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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فصول

091화. 증언과 용서

문혜진의 진술은 차명희의 서면답변과 맞아떨어졌다.5년 전 호텔 카페에서 촬영팀을 대기시킨 사람은 배정은.촬영 방향을 지시한 사람은 차명희.사진 편집과 기사 배포 비용을 지급한 곳은 다원컨설팅이었다.차명희는 변호사 입회 아래 추가 조사를 받았다.“사진을 불륜 증거로 쓰려고 했습니까?”“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언제부터 그 목적으로 사용했습니까?”명희는 물컵을 만지작거렸다.“차성혁이 사진을 보여주며 남자와 단둘이 만난 것처럼 만들 수 있다고 했을 때요.”“허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까?”“원본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그런데도 아들에게 보여줬습니까?”“네.”“한서연 씨에게 확인할 기회를 줬습니까?”“아니요.”질문이 이어질수록 변명할 공간은 줄었다.수사관은 명희에게 본인이 직접 지시한 일과 차성혁에게 들은 일을 구분해달라고 반복해서 요구했다. 사진 촬영은 명희의 지시였고, 다원컨설팅 계좌와 위조 합의서는 성혁이 제안했다. 서민석을 선택한 사람도 성혁이었지만, 명희는 그의 접근권한을 승인했다.“차성혁 씨가 하자고 해서 했다는 답변입니까?”“아닙니다.”명희가 천천히 말했다.“내가 거절할 수 있었고, 승인했습니다.”그 한 문장은 수사의 책임을 성혁에게만 밀지 않았다. 도진이 자신의 선택을 분리해 인정했던 것처럼, 명희도 이제야 자기 몫을 말하기 시작했다.명희는 한 번도 ‘태강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도진이 미리 요구한 것도, 변호사가 조언한 것도 아니었다. 그 문장을 붙이는 순간 다시 자신의 선택을 목적 뒤에 숨기게 된다는 걸 이제는 아는 듯했다.진술 녹취는 서연에게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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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화. 하나로 이어진 날짜

서경민은 회의실 벽 전체에 날짜표를 붙였다.5년 전 4월 14일.서연의 임신 확인.4월 16일.차명희, 차성혁, 서민석의 호텔 라운지 회동.4월 17일.태강호텔 용역계약서에서 서연 서명 파일 열람.4월 18일.다원컨설팅 계좌 개설과 50억 이체.4월 19일.편집된 사진 촬영.4월 20일.차명희가 도진에게 위조 자료 제시.4월 21일.서연의 전화 23통 차단.4월 22일.이혼합의서 서명.하나씩 볼 때는 우연과 기억 착오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한 벽에 붙이자 모든 일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서경민은 확정된 사실에는 파란 메모를, 진술만 있는 곳에는 노란 메모를 붙였다. 아직 추정인 부분은 흰색으로 남겼다. 벽이 한눈에 이야기를 보여준다고 해서 빈칸까지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4월 16일 회동은 호텔 예약기록으로 확인됐지만 대화 내용은 명희 진술뿐이었다. 18일 계좌 개설에는 은행 영상이 보관기간을 지나 사라졌고, 직원은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대신 제출된 신분증 사본의 팩스 발신번호가 태강 별관과 일치했다.“빈칸을 성급하게 채우면 저쪽이 전체를 조작이라고 공격합니다.”수사관의 말에 모두가 확인된 범위를 다시 표시했다.도진은 4월 20일과 21일 사이에 서 있었다.“이때 어머니에게 자료를 받았습니다.”“의심한 부분은 없었어요?”서경민이 물었다.“서연 씨 서명이 평소와 똑같다는 생각은 했습니다.”“그래서 진짜라고 믿었습니까?”“네.”서연은 맞은편에서 말했다.“너무 똑같아서 이상하다고는 생각 안 했고요?”도진은 그녀를 봤다.“안 했습니다.”“돈을 받고 떠날 사람이 왜 직접 전화했는지도?”“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더 요구하려는 거라고 했습니다.”“그 말을 믿었고.”“네.”대답은 반복될수록 변명할 곳을 없앴다.도진은 21일 칸에 자신의 메모를 붙였다.‘통화 차단 지시.’서연이 메모를 읽었다.“이건 차성혁이 시킨 일이 아니죠.”“네. 제가 했습니다.”“그날 회사 일이 얼마나 급했는지 또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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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3화. 먼저 고소한 사람

