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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초고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8 18:58:01
그날 저녁, 심가 안쪽 작은 서실에서 흰 종이 스무 장이 사람의 숨을 조금씩 낮추었다.

서윤은 붓을 들었다.

월령은 곁에 앉아 먹을 갈았다. 먹이 벼루에 닿을 때마다 낮고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둥글게 갈린 먹물이 천천히 깊어졌다. 서윤은 첫 장을 펴고도 한참 글자를 쓰지 못했다.

"천천히 해도 돼."

월령이 말했다.

"묘시 전까지라면 밤은 길어."

"언니는 늘 그렇게 말씀하세요."

서윤이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붓끝이 종이 위에서 작게 떨렸다.

"하지만 언니는 언제나 먼저 해내시잖아요."

먹물 한 방울이 붓끝에 맺혔다. 떨어지기 직전의 검은 물방울이었다.

월령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먼저 해낸 것이 아니었다.

너무 늦게 배운 것이 많았고, 너무 늦게 알아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도 많이 늦어."

월령은 결국 그렇게 말했다.

"언니가요?"

서윤의 눈이 올라왔다.

"응."

월령은 웃었다.

"그러니 네가 쓰는 동안 나는 먹을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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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5. 불

    "…어디.""향방 쪽이요. 담 안 서쪽. 연기가 검어요."월령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걷고 있었다. 걷다가 뛰었다. 봄은 방어멈 품에 있었다. 청아가 뒤에서 따라왔다. 기윤은 이미 없었다. 지붕을 탔다.궁 앞 길이 길었다. 군이 지나간 먼지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길. 그 위로 검은 연기가 한 줄 올라갔다. 자녕궁 담 안에서. 바람이 없어서 연기는 곧게 섰다.*봉쇄 문 앞에 병사 여섯이 서 있었다.문을 등지고. 안을 보지 않고. 연기가 제 등 뒤에서 올라가는데, 여섯이 다 앞을 보고 있었다."문을 열어라."월령이 말했다. 병사장이 고개를 숙였다. 숙인 채 말했다."황명이옵니다, 왕비마마. 드나드는 자 없이. 저희는 문을 못 엽니다.""안에서 불이 났다.""…압니다.""황자 생모가 그 안에 계시다. 타 죽으면, 그게 황명이냐."병사장이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문을 열면 황명을 어긴 것이고, 안 열면 후궁이 탄다. 그 둘을 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서 있으라는 사람이었다.담 안에서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궁인의 비명이 한 번."…곤원전 마마의 이름으로 연다."월령이 말했다."뒷일은 곤원전과 내가 진다. 열어라."병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월령을 보았다. 황후의 패도, 황후의 사람도 없었다. 섭정왕비 하나가 서 있었다. 그 뒤에 시비 하나.병사장이 봉인지에 손을 댔다. 종친부 인이 찍힌 종이가 찢어졌다. 문이 열렸다.*연기가 먼저 나왔다.낮고 검은 연기. 향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오상궁이 짓던 향. 그 향이 타는 냄새였다. 회랑 끝 향방 문에서 불이 혀를 내밀고 있었다. 궁인 셋이 물통을 들고 오갔다. 셋 다 얼굴이 검었다. 셋 다 아무 말이 없었다.설련이 없었다."…설련 언니!"청아가 소리쳤다. 소리치고, 뛰었다. 월령이 그 소매를 잡기 전에. 연기 속으로. 겁먹은 얼굴로. 겁먹은 채 손이 먼저 가는 아이였다. 늘."청아—"기윤이 지붕에서 내려왔다. 소리 없이. 청아가 들어간 회랑으로 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4. 살구나무 마을

