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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식탁과 음악 사이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29 12:32:16

늦은 오후, 창가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은 모든 사물을 조금 더 유연하게 감쌌다.

흰색 테이블보에 가닿은 빛은 따뜻한 크림색으로 바뀌었고,

부엌 타일 위를 스치는 공기는 미지근한 온기로 피어올랐다.

유리는 그날 따라 조용히 라디오를 켰다.

불어로 속삭이듯 흐르던 멘트가 지나가고

곧, 피아노가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작고 선명한 음을 하나씩 튕겨냈다.

이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슬며시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의 발소리조차 음악과 함께 공기 속에서 아주 천천히 녹아들었다.

"오늘은 특별히 뭘 해요?"

이현의 목소리는 나른했고, 유리는 살짝 고개만 돌려 대답했다.

"아니요. 그냥… 요즘 당신이 좋아하는 그 가지볶음 하고 있어요. 두부도 살짝 구우려고요."

“그거면 충분하죠.”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말이 많지 않은 저녁이었다.

하지만 그 적막은 불편하지 않았다.

작은 조각들로 이루어진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끓는 냄비 뚜껑에서 흘러나오는 증기,

프라이팬 위에서 기름이 작게 튀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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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67. 그 남자의 재방문

    파리의 겨울은 낮은 햇살 아래서도 여전히 싸늘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의 가게에는 작은 온기가 퍼져 있었다.오븐에서 천천히 구워지고 있는 당근 타르트의 달큰한 향, 스프 냄비에서 뭉근히 올라오는 채소의 숨결,그리고 오래된 나무 테이블 위에 하나둘씩 앉아 조용히 식사를 기다리는 손님들.그날도 평범한 하루의 시작이었다.유리는 평소처럼 메뉴를 정리하고, 접시의 기스를 조심스레 닦아내고 있었다.그녀의 손길은 익숙하고 조용했으며, 어떤 바람도 일으키지 않는 듯 부드러웠다.그러나 그날 오후, 가게 문이 열리며 작은 소리가 울렸다.차임벨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문턱을 넘어선 인물은 며칠 전 그저 스쳐간 손님, 그 한국인 남자였다.그는 지난번과 비슷한 옷차림이었지만 표정은 조금 더 편안해 보였다.유리는 순간 눈을 마주쳤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그는 웃으며 대답했다.“네, 그냥… 파리에서 이런 식당을 찾기 쉽지 않아서요. 조용하고… 진심이 담긴 맛이 느껴져서 계속 생각났습니다.”그의 말은 간결했지만, 이상하게 유리의 귓가에 오래 남았다.진심이 담긴 맛. 그 말이 어쩐지 그녀가 오랜 시간 잊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일깨우는 듯했다.그는 창가 자리로 가 자연스럽게 앉았다.“오늘도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지난번 수프가 아직도 기억나서요.”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오늘은… 무화과와 치즈를 넣은 따뜻한 샐러드와 사프란 향이 살짝 스며든 해산물 리소토가 있어요.”그는 짧은 망설임 끝에 말했다.“그럼 그걸로 부탁드릴게요. 오늘도… 천천히 오래 머물다 갈 수 있을까요?”그녀는 순간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주방 안에서 그녀는 이상하게 손끝이 민감해지는 걸 느꼈다.늘 해오던 요리인데도 소금의 양이나 레몬의 산미를 조절하는 데 더 조심스러워지고 있었다.그 남자가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건 아니었다.그저 낯선 타지에서 동일한 언어를 나눌 수 있는 사람,그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뱉은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66. 기억을 요리하는 날

