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 7화
어둠은 깊고도 고요했다. 청연국의 화려한 비단 향도, 비린내 나는 아스팔트 냄새도 닿지 않는 완벽한 암전(暗轉).
그 칠흑 같은 심연의 한가운데서 가민은 아주 오래된 기억의 조각을 마주하고 있었다.
다섯 살의 여름은 유난히도 축축하고 더웠다. 철이 들기도 전, 부모라는 존재는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 채 요란하게 갈라섰다. 서로 가민을 맡지 않겠다며 법원 앞에서 악을 쓰며 싸우던 그들의 뒷모습이 가민이 기억하는 부모의 마지막 잔상이었다.
덩그러니 세상에 버려진 다섯 살 어린아이를 거두어 준 것은 같은 지방의 골목길 홀로 식당을 운영하는 외할머니였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숭늉처럼 구수한 냄새가 나던 할머니의 품 안에서 가민은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주름진 손으로 매번 눌러 담아주던 밥과 가만히 등을 쓸어내려 주던 온기가 가민이 가진 유일한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신은 가민에게 그리 다정하지 않았다. 정확히 3년 전 겨울, 유일한 버팀목이자 세상의 전부였던 외할머니마저 오랜 지병 끝에 가민의 손을 잡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민아, 우리 귀여운 강아지…… 혼자 냄겨두고 가가꼬 미안해서 어째…….”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날, 가민은 울지 않았다. 울음조차 사치일 만큼 세상에 온전히 혼자 남겨졌다는 지독한 고독과
현실의 무게가 서른 살의 목을 옥죄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가민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벽을세우고 방구석이라는 가장 안전한 공간에 들어가 오직 글자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집착하게 된 것은.
글 속에서는 누구도 자신을 버리지 않았고, 누구도 죽지 않았으니까.
그런 고독의 성벽을 부수고 가끔씩 무례하게 쳐들어오던 유일한 혈육이 있었다.
바로 외할머니의 막내딸이자 가민의 이모인 ‘미자’였다.
“야, 최가민! 너 또 삼각김밥으로 때우지? 반찬 해왔으니까 당장 문 열어!”
이모는 늘 그랬다. 말은 거칠고 퉁명스러웠지만 부모 없는 조카가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던 츤데레였다. 가민이 웹소설을 쓴답시고 방구석에서 노트북만 두드릴 때도 ‘돈도 안 되는 거 왜 붙잡고 있냐’며 타박하면서도 슬며시 통장으로 월세 보증금을 보태주던 든든한 아군. 혼자 모든 책임을 지려 버티던 소심한 가민에게 이모는 세상과 연결된 마지막 생명줄과 같았다.
“비켜주세요! 응급 환자 들어갑니다! 정형외과, 신경외과 스태프 당장 콜해!”
사고 발생 후 한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각. 구급차 뺑뺑이 끝에 겨우 가민을 받아준 대학병원 응급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요란한 기계음과 핏자국이 낭자한 베드 위로 가민의 차갑게 식어가는 육체가 옮겨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실의 두꺼운 자동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짝짝이 슬리퍼를 신은 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오열하는 이모 미자였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1시간 동안 미친 듯이 차를 몰고 온 터였다.
“가민아! 가민아, 우리조카! 이게 무슨 일이야! 이모 보고 눈 좀 떠봐, 제발!”
머리부터 피 범벅이 된 조카의 처참한 몰골을 마주한 이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핏대를 세우며 통곡했다. 가민의 하얗게 질린 손을 꼭 붙잡은 이모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내 조카를 왜 잡아 가려고 그래, 왜! 우리 가민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모의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응급실 천장을 울렸다. 심전도 모니터의 그래프가 위험천만하게 요동칠 때마다 미자의 가슴도 갈갈이 찢겨 나갔다. 겨우 숨을 붙이고 있는 가민의 육체 곁에서, 이모는 그렇게 영혼을 쏟아내듯 울부짖고 있었다.
그 순간, 옆 베드의 커튼 너머에서 의사들의 다급한 심폐소생술 소리와 함께 거친 기계음이 길게 이어졌다.
-삐이이이이--------.
“2026년 7월 18일 오후 0시 15분, 환자 사망하셨습니다.”
