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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فصول

081화. 듣고도 모른 척

서민석의 휴대전화에는 최근 통화기록이 지워져 있었다.복구된 음성메모는 하나뿐이었다.‘내가 다 말하면, 나만 죽는다.’문장은 8초 뒤 끊겼다.납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출국 기록도 없었다. 수사관은 스스로 숨었을 가능성과 누군가에게 위협받았을 가능성을 함께 봤다.도진은 차명희에게 다시 서면 질문을 보냈다.5년 전 서민석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그가 서연의 서명을 복사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차성혁이 다원컨설팅 계좌를 만들었다는 말을 들었는지.명희의 답은 늦었다.‘서민석이 문서를 정리한다고 들었다.’‘서명 방식은 몰랐다.’‘계좌가 실제 한서연 명의인지 확인하지 않았다.’도진은 마지막 문장을 읽고 직접 찾아갔다.“의심했다고 쓰셨습니다.”명희는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그때는 확실하지 않았어.”“확인할 수 있었습니까?”“은행에 물으면 알 수 있었겠지.”“왜 안 물었습니까?”명희가 창밖을 봤다.“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구나.”도진은 그 말에 손을 움켜쥐었다.“저도 그랬습니다.”“너와 나는 달라. 나는 처음부터 서연이를 내보내려고—”“그래서 더 다르지 않습니다.”도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원하는 결론이 있었고, 거기에 맞는 말만 들었습니다.”명희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차성혁이 그 애가 돈을 원한다고 했어. 서민석이 서류를 보여줬고. 나는… 사실이면 편하다고 생각했다.”“거짓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요.”“그래.”처음으로 명희는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알고도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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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화. 신부였던 사람의 선택

윤세아는 파혼 다섯 달 만에 마지막 예물을 돌려보냈다.다이아몬드 목걸이, 양가 합작법인 지분 약정서, 신우그룹 명의로 임대한 신혼집 열쇠.차도진이 받은 것은 없었다.모든 물건은 공증인을 통해 태강가와 신우가에 각각 반환됐다.세아의 아버지는 이사회에서 딸의 경영권을 제한하려 했다. 파혼으로 신우그룹이 입은 손해와 대외 신뢰 훼손을 책임져야 한다는 명분이었다.세아는 손해 내역을 직접 계산해 내놓았다.“결혼 추진을 위해 집행된 홍보비와 법무비는 양가 공동사업 예산이었습니다. 제 개인 비용으로 처리할 근거가 없습니다.”“네가 입장문만 안 냈어도 이렇게 커지지 않았어.”“제가 침묵했으면 한서연 대표가 불륜녀가 되고, 미성년자가 홍보에 쓰였겠죠.”“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세아는 아버지를 똑바로 봤다.“제 결혼식으로 하려던 일이니까요.”그녀는 독립 사외이사에게 모멘텀PR 계약과 회의 녹음을 제출했다. 신우그룹이 파혼 뒤 허위 여론전에 참여하려 했다는 내용까지 포함됐다.결국 세아의 직무정지안은 부결됐다.대신 양가 합작법인은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세아는 표결이 끝난 뒤에도 승리한 사람처럼 웃지 않았다. 합작법인에 배정됐던 임직원 열일곱 명의 전환 배치와 계약직 보상안이 남아 있었다. 파혼은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을 이유로 실무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둘 수는 없었다.그녀는 신우와 태강이 절반씩 비용을 부담하는 정리안을 냈다. 태강 측은 파혼 책임이 신우에도 있다며 버텼고, 세아는 모멘텀PR 비용부터 공개하겠다고 맞섰다. 사흘 뒤에야 합의가 됐다.결혼은 취소 서명 한 번으로 끝났지만, 결혼을 사업으로 만든 사람들이 벌여놓은 일은 항목마다 정산해야 했다.그날 저녁 세아는 루미에르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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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화. 흔들리지 않는 계약

