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해가 기울 무렵, 식탁은 완성되었다.꽃은 제 위치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그녀가 고른 조명은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은 부드러운 빛으로 식탁 위를 감싸고 있었다.유리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묶었다가 다시 풀었다.그러곤 거울 앞에서 조용히 웃었다.오늘의 자신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람이 아니라,그저 자신의 온도로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저녁 7시가 조금 넘어 문 앞에 벨이 울렸다.그 짧은 소리에도 유리는 가슴이 살짝 뛰는 걸 느꼈다.문을 열자, 민우는 손에 작은 종이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이거&hellip
이탈리아 피렌체. 석양이 내려앉은 아르노 강변의 벤치 위에 이현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유리한 조각처럼 맑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그의 눈빛은 멀리, 아주 멀리 붉게 물든 하늘 끝을 향해 있었다.사람들은 저마다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고,관광객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강바람에 실려 흘러갔다.그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이현에게 조금도 닿지 않았다.그의 주머니 속, 가볍고 얇은 기기의 화면 한쪽에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지인이 우연히 보낸 메시지 안에 덤처럼 첨부되어 있던 사진.그 속엔 유리의 부엌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고,그녀가 만든 듯한 파스타 한 접시와
파리의 아침은 어느새 봄의 기운을 조금씩 머금고 있었다.햇살은 아직 차가웠지만, 햇빛이 닿는 창턱 위에는 작은 생기 같은 것이 살금살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유리는 창문을 반쯤 열고 따뜻한 물에 녹차 티백을 담갔다.물 위로 퍼져나가는 연한 녹빛이 그녀의 감정을 천천히 따라 흐르고 있었다.그날은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어쩌면 너무 평범해서 기억조차 남지 않을 하루였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오후 3시 27분,민우에게서 도착한 짧은 메시지 하나가 그 평범했던 하루의 결을 바꾸었다.“오늘은 햇살이 좋네요. 유리 씨 창문에도 잘 들어가고 있나요?”아무런 꾸밈도 없고, 아무 의도도 보이지 않는 말.
파리의 아침은 희미한 빛으로 시작되었다.하늘은 짙은 회색을 품고 있었지만, 그 속엔 햇살이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늘진 창가에 앉아 있던 유리는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실내에 머물다 오랜만에 천천히 겉옷을 챙겨 입었다.오늘은 밖으로 나가보자고 마음먹은 날이었다.특별한 이유는 없었다.그저 냉장고 안의 채소가 다 떨어졌고,따뜻한 바게트 하나쯤 갓 구운 걸로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하지만 유리는 알고 있었다.그 단순한 이유 속에 자신이 조심스럽게 세상에 닿아보려는 마음을 담았다는 것을.마르셰 시장은 생각보다 활기찼다.
비가 올 듯한 파리의 아침. 유리는 천천히 커튼을 걷고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창밖의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있었고, 돌바닥을 밟는 사람들의 걸음도 어딘지 모르게 조용했다.오랜만의 일상이었다. 그녀는 다시 이곳에 있었다.그동안의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질 만큼,이 아침은 평범했고 또 낯익었다.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었다.그녀의 마음은 예전보다 조용했고,그 조용함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아끼려는 결심 때문이었다.냉장고를 열었다. 몇 가지 야채들과 어제 사온 닭고기, 그리고 토마토 페이스트가 눈에 들어왔다.유리는 무언가 오래도록 부드럽게 끓이는 요리를 하고 싶었다.시간이 걸려도 괜찮은 것. 급하
기차가 파리 북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을 스치는 바람은 며칠 전보다 훨씬 차가웠다.도시의 공기는 여전히 바쁘고 무심했지만 그 안에서 유리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한 숨을 쉬고 있었다.손에 든 가방은 가벼웠지만, 마음 안엔 무언가가 조금 더 단단히 들어찬 기분이었다.민우와의 여행이 끝난 지금, 그녀는 여전히 혼자였고 그 혼자라는 말은 예전처럼 외롭지 않았다.택시를 타지 않고 유리는 천천히 걷기로 했다.몇 정거장쯤 되는 거리를 낯선 이방인의 발걸음처럼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이 거리, 이 골목, 예전엔 그 모든 곳이 이현과의 기억으로 묶여 있었지만지금은 그마저도 부드럽게 바래진 감정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밤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데도,유리는 어딘가 온몸이 달아오른 듯 잠시 가게 문 앞에 멈춰 서서바람에 흔들리는 간판 소리를 들으며 혼자 속삭였다.“…나… 이러면 안 되는데.”유리는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분주히 움직였다.주방 안을 바삐 오가며 냄비 뚜껑을 열어보고, 칼을 쥔 손끝을 재촉했지만,그럴수록 마음 한편은 더 조급하게 요동치는 느낌이었다.주방 창가로 스며드는 한 줄기 햇살에 눈이 시리도록 부딪힐 때마다,그 골목 어귀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오늘은 안 올 거야. 그럴 리 없지. 근데,
이현은 문 안으로 들어서며 느긋하게 웃었다.유리는 순간 칼을 내려놓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쥘 뻔했다.“진상님… 진짜 왜 이렇게 매일 와요. 그만 좀 와요.”“싫은데요?”이현은 짧게 웃으며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보고 싶어서 왔는데요.”조유리는 입술을 꾹 깨물고, 뒤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런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뺨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꾹 눌렀다.‘조유리, 이러지 마… 진짜, 정신 차려…’그날 저녁, 은별은 가게 문턱을 조용히 넘었다.“회장님, 식사 시간이 이렇게 중요하셨나요?”은별
은별의 미소 속엔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회장님이 뭐가 그리 맛있다고 매일 이곳에 오시는지.”이현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비서님, 일은 일이고, 제 사생활은 좀 놔두시죠.” 라고 말했다.유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들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기류가 한순간 식당 안 공기를 차갑게 만들었다.가게 정리 중, 유리는 문을 닫으려다 또 골목 끝에 서 있는 이현을 발견했다.“진상님, 진짜… 오늘은 왜 안 가세요.”이현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며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냥… 보고 가려고요.”유리는 한숨을
“조유리 씨,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신경 많이 쓰세요?”그 말에 유리는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손님 관리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인가요?” 하고 받아쳤다.이현은 피식 웃었다.“잘못은 아닌데요, 굳이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는 없잖아요.”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휘젓다 턱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그 와중에도 심장이 자꾸만 빨리 뛰는 게 더 화가 났다.문득 식당 문이 열리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울렸다.조은별이었다.완벽한 정장 차림, 미소를 얹은 얼굴,그러나 그 안에서 번뜩이는 눈빛은 누구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