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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해드립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22 챕터

11. 좁혀진 거리

문을 닫는 소리가 카페 안에 잠시 남았다.손님이 나간 뒤의 소리였다.그 소리는 언제나 비슷했고, 그래서 특별하지 않았다.특별하지 않은 소리들이 쌓일수록, 하루는 빨리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다.이수는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이미 깨끗한 테이블이었지만, 한 번 더 닦았다.손을 움직이고 있으면 생각이 덜 생겼다.생각이 줄어들면, 결정도 늦춰진다.진상은 계산대 아래를 정리하다가 시계를 봤다.시간을 확인하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이미 몇 번이나 본 시계였다.“오늘은.”그가 말을 꺼냈다.어제와 비슷한 시작이었다.그러나 어제와는 조금 달랐다.“조금 일찍 끝내도 되겠죠.”질문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확인이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일을 마친다는 건, 그 다음이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했다.카페 안의 불을 하나씩 끄자, 공간이 조금 좁아진 느낌이 들었다.밝을 때는 넓어 보이던 곳이, 어둠 속에서는 금세 사람을 가까이 불러왔다.이수는 마지막으로 커피 머신을 확인하고, 전원을 껐다.기계가 멈추는 소리가 짧게 났다가 사라졌다.“밖에서 기다릴게요.”진상이 말했다. 이수는 그 말을 붙잡지 않았다.붙잡지 않아도, 이미 함께 나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문을 나섰을 때, 공기는 낮보다 차가웠다.완전히 어둡지도, 완전히 밝지도 않은 시간이었다.사람들이 퇴근하고, 아직 집에 도착하지는 않은 시간.거리에는 목적지가 비슷한 얼굴들이 지나가고 있었다.“많이 춥지는 않죠.”그가 물었다.“괜찮아요.”이수는 외투의 단추를 잠그며 답했다.괜찮다는 말은 오늘 들어도, 어제 들어도 같은 온도로 나왔다.둘은 잠시 나란히 걸었다.보폭을 맞추려는 노력은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속도가 비슷해졌다.사람은 말을 하지 않을 때, 걸음으로 상대를 판단한다.“근처에.”진상이 말했다.“가볍게 한 잔 할 수 있는 데가 있어요.”가볍게라는 말이 붙었다.부담을 줄이기 위한 말이었다.그러나 부담을 줄인다는 건, 가능성을 남긴다는 뜻이기도 했다.이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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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덫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눈을 떴고, 세수를 했고, 준비를 했다.전날의 술자리는 기억 속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기억은 있었지만, 의미는 아직 붙지 않은 상태였다.이수는 머리를 말리며 거울을 보았다.화장을 바꾸지는 않았다.어제의 얼굴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어제는 어제였고, 오늘은 오늘이었다.카페에 도착했을 때,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진상은 안에 있었다.카운터 뒤에서 컵을 정리하고 있었고, 동작은 평소와 같았다.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하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다.“안녕하세요.”이수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어,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그가 말했다. 말끝이 조금 길어졌다.평소라면 굳이 붙이지 않았을 말이었다.“네.”이수는 짧게 대답했다.어제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꺼내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적어도 표면에서는.앞치마를 두르고, 손을 씻었다.차가운 물이 손끝을 스쳤고, 그 감각이 오래 남지는 않았다.이수는 굳이 손을 오래 씻지 않았다.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카페는 오전 내내 조용했다.손님은 있었지만, 많지 않았다.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컵이 내려앉는 소리,테이블을 닦는 소리들이 하루를 채웠다.진상은 자꾸 이수를 보았다.대놓고는 아니었고, 시선을 붙잡지도 않았다.그러나 자주, 그리고 이유 없이.“오늘은.”그가 말했다가, 말을 멈췄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기다리지도 않았다.그가 말을 고를 시간을 주었다.“아니에요.”그가 웃으며 말을 바꿨다.“그냥… 손님이 없어서요.”그 말은 필요 없었다.필요 없는 말은, 하고 싶어서 나오는 법이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짧게, 습관처럼. 그 반응이 그를 더 편하게 만들었다.점심 무렵, 그는 커피를 하나 더 내려 마셨다.평소보다 진했다.쓴맛이 강하면, 정신이 또렷해진다고 믿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이수 씨는.”그가 갑자기 물었다.“쉬는 날엔 뭐 해요?”일상적인 질문이었다.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그냥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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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유혹

