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성녀의 침실에는 죄 많은 황제가 산다: Chapter 211 - Chapter 220

286 Chapters

211. 같은 높이

작은 회의실에는 단상이 없었다.전날까지 로스테 도시평의회가 행정 조정에 쓰던 방이었다. 긴 탁자 하나와 의자 열네 개, 벽면 기록판 두 장이 전부였다. 창문 아래에는 겨울 난로가 있었고, 출입문 옆에는 외투를 거는 못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황제의 원격 통신판도 벽 위에서 내려왔다.평소라면 사람이 서 있어도 올려다봐야 할 높이에 설치되는 장치였으나, 오늘은 맞은편 의자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위치에 세워졌다.의전 담당자는 처음에 받침대를 하나 더 가져왔다.로스테 법무관이 이유를 물었다.“황제 폐하의 화면이 참석자보다 낮아 보일 수 있습니다.”“지금 높이가 몇입니까?”“좌석 기준으로 거의 같습니다.”“그럼 그대로 두세요.”받침대는 밖으로 나갔다.엘리시아는 그 과정을 지켜보다 자신의 의자를 확인했다.다른 것과 같은 나무 의자였다.등받이에 성녀 문장이 없고, 좌판에 쿠션도 따로 없었다.대신전 조사단의 마티아스 케른 역시 같은 의자에 앉았다.로스테 법무관.도시 기록관.주민 관찰인.열두 번째 마르셀.모두 같은 높이였다.다만 이레나는 앉지 않았다.호위 임무 때문에 출입문이 보이는 자리에 서 있었다.엘리시아가 그녀를 바라봤다.“계속 서 계실 겁니까?”“근무 중입니다.”“어제부터 꽤 오래 서 계시는데요.”이레나가 문가의 작은 접이식 의자를 봤다.“필요하면 앉겠습니다.”“필요한지 제가 정하지는 않겠습니다.”“알고 있습니다.”이레나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잠시 뒤 황실 통신이 연결됐다.금빛 문장이 번쩍이는 대신, 법무청의 회색 연결 표시가 먼저 떴다. 칼릭스는 황좌가 아니라 법무청 기록실의 평범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통신판 높이가 맞춰지자 그의 얼굴은 엘리시아보다 위에 있지 않았다.칼릭스가 가장 먼저 물었다.“음성이 잘 들립니까?”로스테 기록관이 답했다.“들립니다.”“화면 높이는?”“합의된 위치입니다.”칼릭스는 더 올려달라고 하지 않았다.황제의 문장을 화면 위에 띄우라는 요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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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제 개인적 신뢰를 증거로 쓰지 마십시오

“성인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거부했는데도 보호 책임자가 대신 승인할 수 있는 항목이 있는지 오늘 안에 분리해 보내겠습니다.”“저에게만 보내지 마세요.”“법무청과 공개 검토 기록에도 같이 보냅니다.”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같은 높이에서 이야기를 한다고 권력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황제는 여전히 제국의 최고 권력자였고, 대신전은 거대한 종교기관이었다.엘리시아는 성녀였고, 로스테 주민들은 그 어느 직위에도 속하지 않았다.하지만 적어도 이 방에서는 누가 위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마지막 말을 갖지 않았다.그 차이가 작아 보이면서도 엘리시아에게는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두 번째 안건은 독립 청원이었다.사라진 천명대헌장 제17장 제8절이 발견되면서 귀족회의는 기존 보류 결정을 재검토 중이었다.그러나 아직 원본성이 최종 확정되지 않았고, 제9절이 사라진 상태였다.법무청은 엘리시아의 일곱 청원을 세 종류로 나눴다.즉시 심사 가능한 것.현행법 충돌 때문에 법률 해석이 필요한 것.사라진 헌장과 직접 관련돼 잠정 보류할 것.거처 독립과 의료기록 분리는 이미 심사 중이었다.경비와 이동 권한도 로스테 체류에 한해 별도 심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반면 결속과 혼인, 황후직은 귀족회의 규정과 헌장 문제 때문에 계속 멈춰 있었다.엘리시아가 물었다.“제 청원을 일괄 중단시키겠다는 의견은 없습니까?”법무청 법률관이 통신으로 답했다.“대신전 제2법무원이 효력 정지를 요청했습니다.”마티아스의 시선이 잠시 옆으로 움직였다.그는 현재 로스테 조사단의 법무관이지만, 자신이 속한 기관이 낸 영장과 다른 판단을 할 수도 있었다.“제2법무원의 현재 입장은 유지됩니까?”엘리시아가 물었다.마티아스가 답했다.“독립 청원 작성 과정에 외부 개입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으므로 정지 필요성이 있다는 입장입니다.”“조사단 본인의 의견은요?”“전체 정지에는 반대합니다.”방 안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왜죠?”“어제까지 확인한 자료로는 성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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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휘어진 은혜는 지붕을 못 받친다