서울웨딩페어 조직위원회는 루미에르의 참가 취소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위약금도 없애주겠다는 조건이었다.“미성년자 신상 유출 위협을 받았다면 안 나오시는 게 맞습니다.”조직위원장이 말했다.“행사 이미지도 있고요.”민지수가 서연을 봤다. 직원들 가운데 절반은 취소를 원했다. 청림방직 결혼식을 무사히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다시 표적이 되는 행사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었다.서연은 직원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참가 여부는 오늘 투표하지 않겠습니다.”회의실 화면에 세 가지 선택지를 띄웠다.전면 취소.온라인 전시로 전환.현장 참가하되 부스와 무대 운영을 분리하고, 독립 보안감사를 붙인다.“각자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익명으로 적어주세요. 담당 업무를 거부해도 불이익 없습니다.”최은채가 물었다.“대표님은 하고 싶으세요?”“네.”“왜요?”“상대가 노리는 건 제 사생활만이 아니라 루미에르가 고객 정보를 지킬 수 없다는 인상을 만드는 거예요. 안전하게 할 방법이 있다면 현장에서 우리 일을 보여주고 싶어요.”“증거 잡으려고 가는 건 아니고요?”“그건 수사팀 일입니다. 우리 목적은 행사를 하는 것.”서연은 선을 분명히 했다.“증거 때문에 직원 안전을 걸지는 않을 겁니다.”익명 의견을 모으니 가장 큰 우려는 대형 화면과 내부 네트워크였다. 그다음은 아이 사진이 실제로 노출될 가능성, 기자들의 사생활 질문이었다.다음 날에는 실제 상황을 가정한 모의훈련을 했다. 기자 역할을 맡은 외부 홍보 자문이 부스 직원에게 시우와 도진을 질문했고, 직원들은 준비한 한 문장만 답했다.“고객과 임직원의 가족 정보에는 답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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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4화. 사진을 자른 사람

5년 전 서연의 ‘다른 남자’ 사진을 찍은 사람은 이현수라는 프리랜서 사진가였다.원본 기사를 쓴 매체에서는 외부 제보 사진이라고만 기록돼 있었다. 사진 파일의 촬영자 정보는 지워졌지만, 복원된 메타데이터에 카메라 일련번호가 남아 있었다.이현수는 현재 지방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했다.서연은 변호사와 함께 찾아갔다.사진관 벽에는 돌 사진과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현수는 서연을 보자 문을 닫으려 했다.“취재하러 온 거 아닙니다.”서경민이 명함을 내밀었다.“5년 전 촬영 건 확인하러 왔습니다.”이현수는 한참 서 있다가 둘을 안으로 들였다.“난 불법 촬영 안 했어요. 공개 행사장에서 찍은 겁니다.”“장소는 호텔 카페였습니다.”서연이 말했다.“제가 웨딩 플로리스트와 미팅하던 날이었죠.”“누군지는 몰랐습니다.”“누가 촬영을 의뢰했습니까?”이현수는 손가락으로 카메라 끈을 만졌다.“문화재단 홍보팀이라고 했어요. 행사 관계자 동선 기록이 필요하다고.”“그런데 사진은 제가 남자와 밀회한 것처럼 기사에 나갔습니다.”“그건 내가 자른 게 아니에요.”서연은 노트북에 기사 사진을 띄웠다.사진에는 그녀와 남자 한 사람만 있었다. 테이블 위 계약서는 잘렸고, 옆에 앉아 있던 플라워팀 직원들도 보이지 않았다.이현수는 서랍에서 오래된 외장하드를 꺼냈다.“혹시 몰라서 원본은 갖고 있었습니다.”원본 사진에는 다섯 명이 함께 있었다.서연은 샘플 부케를 들고 있었고, 맞은편 남자는 거래처 대표였다. 기사에서 ‘손을 잡았다’고 설명된 장면은 계약서 위 꽃잎을 치우는 순간이었다.연속 촬영된 다음 사진에는 남자의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합류하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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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화. 하나를 버리라는 제안