가민과 충돌했던 전동 킥보드의 또 다른 탑승자, 만 열다섯의 중학생이었다. 거친 충돌의 여파로 뇌출혈이 너무 심했던 소년은 끝내 골든타임을 넘기지 못하고 차가운 병상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순간의 무모함이 불러온 대가는 소년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 비극의 파편은 고스란히 남겨진 가민의 육체를 향해 사정없이 튀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응급실 전체를 차갑게 지배하는 순간이었다.
같은 시간, 차원 너머 청연국 연가 본가 처소.
“허어억……!”
암전되었던 가민—아니, 연월린의 육체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침상 위에서 거칠게 튀어 올랐다. 가민의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적셨다. 그것은 자신의 눈물이자, 저쪽 세계에서 자신을 붙잡고 오열하는 이모의 슬픔이 영혼의 끈을 타고 넘어온 감정의 잔해였다.
옆 베드에서 소년이 사망하며 뿜어낸 죽음의 서늘한 기운이 차원을 넘어 가민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아씨! 정신이 드십니까? 의원님, 아씨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채담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지만, 가민의 고통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슴을 쥐어짜는 원인 모를 통증과 산소가 허파로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독한 호흡 곤란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 이게 무슨…… 윽! 하아, 흐윽!”
“아씨! 숨을 쉬십시오! 전담 의원님, 어서 맥을 짚어보십시오!”
전담 의원 지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민의 손목에 명주실을 감고 맥을 짚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맥박은 미친 듯이 날뛰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침을 놓고 독을 검사하는 약재를 입에 물려보아도 아무런 약효가 듣지 않았다. 그 누구도 이 무서운 발작의 원인을 진단해 내지 못했다. 당연했다. 이 고통의 근원은 청연국이 아닌, 대한민국 OO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있었으니까.
가민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방구석 작가로서 수천 편의 판타지 설정을 다루며 축적된 추측이 경고음을 울렸다.
‘내 현실 세계의 진짜 몸이…… 지금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구나. 그 육체가 완전히 숨을 거두면, 나도 여기서 끝이야. 진짜 몸이 살아있어야만 원래 세계로 돌아가든 여기서 살든 할 수 있어!’
그 잔인한 진실을 증명하듯, 기이한 시각적 이변이 가민의 눈앞에 펼쳐졌다.
탁자 위 망원경을 보지 않고 맨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청연국 수도 사방의 하늘 끝자락을 감싸고 있던 묘한 일렁임과 아지랑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일렁임은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마치 거대한 극장의 암막 커튼이 닫히듯 가민의 처소를 향해 사방에서 범위를 좁히며 압착해 들어오고 있었다.
세계의 경계면이 무너지고 있었다. 공간 자체가 깨진 픽셀처럼 파르르 떨리며 어둠 속으로 침식되는 풍경은 이 차원의 문이 닫히기 직전이라는 절대적인 전조 증상이었다. 원래 세계의 최가민이 완전히 사망해 영혼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이 이세계의 차원문마저 영원히 봉인되어 공간 자체가 소멸해 버리는 이 세계의 절대적인 규칙이 가민의 뇌리에 본능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늘이 좁아질 때마다 가민의 숨통도 함께 조여들었다.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세계의 끝을 보며 가민은 침상 시트를 찢어발길 듯 쥐었다.
OO의 응급실에서 이모가 제 손을 꼭 붙잡고 기도를 시작한 온기가 아주 미세하게 차원을 타고 넘어왔기에, 가민은 간당간당하게 숨을 이어 붙였다. 이모가 울부짖으며 붙잡아둔 진짜 최가민의 생명줄이, 이곳 청연국의 연월린을 유일하게 지탱하는 실타래였다.
가민은 여전히 귓가에 환청처럼 웅웅거리는 이모의 오열 소리를 들으며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물었다.
‘이모…… 나 여기 살아있어. 어떻게든 버티고 있으니까 제발 그쪽의 나를 포기하지 마.
나도 안 죽고 버틸 테니까……!’
사방의 하늘이 시커넓게 일렁이며 좁혀져 오는 절대적 위기 속에서 외톨이 작가의 목숨을 건 지독한 차원 생존 투쟁이 본격적으로 닻을 올렸다.
영혼이 완전히 빙의된 건지, 아직 상황 파악이랑 세계관도 채 다 파악하기 전에 거대한 위기에 닥쳐버린 우리 가민이... ㅠㅠ! 알고 보면 저쪽 원래 세계의 육체와 어느 정도 연결이유기(공유)가 되는 것 같죠? 과연 원래 있던 세계의 육체가 사망하게 된다면, 이세계 월린 안의 가민이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는 미스터리와 긴장감 넘치는 전개! 다음 화도 많관부입니다!