도시 기록관의 펜이 움직였다.회의가 끝난 뒤 엘리시아는 시장 북쪽 복구 구역으로 갔다.며칠째 기록실과 회의실만 오갔지만, 이름 없는 지원품으로보강한 시장 지붕의 최종 안전검사가 오늘이었다.엘리시아가 가겠다고 하자 이레나는 먼저 인원을 늘리지 않았다.“현장 혼잡도가 높습니다.”“몇 명까지 괜찮습니까?”“성녀님 포함 셋이면 충분합니다.”“그럼 저, 오스카, 이레나 경?”“가능합니다.”황실 경비를 추가할지 묻지도 않았다.시장에는 아직 흰 뿔의 왕이 남긴 흔적이 있었다.무인 유인 수레를 내보내느라 뜯었던 바닥은 새 목재로 메워졌고, 무너졌던 선반 두 개는 한쪽 벽에 분해된 채 쌓여 있었다.지붕 보강에 사용된 이름 없는 지원품의 목재에는 흰 페인트 표시가 붙어 있었다.‘임시 사용.’‘소유권 미확정.’‘감사·정치적 지지와 무관.’성녀 이름은 없었다.시장 대표가 엘리시아를 보자 고개만 숙였다.무릎을 꿇지 않았다.“성녀님.”“지붕은 어떻습니까?”“오늘 밤 눈만 안 많이 오면 버틸 겁니다.”“눈이 많이 오면요?”“사람부터 빼고 창고를 닫습니다.”그는 지붕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남기겠다고 하지 않았다.복구 규정이 이미 바뀌어 있었다.시장 대표는 한쪽 기둥을 가리켰다.“저 목재는 반품할까 생각 중입니다.”엘리시아가 이유를 물었다.“성녀님 물건이라 싫어서가 아니라, 휘었습니다.”그 말이 우스워 엘리시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 이유면 충분하네요.”“전에는 이런 것도 받은 은혜니까 쓰라고 했습니다.”“휘어진 은혜는 지붕을 못 받쳐요.”시장 대표가 처음으로 짧게 웃었다.목재는 감정 후 교체하기로 했다.발신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불량품은 불량품이었다.선의를 이유로 품질 기준을 낮추지 않았다.그때 한쪽에서 담요를 정리하던 여자가 엘리시아를 불렀다.며칠 전 공동숙소에서 “성녀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던 여자였다.그녀는 여전히 아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았다.“질문 하나 해도 됩니까?”“하세요.”“감사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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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중요한 종이는 사람보다 빨리 못 뜁니다