이수는 그날 조금 늦게 카페에 도착했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서두르지도 않았다.지각은 아니었고, 그래서 변명도 필요 없었다.문을 열자, 종이 한 번 울렸다.익숙한 소리였다.이제는 그 소리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진상은 계산대에 서 있었다.컵을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이수가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한 타이밍이었다.“오늘은 조금 늦었네요.”그가 말했다.어제와 같은 문장이었지만, 톤은 달랐다. 확인이 아니라, 관심에 가까웠다.“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수업이 있어서요.”미용을 배우는 중이라는 설정은 이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단계였다.사람은 반복해서 들은 정보를 자기 기준에 맞게 정리한다.“아, 그렇구나.”그는 짧게 답했다.그러나 그 짧은 말 뒤에 한 박자 정도의 여운이 붙어 있었다.아쉽다는 감정이 말보다 먼저 나오는 방식이었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두르며 손을 씻었다.물소리가 잠시 공간을 채웠고, 그 사이에 카페 안의 공기가 가라앉았다.오늘은 유난히 조용했다.손님도 적었고, 음악도 낮았다.조용한 날은 사람의 말이 더 크게 들린다.“미용 배우는 건 어때요?”진상이 물었다.질문은 일상적이었지만, 이제는 일상 안으로 들어가려는 질문이었다.그녀의 하루를 알고 싶다는 뜻이기도 했다.“아직은요.”이수는 컵을 닦으며 말했다.“생각보다 어렵고.”그녀는 거기까지만 말했다.어려움 뒤에 감정을 붙이지 않았다.“그래도.”그가 말을 받았다.“잘 어울려요.”그 말은 칭찬이었지만, 근거는 없었다.근거 없는 칭찬은 보통 느낌에서 나온다.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점심 무렵,햇빛이 카페 안으로 깊이 들어왔다.테이블 위에 그림자가 생겼고, 그 그림자는 시간에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진상은 커피를 내리다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오늘은.”그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끝나고… 시간 괜찮아요?”이수는 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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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함정

카페는 평소보다 이르게 한산해졌다.점심을 넘긴 뒤부터 손님이 뜸해졌고,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줄어들었다.날이 그런 날이었다. 특별히 이유는 없지만, 가만히 있으면 더 가만히 있고 싶어지는 날.이수는 테이블을 정리하며 계산대를 한 번 바라봤다.최진상은 머신 옆에 서서 원두 통을 닦고 있었다.이미 닦아둔 통이었다.굳이 다시 닦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오늘.”이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그의 손이 잠깐 멈췄다.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다렸다는 반응이었다.“손님도 없고.”이수는 말을 이어갔다.“조금 일찍 닫아도 되지 않을까요.”질문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제안이었다.그리고 제안은 이미 계산된 말이었다.진상은 시계를 봤다.아직 닫기엔 이른 시간이었고, 그래서 더 망설이는 표정이었다.“괜찮을까요?”그가 물었다.허락을 구하는 말이었지만, 이미 마음은 기울어 있었다.“가끔은요.”이수는 가볍게 웃었다.“바람 좀 쐬는 것도 좋잖아요.”바람. 그 단어는 카페 밖을 의미했고, 일이 아닌 시간을 의미했다.최진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늘은 일찍 닫죠.”결정은 그가 한 것처럼 보였다.이수는 그 점이 중요했다.간판의 불을 끄고, 문에 ‘영업 종료’ 팻말을 걸었다.낮인데도 문을 닫는다는 건 조금 과한 선택처럼 보였고, 그래서 더 특별했다.밖으로 나오자 공기가 달랐다.카페 안과는 다른 냄새, 다른 소리.“차는…”그가 말을 꺼냈다.“제가 가져왔어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차 안은 조용했다.라디오는 켜지지 않았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엔진 소리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어디로 갈까요?”진상이 물었다.“아무 데나요.”이수가 말했다.“조용한 쪽으로.”조용하다는 말은 이제 둘 사이에서 여러 의미를 가졌다.차는 도심을 벗어나 조금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바다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람은 더 넓게 불어왔다.차를 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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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정리