차성혁은 압수수색 영장 심사를 하루 앞두고 먼저 움직였다.서연과 도진을 상대로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고소장을 제출했다.기자들에게는 ‘전처와 전 회장이 경영권 탈취를 위해 허위 증거를 조작했다’는 자료가 배포됐다.다원컨설팅은 정상적인 경영자문 회사였고, 50억은 서연이 합의 아래 받은 자문료라는 주장.웨딩페어 영상은 모멘텀PR 직원 개인의 일탈이라는 주장.코어링크 로그는 도진 측이 불법으로 취득했다는 주장.기사 제목은 자극적이었다.[반전된 전남편 스캔들…차성혁 “내가 피해자”]민지수가 화가 난 얼굴로 노트북을 닫았다.“저쪽이 고소하면 우리가 피고가 되는 거예요?”“피고가 아니라 피고소인.”서경민이 정정했다.“그리고 먼저 고소했다고 사실이 되는 건 아닙니다.”서연은 고소장 요약본을 읽었다.성혁은 그녀가 도진과 재결합하기 위해 파혼과 경영권 분쟁을 계획했다고 적었다. 루미에르의 웨딩페어 참가도 여론 조작이라고 했다.“공동 대응할까요?”도진이 물었다.그는 같은 사무실 안에서도 서연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변호사들이 불러 함께 참석한 자리였다.“공동 입장문은 필요해요.”서연이 답했다.“다만 당신 회사 싸움과 내 명예훼손 피해를 한 덩어리로 묶지는 마세요.”“네.”“나는 경영권에 관심 없고, 당신 복귀를 위해 움직인 적도 없다는 걸 분명히 할 겁니다.”“제 입장문에도 넣겠습니다.”“‘한 대표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식으로 보호하지 말고요. 나는 수사자료를 검토했고 고소 결정도 직접 했어요.”도진은 문장을 메모했다.“한 대표가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했다.”“그 정도면 됩니다.”공동 사실확인서는 감정적인 반박을 피했다.공개하지 않는 항목도 명시했다. 시우의 사진과 의료정보, 서민석의 가족 정보, 압수수색 전인 자료의 구체적인 위치였다. 의혹을 반박한다며 또다시 아이를 증거물처럼 내놓지 않기 위해서였다.기자들에게 제공할 파일에는 모든 문서에 출처와 공개 범위를 표시했다. 배정은 녹음처럼 감정 중인 자료는 존재만 확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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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화. 사직서가 아닌 진술서

압수수색 당일 아침, 서민석이 경찰서에 나타났다.수염이 자랐고 며칠째 잠을 못 잔 얼굴이었다.그는 변호사 없이 진술하지 않겠다고 했다. 국선변호인과 신변보호 절차가 마련된 뒤에야 입을 열었다.경찰은 먼저 그가 자발적으로 출석했는지 확인했다. 가족은 별도 장소로 옮겨졌고, 휴대전화 사진에 찍힌 학교와 발신 경로도 수사 대상이 됐다. 서민석은 밤새 작성했다는 종이뭉치를 봉투째 제출했지만, 수사관은 조사 전에 내용을 맞춰보지 않았다.“기억나는 사실과 문서로 확인한 사실을 구분해서 말씀하십시오.”국선변호인이 당부했다.서민석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야 첫 문장을 말했다.“돈은 안 받겠습니다.”첫 말이었다.“면책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한 일은 처벌받겠습니다.”서경민과 도진 측 변호사는 별도 공간에서 영상으로 조사 일부를 지켜봤다. 서연은 참석하지 않았다. 서민석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이 진실 확인에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5년 전 어떤 지시를 받았습니까?”수사관이 물었다.“한서연 씨가 태강호텔과 체결한 용역계약서에서 서명 이미지를 추출하라고 했습니다.”“누가 지시했습니까?”“당시 팀장 최정환입니다.”“최정환은 누구 지시라고 했습니까?”“차성혁 전무실 특별업무라고 했습니다.”서민석은 서명을 전표와 이혼합의서에 삽입했다.서연의 일정 파일을 열어 부산 출장 날짜도 확인했다. 그 날짜에 은행 방문 기록을 만들면 알리바이가 오히려 조작처럼 보일 수 있다는 설명까지 들었다.“무슨 뜻입니까?”“차성혁 전무가… 진짜 돈을 받은 사람이라면 일부러 먼 지역 행사에 얼굴을 비췄을 수도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거짓말은 반박까지 예상해 만들어졌다.“계좌 개설에는 어떻게 관여했습니까?”“태강은행 내부 담당자에게 주민등록 사본과 위조 위임장을 전달했습니다. 이경자 씨는 실제 개설 직원이 아닙니다. 나중에 목격자 역할을 맡길 사람으로 명단에만 넣었습니다.”“50억은 어디로 갔습니까?”“계좌에 하루 머문 뒤 다원컨설팅 자회사 세 곳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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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화. 창고의 원본