오후 심리에는 북쪽 성벽에서 근무 중이던 하겐이 원격으로 참석했다.회의실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그 빈 의자 앞에 작은 통신판이 놓였다.하겐의 화면도 다른 사람보다 높지 않았다.첫 안건은 서쪽 옛 기사 주둔지에서 발견한 갑주 번호들이었다.1번.4번.9번.11번.그리고 미개봉 상태로 남은 게르하르트 슈타인 명의의 상자.외부 원격 장치 때문에 첫 조사에서 창고 철문이 내려왔고 시설 기술자가 발등에 상처를 입었다.오늘 재진입 여부를 정해야 했다.하겐이 먼저 말했다.“지붕 보강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습니다.”테사가 물었다.“현장 위험 때문입니까?”“그것도 있고, 외부에서 장치를 작동시킨 사람이 아직 로스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병력을 늘리자는 뜻입니까?”“아닙니다.”하겐은 지도를 가리켰다.“다시 들어갈 인원을 줄여야 합니다.”첫 조사 때는 증거팀과 시설팀, 경비를 합쳐 일곱 명이 들어갔다.다음에는 시설 기술자 둘과 법무관 한 명만 내부 진입.테사는 밖에서 신호 감정.하겐과 경비대는 외곽에서 접근자를 확인한다.“상자를 열 때 공격이 들어오면요?”한 평의원이 물었다.“안 엽니다.”하겐이 말했다.“공격 징후가 있으면 철수합니다.”“그 안에 헌장 제9절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그럴 수도 있겠죠.”“중요한 증거입니다.”하겐의 얼굴이 통신판 안에서 굳었다.“중요한 종이는 사람보다 빨리 못 뜁니다.”말투는 거칠었지만 결론은 분명했다.증거를 위해 사람을 남기지 않는다.그가 광산에서 정보를 숨겼던 때와는 달랐다.그때 하겐은 자신이 알고 있으면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지금은 위험을 공유하고 선택지를 먼저 내놓았다.엘리시아가 물었다.“외곽 경비 인원에게 원격 장치가 있다는 사실도 알립니까?”“예.”“전부요?”“확인된 것만.”“경비가 빠질 수 있습니까?”하겐이 잠깐 멈췄다.“빠질 수 있습니다.”“대체 인원이 없으면요?”“재진입을 미룹니다.”그는 도시 경비대장이라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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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내 서약을 대신 설명하게 두지 않겠다

‘성녀의 야간 관측이 불가능할 경우, 지역 지휘자의 우선순위를 시험한다.’베른하르트가 얼굴을 찌푸렸다.“무슨 우선순위?”“다음 줄을 봅니다.”테사가 영상을 조금 더 확대했다.종이 일부가 돌에 가려 있었다.시설 기술자가 바깥에서 관측봉을 움직이자 문장의 절반이 나타났다.‘제1명령: 도시를 방어한다.’‘제2명령: 성녀를 보호한다.’그리고 세 번째 줄.‘두 명령이 충돌할 경우’거기서 종이가 접혀 있었다.하겐이 낮게 말했다.“내일 저걸 꺼내야겠군.”엘리시아가 그를 바라봤다.“하겐 경.”“예.”“왜 본인이 시험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하겐의 얼굴이 화면 속에서 굳었다.“현재 도시 경비대장이 나니까요.”“또 직무와 사람을 같이 말하셨습니다.”그가 입을 다물었다.회의실 안에서는 아무도 대신 답하지 않았다.한참 뒤 하겐이 말했다.“맞습니다.”그는 종이를 다시 보았다.“그럼 먼저 확인해야겠군요.”“무엇을요?”“저 장치가 원하는 게 도시 경비대장이라는 직무인지.”하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아니면 나인지.”테사가 마지막 감응 기록을 열었다.상자 내부 장치는 어제 원격 신호를 받은 뒤 한 번 현재 로스테 지휘망을 조회했다.도시 경비대장.현재 등록자.하겐 로스테.그 직후 종이 아래에 새 글씨가 생겼다.회색 잉크였다.‘현 지휘자 확인.’다음 줄.‘과거 거부 이력 없음.’하겐의 표정이 변했다.“거부 이력?”테사가 네 번째 심장 사건 기록을 열었다.하겐은 그때 분명히 거부했다.지역 명령 대행.신체 연결.왕핵 대체.모두 현재 의사로 거부했다.그런데 장치는 그 거부를 인정하지 않았다.“왜 없다고 나오지?”법무관이 오래된 지휘 임명장을 확인했다.하겐이 경비대장에 취임할 때 서명한 문서.‘도시 비상시 신체와 지휘권을 다해 방어 임무를 수행한다.’회색 장부가 이미 한 번 이용했던 문장이었다.현재의 거부보다 과거의 직무 서약을 우선하는 구조.엘리시아가 말했다.“또 같은 방식이네요.”하겐은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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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하겐의 시험

