바랜 자리가 있었고, 여러 번 손을 탄 자국이 있었다. 안의 이름들도, 한 사람이 적은 것이 아니었다. 오래된 먹으로 적힌 이름 위에, 새 먹으로 적힌 이름이 덧대어 있었다.이름을 물려주듯, 명부도 물려받았다. 앞의 연이 적다 물러나면, 뒤의 연이 그 명부를 이어 적었다. '연'은 사람과 함께 죽는 이름이 아니라, 명부와 함께 이어지는 이름이었다.연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이어 가는 자리였다. 앞의 연이 물러나면, 뒤의 연이 그 자리를 이었다. 얼굴은 바뀌어도, 이름은 남았다. 그래서 잡아도 잡아도, '연'은 늘 다음 얼굴로 옮겨 갔다.월령이 지난겨울부터 쫓던 하나의 얼굴은, 처음부터 없었다.*"이 자리가, 언제부터 이어져 왔지."위지헌이 물었다.강무진은 답하지 못했다. 밭의 어른도, 절터의 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79. 이름 하나

    봉지를 보낸 자를 따라가는 데에는, 강무진의 걸음이 다시 나섰다.봉지는 심가가 늘 쓰던 약방의 이름을 훔쳐 왔다. 그 이름을 훔치려면, 그 약방의 살림을 아는 사람이라야 했다. 심부름 아이의 이름과 얼굴까지 아는 사람.강무진은 그 약방을 드나든 자들을, 며칠 세었다.쫓는 것과 세는 것은 달랐다. 쫓으면 상대가 알아챘고, 세면 알아채지 못했다. 강무진은 약방 건너 국숫집에 다시 앉았다. 드는 자와 나는 자를, 하루하루 헤아렸다.지난겨울 심가 담 밖에서 하던 일과, 같은 일이었다. 그림자로 사는 자는 늘, 같은 자리에 오래 앉는 것으로 제 몫을 했다.*며칠 뒤, 강무진이 낮게 옮겨 왔다."그 약방에 봄부터 드나든 자가 하나 있습니다. 약재를 대는 사람인데, 남쪽 약밭에서 온다 합니다."남쪽 약밭. 독고가 곁가지가 부치는, 적련초가 나는 밭이었다.봉지는 그 약밭에서 온 자가, 약방의 이름을 훔쳐 심가로 보낸 것이었다. 밭과 심가 사이에, 그 자 하나가 서 있었다.그 자 하나를 잡으면, 어머니를 겨눈 길 하나는 끊겼다. 그러나 월령은 길 하나를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 길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끝까지 거슬러 오르고 싶었다.월령은 그 이름을 장부에 적었다. '연' 아래, 남쪽 약밭에서 온 약재상 하나가 더해졌다.*"그자를 잡으랴."위지헌이 물었다.월령은 잠깐 생각했다.그자를 잡으면, 어머니를 겨눈 손 하나는 끊겼다. 그러나 그자는 밭에서 온 약재상일 뿐이었다. 석중처럼, 목이 매인 손일 것이었다. 잡아도, '연'의 얼굴은 여전히 벽 뒤에 있었다."잡되, 조용히 잡아요."월령이 말했다."그리고 그자가 밭에서 누구의 명을 받는지, 그것부터 물어요. 밭에서 심가로 온 길을 거슬러 오르면, 벽 뒤의 얼굴에 한 걸음 가까워져요."*강무진이 그 약재상을 조용히 확보했다.옥에 가두지 않았다. 석중처럼, 잡은 것도 놓은 것도 아닌 자리에 두었다.그자는 처음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제 목숨이 걸린 것이 아니라 제가 부린 명이 어디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2. 틈

    비는 밤새 그치지 않았다.새벽녘에는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실을 감는 소리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곧이어 두 방울씩, 나중에는 어느 것이 먼저 떨어졌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잦아졌다.심가의 아침은 젖은 냄새로 열렸다.행랑채 아이들은 짚신 밑창에 진흙을 묻힌 채 창고 앞을 오갔고, 부엌에서는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느라 연기가 낮게 깔렸다. 말린 생강은 다시 대청 안으로 들여졌고, 약방의 작은 종은 창포 묶음을 처마 아래에 걸며 연신 코를 훌쩍였다.비가 오는 날에는 집안의 틈이 먼저 보였다.기와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1. 실

    자녕궁에서는 아무 말도 오지 않았다.칭찬도 없었고, 꾸짖음도 없었다.완성본을 거두어 간 뒤 사흘이 지났으나 문상궁의 먹빛 소매는 다시 심가 문턱을 넘지 않았다. 동쪽 대문을 드나드는 것은 장작을 실은 수레와 포목점 심부름꾼, 약방의 어린 종뿐이었다.그런데도 심서윤은 매번 대문 쪽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들었다.처음에는 아주 작게였다.찻잔을 내려놓다가, 바느질하던 바늘끝을 멈추다가, 어머니 한씨가 부르는 말에 대답하려다 말고. 시간이 갈수록 그 작은 움직임은 몸에 남은 버릇처럼 굳어 갔다.기다림은 소리가 없었다.그러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0. 붓끝

    심서윤은 그 밤 잠들지 못했다.자녕궁에서 받은 작은 붓은 베개맡에 놓여 있었다. 흰 붓대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떠 보였고, 끝에 매인 금실은 등잔불이 사라진 뒤에도 혼자 빛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서윤은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는 밤새 젖은 살구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멀리 행랑채 쪽에서는 늦게 돌아온 하인이 물동이를 내려놓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그런 소리들이 집의 숨처럼 느껴졌을 것이다.오늘은 모든 소리가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았다. 마마께서 다시 부르실까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9. 잔

    태후의 초대장은 향이 없었다.그 사실이 먼저 심가를 조용하게 만들었다.아침 부엌에서는 멥쌀 씻는 물소리가 나고, 무쇠솥 가장자리에는 지난밤 끓여 둔 닭죽의 기름이 얇게 굳어 있었다. 행랑 쪽에서는 하인들이 장작을 패며 낮은 농담을 주고받았고, 마구간에서는 젖은 짚을 갈아내는 냄새가 느리게 흘러왔다.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그런데 검은 칠을 한 죽간 하나가 대문을 넘자, 집 안의 모든 소리가 반 박자씩 늦어졌다.칼을 갈던 호위가 손을 멈췄고, 죽을 푸던 계집종은 국자의 끝을 솥 가장자리에 대고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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