오병철의 열쇠는 세 번째 캐비닛에 맞았다.문이 열리자 종이 냄새와 오래된 습기가 퍼졌다.상단에는 다원컨설팅 회계장부가 있었다.그 아래에는 태강호텔 용역계약서 원본, 서연의 일정표 사본, 위조 계좌개설 신청서, 이혼합의서가 날짜별로 묶여 있었다.각 봉투에는 보관 이유를 뜻하는 약어가 적혀 있었다. `L`은 법무, `P`는 홍보, `N`은 협상. 서연 관련 봉투에는 세 글자가 모두 찍혀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을 법적 압박과 여론, 경영권 협상에 동시에 쓸 자료로 분류한 흔적이었다.수사팀은 종이의 지문과 필적을 확인하기 전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캐비닛 안 습도와 먼지 상태도 기록했다. 누군가 최근 문서를 넣거나 빼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캐비닛이 비어 있었던 만큼, 발견한 자료가 전부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수사관은 모든 과정을 촬영했다.서민석이 만든 파일명과 실제 문서 봉투의 관리번호도 일치했다.가장 아래에는 작은 흰 봉투가 있었다.‘한서연 반환 우편.’차명희 비서가 버리라고 했던 초음파 사진과 편지의 또 다른 사본이었다.봉투 겉면에는 ‘수취 거절’ 도장이 찍혀 있었지만 우체국 기록과 형식이 달랐다. 태강 비서실에서 자체 제작한 도장이었다. 실제로 서연에게 배달을 시도한 우편이 아니라, 반송된 것처럼 꾸민 자료였다.편지에는 임신 사실과 다시 연락해달라는 문장이 있었고, 아래에는 서연이 병원 계단에서 급히 적은 날짜가 남아 있었다. 원본은 차명희 쪽에서 없앴지만, 협상 자료를 만들기 위해 복사해둔 한 장이 살아남은 셈이었다.서연은 수사기관에서 원본 확인 요청을 받고 다음 날 별도 증거실로 갔다.장갑을 끼고 첫 문서를 봤다.태강호텔 용역계약서 서명란에 자신이 실제로 쓴 이름이 있었다. 그 종이에서 스캔된 서명이 여러 위조문서에 붙었다.이혼합의서에는 같은 서명이 반복됐다.확대하지 않아도 복사본이라는 게 보였다. 획 끝의 잉크 튄 자국이 매번 똑같았다.“이 문서에 직접 서명한 적 있습니까?”수사관이 물었다.“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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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6화. 윤세아의 이유