제 35화 현의 선율과 검의 궤적 정자 위에 자리를 잡은 월린은 그 광경을 보며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사실 월린의 머릿속은 현재 연가의 훈련장이 아니라, 과거 웹소설 작가 시절 밤을 지새우며 써 내려갔던 무협지의 한 장면 그 자체였다.'그래, 바로 저거야. 연호가 왼쪽에서 공격을 흘리면 유현이가 오른쪽 빈틈을 완벽하게 커버하며 들어오는 저 흐름! 저건 단순히 검술이 아니야. 두 무사 간의 관계성이 쌓인 서사지, 서사! 서로를 믿지 않는 척, 무심한 척하면서도 실상은 위기의 순간에 등을 맞대고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는 저 묵묵한 브로맨스! 이게 바로 무협의 낭만 아니겠어? 현실에서 직관하는 맛은 차원이 다르구나!'월린의 눈동자가 오타쿠 광기로 번뜩였다. 뇌내에서는 이미 연호와 유현이 겪을 험난한 고난과, 그 과정에서 피어날 끈끈한 유대, 그리고 비극적인 서사까지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월린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짐짓 비장한 표정으로 망상을 이어갔다."캬, 좋다! 저 찰나의 눈빛 교환! 저게 바로 '쌍벽'의 진수지. 연호의 검이 호랑이라면 유현의 검은 용이라. 둘이 합쳐지면 가히 천하무적일 것이야. 저 조합이라면 독자들 반응은 무조건 폭발인데... 하필 이 세계엔 웹소설 플랫폼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월린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무장 아래에서 두 무사는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합을 맞추고 있었다. 유현은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예리한 눈빛으로 연호의 등 뒤를 살폈다."형님, 셋을 셀 때 공중으로 도약하십시오. 제가 하단을 휩쓸겠습니다.""알았다."단 세 마디의 대화. 그것으로 충분했다. 연호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내리찍자 유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회전하며 상대의 하단을 쓸어버렸다. 연호의 검이 회전할 때 유현은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빈틈을 채웠다. 둘의 검이 맞물리며 발생하는 금속음은 규칙적이고도 위협적이었다. 제 형님의 등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움직임을 지배하고 있었다. 월린은
제 34화 ‘어머니’라는 어두운 그늘 연가의 정문 앞, 평화롭던 공기가 소란에 휩싸였다. 정문 수문장들이 문 앞의 여인과 사내들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서서 연가를 올려다보던 은교는 비단옷을 걸치고도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내가 연호의 어미다! 왜 가주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 거냐!"연호가 연가에 들어간 뒤로 은교의 삶은 통째로 변했다. 연호가 매달 부치는 돈으로 집안은 살만해졌고, '연호의 본가'라는 소문 덕분에 침선가는 손님들로 붐볐다. 하지만 은교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녀에게 연호는 가문을 일으킬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훈련 중 소란을 듣고 달려온 연호는 정문 앞의 은교를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꺼이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악몽이 현재의 평온을 침범하고 있었다."연호야!"은교는 아들을 보자마자 계산적인 미소를 지었다."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대박이 났다. 이제는 옷감뿐만 아니라 상단들도 우리를 찾더구나. 연호야, 이젠 엄연히 차기 가주의 남첩 아니냐? 대상단이라던 정실 남편 분은 육촌까지 특혜가 있다던데, 우리가 연가의 인맥을 빌려 무역권을 따내면 우리도 금방 대상단이 될 거다. 당장 가주에게 말해라!"연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흉터가 남은 손바닥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 곁에서 유현은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현은 연호를 걱정하면서도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어머니,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가주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일 수 없습니다.""허락? 내가 네 어미다! 네가 내 덕에 사람 구실하고 사는 거 아니냐? 그까짓 가주가 뭐 대단하다고 유세냐!"분을 못 이긴 은교가 연호의 뺨을 치려 손을 번쩍 치켜올렸다.그 찰나, 유현이 움직였다."악!"은교의 손목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느새 다가온 유현이 은교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의 눈빛은 서늘했다."어머니라고 하셨습니까."유현의 말투는 건조하고 딱딱했다. 그는 은교를 보지도 않은 채 손목을