    유리는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었다.햇살은 오늘따라 무척 투명했고,따뜻하지는 않았지만 겨울의 냉기가 덜한 부드러운 공기가 유리창을 타고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주방 한편, 낡은 수납장 서랍을 정리하던 그녀는 무심코 한 권의 노트를 꺼내 들었다.진회색 가죽 커버의 작고 두꺼운 수첩.그녀가 서울을 떠나올 때 버리지 못하고 함께 싸왔던 것 중 하나였다.‘언젠가 다시 꺼내야지’생각만 하다가 차마 펼치지 못했던 노트였다.조심스럽게 펼친 첫 장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2020년 3월 14일 마늘 3알, 양파 반 개, 올리브유 1큰술, 소금 약간 첫 파스타 소스, 실패. 너무 짰다.”그 글씨를 보는 순간 유리는 웃음이 나왔다.당시엔 참 심각하게도 요리를 하나하나 기록했었구나, 싶었다.장 하나, 또 하나를 넘길수록 그녀는 놀라운 감각으로 그 시절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냈다.어느 날은 반복된 실패에 짜증이 가득 배어 있었고,어느 날은 직장 상사의 말 한마디에 그날의 수프까지 짜게 되어버린 기록이 있었다.그리고, 어느 페이지에선 멈춰섰다.“오늘은 그냥 국 끓였다. 맛도, 냄새도, 기억도 없는 날. 그런 날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중.”짧은 문장. 그러나 그 한 줄이 그녀의 가슴을 조용히 두드렸다.그날이 언제였는지도 잊고 있었지만그 문장을 읽는 순간 그녀는 그날의 공기까지 고스란히 떠올렸다.어느 봄날, 창밖에선 벚꽃이 피고 있었지만 유리는 단 한 송이의 꽃잎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회사의 실적 압박, 좁은 방에 홀로 남겨진 감정,멀어져만 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그녀는 음식조차 무미건조하게 끓여낼 수밖에 없었다.‘그런 날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중’그 말은 어쩌면 그녀가 자신에게 건넨 작은 위로였는지도 모른다.지금의 유리가, 그날의 유리를 껴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그녀는 노트를 조심스레 덮었다.그리고 오늘의 메뉴를 적기 위해 새 종이를 꺼냈다.그 위에는 이상하게도 그날의 감정이 조금 묻어나기 시작했다.“오늘은 따뜻한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65. 비 내리는 날엔 당신이 생각나서

    비는 예고도 없이 쏟아졌다.파리의 하늘은 종종 그렇게 변덕을 부렸다.분명 아침엔 옅은 햇살이 길을 따라 번지고 있었는데,정오를 지나며 구름이 짙게 몰려들었고,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바깥은 회색의 물결로 가득했다.가게 유리창에 물방울이 차례차례 흘러내렸다.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마치 오래된 기억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유리는 문득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창가로 걸어가 그 흐릿해진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파리의 골목은 비에 젖으면 더 조용해졌다.우산 아래의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였고, 그 짧은 순간이 지나면 다시 멀어져 갔다.그 흐름이 마치 사람 사이의 감정 같다고 유리는 생각했다.가까워지는 데는 작은 계기 하나면 충분하지만,멀어지는 건 늘 이유도 말도 없이 너무 쉬운 일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고.이현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어깨는 조금 젖어 있었고, 손에는 조그만 검은 우산이 들려 있었다.유리는 그를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수건을 내밀었다.“젖었네요.”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당신이 만든 스프 냄새에 이끌려서 비 오는 줄도 모르고 걸었어요.”그의 말에 유리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오늘은… 따뜻한 수프 먼저 드릴게요.”그녀는 조심스럽게 주방의 뒷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를 열었다.그 안엔 마늘과 양파를 천천히 볶아낸 향이 배어 있었고,부드럽게 푹 삶은 렌틸콩과 토마토가 걸쭉하게 어우러져 있었다.그녀는 국자를 들고 말없이 국물을 떠올렸다.그 한 동작조차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느껴졌다.그녀는 알 수 있었다.자신의 마음이 이유 없이 조용해지고 있다는 것을.식탁에 앉은 이현은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따뜻하네요. 속이 녹는 느낌이에요.”그 말에 유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을 보지 않았다.창밖의 비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까.아니면, 그 비를 보며 떠오른 어느 과거의 한 장면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일까.이현은 유리의 표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64. 아무 말 없이 향기만 피울게요

