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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덫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9 15:44:30

아침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눈을 떴고, 세수를 했고, 준비를 했다.

전날의 술자리는 기억 속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기억은 있었지만, 의미는 아직 붙지 않은 상태였다.

이수는 머리를 말리며 거울을 보았다.

화장을 바꾸지는 않았다.

어제의 얼굴을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어제는 어제였고, 오늘은 오늘이었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진상은 안에 있었다.

카운터 뒤에서 컵을 정리하고 있었고, 동작은 평소와 같았다.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하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수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그가 말했다. 말끝이 조금 길어졌다.

평소라면 굳이 붙이지 않았을 말이었다.

“네.”

이수는 짧게 대답했다.

어제의 일을 꺼내지 않았다.

꺼내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적어도 표면에서는.

앞치마를 두르고, 손을 씻었다.

차가운 물이 손끝을 스쳤고, 그 감각이 오래 남지는 않았다.

이수는 굳이 손을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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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륜해드립니다.   28. 선긋기

    “이혼이라는 말이요.”여자가 그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 이수는 컵에 물을 따르고 있었다.물이 넘치지 않도록, 정확히 선에서 멈췄다.넘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선명했다.이 단어는 넘쳐야 하는 말이었다.여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오늘도 머리는 하지 않았다.이제는 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였다.이 미용실은 머리를 핑계로 들어오는 곳이었고,나갈 때는 언제나 다른 이유를 안고 나가게 되는 곳이었다.“집에서요.”여자가 말을 이었다.“어제는… 갑자기 그 말을 하게 됐어요.”이수는 컵을 내려놓고, 여자를 바라봤다.이번에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아닌 이수는 여자를 직접 바라보았다..이 단어는 직접 받아야 했다.“어떻게요.”“그냥…”여자는 잠시 말을 멈췄다.이제 와서 단어를 되돌리고 싶은 사람의 숨이었다.“갑자기 입에서 나왔어요. 저도 모르게.”이혼이라는 말은 준비해서 나오는 게 아니다.쌓여 있던 문장들이 한꺼번에 무너질 때, 그 자리에 가장 짧은 말 하나가 남는다.이수는 그걸 알고 있었다.“그 사람은,”이수가 물었다.“뭐라고 했나요.”여자는 고개를 저었다.“아무 말도 안 했어요. 처음에는… 웃더니, 그 다음엔 제 핸드폰을 봤어요.”이수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낮아졌다.핸드폰을 본다는 건, 말이 아니라 증거를 찾겠다는 뜻이다.“그냥… 괜히 그런 말 하지 말라고.”여자가 덧붙였다.“요즘 예민해서 그렇다고.”예민하다는 말은 상대를 상황으로 만들기 가장 쉬운 단어다.이수는 그 단어를 마음속에서 선으로 그었다.“그래서,”이수가 조용히 말했다.“그 말은 없던 일이 됐나요.”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대답하지 못한다는 건 이미 없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그런데요.”여자가 고개를 들었다.“집에 돌아와서… 그 말이 계속 남아 있었어요.제가 잘못 말한 건지, 아니면… 이제 와서 말한 게 늦은 건지.”이수는 잠시 침묵했다.이 침묵은 기다림이 아니라, 선을 긋는 시간이었다.“그 말,”이수가 말

  • 불륜해드립니다.   27. 남겨진 자리

    “어제는… 그냥 잠들었어요.”여자의 말은 그렇게 시작됐다.설명도, 변명도 붙지 않은 문장이었다.이수는 계산대 위에 놓인 예약장을 넘기다 말고 손을 멈췄다.잠들었다는 말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그날을 넘겼다는 의미에 더 가깝다.여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머리를 하러 온 자세가 아니었고, 어제처럼 잠깐 숨을 고르러 온 얼굴도 아니었다.오늘의 얼굴에는 결과를 보고 온 사람 특유의 표정이 있었다.“말 안 했어요.”여자가 덧붙였다.“아무 말도. 묻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에 물을 따랐다.컵이 채워지는 동안, 여자의 말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계산했다.사람은 말을 꺼낼 때, 이미 절반쯤은 결론에 와 있다.“그 사람은요.”여자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처음엔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자기 전에 갑자기 물어보더라고요.”“뭐라고요.”“요즘 왜 이렇게 조용하냐고.”여자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그 말이… 이상했어요. 마치 제가 조용해진 게 문제인 것처럼.”이수는 컵을 여자의 앞에 놓았다.말없이. 침묵이 끼어드는 타이밍은 늘 이수가 먼저 결정했다.“그래서요.”“그래서…”여자가 말을 멈췄다. 이번에는 망설임이 아니었다.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스스로 선을 긋는 시간이었다.“제가 아무 말도 안 했거든요. 그랬더니… 침대 옆에 앉아서, 한참을 가만히 있더라고요.”침대 옆에 앉아 가만히 있는 사람.그건 화도, 다정함도 아닌 상태다. 기다림에 가깝다.“기다렸군요.”이수가 말했다.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뭐라고 말해주길.”이수는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오늘은 빗도, 가위도 들지 않았다.이건 머리의 문제가 아니었다.“그 사람은,”이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당신이 조용해진 이유를 알고 싶은 게 아니에요.”여자의 눈이 이수에게로 향했다.“그럼요?”“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여자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눈을 내렸다.그 표정에는

