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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화. 제주에서 온 사진

Author: 에이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7 21:22:48

제주에 온 뒤부터 나는 도현에게 하루에 사진 한 장만 보냈다.

누가 정한 규칙은 아니었다.

첫날 내가 바다 사진을 보냈고.

둘째 날 돌담을 보냈고.

셋째 날부터 자연스럽게 하루 한 장이 됐다.

사진의 종류도 별 의미가 없었다.

바다.

돌담.

커피.

운동화 끝.

비에 젖은 창문.

어느 날은 그냥 길 위에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

도현은 늘 비슷하게 답했다.

[봤습니다.]

그뿐이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다.

그런데 닷새째도.

일곱째도.

아홉째도.

정말 똑같았다.

[봤습니다.]

열흘째 되는 날.

나는 결국 저녁 통화에서 물었다.

“왜 맨날 ‘봤습니다’만 해요?”

도현이 잠시 조용해졌다.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그런데요?”

“너무 성의 없잖아요.”

“성의가 없어서 그렇게 쓰는 건 아닙니다.”

“그럼?”

도현은 한참 생각하다 말했다.

“더 말하면.”

“응.”

“당신이 저에게 반응하느라 제주를 덜 볼까 봐.”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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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달 뒤. 숫자가 나왔다. 예상대로 매출 성장률은 낮아졌다. 전년 동기 대비 증가 폭은 이전 분기보다 작았고, 외부 투자자들이 기대했던 수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다른 숫자가 있었다. 핵심 직원 퇴사자. 0명. 처음이었다. 나는 보고서를 한참 봤다. “진짜 0이에요?” 한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휴직자는?” “있어요. 퇴사는 아니고.” “이직 예정자는?” “현재까지 확인된 사람 없습니다.” 카렐이 옆에서 태블릿을 넘겼다. “핵심 인력뿐 아니라 전체 자발적 퇴사율도 낮아졌습니다.” “얼마나?” “작년 동기 대비 31%.” 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 매출 숫자였다면 바로 반응했을 것이다. 잘했네. 더 올릴 수 있겠네. 다음 목표는 얼마. 예전의 나는 항상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0명. 아무도 떠나지 않은 분기. 그 숫자가 이상하게 오래 눈에 남았다. 월간 운영회의에는 처음으로 직원대표도 참석했다. 새로운 성장 목표를 평가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 도시별 책임자. 재무. 인사. 운영. 직원대표까지. 나는 일부러 보고서를 먼저 설명하지 않았다. “어땠어요?” 직원대표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확실히 덜 지칩니다.” “구체적으로?” “승인 대기 시간이 줄었고요.” “네.” “갑자기 추가되는 신규 프로젝트가 거의 없었습니다.” 카렐이 바로 끼어들었다. “거의가 아니라 없었습니다.” 직원대표가 웃었다. “맞습니다.” “또요?” “중간관리자들이 예전보다 휴가를 실제로 씁니다.” 나는 인사 자료를 봤다. 정말이었다. 휴가 사용률도 올라가 있었다. “이게 다 성장률 낮춘 것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한예린이 말했다. “전부는 아니겠죠.” 카렐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스템 개선 영향도 있습니다.” 직원대표가 덧붙였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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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90화. 한 달 뒤의 밤

    제주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낮 동안은 이상할 만큼 평범했다. 나는 밀린 메일을 정리했고. 도현은 서재에서 회의 자료를 확인했다. 같은 집에 있었지만 각자 자기 일을 했다. 한 달 전과 달라진 건 거의 없어 보였다. 다만. 서로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방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불안하지 않다는 점. 그리고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면 된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 그게 달랐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제주에서 가져온 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도현이 맞은편에 앉았다.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먼저 고개를 들었다. “왜 봐요?” “생각 중입니다.” “뭘?”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은 원합니까?” 질문의 의미를 바로 알았다. 한 달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제주에 첫 일주일 같이 있을 때도 일부러 쉬었다. 그 뒤로는 서로 다른 도시에서 지냈다. 그러니까 오늘은. 한 달 만이었다. 나는 노트를 덮었다. “네.” 도현의 시선이 조금 깊어졌다. 하지만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랜만이라도 기존 범위를 그대로 가정하지 않겠습니다.” “알아요.” “한 달 전 괜찮았던 게 오늘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네.” “무엇이 좋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상하게. 오히려 분명했다.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더 잘 알 것 같았다. “손목.”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대는 싫어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리드도 오늘은 싫고.” “좋습니다.” 나는 잠시 멈췄다. 도현이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목소리는…” “네.” 나는 그를 바라봤다. “좀 세게.” 그 순간. 도현의 눈빛이 천천히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남편이던 얼굴에서. 익숙한 무게가 내려앉았다. 그래도 마지막 확인은 같았다. “색깔.” “초록색.”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89화. 공항이 아닌 집