윤세아는 검찰 출석 전날 서연에게 연락했다.“증언할 내용 중 당신 이름이 나옵니다.”“수사기관에서 연락받았어요.”“그래도 내가 먼저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두 사람은 신우그룹이 아닌 작은 갤러리 카페에서 만났다. 세아가 직접 운영을 맡은 신진작가 전시 공간이었다.“아버지가 결혼을 다시 추진하려고 합니다.”세아가 차를 따르며 말했다.“차도진 씨 말고 다른 집안과요.”“하실 겁니까?”“안 해요.”대답이 빨랐다.“예전에는 정략결혼도 경영 판단이라고 생각했어요. 상대가 나를 존중하고 조건이 공평하면 가능하다고.”“지금은요?”“조건이 공평한지 정하는 테이블에 내가 앉아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죠.”세아는 아버지와 나눈 최근 대화도 들려줬다. 새 혼담 상대의 이름보다 먼저 양가 지분 교환표가 놓였고, 세아가 거절하자 ‘이번에는 네가 파혼 원인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그래서 이사회에 안건을 냈어요. 오너 가족의 혼인과 회사 투자계약을 연계하지 못하게 하는 내부규정.”“통과될까요?”“처음에는 안 되겠죠.”세아는 담담했다.“그래도 회의록에는 남습니다. 다음 사람이 같은 말을 할 때 처음이 아니게요.”세아는 유리창 너머 전시장을 봤다.“차도진 씨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어요. 나도 사랑하지 않았고. 그래서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요?”“사랑이 없어도 동의는 있어야 하더군요.”세아는 자신의 증언서 사본을 내밀었다.양가가 결혼 날짜를 확정한 과정.모멘텀PR이 파혼 이후 여론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한 사실.차성혁이 시우를 공개해 도진을 경영권 협상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발언.그리고 신우그룹 측도 그 계획 일부를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신우 측 참석자 이름에는 세아의 아버지와 법무담당 임원도 포함됐다. 그들은 시우 사진을 직접 공개하자는 데는 반대했지만, 서연을 ‘과거 관계인’으로 축소하는 공동성명에는 동의했다.“저도 그 자리에서 바로 나가지 않았습니다.”세아는 회의록에 자신의 침묵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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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화. 어머니의 진술

차명희는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됐다.허위사실 유포와 개인정보 불법 취득, 문서 위조 방조 혐의였다.그녀는 출석 전 도진에게 전화했다.“같이 가주면 안 되겠니?”도진은 한참 말이 없었다.“변호사가 동행할 겁니다.”“아들로서 묻는 거야.”“제가 옆에 있으면 어머니가 저를 위해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무슨 뜻이니?”“사실이 아니라, 제가 듣고 싶어 할 말을 고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명희의 숨이 거칠어졌다.“너까지 나를 못 믿니?”“어머니가 서연 씨를 믿지 않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돌려드리는 게 아닙니다.”도진은 조용히 말했다.“진술은 혼자 책임지셔야 합니다.”명희는 전화를 끊지 못했다.“도진아. 나도 무섭다.”“그럴 겁니다.”“그 말뿐이니?”도진은 눈을 감았다.어머니가 자신의 두려움을 이유로 다른 사람을 밀어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두려움 자체를 조롱하고 싶지는 않았다.“사실대로 말씀하세요.”“그러면 네 작은아버지만이 아니라 나도 처벌받을 거야.”“네.”“그래도?”“그래도요.”명희는 결국 혼자 출석했다.정확히는 변호사와 함께였지만, 가족은 아무도 동행하지 않았다. 현관 앞에 모인 기자들은 도진이 어머니를 버렸느냐고 물었다. 명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들이 오지 않은 이유를 자신이 설명할 일이 아니었다.조사실에 들어가기 전 변호사는 불리한 질문에는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다시 알렸다. 명희는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기억이 불확실한 부분은 자료를 본 뒤 답하고, 자신의 범행에 해당하는 질문에도 변호사 조력을 받으며 진술하기로 했다. 처벌받겠다는 마음과 절차를 무시하는 것은 달랐다.진술은 오전부터 밤까지 이어졌다.그녀는 서연의 사생활을 조사하라고 배정은에게 지시한 사실을 인정했다.사진 원본에 여러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도 잘라 사용한 사실도 인정했다.도진에게 임신 가능성을 알리지 않았고, 서연의 전화가 연결되지 않게 비서실에 지시했다고 말했다.다원컨설팅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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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화. 용서를 바라지 않는 사과