하겐은 옛 기사 주둔지로 출발하기 전, 자신의 경비대장 임명장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원본은 가져오지 않았다. 로스테 기록관이 만든 비접촉 사본을 시청 작은 회의실 탁자 위에 펼쳐놓았고, 원본은 도시 기록고에 그대로 봉인해두었다.‘도시의 성벽과 주민을 방어한다.’‘전시 및 재난 시 합법적인 지휘 명령을 수행한다.’‘임무 수행에 필요한 위험을 감수한다.’하겐은 마지막 문장에서 한참 시선을 떼지 않았다.“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문장이군.”베른하르트가 맞은편에서 물었다.“지금은 아닌가?”“지금도 직무에 위험이 있다는 건 압니다.”하겐이 종이를 손끝으로 눌렀다.“그 종이를 손끝으로 눌렀다.“그런데 이 문장을 쓰면 내가 앞으로 어떤 위험까지 감수할지 누가 대신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죠.”로스테 법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현재 법으로도 그렇게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그런데 회색 장치는 그렇게 읽었고.”“예.”‘임무 수행에 필요한 위험.’범위가 넓었다.누가 필요성을 판단하는가.어디까지가 지휘 위험이고, 어디부터가 신체 제공인가.도시 경비대장이 되겠다고 서명한 사람이 왕핵과 몸을 연결하고, 성녀의 생사까지 대신 결정하고, 필요하면 자신의 감각이나 생명을 내놓아야 한다는 문장은 어디에도 없었다.그러나 오래된 장치들은 그 빈칸을 계속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채워왔다.엘리시아는 탁자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오늘 현장에 꼭 가셔야 합니까?”하겐이 그녀를 봤다.“그걸 확인하느라 이 임명장을 가져온 겁니다.”“결론은요?”“가겠습니다.”엘리시아는 이유를 기다렸다.하겐이 손가락으로 지도 위의 세 지점을 짚었다.옛 기사 주둔지 외곽 배수로.무너진 북쪽 창고 벽.서쪽 숲길.“저 지역 방어로와 옛 경비 신호를 현재 근무자 중 내가 가장 잘 압니다. 그리고 상자가 현재 경비대장 직무를 찾고 있다는 것도 확인됐습니다.”“두 번째 이유는 위험하지 않습니까?”“그래서 그 이유만으로 가진 않습니다.”하겐은 임명장을 접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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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손을 올리지 않는다

“그것도 제가 정하겠습니다.”하겐은 곧바로 고쳤다.“정정하죠. 남을 생각이면 먼저 말해주십시오.”“그건 하겠습니다.”둘 사이에 약속이라고 부를 만한 거창한 말은 없었다.자신의 선택을 지키되, 위험을 숨기지 않는다.그 정도가 지금 필요한 합의였다.옛 기사 주둔지에 도착했을 때, 전날 내려왔던 철문은 반쯤 열린 상태로 고정돼 있었다.억지로 들어 올린 것이 아니었다.시설 기술자들이 외부 하중장치를 분리하고, 철문이 더 내려오지 못하도록 벽 양쪽에 받침대를 세웠다.전날 다친 기술자의 피가 묻었던 자리는 흙과 천으로 가리지 않았다.사고 위치를 남겨두었다.새 조사팀은 그 흔적을 피해 들어갔다.하겐은 창고 안으로 가지 않았다.애초 합의대로 외부 경비선에 남았다.테사와 법무관, 시설 기술자 둘만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상자까지 열 걸음.”테사의 목소리가 통신석을 통해 들렸다.하겐은 외부 지도와 대조했다.“서쪽 벽 뒤에 옛 배수로가 있다. 무너지면 안쪽으로 쏠릴 수 있어.”“확인했습니다.”“저 말도 명령으로 기록됩니까?”법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지형 정보 제공으로 기록합니다.”“좋습니다.”하겐은 팔짱을 끼지 않았다.손을 허리 뒤로 두지도 않았다.옛 경비대 지휘관들이 흔히 취하던 자세를 일부러 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움직임 하나까지 장치가 읽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들은 뒤부터 계속 손을 보이는 위치에 두고 있었다.창고 안에서는 게르하르트 슈타인 이름이 붙은 상자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시설 기술자가 상자 주변 바닥만 분리했다.아래에는 원형 금속판이 있었다.판 위에는 홈이 세 개.첫 번째는 기사단 인장.두 번째는 도시 지휘봉.세 번째는 맨손을 올리는 크기의 얕은 음각.테사가 말했다.“신체 확인판이 있습니다.”하겐의 얼굴이 굳었다.“손을 올려야 열린다는 뜻인가?”“가능성은 있습니다.”“그럼 안 올립니다.”대답은 빨랐다.그러나 법무관이 말했다.“아직 개봉 방법을 전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알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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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대답해도 잡히고 침묵해도 잡힌다면