    파리의 어느 겨울 아침, 햇살은 짧고 낮게 가게 창을 스쳤다.그 아래에서 유리는 천천히 오늘 사용할 재료를 정리하고 있었다.시트러스 향이 묻어나는 나무 상자 하나가 가게 문 앞에 조심스럽게 놓여 있었다.어제 들렀던 단골 손님이 자신의 고향에서 직접 가져왔다며 작은 오렌지를 건네주고 갔던 것이다.“이거요, 아주 달고 향긋해요. 그냥 먹어도 좋고, 잼을 만들어도 좋고요. 가게 향기로도 써보세요.”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던 유리는 그 중 가장 작고 예쁜 하나를 골라 칼끝으로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겼다.향이 퍼졌다. 아주 은근하고 부드럽게, 가게 안에 고요하게 깔려 있던 공기가 그 순간 살짝 움직였다.그녀는 무심코 손끝에 묻은 즙을 닦으며 문득 어떤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아주 오래전, 서울에 첫눈이 내리던 날.유리는 좁은 자취방 창문을 닫고 작은 난로 위에 귤을 구워 먹고 있었다.그때 누군가 말했다."오렌지는 슬픔을 다 녹여주는 과일 같아. 껍질을 까는 순간부터 위로가 시작되는 느낌."그 목소리가 누구였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아마 가족이었을 수도, 아니면 그리 멀지 않은 인연이었을 수도 있다.그저, 그 말에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감각만은 또렷이 남아 있었다.유리는 오렌지 껍질을 작은 주전자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가게 안은 곧 포근하고 달큰한 향으로 가득 찼고,그 향이 어느새 그녀의 손끝과 마음 안쪽까지 조용히 스며들었다.그 향기를 따라 이현이 주방 쪽으로 다가왔다.“무슨 향이에요? 기분이 이상하게… 편해지네요.”그녀는 잠시 주전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오렌지 껍질 끓였어요. 아주 오래된 방식이에요. 향기를 피우는 가장 따뜻한 방법.”그녀의 말에 이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오늘따라… 유리 씨가 더 유리 씨 같아요.”그 말은 특별히 시적인 말도,큰 의미가 담긴 말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괜히 가슴 안이 간질간질해졌다.‘내가 나다워지는 것. 그게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꽤 기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63. 바람이 지나간 자리

    오전의 파리는 희미한 햇살로 젖어 있었다.잔잔한 바람이 골목마다 스치듯 흐르고,카페 앞 테이블 위엔 누군가 두고 간 책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지 못한 채 펼쳐져 있었다.유리는 여느 때처럼 창가 쪽 테이블부터 닦기 시작했다.하루에 한두 번은 햇살이 가장 예쁘게 머무는 자리를 손수 정돈하는 일이 그녀에게는 습관처럼 남아 있었다.그날은 어쩐지, 창밖에 비치는 그림자가 평소보다 길게 느껴졌다.햇살이 따뜻한 날은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고,느슨해진 그 마음에는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이 문득 얼굴을 내밀곤 했다.점심 무렵. 가게 문이 조용히 열렸다.그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낯선 말투의 한국인이었다.서늘한 코트 자락에 먼지가 희미하게 앉아 있었고,그의 손에는 반쯤 구겨진 지도와 조금은 지친 표정이 함께 걸려 있었다.“혹시… 따뜻한 수프, 있나요?”그의 말은 조심스러웠다.이국의 언어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 처음 내미는 요청처럼 보였다.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네, 오늘은 당근과 감자, 그리고 파르메산 치즈가 들어간포타주 수프가 있어요. 많이 걸쭉하진 않지만, 따뜻해요.”그 남자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고, 자신이 처음 여행 온 지 이틀째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여행지에서… 이렇게 조용한 식당을 찾을 줄은 몰랐어요. 여긴, 참… 공기가 다르네요.”그의 말에 유리는 부드럽게 웃었다.“여긴, 그런 장소예요. 크게 말하지 않아도, 그냥… 머무는 곳.”그가 수프를 먹는 동안, 유리는 주방 한편에서 조용히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그는 숟가락을 들 때마다 조금씩 숨을 고르듯 천천히 움직였고,무언가를 곱씹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그의 눈빛에서 유리는 오래전 자신을 본 것 같았다.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혼자 먼 곳까지 걸어온 사람.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한 감정들을 잠시 내려놓을 공간을 찾아 헤매던 어느 날의 자신.그 감정이 너무 익숙해서 그녀는 그를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여기… 꼭 다시 와도 될까요?”그가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62.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는 공간