집 안은 조용했다.조용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만드는 정적이었다.이수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도 한동안 서 있었다.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아직 밖에 머무는 것 사이에 짧은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불을 켰다.거실의 등이 켜지면서 공간이 또렷해졌다.사물들이 제자리를 찾았고, 그제야 집이 집처럼 보였다.하빈은 안쪽 방에서 나와 있었다.셔츠 소매를 걷은 채, 테이블 위에 펼쳐진 서류를 보고 있었다.이수는 그 풍경을 잠시 바라봤다.늘 같은 모습이었고, 그래서 오늘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왔어?”그가 물었다.고개를 들지 않은 채였다.“응.”이수는 짧게 답하며 가방을 내려놓았다.그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평소보다 조금 크게 느껴졌다.잠시 침묵이 흘렀다.하빈은 묻지 않았고, 이수도 말하지 않았다.서로가 그 침묵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이수는 가방을 열었다.안쪽에서 휴대폰 하나와 작은 봉투를 꺼냈다.봉투는 두껍지 않았다.그러나 가벼워 보이지도 않았다.그녀는 테이블 위에 봉투를 내려놓았다.서류들 옆, 이미 일이 놓여 있는 자리 위였다.하빈의 손이 멈췄다.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봉투를 한 번 보고, 이수를 한 번 봤다.표정은 변하지 않았다.변하지 않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이거면.”그가 낮게 말했다.“충분해.”충분하다는 말은 확인에 가까웠다.질문도, 감탄도 아니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설명하지 않았다.설명은 이 봉투 안에 이미 다 들어 있었다.하빈은 봉투를 열어 안쪽을 확인했다.사진, 기록, 메시지 캡처. 하나씩 넘기는 손길이 느렸다.꼼꼼해서라기보다는 불필요한 감정을 섞지 않기 위해서였다.“시간도.”그가 말했다.“딱 좋아.”그 말에는 어떤 만족도 섞여 있지 않았다.그저 정리 가능한 상태라는 판단뿐이었다.이수는 의자에 앉았다.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숨을 한 번 고르듯 내쉬었다.긴 숨은 아니었다.끝났다는 표시 정도였다.“카페는.”하빈이 물었다.“정리돼?”“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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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이름

법원 앞은 생각보다 조용했다.소란스러울 거라 예상했던 마음과 달리,건물은 무심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드나들 뿐이었다.이수는 계단 아래에서 잠시 멈춰 섰다.이곳에 서 있는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다르게 느껴졌다.하빈이 몇 걸음 앞에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그의 손에는 두툼하지 않은 파일 하나가 들려 있었다.무게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 들어 있는 결정들이었다.“곧 끝나.”그가 말했다. 확신에 찬 말투였다.위로도 격려도 아니었다. 사실 전달에 가까웠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괜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이 호흡이 이 일의 마지막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 같았다.안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공기가 감돌았다.대기실의 의자는 딱딱했고, 벽에 걸린 시계는 초침 소리를 숨기지 않았다.시간은 이곳에서 유난히 솔직했다.잠시 뒤, 문이 열리고 이름이 불렸다.최진상이라는 이름. 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 이름은 이제 그녀가 직접 마주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진상은 혼자 들어왔다.누군가와 함께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미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그의 어깨는 전보다 조금 내려가 있었고, 걸음은 일정하지 않았다.재판은 길지 않았다.사실 확인, 자료 확인, 그리고 판사의 짧은 정리.“혼인 관계는 이미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됩니다.”그 문장은 감정 없이 읽혔지만, 그래서 더 확정적이었다.진상은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말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은 이미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결정은 내려졌고, 서류는 정리되었다.이혼 성립. 그 단어는 생각보다 가볍게 공기 중에 놓였다.밖으로 나왔을 때, 햇빛이 생각보다 강했다.이수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법원 안의 공기와 밖의 공기가 너무 달라 현실감이 조금 늦게 왔다.하빈은 계단을 내려오며 파일을 가방 안에 넣었다.이제 그 서류는 그의 일이 아니었다.“끝났어.”그가 말했다.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끝났다는 말은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한 말이었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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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척