제 33화 흉터를 들여다보는 시선연가의 식사 자리는 늘 북적였다. 가문의 세력만큼이나 식탁 위는 풍성했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온기를 채워주는 것은 차기 가주인 월린과 좌우에 나란히 앉은 연호와유현이었다. 그들은 월린의 가장 든든한 방패이자, 차가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뉘일 수 있는 안식처였다.월린은 양옆에 앉은 두 사내의 커다란 손을 하나씩 덥석 잡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자, 오늘 반찬은 태원 씨가 특별히 보내준 고기 요리야! 우리 대장님들, 이 넓은 저택과 나를 지키려면 덩치 유지하는 데 이 정도는 당연히 먹어줘야지."월린의 엉뚱하면서도 다정한 행동에 연호와 유현은 익숙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녀의 밝은 표정 이면에 문득 멈춰 선 시선을 눈치채곤 눈빛을 가라앉혔다.월린의 시선이 향한 곳은 연호의 왼쪽 손바닥이었다. 젓가락을 쥔 손바닥 한가운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하얗게 뒤틀린 흉터가 유독 도드라져 있었다. 훈련 중 스치듯 생긴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아주 깊고 무자비한 무언가에 강하게 짓눌렸던 처절한 흔적이었다.유현은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고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정적을 지켜보았다.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말없는 아픔이 묵직하게 배어 있었다.밤이 깊어가고, 월린은 결국 연호를 자신의 처소로 불렀다.달빛이 창호지 문을 비추는 고요한 방 안. 월린은 달콤한 설탕 과자가 담긴 접시를 연호에게 밀어주었다. 연호가 긴장한 마른침을 삼키는 동안, 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과자 하나를 집어 그의 입가로 가져다주었다."연호, 이거 먹어봐. 오늘 시장에서 가장 달콤한 걸로 구해온 거야."자연스럽게 과자를 먹여주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커다란 왼쪽 손을 펼쳤다. 손가락 마디마디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바닥, 그 중심을 가로지르는 선명한 흉터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월린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났다."이거... 옛날에 엄청 아프지 않았어? 무사 훈련 중 생긴 흔한
제 32화 [연호 과거]버려진 자식의 기억바람을 가르는 칼날은 연무장의 적막을 찢어 놓았다. 연호의 상체는 쉼 없이 흐르는 땀으로 젖어, 햇빛을 받아 구릿빛으로 찬란하게 빛났다. 결이 살아있는 탄탄한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남성적인 매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했다. 연가의 모든 무사들이 그를 보며 감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에게 연호는 정점에 선 대장이자, 완벽한 신체의 소유자였으니까.하지만 그 화려한 근육 속에 깃든 깊은 골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매일의 루틴은 단련이 아닌 생존이었고 맹목적인 인정 욕구의 결과물이었다.연호의 과거 기억 속에서 친 어머니 이은교는 ‘가문의 서열'을 먼저 쥐고 있었다.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의 차녀였던 은교는 대대로 정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는 '박복한 집안'의 징크스를 안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가문의 명맥을 잇기 위해 비슷한 수준의 귀족과 혼인했으나 자식 하나 없이 남편마저 병으로 일찍 여의고 말았다. 가문이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급박하게 남첩을 들였다. 그가 바로 침선가(針線家)를 운영하던 중소 상인, 연호의 아버지 재우였다.어머니에게 이 결혼은 애정이 아닌 수단이었다. 그녀는 재우의 손재주를 이용해 침선가를 일으켰다. 재우가 밤낮으로 옷을 짓고 기물을 수선하면, 은교는 그 옷감을 들고 귀족가를 돌며 영업을 했다."너는 귀족인 아들이다. .. 네가 정녕 평생 옷감이나 깁다가 죽을 셈이냐?"어머니의 히스테리는 매일 밤 집안을 울렸다. 귀족의 혈통을 가졌음에도 '상인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귀족 취급조차 받지 못하는 현실. 은교는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귀족가의 품위’를 갉는다며집안 등급에 막혀 큰 상단이 되지 못한다는 열등감은 고스란히 연호에게 투사되었다. 맛있는 간식이 생기면 은교는 한 살 위 누나인 수빈의 입에 먼저 넣어주었다. 연호는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는 아버지 재우를 도와 수선하는 기물을 만들며 상인으로서의 기술을 익