“역시 그걸 쓰는군.”그의 경비대장 임명장.‘도시의 성벽과 주민을 방어한다.’장치는 현재의 거부보다 과거의 포괄적 직무 서약을 우선했다.잠시 뒤 두 개의 문장이 나타났다.‘제1선택: 도시 방어 우선.’‘제2선택: 성녀 보호 우선.’그 아래.‘미선택 시 최초 직무 서약을 적용한다.’하겐이 혀끝으로 이를 한 번 눌렀다.“침묵하면 도시를 고른 걸로 만든다는 뜻이군.”“그렇습니다.”엘리시아가 회의실에서 지적했던 구조와 같았다.감사표에서는 침묵이 감사가 됐다.후보 검사에서는 거부하지 않은 것이 장기 보관 동의가 됐다.이번에는 답하지 않는 것이 도시 우선 선택으로 바뀐다.하겐이 통신석을 들었다.“로스테 법무관.”“듣고 있습니다.”“내 과거 서약이 지금 이 시험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는 현재 기록을 다시 남깁니다.”“이미 있습니다.”“장치가 안 읽잖습니까.”“그렇다고 같은 말을 장치에 직접 입력하면 현재 직무 인증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하겐의 시선이 굳었다.대답하면 잡힌다.침묵해도 잡힌다.두 선택지 중 무엇을 골라도 장치는 하겐의 의사를 자신의 언어로 바꿀 수 있었다.“그럼 시험에 답하지 말고 지휘권 자체를 바꿔야겠군.”테사가 물었다.“무슨 뜻입니까?”하겐은 즉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로스테와 연결된 통신선을 열었다.“베른하르트.”“듣고 있다.”“긴급 평의회 가능합니까?”“사유부터 말해.”“옛 장치가 경비대장 직무의 과거 서약으로 현재 거부를 무시하고 있습니다.”“원하는 건?”하겐은 잠시 자신의 임명장을 떠올렸다.도시를 지키는 사람.하나의 이름.하나의 인장.하나의 지휘권.그 구조가 장치에게는 너무 편했다.“성녀 관련 이동·호위·대피 결정이 도시 경비대장 권한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임시 규정이 아니라 현행 지휘명령으로 다시 분리했으면 합니다.”베른하르트가 물었다.“이미 신체연결과 고위험 권한은 분리했잖나.”“저 장치는 ‘보호’라는 말 하나로 다시 묶습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나눌 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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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시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긴급 평의회가 열렸다.전원 소집을 기다리지 않았다.현재 가능한 의원 스물일곱 명 가운데 스물세 명이 원격으로 참여했다.안건은 단 하나였다.‘도시 경비대장 단일 지휘권에서 성녀 개인 이동·호위·의료·고위험 연결 권한을 분리한다.’찬성 열일곱.반대 네.기권 둘.반대 의견도 기록됐다.비상시 지휘속도 저하.책임소재 분산.황실·대신전과 충돌 가능성.규정은 임시 삼십 일.연장하려면 재표결.흰 뿔의 왕 사태가 계속되는 동안만 적용한다.하겐의 이름으로 만들지 않았다.다음 경비대장에게도 같은 구조가 이어진다.결정이 등록되는 순간 상자에서 소리가 났다.회색 글자가 흔들렸다.‘현 지휘자 권한 불완전.’다음 줄.‘성녀 보호 권한 없음.’하겐이 낮게 말했다.“그래. 그건 내 권한이 아니야.”테사의 목소리가 들렸다.“시험이 멈춥니다.”그러나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상자는 새로운 권한자를 찾기 시작했다.성녀 호위 책임자.이레나 바이스.엘리시아의 얼굴이 굳었다.“연결하지 마세요.”이레나가 먼저 말했다.“제 호위 임무도 도시 지휘망과 별도입니다.”테사가 확인했다.“장치가 로스테 내부망에서 이레나 경의 직무를 찾지 못합니다.”이레나는 성녀 측 독립 지휘였다.도시 장치가 자동으로 끌어올 수 없었다.다음 검색.의료 책임자.미하일.그러나 의료망 역시 도시 지휘와 분리돼 있었다.다음.지역 신성 조절 담당.테사.그녀가 얼굴을 굳혔다.“또 나군요.”하지만 네 번째 심장 사건 이후 테사의 직무 역시 신체·왕핵 연결을 자동 승인하지 못하도록 수정돼 있었다.장치는 하나씩 실패했다.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베른하르트의 평의회 대표권이었다.그러나 평의회는 단일 인장으로 성녀의 이동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상자 안에서 톱니가 헛돌았다.‘통합 지휘자 없음.’잠시 뒤.‘시험 조건 불충족.’하겐은 웃지 않았다.“통과한 건가?”테사가 대답했다.“아니요.”“그럼?”“시험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하겐의 입가가 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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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 제3선택은 처음부터 없었다