    출정 전야에, 월령이 품에서 꽃잎 봉지를 꺼냈다.네 장. 한 장은 그의 소매에 있었다. 월령이 그 봉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받지 않고, 도로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한 장은 부군이 가지고 가셔야지요. 소매 거 말고요.""소매 것으로 된다. 오늘 밤은 네가 다 가져라. 넷 다."월령이 봉지를 쥐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봉지째 쥐었다."…살구나무 마을이 탔다.""알아요.""내가 거기 간다. 가서, 남은 게 있으면 찾는다. 첫 장이든, 나무든.""나무는 탔겠지요.""뿌리는 안 탄다."그가 말했다. 짧게. 그 말이 격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월령은 알았다. 살구나무는 뿌리로 산다.*그가 그녀를 당겼다.등불을 끄지 않았다. 옷고름을 푸는 손이 오늘은 느리지 않았다. 느릴 시간이 없었다. 새벽에 떠났다. 그런데 서두르지도 않았다. 서두르는 것과 느리지 않은 것은 달랐다.입술이 닿았다. 숨이 섞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받쳤고, 그녀의 손이 그의 등을 쥐었다. 자국이 있는 자리. 두 번 낸 자국. 오늘 세 번째."…부군.""음.""돌아오세요. 두 번은—""안 늦는다."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끊고, 그 입술을 제 입술로 막았다. 무게가 실렸다. 월령의 무릎이 풀렸고, 그가 그것을 받았다. 이름을 불렀다. 한 번. 그 한 번에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이었다. 부군이 아니라, 이름으로."…지헌."그의 숨이 목 깊은 데서 끊겼다.*한참 뒤, 그가 그녀의 등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네가 내 이름을 불렀다.""불렀어요.""두 생 동안 처음이다.""알아요. 그래서 불렀어요."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에 얹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월령은 그가 무엇을 삼키는지 알았다.*새벽에 군이 섰다.북경군 본대. 왕부 앞에서 궁 앞으로, 궁 앞에서 북문로로. 위지헌이 말에 올랐다. 검은 대창포, 옥관. 강무진이 그 뒤. 정무가 그 옆. 북영에서 밤길을 내려온 위명서가 그 반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3. 북에서

    급보는 낮에 왔다.북문군 파발. 흙먼지를 뒤집어쓴 군사가 왕부 대문 앞에서 말에서 굴러 내렸다. 강무진이 그를 받았다. 붕대 푼 팔로."…흑령이 국경을 밟았습니다. 사흘 전에. 염로 초소 둘이 무너졌고요.""둘.""예. 그리고 군량이… 군량이 샙니다, 나리. 염로 물표가 가짜가 섞여서, 어디로 새는지 아직."강무진이 파발을 안으로 들였다. 물 한 그릇을 제 손으로 떠다 주었다. 오른손으로."…나리. 나리도 북에 가십니까.""간다. 왕야가 가시면.""그럼 저도 같이. 길은 제가 압니다.""길은 나도 안다. 근데 너는 자라. 사흘 달렸으면."파발이 물그릇을 든 채 벽에 기댔다. 기대자마자 잤다.*심각의 서신이 그 뒤에 왔다.월령의 오라비. 북문군에서 부장으로. 글씨가 급했다. 급한 글씨로 전황을 적었다. 흑령 본대의 위치, 초소가 무너진 날, 그리고 물표.월령이 그 물표 번호를 보았다. 소매에서 낡은 물표를 꺼냈다. 명부지기의 것. 삭원 염로.번호가 같았다."…같아요.""뭐가.""군량이 새는 물표하고, 명부지기가 쥐고 죽은 물표요. 같은 번호예요. 발행처가 같은 손이에요."위지헌이 두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낡았고 하나는 새것이었다. 같은 번호가 두 번 찍혀 있었다.*편전에서 경화제가 그것을 들었다.병상이 아니었다. 아직은. 그러나 기침을 한 번 했다. 고 내관이 그 기침을 세었다."…출정이다."경화제가 말했다."지헌아. 네가 간다. 북경군 본대로.""예."경화제가 섭정왕비를 함께 들라 한 자리였다."도성은."위지헌이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못했다. 도성에 봄이 있었다. 봉쇄된 자녕궁에 설련이 있었다. 그 자녕궁에 숙비가 있었다. 그가 도성을 비우면, 담 밖에 세운 군도 함께 빈다."…도성은, 신첩이 있사옵니다."월령이 말했다. 편전에서. 낮게, 그러나 다 맺어서.경화제가 그녀를 보았다. 옥필을 굴리지 않았다."섭정왕비가.""예. 폐하께서 뒤에 계시옵고, 황후마마가 곁에 계시옵니다. 신첩은 담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2. 담