초인종은 한 번만 울렸다.길게 누르지 않은 소리였다.조심하는 사람이 내는 방식.이수는 소파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초인종이 울렸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확인할 시간을 조금 남겼다.다시 울리지 않았다.그 점이 더 신경 쓰였다.급한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이수는 현관으로 걸어갔다.걸음은 느렸고, 문고리에 손을 얹기 전 잠시 멈췄다.문 하나 사이의 거리에서 사람의 태도는 대부분 드러난다.문을 열자 여자가 서 있었다.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고, 옷차림은 지나치게 단정했다.단정함이 몸에 익은 사람처럼 머리는 묶여 있었고,손에는 작은 가방 하나만 들려 있었다.“서이수 씨 맞죠?”여자는 먼저 이름을 불렀다.호칭이 정확했다.확신이 섞인 발음이었다.“네. 맞아요.”이수는 문을 더 열지 않았다.여자도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둘 사이의 거리는 딱 한 발 정도였다.“잠깐.”여자가 말했다.“시간 괜찮으시면.”부탁처럼 들렸지만, 이미 거절을 예상한 말투였다.거절을 예상하는 사람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문을 조금 더 열고 몸을 옆으로 비켰다.초대라기보다는 통과 허락에 가까운 동작이었다.여자는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정렬해서 놓았다.그 작은 행동이 성격을 설명했다.거실에 앉자 여자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열지 않았다. 말부터 꺼낼 생각이었다.“소개는.”여자가 말했다.“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그 말은 이미 이수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이수는 묻지 않았다.이제는 묻지 않는 편이 더 정확할 때가 많았다.“제 얘기를.”여자가 말을 이었다.“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이수는 물을 한 잔 따랐다.여자 앞에 놓고, 자기 앞에도 하나 놓았다.말을 시작하기 전에 손이 할 일을 만들어주는 습관.“처음부터요.”이수는 말했다.“보통은.”여자는 잠시 물컵을 바라봤다.손은 컵을 잡지 않았다.잡지 않는다는 건 아직 자신을 내놓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저는.”여자가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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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균열

은하의 하루는 늘 같은 순서로 흘러갔다.아침에 일어나고, 남편의 셔츠를 다리고, 식탁을 정리하고, 문 앞에서 인사를 건넸다.그 인사는 언제나 짧았고, 남편은 늘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그날도 다르지 않았다.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그래서 은하는 오히려 불안했다.집 안이 조용해지자 은하는 소파에 앉았다.TV를 켜지 않았고, 라디오도 틀지 않았다.소음이 있으면 생각이 흐려질까 봐서였다.어제 이수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지금은 아직 버티고 있잖아요.버티고 있다는 말은 위로처럼 들리면서도 책임처럼 남았다.그 말 이후로 은하는 스스로에게 자꾸 질문하게 됐다.‘나는 정말 버티고 있는 걸까.‘아니면 그냥 멈춰 있는 걸까.’부엌으로 가 컵을 하나 꺼냈다.물을 따르다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컵 가장자리에서 물방울이 넘쳤다.은하는 급히 닦았지만, 바닥에 남은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그 자국을 보며 은하는 잠시 멈췄다.아주 작은 흔적이었지만,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점심 무렵, 은하는 외출 준비를 했다.특별한 약속은 없었다.그러나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생각이 더 깊어질 것 같았다.밖으로 나가는 선택은 도망이 아니라 유예에 가까웠다.동네 마트에 들러 필요 없는 물건을 몇 개 샀다.사야 할 목록은 이미 끝났지만, 계산대에 서는 순간이 오늘의 목적 같았다.카드 결제 소리가 났고, 영수증이 나왔다.은하는 그 영수증을 바로 버리지 못했다.손에 쥔 채 잠시 서 있었다.이상하게도 그 작은 종이가 자기 하루의 증거처럼 느껴졌다.집으로 돌아와 봉투를 정리하다가 서랍 하나를 열었다.평소엔 잘 열지 않는 서랍이었다.그 안에는 남편의 물건들이 섞여 있었다.오래된 명함, 잊힌 충전기, 쓰지 않는 휴대폰 하나.은하의 손이 그 휴대폰 위에서 멈췄다.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충전기를 연결하자 잠시 후 화면이 켜졌다.잠금은 없었다.남편은 집 안에서만큼은 경계를 풀어두는 사람이었다.은하는 메시지함을 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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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확인