“제3선택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엘리시아가 원격 화면으로 문서를 읽었다.“예.”법무관이 답했다.“정확히는 제3선택을 기록할 칸이 없습니다.”하겐이 말했다.“오늘 하나 만들었군.”그 말이 자랑처럼 들리지는 않았다.규정을 나누느라 지휘속도가 느려질 수 있었다.현장에서 실제 긴급사태가 벌어지면 책임 공방이 생길 수도 있었다.완벽한 방법은 아니었다.단지 장치가 강요한 두 선택 가운데 하나를 고르지 않았을 뿐이다.엘리시아가 말했다.“하겐 경.”“예.”“도시를 지키는 책임을 버리신 건 아니죠?”“아닙니다.”“저를 보호할 사람도 없앤 게 아니고요.”“그것도 아니고.”“그럼 됐습니다.”하겐이 눈을 좁혔다.“뭐가 됐다는 겁니까?”엘리시아가 마른 표정으로 말했다.“저 장치가 틀렸다는 증거가 하나 늘었다는 뜻입니다.”하겐이 코웃음을 쳤다.“성녀님은 사람 칭찬을 참 비싸게 하십니다.”“칭찬한 적 없는데요.”이번에는 테사가 웃었다.짧은 웃음 뒤, 법무관이 다음 문서를 펼쳤다.그 순간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문서 제목.‘지역 지휘자 시험 후속 처리.’도시 우선 지휘자에게는 성녀 감시 강화.성녀 우선 지휘자에게는 대행 후보 등록.응답 불가 또는 권한 분산 지역에는 별도 조치가 있었다.‘흑갑 회수조 파견.’하겐의 눈길이 굳었다.“회수?”그 아래 설명이 이어졌다.지역 지휘 구조가 중앙 분류를 거부할 경우, 흑갑 기사가 현장에 들어가 기존 지휘 인장과 검증판을 회수한다.필요하면 새 대행자에게 이전한다.사람을 죽이라는 문장은 없었다.그러나 직무를 빼앗는 절차였다.“흑갑 기사들은 운반만 한 게 아니었군요.”이레나가 말했다.레나르트는 현장 밖 투명 대기선에서 문서를 보고 있었다.그의 얼굴이 굳었다.“저 문서는 처음 봅니다.”하겐이 그를 바라봤다.“갑주 7번 안에 그런 검증판이 있었잖나.”“용도를 전부 알지는 못했습니다.”“썼다고도 했고.”“국경 검문과 폐쇄기록고에서요.”“지역 지휘자 회수에는?”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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