  • 불륜해드립니다.   26. 입 밖에 낸 말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여자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수는 가위를 들고 있었다.머리카락 위에서 멈춘 가위는 아직 닫히지도, 열리지도 않은 상태였다.결정은 늘 그렇게 애매한 지점에서 멈춘다.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답을 하지 않는 대신, 가위를 내려놓고 빗을 들었다.말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선택이었다.여자는 그 침묵이 거절이 아니라는 걸 이상하게도 바로 알아차린 얼굴이었다.“오늘은… 머리 안 해도 돼요.”여자가 말했다.“그냥… 여기 잠깐 앉아 있다가 가고 싶어서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의자를 가리키지도, 계산대를 보지도 않았다.이곳에서는 머리가 이유가 되고, 이유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그걸 모르는 사람은 이 문을 넘지 않는다.여자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대신 거울 앞에 서서 자기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벽 쪽에 놓인 작은 소파에 몸을 기대듯 앉았다.머리를 맡기러 온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다.집에 돌아가기 전, 잠깐 숨을 고르러 온 사람의 자세였다.“어제는요.”여자가 낮게 말을 꺼냈다.“집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어요.”이수는 수건을 개다 말고, 손을 멈췄다.문이 닫히는 소리는 늘 같지만, 어떤 날에는 유난히 크게 들린다.그건 소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그래서,”여자가 말을 이었다.“신발도 안 벗고 그냥 서 있었어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할 때까지.”이수는 천천히 수건을 접어 제자리에 놓았다.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현관, 켜진 불, 벗지 않은 신발,그리고 말이 나오길 기다리는 시간.“뭐라고 했나요.”“아무 말도 안 했어요.”여자는 짧게 웃었다.“그게 더 이상하더라고요. 예전 같았으면, 왜 이렇게 늦었냐고, 어디 갔었냐고…뭐라도 했을 텐데.”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대개는 이미 알고 있다고 믿을 때 나온다.이수는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지금은 여자가 스스로 그 지점에 닿아야 했다.“그래서 그냥 방으로 들어

  • 불륜해드립니다.   25. 익숙해지는 속도

    장미 미용실의 오후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수는 미묘한 차이를 느끼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횟수도,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비슷했는데, 공간 안에 남아 있는 공기의 밀도가 달랐다. 사람 하나가 다녀간 뒤에는 늘 그런 잔향이 남는다. 말이 많지 않았을수록, 그 잔향은 더 오래 머문다.이수는 빗을 정리하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어제의 여자가 떠올랐다. 집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다고 말하던 얼굴, 그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오래 남았다. 사람은 보통 집 밖에서만 연기를 한다. 집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다는 건, 이미 집 안에서도 연기를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문이 열렸다.이번엔 종이 울렸다. 어제보다 조금 더 힘이 들어간 소리였다. 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고도 알았다. 같은 사람이었다. 발걸음이 기억보다 반 박자쯤 빨라져 있었다. 익숙해지는 속도는 늘 발에서 먼저 드러난다.여자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자연스럽게 의자 쪽으로 걸어왔다.어제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이수는 그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느꼈다. 사람은 두 번째 방문부터는 공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오늘은… 예약 안 했는데 괜찮죠.”여자의 말투에는 사과가 없었다. 허락을 구하는 형식이었지만, 이미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그 말의 무게를 바꾸고 있었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앉으세요.”의자를 당겨주지는 않았다. 대신 말만 던졌다. 여자는 스스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고, 그 소리가 어제보다 조금 컸다. 자기 자리를 만든 사람의 소리였다.“머리는… 어제랑 비슷하게요.”여자가 거울을 보며 말했다.“너무 바뀌진 않았으면 좋겠어요.”이수는 빗을 들며 여자의 머리를 살폈다.어제보다 묶은 자국이 덜했다. 집에서 머리를 풀고 있었던 흔적. 이런 건 설명하지 않아도 드러난다.“집에서 머리 잘 풀고 계시네요.”이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여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작게 웃었다.“네. 어제는… 그냥 그렇게 있었어요.”그 ‘그냥