배정은은 예정된 조사에 나오지 않았다.조직위원회에는 건강 문제로 휴직계를 냈고, 집에도 없었다. 출국 기록은 없었지만 휴대전화 전원은 꺼져 있었다.그날 저녁 차성혁이 서연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 않았다. 모든 통화는 녹음 중이었다.“한 대표, 만나서 끝냅시다.”“변호사를 통하세요.”“변호사끼리 말하면 서로 돈만 벌지.”“그게 필요한 비용입니다.”성혁이 낮게 웃었다.“내일 오후 3시, 라온호텔 라운지. 안 나오면 웨딩페어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막아줄 수 없어.”“협박으로 이해하겠습니다.”“제안이야. 당신이 원하는 원본을 다 줄 수 있다는.”서연은 바로 끊지 않았다.“조건은요?”“차도진이 수사기관에 넘긴 자료를 회수하고, 당신은 관련 고소를 취하해. 대신 5년 전 위조문서 원본과 아이 정보 수집 경로를 넘기지.”“당신 범죄 증거를 돌려달라는 말이네요.”“범죄인지 기업 방어인지 법원이 판단하겠지.”“만날 이유 없습니다.”“하나를 골라야 할 거야.”성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회사와 진실. 웨딩페어를 포기하면 아이 사진은 묻어두지. 행사를 강행하면 루미에르 고객들이 당신 가족사부터 보게 될 거고.”서연은 통화를 끝낸 뒤 녹음파일을 서경민에게 보냈다.수사관은 예정된 만남에 나가 추가 증거를 확보하자고 했다. 서연은 동의하되 자신이 미끼가 되는 방식은 거부했다.“제가 가는 목적은 협상 내용을 확인하는 겁니다.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바로 나옵니다.”다음 날 라온호텔 라운지에는 서연 혼자 들어갔다.인접 테이블에 수사관이 있었고, 호텔 보안팀도 대기했다. 하준은 사전에 모든 절차를 승인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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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6화. 이사 해임안

차도진의 대표이사 사임은 수리됐지만, 사내이사 임기는 남아 있었다.차성혁은 그것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다.정기 이사회 하루 전, ‘중대한 경영 판단 실패 및 회사기밀 외부 유출’을 이유로 도진의 이사 해임안이 공시됐다. 주주총회에서 통과되면 그는 이사회 의석과 남은 공식 권한도 잃게 된다.강태욱이 개인 휴대전화로 연락했다.“우호 지분 세 곳이 돌아섰습니다.”“이유는?”“신용등급 하락과 파혼 손실을 들고 있습니다. 차성혁 전무가 금융사 만기연장과 해임안을 묶은 것 같습니다.”도진은 숫자를 확인했다.해임을 막으려면 시우 관련 문서 공개와 수사를 중단하겠다는 합의를 해야 했다. 성혁 측에서 보낸 비공식 제안은 여전히 유효했다.“거절합니다.”“한 번 더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생각했습니다.”“해임되면 내부자료 접근권도, 감사 요구권도 없습니다.”“이미 외부 조사에 넘길 건 넘겼습니다.”“남은 게 있을 수 있습니다.”“그걸 찾겠다고 아이와 한 대표를 협상물로 둘 수는 없어.”강태욱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럼 내일 직접 참석하십니까?”“네.”도진의 개인 변호사는 표결 절차부터 문제 삼았다. 사내이사 해임은 이사회 의결만으로 끝낼 수 없어 임시 주주총회가 필요했고, 이사회는 소집안과 직무 제한만 결의할 수 있었다. 성혁 측 자료는 두 절차를 일부러 섞어 언론에 흘리고 있었다.“내일 바로 해임된다는 기사는 틀렸습니다.”“정정은 하되, 절차 문제만으로 자리를 지키려는 인상은 피합시다.”도진은 주주들에게 보낼 의견서에 자신이 수사 중단을 조건으로 경영권 거래를 제안받았다는 사실도 적었다. 녹음 원본은 수사기관 허락 없이 공개하지 않았고, 확인 가능한 문장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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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화. 희생하지 말아요