은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방향을 틀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돌아갈 수 없는 방향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발걸음이 조금 빨라졌고, 숨은 짧아졌다.휴대폰을 꺼내 사진 속 카페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지도 앱을 켜지 않았다.이미 두 번이나 본 길이었다.확인은 필요했지만, 의존하고 싶지는 않았다.카페 앞에 섰을 때, 은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유리 너머로 내부를 훑었다.익숙한 냄새가 상상처럼 떠올랐다.남편이 좋아한다고 말하던 종류의 커피.그 말이 이제는 설명처럼 들렸다.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들어가는 것과 돌아서는 것 사이의 거리.그 거리는 생각보다 짧았다.은하는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에서 바리스타가 고개를 들었다.낯선 얼굴이었다.그 사실이 이상하게 안심을 줬다.“주문하시겠어요?”바리스타가 물었다.“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이요.”은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어제 사진 속 각도와 비슷한 자리였다.의자를 밀어 넣는 소리가 조금 크게 들렸다.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대신 주변을 봤다.카운터, 테이블 간격, 벽에 걸린 시계.시간을 숨길 수 없는 배치였다.커피가 나왔음을 알리는 벨이 울렸고. 은하는 커피를 가지고 왔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컵에 김이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걸 그저 바라볼 뿐 그리고,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휴대폰을 꺼냈다.사진을 다시 열었다. 각도를 비교했다.유리창의 반사, 벽의 질감, 시계 위치. 틀리지 않았다.확인은 이렇게 끝났다.확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밖으로 나왔을 때, 바람이 불었다.은하은 잠시 눈을 감았다.눈을 감아도 이미 본 장면은 지워지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은하는 중간에 멈춰 약국에 들어갔다.목적은 없었다.그냥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계산대 앞에서 손이 멈췄다.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왔다.그 행동이 지금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확인은 했지만, 아직 선택하지 않은 상태.집에 도착했을 때, 해는 아직 높았다.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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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다시

이수는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틀었다.물이 흘러나오는 소리는 일정했고, 그 일정함이 마음을 가라앉혔다.손을 씻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비누 거품이 생겼다가 금방 사라졌다.깨끗해졌다는 감각보다는 정리됐다는 느낌이 더 가까웠다.거울을 올려다봤다.낯선 얼굴은 아니었지만, 늘 같은 얼굴도 아니었다.사람은 일 하나를 끝낼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그 변화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휴대폰이 울렸다. 은하가 아니었다.그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수는 화면을 바로 확인했다.-상담 가능할까요.짧은 문장이었다.시간도, 이유도 없었다.그러나 이수는 이 문장이 어떤 종류의 문장인지금방 알 수 있었다.가능하다는 질문은 이미 불가능한 상태라는 뜻이다.이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답을 미루는 건 상대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다.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며칠 전과는 다른 공기였다.계절이 바뀌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의 체감은 사건 하나만으로도 바뀐다.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은하가 두고 간 것도 없고, 이수가 정리해둔 것도 없었다.그래서 이수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일을 시작하기 전의 자세였다.하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수는 받았다.“끝났지.”하빈이 말했다.질문이 아니라 확인처럼 들렸다.“응.”이수는 짧게 답했다.“이번 건.”하빈이 잠시 말을 멈췄다.“좀 달랐어.”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다르다는 말에는 항상 설명이 따라오지만, 지금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그래도.”하빈이 말을 이었다.“정확했어.”정확하다는 말은 잘했다는 말보다 이수에게 더 중요한 말이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이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아까 온 메시지 창을 열었다.그리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언제 괜찮으세요.보내고 나자 숨이 조금 깊어졌다.이 문장을 보내는 순간부터 다음 일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이수는 생각했다.은하는 떠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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