    도현은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 약속대로 집에서 기다렸다.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몇 번이나 휴대폰을 확인했다. 도착 시간. 수하물 찾는 곳. 집까지 걸리는 시간. 예전 같았으면 도현에게 하나씩 알려줬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출발 전에 한 번. [출발해요.] 도현의 답.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내가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 곧바로 답이 왔다. [조심히 오십시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괜히 이상했다. 도현이 공항에 없다는 사실이. 예전 같으면 조금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한 달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그래도 얼굴이라도 빨리 보고 싶지 않나. 그런 생각.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공항에 오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도현은 그대로 했다. 보고 싶다고 했으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보다 내가 원하는 방식을 먼저 지킨 것. 그게 마음에 들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느껴진 건 냄새였다. 따뜻한 국물 냄새. 나는 캐리어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요.” 주방 쪽에서 도현이 바로 나왔다. “왔습니까.” 그는 몇 걸음 다가오다가 멈췄다. 나는 그걸 보자 웃음이 났다. “왜 거기 서 있어요?” “안아도 됩니까?” 한 달 만에 보는 첫 질문이었다.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놓았다. “네.” 이번에는 오래 안겼다. 제주에서 출발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막상 품에 들어오니까 이상하게 힘이 조금 빠졌다. 도현의 팔이 내 등을 감쌌다. 조금 단단하게. 그래도 내가 몸을 움직이자 바로 힘을 풀었다. “더 세게 해도 돼요.” 내가 말하자 그제야 팔에 힘이 들어갔다. “이 정도?” “응.” 몇 초 더. 그리고 내가 먼저 떨어졌다. 도현은 아쉬운 표정도 숨기지 않았다. “끝입니까?” “일단.” “일단.” 그가 따라 말했다. 나는 웃으며 식탁 쪽을 봤다. 냄비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

  •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288화. 돌아오라는 말

    제주에 온 지 스물다섯째 날. 이제 이 집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아침이면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열었고. 바람이 강하면 얇은 겉옷부터 챙겼고. 자주 가는 카페에서는 굳이 메뉴판을 보지 않았다. 노트북을 켜면 회사였고. 노트북을 닫으면 제주였다. 그 경계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한 달이 길게 느껴졌는데. 막상 스물다섯째 날이 되자 이상하게 짧았다. 다섯 날. 딱 그만큼만 더 있으면 다시 서울이었다. 그날 저녁. 도현과 통화를 했다. 평소처럼 별일 없는 하루였다. 카렐이 또 회의에서 반대했고. 한예린이 예산표를 다시 보냈고. 나는 오후에 혼자 산책을 다녀왔다. 도현도 서울에서 회의를 두 개 했다고 했다. 한동안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갑자기. 도현이 말했다. “서윤.” “응?”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많이 했다. 다만 예전에는 그 문장 뒤에 무언가가 따라붙었다. 일정을 바꾸라는 말. 비행기 시간을 확인하는 질문. 왜 굳이 더 있어야 하느냐는 이유. 혹은. 돌아오게 만들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이번에는 달랐다. 그냥 한 문장.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물었다. “왜?” “보고 싶어서.” 대답은 바로 나왔다. “일은?” “상관없습니다.” “회사에 문제 생겼어요?” “아닙니다.” “집이 심심해요?” 잠깐 침묵. “많이.” 나는 웃었다. “솔직하네.” “요즘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5일 남았는데.” “압니다.” “참아요.” 도현도 아주 짧게 말했다. “네.” 끝이었다. 정말 끝. 나는 조금 기다렸다. 혹시라도 다음 말이 나올까 봐. [내일 와도 되지 않습니까.] [비행기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달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도현은 오히려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오늘 저녁은 뭘 먹었습니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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