서연은 웨딩페어 리허설 전날 도진을 만났다.장소는 루미에르 회의실이었다. 직원들이 퇴근한 뒤였고, 테이블에는 보안보고서와 문서보관소 열쇠 사진이 놓여 있었다.“이사 해임, 정말 당신 책임이라고만 생각해요?”서연이 물었다.“제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시우를 지키려고 자리를 버렸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했죠.”“그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기사들은 전부 그렇게 써요. 전처와 아들을 위해 경영권을 버린 순정남.”도진의 입술이 굳었다.“정정 요청하겠습니다.”“기사만의 문제가 아니에요.”서연은 팔짱을 풀고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당신도 마음 한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이만큼 잃었으니, 언젠가는 서연도 알아주겠지.”“그렇지 않습니다.”“확실해요?”도진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정직하려면 자신의 마음 안쪽까지 봐야 했다.해임안이 통과됐을 때 그는 서연이 알게 될 것을 생각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자신을 조금 다르게 볼지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었다.“전혀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그가 말했다.“하지만 그 기대를 서연 씨에게 갚으라고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서연은 한동안 그를 봤다.“그게 중요해요.”“알고 있습니다.”“당신이 잃은 걸 내 빚으로 만들지 마세요.”“그러지 않겠습니다.”“내가 돌아오지 않아도요?”도진의 얼굴에 아픔이 지나갔다. 그래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네.”서연은 도진이 서명했던 공증 문서를 다시 꺼냈다. 권리를 제한하는 조항은 있었지만, 희생을 사랑의 증거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문장은 없었다. 계약으로 감정까지 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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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화. 권한이 없는 하루

도진은 웨딩페어 첫날 오전 8시에 출근했다.‘출근’이라고 부르기엔 임시근로계약서가 하루짜리였지만, 그는 시간당 급여가 적힌 계약서에 서명했다.계약서에는 업무 범위와 비밀유지, 촬영금지 조항이 있었다. 사고가 나면 태강이 아니라 보안업체 지휘체계에 따라 보고하고, 계약 종료 뒤에는 본 자료를 개인적으로 보관하지 않는다. 도진은 이름 옆에 주민번호 대신 근로자 식별번호를 적었다.담당 직원은 통장 사본과 비상연락처를 요청했다. 도진이 비서실 번호를 말하려다 개인 번호로 고쳤다.“보호자 연락처도 적어주세요.”펜이 잠깐 멈췄다. 서연의 번호를 쓸 자격은 없었다. 그는 강태욱의 개인 번호를 적었다.통제실 책임자는 전날보다 더 단호했다.“오늘은 참관만 하시는 겁니다. 이상 징후가 보여도 직접 차단하지 마세요.”“네.”“그리고 현장 직원들한테 회장님처럼 말씀하시면 곤란합니다.”“이제 회장 아닙니다.”“그래도 다들 얼어붙어서요.”도진은 잠깐 생각했다.“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겠습니다.”부스에서는 루미에르 직원들이 상담 테이블을 정리하고 있었다.도진은 지나가다 무거운 샘플 상자를 든 최은채와 마주쳤다.“제가—”손을 내밀려다가 멈췄다.“도와드려도 됩니까?”최은채는 어색하게 웃었다.“네. 저쪽 테이블 밑에 놔주세요.”도진은 상자를 들었다.한때 수백 명에게 전화 한 통으로 일을 시키던 사람에게, 상자 하나 놓을 위치를 묻는 일이 낯설었다.“거기 말고 왼쪽이요.”“여기입니까?”“조금 더 안쪽.”그는 시킨 대로 움직였다.최은채가 말했다.“생각보다 말 잘 들으시네요.”“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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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9화. 삭제하지 못한 메일