    봉쇄된 담에는 소리가 없었다.초비가 지붕에서 그 담을 보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묵아가 저녁부터 새벽까지. 궁인 셋이 드나들었다. 물을 긷고, 땔감을 들이고. 설련은 봉쇄 뒤로 이틀째 안 보였다. 창가에 서지 않았다. 휘장이 내려진 채였다."…아무것도요."초비가 왕부에 그것을 전했다. 장작을 패다 온 손이었다. 손등 흉터에 나무 부스러기가 앉아 있었다."궁인 셋은요, 얼굴이 다 같아요. 다 같이 아무것도 안 봐요. 물 긷고, 들어가고. 휘장은 그대로고. 그게 다예요."월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비는 본 것만 말하는 아이였다. 안 본 것을 말하지 않았다.*저녁에, 월령이 그 담 앞에 갔다.가마 없이. 청아도 없이. 봄은 방어멈에게. 담 밖에 서 있던 자리. 설련이 서 있던 자리. 거기 섰다.담이 높았다. 안이 안 보였다. 안에서도 밖이 안 보일 터였다. 그런데 설련은 이 담 앞에 하루를 서 있었다. 안 보이는 담을 보면서.월령은 그 아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을.*독고진겸이 왔다.옆에 섰다. 한 걸음 떨어져서. 늙은 사내가 담을 보았다. 딸이 서 있던 자리에 딸이 아닌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뒤에, 그가 말했다."…그 아이가 여섯 살에 열쇠를 삼키려 했소. 셈방에 들어가기 싫다고. 그 얘기는 했지.""예.""안 한 얘기가 있소. 그때 그 열쇠를 뺏은 게 누이요. 누이가 궁에서 나와 상단에 들른 날이었소. 그 아이 입에 손가락을 넣어서 열쇠를 꺼냈어. 그러고는 아이를 안고 자녕궁으로 데려갔지. 그 뒤로 그 아이는 찻상 뒤에서 컸고. 나는 못 했소. 나는 셈방에 있었으니까."월령이 그를 보았다."…그러니 그 아이한테 그 방은, 무서운 방이면서 숨는 방이오. 둘 다요. 나는 그걸 아오. 알면서도 그 방에 두고 온 왕비를 못 봐주겠고. 그런데 그 아이가 제 발로 남은 것도… 알겠고."독고진겸이 담에 손을 짚었다. 셈을 매기던 손."부녀가 아니오, 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1. 황명

    "…이번엔 불윤이 아니오."배중곤이 말했다. 종친부 앞마당에서, 원로들 사이에 앉아. 목소리가 전 같지 않았다."곤원전에서 사람이 죽었소. 곤원전 궁녀 손에. 그 궁녀가 자녕궁 담을 두드리다 잡혔고. …이건, 이건 우리 종친부가 상소 쓰고 말고 할 일이 아니오."원로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중곤의 발이 옮겨 갔다. 반 발이 아니라 한 발. 이긴 쪽으로."…그런데 배 대감. 자녕궁이 상소를 낼 때는 대감이 의를 맡으셨는데."젊은 원로 하나가 말했다. 배중곤이 그를 보았다."그때는 병이 돈다기에. 늙은이가 소문에 속았다고 이미 말했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시오."젊은 원로가 입을 다물었다. 배중곤은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이긴 쪽으로 옮긴 발이 늘 이렇게 남의 눈에 밟혔다.*편전에 경화제가 앉아 있었다.옥필을 굴리지 않았다. 앞에 놓인 것은 셋이었다. 봄의 저고리에서 나온 붉은 실 둘. 청릉 장부와 삼황자부 궤 목록. 그리고 곤원전 뒤채에서 죽은 여인의 이름.황후가 그 곁에 앉아 있었다. 밤옷이 아니라 정장으로. 오래 이 자리에 앉지 않던 사람이었다."…내 처소요, 폐하."황후가 말했다."내 처소에서, 내 궁녀 손으로. 대황자 때 폐하께서 보류하셨지요. 그때 나는 아무 말도 안 했고. 이번엔 합니다."경화제가 아내를 보았다. 잠자코 보았다. 그러고는 고 내관을 불렀다.*황명은 셋이었다.자녕궁 봉쇄. 문을 닫고, 궁인 셋 외에 드나드는 자 없이. 숙비는 '병중 요양'. 병이 나을 때까지. 나을 날은 적지 않았다.삼황자 위명서, 북영 종군 정식 임명. 황명으로.곤원전 궁녀·오상궁 참, 사후 재가."…자녕태후."경화제가 낮게 말했다. 고 내관이 붓을 멈췄다."그 말이 종친부에서 나오거든, 짐이 아직 살아 있다고 전해라."*위명서가 편전에 들었다.북영에서 한 시진. 흙먼지 그대로. 매화 소맷단에 붉은 것이 마르지 않은 채 있었다. 북영에서 내보낸 척후가 북문로 북쪽 끝, 회암역 너머에서 흑령 척후와 부딪쳤다. 그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400. 베다