제 31화. 청연(淸延)의 위계 그리고 연가(連家)의 무인들청연국(淸延國)은 철저히 계급과 직업이 명시된 나라였다. 이 땅에서 사내들이 택할 수 있는 삶의 궤적은 대개 그들이 발붙인 땅의 비옥함과 가문의 뿌리, 그리고 타고난 기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기생으로 화려한 막을 올리거나, 시종으로 평생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거나 상단에 몸을 실어 부를 쫓거나, 혹은 무인으로서 칼을 쥐는 것.그중에서도 무인이라는 직업은 단순한 힘의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았다.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해서 전장에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하는 지적 능력, 전술적 전투 센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구의 칼이 되어줄 것인가’라는 가문빨이 뒤섞인 복합적인 체계였다.월린은 책상 위에 펼쳐진 두꺼운 서적들을 정리하며 청연국의 사회를 분석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계급도는 명확했다. 황실 전속 무사가 정점에 있고, 그 아래로 귀족 가문의 호위무사들이 있었다. 중소 상인 그 이하 집안에서 올라온 이들은 흔히 ‘문지기’라 일컬어지는 하급 무사의 범주에 묶였다.하지만 연가는 달랐다. 본래 무사양성기관에서 하급 무사로 키워졌으나 연호와 유현은 월린의 어머니, 즉 전대 가주에게 무인대회에서 발탁되어 간택받았다. 그들은 연가 라는 가문의 울타리 안에서 뼈를 깎는 훈련을 견뎌냈고, 마침내 실력을 인정받아 무사들의 우두머리, ‘대장’의 위치에 올랐다.‘이세계는 설정이 되게 복잡하네…. 강한 무사들이 왜 그토록 귀족이나 부유층의 첩으로 간택당하길 바라는지 이해가 돼.’가민은 망원경으로 멀리 시장을 살폈다. 황실의 전속 무사가 되어 쳇바퀴 돌듯 궁을 지키는 것보다, 세력 있는 귀족 가문의 남첩으로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빠른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되어주기 때문이었다. 무사라는 계급은 첩으로서 간택당하기에 더없이 매력적인 재료였다. 튼튼한 체구와 단련된 정신, 그리고 복종이라는 가치를 체득한 이들이니까. 연호와 유현은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귀족 호위무사라는 정점에 도달한 산증인들이었다
제 30화. 연가(連家)의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그러나 가주실로 들어선 월린의 손에 들린 서찰 한 통이 그 적막을 유쾌하게 깨뜨렸다. 멀리 떠나 있는 정실 남편 연 태원에게서 온 것이었다.월린은 봉투를 보자마자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분홍빛 종이의 서찰은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셨다. 서둘러 봉인을 뜯자 태원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어딘가 들뜬 필체가 드러났다.[내 사랑하는 아내 월린에게.]첫 문장부터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태원은 타지에서의 고된 무역 일상과 소소한 풍경들을 상세히 적어 내려갔다. 월린은 답장을 쓰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녀는 벼루에 먹을 갈며 창밖을 잠시 내다보았다. 태원이 떠난 뒤로 연가의 풍경은 그대로인데 왠지 모를 빈자리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월린은 붓 끝에 먹을 충분히 묻혔다. 종이 위로 스며드는 검은 먹물은 마치 그녀의 평온한 일상에 떨어지는 작은 점 같았다.‘태원 씨, 당신이 떠난 뒤로 여기는 별일 없어요.’붓을 놀리는 손끝이 조금 망설였다. 그건 그리움이라기보다 태원이 없는 빈자리가 주는 낯선 적막함이었다. ‘연월린’의 육체에 깊게 새겨진 잔상인지 과거 태원이 처음 정실로 들어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던 그날의 풍경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이 서찰 한 장에 온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월린은 서찰 귀퉁이에 하트와 별 모양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귀족들이 가주의 위엄을 논할 때 월린은 그저 투박한 하트 하나에 제 마음을 다 담았다. 다꾸용 스티커나 알록달록한 색볼펜이 없는 세상이라니 그녀는 잠시 입술을 삐죽이며 붓 끝을 더 정교하게 놀렸다.‘연호랑 유현이도 잘 지내요. 당신이 보낸 안부 덕분에 다들 기운 차렸어요.’그녀에게 태원은 그저 자기 사람이었고 이 서찰은 연가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서 나누는 지극히 사적인 대화였으니까. 서찰을 다 쓰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연무장 한쪽, 태원이 보낸 소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