    파리의 겨울은 낮이 짧았다.오후 네 시가 채 되기 전,가게 안은 벌써 희미한 어둠의 기척에 잠식되기 시작했다.유리는 창가에 놓인 조명을 하나씩 켜며 조용히 하루를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오늘도 말없이 일했다.그 조용함 속에는 이젠 예전처럼 고립이나 두려움이 담겨 있지 않았다.대신, 온기가 담겨 있었다.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이현은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그는 서류를 정리하며 가게 한쪽에서 들려오는 유리의 조리도구 소리, 뜨거운 물이 흐르는 소리,천천히 부서지는 수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그 모든 소리는 그에게 음악이었다.요란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더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그날 밤. 유리는 퇴근 준비를 마친 뒤, 주방의 작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거기엔 이현이 모르게 붙여둔 작은 메모지 하나가 숨어 있었다.‘오늘의 소스 맛… 참 좋았어요. 첫입보다 마지막이 더 깊어졌어요. 당신 마음처럼요. 이현’그녀는 그 글귀를 보는 순간 작게 숨을 내쉬었다.자신이 얼마나 조용히 그리고 서툴게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지 알기에 그 짧은 문장 하나가 그녀에겐 너무 큰 위로였다.그녀는 다음 날, 가게 문을 닫은 뒤 커피 머신 위에 종이 쪽지 하나를 조심스레 올려두었다.‘당신이 있는 공간에선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요. 그게 참… 좋네요. - 유리’그다음 날. 이현은 그 쪽지를 발견한 순간 마치 작은 숨결 하나가 가슴에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무언가,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조용히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그날 밤, 그는 식탁 위에 다 마신 찻잔 옆에 또 다른 메모를 올려놓았다.‘당신은 말이 없을 때 가장 큰 말을 해요. 그게 나한텐… 늘 조용한 고백 같아요. - 이현’그 후 며칠 동안 두 사람은 말보다 쪽지로 더 많은 것을 나눴다.그들의 문장은 짧았지만, 그 속엔 아주 깊은 신뢰와 조심스러움이 담겨 있었다.‘오늘 창문 너머로 보인 구름, 당신 생각났어요. 묘하게 따뜻하고, 깊었거든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4. 뒤돌아선 발끝

    식당 안은 평소보다 훨씬 시끄러웠다.단골손님들은 슬쩍 눈치를 주고받으며 수군거렸고,어떤 아줌마는 “저기 사장님 남친이세요?”라며 장난을 쳤다.유리는 “아니라고요!!”라고 소리를 지르며 국자를 들었다가,아줌마들이 깔깔 웃는 소리에 입술을 꾹 다물고 물만 내렸다.“유리 씨 인기 많네. 장사 잘하겠다.”이현이 팔짱을 풀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유리는 국자로 찌개를 저으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러지…”저녁 무렵, 문득 식당 안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문틈 사이로 들어선 한 여자의 실루엣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3. 선 긋는 건 너였는데

    아침 공기가 아직 서늘한데도 유리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다.주방에서 채소 써는 소리가 경쾌하게 퍼져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분주하고 어지러웠다.칼끝으로 리듬을 타는 손놀림은 점점 빨라졌고, 심장이 그것보다 먼저 뛰고 있다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었다.‘설마 오늘은 안 오겠지. 아니, 저 진상님도 적당히 해야지… 설마 또?’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골목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몰려들었다.평소보다 훨씬 큰 소음에 유리는 머리를 홱 돌려 주방 창으로 달려갔다.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2. 설명 없는 떨림

    새벽 공기를 뚫고 부엌 창문 틈으로 겨우 스며드는 첫 햇살에, 유리는 눈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손끝에 아직 따뜻함이 채 가시지 않은 빗자루의 감촉이 남아 있었고, 어젯밤 그 황당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떠올랐다.‘미친놈인가…’스스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지만, 그때 느꼈던 묘한 울렁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분노에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사람의 강렬한 눈빛이, 생각보다 오래 가슴 한가운데 남아 있었던 걸까.유리는 스스로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며 부엌으로 향했다.익숙한 동작으로 칼을 쥐

  • 회장님, 어떤 맛을 원하세요?   1. 미친놈인가?

    S그룹 본사 최상층 회장실, 그 문 앞 복도에는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셰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흰 셰프복에 단정한 모자, 은빛이 번쩍이는 조리도구, 완벽히 플레이팅된 요리가 놓인 쟁반을 양손으로 받쳐 든 모습은 그 자체로 일종의 퍼레이드 같았다.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초조함이 엉켜 있었고, 뺨에는 굳은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복도를 채운 공기는 마치 숨조차 삼키기 두려운 듯 묵직했고,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 위를 긁는 미묘한 소리와 낮고 단호한 남자의 목소리는 그 공기를 더욱 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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