    궁녀는 새벽에 잡혔다.자녕궁 담 밖 회랑 뒤 협도였다. 초비가 지붕에서 보았고, 묵아가 실을 던졌고, 기윤이 내려섰다. 젊은 궁녀는 담 안으로 들지 못했다. 담 안에서 문이 안 열렸다. 숙비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마마. 마마, 제가—"궁녀가 담을 두드렸다. 담 안은 조용했다. 낮은 발소리조차 없었다.기윤이 그 허리띠를 잡았다. 뒷덜미가 아니라 허리띠. 궁녀가 담을 보며 끌려갔다. 담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곤원전에서 온 기별이 왕부에 닿은 것은 그보다 먼저였다.월령이 그것을 새벽에 들었다. 새벽 젖을 물리고 봄을 다시 재우던 때. 늙은 상궁의 글씨. 명부지기가 죽었다. 차를 마시고. 곤원전 궁녀 손으로.월령은 그 글을 두 번 읽었다. 두 번째에도 같은 글자였다.첫 장 이야기는 없었다. 하나씩, 천천히 듣기로 한 답이 없었다. 늙은 여인이 팔 것이 없어져서 그냥 주려던 답이, 잔 하나에 없어졌다.위지헌이 그 글을 받아 들었다. 읽었다. 그러고는 옥대를 맸다. 풀었던 것을."…형님께 간다.""저도요.""너는 봄 곁에.""아니요. 저도 가요. 그 여인이 저한테 주려던 걸 누가 가져갔는지, 제가 봐야 해요."*새벽에 자녕궁으로 보낸 기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문이 안에서 안 열렸다고. 설련이 제 손으로 안 연 문이었다.편전에 경화제가 없었다.병상이 아니라, 아직은 새벽이라. 위지헌은 기다리지 않았다. 월령이 소매의 종이를 고 내관에게 건넸다. 붉은 실 둘. 위지헌이 고 내관에게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곤원전 궁녀 하나와, 옥의 오상궁. 오늘 참한다. 형님께는 그리 아뢰어라.""…전하. 황명이 아직.""황후전에서 사람을 독살한 손이다. 황자 생모 손발이든 뭐든, 그건 대역이다. 황명은 뒤에 받는다."고 내관이 옥필을 들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였다. 깊이.*형장은 궁 밖 남쪽이었다.월령이 그 자리에 섰다. 위지헌의 반 걸음 뒤. 청아가 그 곁에. 봄은 방어멈에게.오상궁이 먼저 끌려 나왔다. 옥에서 달포. 향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1. 종이

    조서는 얇았다.얇은 종이가 사람을 가장 깊게 베는 날이 있다.심가 대문에 걸린 등불은 밤새 꺼지지 않았다. 내관이 돌아간 뒤에도 하인들은 감히 소리를 높이지 못했고, 부엌의 솥뚜껑은 평소보다 조용히 닫혔다. 종이 한 장이 집 안의 숨을 바꾸었다. 누가 지나가도 발끝이 먼저 조심스러워졌고, 아이들은 웃다가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월령은 조서를 다시 펼쳤다.궁중 내지 유출.호부 군량 장부 조작.심가 여식.그 말은 일부러 넓었다.월령일 수도 있고, 서윤일 수도 있었다.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었다. 넓은 말은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20. 등불

    자녕궁에 가는 날, 경성의 거리에는 낮부터 등틀이 세워지고 있었다.상원절은 이미 지났지만, 대연의 봄에는 작은 등놀이가 자주 열렸다. 남쪽 수해지에서 올라온 장인들이 생계를 잇기 위해 종이등을 만들었고, 궁은 그것을 사들여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양을 갖췄다. 거리의 아이들은 등불을 좋아했고, 어른들은 쌀값을 생각하며 그 빛을 보았다.빛은 늘 아름다웠다.그러나 빛을 밝히는 기름값은 누군가의 장부에 적혔다.마차 안에서 서윤은 말이 없었다.오늘의 서윤은 옅은 연두빛 치마를 입었다. 한씨가 골라 준 옷이었다. 너무 화려하지 않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9. 이름

    허도겸은 약속한 시각보다 이른 때에 왔다.아침 안개가 아직 대문 밖 버드나무 잎에 걸려 있을 때였다. 심가의 하인들은 물을 뿌린 마당을 쓸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찹쌀을 씻는 소리가 낮게 났다. 심 부인의 약을 달이는 냄새가 서원당 쪽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집은 깨어나고 있었으나, 아직 하루의 얼굴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다.그 틈에 온 사람은 늘 급한 일을 품고 있다.허도겸은 정청이 아니라 서고 앞 작은 툇마루에서 월령을 보겠다고 했다. 둘째 숙부는 불쾌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으나, 호부 낭중의 말은 예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나를 죽인 황제에게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18. 장부

    아이의 이름은 은호였다.은매가 처음 그 이름을 부를 때, 목소리는 거의 소리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은호야. 그 두 글자가 입술 밖으로 나오자마자 은매는 다시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으나, 울지는 않았다. 동생이 깰까 봐 참는 울음이었다.은호는 작았다.일곱 살이라 들었지만, 마른 몸은 그보다 더 어려 보였다. 손목에는 회색 실이 묶여 있던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기침을 참을 때마다 혀끝으로 이를 쳤다. 딱, 딱. 작은 소리는 방 안 사람들의 숨을 매번 붙잡았다.왕부 의원은 은호의 맥을 짚고 오래 말이 없었다.청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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