메일 본문은 짧았다.‘병원에서 나온 것을 봤다. 임신일 가능성이 있다. 네가 알기 전에 정리하는 편이 낫겠다.’차명희는 보내기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그렇다고 내용을 지우지도 못했다.메일은 문화재단과 태강 본사 사이 자료를 백업하던 서버에 남아 있었다. 웨딩페어 침입계정의 복구 주소가 배정은의 옛 계정과 같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수사팀이 보전 중인 백업을 다시 검색해 찾아낸 것이었다.도진은 화면 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원본 보존부터 하겠습니다.”보안업체 책임자가 말했다.“읽으실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수사기관 요청 없이 다른 메일은 열 수 없습니다.”“알겠습니다.”도진은 사진을 찍지 않았다. 서경민과 수사관이 도착할 때까지 자리에서 기다렸다.수사관은 메일 헤더와 임시저장 시각, 마지막 열람 계정을 따로 추출했다. 작성자는 차명희의 계정이었지만 마지막으로 열어본 사람은 배정은이었다. 5년 전 이혼 다음 날, 그리고 웨딩페어 준비가 시작된 달에 한 번씩 접속한 기록이 있었다.“내용을 지우지는 않았네요.”책임자의 말에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겨둔 것이 양심 때문인지, 훗날 명희를 통제할 자료로 쓰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확인된 것은 누가 언제 열었는지뿐이었다.서연은 행사 종료 뒤 통제실로 왔다.“봤어요?”“네.”“차명희 씨가 임신을 알았다는 증거네요.”“가능성을 알았습니다.”도진은 정확히 정정했다.“그리고 저에게 알리려다 멈췄습니다.”“왜 멈췄는지는 아직 모르고요.”“네.”서연은 메일을 다시 읽었다.그날 자신은 산부인과에서 임신 7주 진단을 받고, 도진에게 전화하려 했다. 차명희 비서에게 연락을 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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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화. 웨딩페어의 목격자

스타일리스트 이름은 문혜진이었다.5년 전 태강가 전담 의상팀에서 일했고, 서연의 첫 결혼식 드레스 수선에도 참여했다.그녀가 보관한 일정표에는 이혼 직전 호텔 피팅 일정이 적혀 있었다.오후 1시, 한서연 플라워 미팅.오후 1시 20분, 문화재단 홍보 촬영팀 대기.오후 1시 30분, 차명희 이사장 도착.서연의 미팅은 공개 행사가 아니었다.누군가 미리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지 않으면 촬영팀이 대기할 수 없었다.“왜 일정표를 갖고 있었습니까?”서경민이 묻자 혜진이 손가락을 맞물렸다.“그날 이사장님이 모든 기록을 폐기하라고 했어요. 찜찜해서 제 개인 수첩만 남겼습니다.”“차명희 씨가 사진 촬영을 직접 지시하는 걸 들었습니까?”“배정은 씨한테 ‘남자와 둘만 있는 장면으로 만들어’라고 말하는 걸 들었어요.”“당시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요?”혜진은 고개를 숙였다.“다음 날 계약이 끊겼습니다. 다른 호텔에도 취업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고요.”“돈을 받았습니까?”“아니요.”“침묵의 대가로 이익을 얻은 적은요?”“없습니다.”서경민은 혜진이 당시 해고된 기록과 이후 지원한 호텔 명단도 확인했다. 세 곳에서 최종 합격 직전 채용이 취소됐고, 그중 한 곳 인사담당자 메일에는 ‘태강 의상팀 블랙리스트 확인’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었다.혜진의 수첩만으로 촬영 지시를 입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호텔 지하주차장 기록에는 차명희 차량이 들어온 시각이, 의상실 전화내역에는 배정은 번호가 남아 있었다. 서로 독립된 기록들이 같은 시간대를 가리켰다.“기억나지 않는 건 모른다고 답하셔야 합니다.”서경민이 말하자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정확한 문장은 기억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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