  • 불륜해드립니다.   24. 없는 연습

    장미 미용실 문이 열릴 때,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종이 울리기 전에 공기가 먼저 움직였고, 그 미세한 변화로 이수는 누가 들어왔는지보다 어떤 결의 사람이 들어왔는지를 알아챘다. 급하지 않고, 눈을 두리번거리지도 않는 발걸음. 이곳을 처음 찾았지만, 처음인 척하지 않는 태도였다.여자는 문을 닫고도 한 박자쯤 더 서 있었다.문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로, 안쪽을 훑는 대신 바닥을 먼저 보았다. 그 짧은 멈춤은 망설임이 아니라 정리에 가까웠다. 마음속 문장을 한 번 접어 넣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습관.“머리… 조금만 다듬을 수 있을까요.”여자는 그렇게 말했고, 말의 끝을 올리지 않았다. 부탁이라기보다 확인이었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가리켰다.그녀의 손짓은 앉으라는 신호는, 시작을 허락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의자에 앉은 여자는 거울을 정면으로 보지 않았다.시선은 자꾸 옆으로 비켜났고, 그 비켜난 자리마다 생각이 스쳤다 사라졌다. 이수는 가위를 들지 않고 빗부터 들었다. 머리를 자르기 전의 빗질은, 말을 꺼내기 전의 호흡과 닮아 있다.“처음 오셨어요?”이수의 질문은 가볍게 던져졌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근처에… 살게 돼서요.”‘살게 됐다’는 말에는 과거가 없다. 의도적으로 지운 표현이다. 이수는 그 선택을 기록하듯 받아두었다.“원하시는 스타일은요.”“많이 바꾸고 싶지는 않아요.”여자는 잠시 말을 고르다 덧붙였다.“그냥… 집에 있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어요.”이수의 손이 잠깐 멈췄다. 아주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집에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다는 말은 보통 집 밖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이수는 빗을 다시 움직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편한 쪽이 좋으세요.”“네.”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짧은 대답일수록 사람의 바닥이 드러난다. 이수는 여자의 머리결을 살폈다. 관리가 지나치지 않았고, 방치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되, 그 시선에 매달리지는 않는 상태.

  • 불륜해드립니다.   23. 남겨두는 연습

    장미 미용실의 오후는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해가 기울어 들어오는 각도가 달라졌고, 거울에 비치는 빛도 오전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이수는 그 미묘한 변화를 좋아했다. 사람의 마음이 말을 고르기 가장 좋은 시간은 대개 이렇게 빛이 한 발짝 물러난 뒤였다.의자에 앉은 여자는 거울 속 자기 얼굴을 오래 보지 않았다.눈길이 자꾸 옆으로 흐르다가, 이수의 손끝으로 갔다. 가위가 아니라 빗을 쥔 손,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손의 각도. 그 손은 급하지 않았고, 급하지 않은 손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여자는 그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어제는요.”여자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말이 시작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집에 가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평소 같았으면, 괜히 웃으면서 물어봤을 거예요. 오늘 뭐 했냐고, 피곤하지 않냐고. 근데 그냥…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어요.”이수는 빗을 천천히 내려놓고, 여자의 머리를 한 번 더 훑었다. 말이 이어질 수 있는 속도를 만들어주는 동작이었다. 여자는 잠시 숨을 골랐다. 말은 내뱉는 것보다, 계속 꺼내는 쪽이 더 어렵다.“문을 닫고 나니까요.”여자가 낮게 말했다.“이상하게 무섭기도 했고, 동시에… 조금 편했어요. 제가 뭔가를 안 해도 되는 사람 같아서.”이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감각은 이수가 가장 자주 듣는 종류의 고백이었다. ‘안 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감각. 그건 자유의 시작이기도 하고, 관계의 균열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 사람은요?”이수가 물었다. 질문은 짧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상대가 아니라 상황을 묻는 질문.여자는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가, 다시 폈다.“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방으로 들어간 걸 보고도, 그냥 TV를 켜더라고요. 그게… 평소랑 똑같아서 더 이상했어요. 제가 조용해졌는데도, 집은 그대로였거든요.”그 말은 불평이 아니었다. 관찰에 가까웠다.관찰은 감정보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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