차명희의 편지는 변호사 봉투로 왔다.이번에는 서연에게 전달해달라는 요구가 없었다.‘수사자료로 제출하지 않는 개인 서신이며, 수령 여부와 답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겉봉에 적혀 있었다.서연은 사흘 동안 열지 않았다.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회의를 했고, 시우 학예회에 갔고, 윤세아 자선행사 견적을 마무리했다.넷째 날 밤, 집이 조용해진 뒤 봉투를 꺼냈다.편지는 한 장이었다.‘한서연 씨.나는 당신이 돈을 받고 떠났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임신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도진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막았고, 사진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도 사용했습니다.태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쓰지 않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며느리가 아니었고, 아들이 내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 당신을 없애려 했습니다.당신과 시우에게 용서를 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나게 해달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수사와 배상 절차에 필요한 일을 하겠습니다.미안합니다.’서연은 마지막 줄을 오래 봤다.‘하지만’이 없었다.‘그래도’도 없었다.그렇다고 상처가 줄지는 않았다.편지를 찢지 않고 다시 접어 서랍에 넣었다.답장을 쓰지 않는 결정도 하나의 답이었다. 서연은 편지를 증거철이나 시우 서류와 섞지 않고 개인 보관함에 넣었다. 언젠가 다시 읽을 수도, 그대로 폐기할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명희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었다.다음 날 아침 시우가 그 서랍을 열려고 하자 서연은 손을 막았다.“엄마 편지야. 시우가 보면 안 되는 거야?”“응. 엄마가 보여주기로 할 때까진.”“비밀?”“나쁜 비밀은 아니고, 엄마 개인적인 것.”아이에게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든 내용을 볼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쉬운 문장으로 알려줬다.다음 날 도진과 양육 일정 회의가 있었다.서연은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도진도 묻지 않았다.11월 유치원 일정과 시우 건강검진, 겨울방학 면접교섭 시간을 정한 뒤 서연이 말했다.“차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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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화. 끝까지 남은 서명

차성혁의 구속기소는 한 달 뒤 이뤄졌다.그 한 달 사이 임시주주총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수사가 끝나기 전이어서 일부 주주들은 도진의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도진은 자신의 이사 해임안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표결 끝에 그는 이사직에서 해임됐다.도진은 결과에 불복하지 않았다. 차성혁의 범죄가 드러났다는 사실이 자신이 과거에 내린 잘못된 판단까지 없애지는 않았다. 향후 복귀 여부는 새 후보와 같은 심사를 거쳐 다시 결정받겠다고 밝혔다.적용된 혐의는 사문서위조, 명의도용, 업무방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배임과 횡령 등이었다.배정은과 최정환, 서민석도 각자 관여한 범위에 따라 기소됐다. 서민석은 자진출석과 원본 확보 협조가 양형에 반영될 수 있었지만 책임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이경자는 허위 인터뷰 대가로 받은 돈을 인정했다.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사과 영상을 찍겠다고 제안했다.서연은 거절했다.“정정보도에 필요한 서면 진술만 받겠습니다.”또 다른 눈물 영상이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법원은 우선 언론사 열두 곳에 정정보도와 기사 삭제를 명령했다.형사재판이 끝나기 전이었지만, 허위 계좌자료와 원본 사진이 확인된 부분에 대해서는 민사 조정과 임시 처분이 먼저 이뤄졌다. 일부 언론사는 항고 대신 정정에 합의했고, 끝까지 다툰 곳은 본안 소송을 이어가기로 했다.서연은 모든 기사를 인터넷에서 완전히 없애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복제본까지 지울 수 없었고, 사건 보도 자체도 남아야 했다. 검색 결과 첫 화면에 정정문이 함께 표시되고, 시우 얼굴이 들어간 사진과 허위 전표 이미지를 내리도록 범위를 정했다.정정문에는 모호한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다.‘한서연이 50억 원을 받고 이혼했다는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해당 계좌는 본인 동의 없이 개설됐고, 한서연은 자금을 수령하거나 사용하지 않았다.’‘차도진의 정략결혼 파기와 한서연의 업무 수행 사이에 공모 정황이 없다.’서연은 문장을 직접 확인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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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돌아갈 자리

태강그룹 임시 주주총회는 예상보다 조용하게 끝났다.가족 승계 문구 삭제.문화재단 독립 이사회 구성.외부 감사위원 선임.내부고발자 보호규정 강화.도진이 요구한 개편안은 일부 수정됐지만 핵심은 통과됐다.주주총회는 도진의 복귀를 한꺼번에 승인하지 않았다. 먼저 정관 개정과 외부 이사 선임을 의결하고, 새 인사위원회가 후보 면접을 진행했다. 도진은 다른 두 후보와 같은 질문을 받았다.5년 전 내부통제가 가족 지시에 무너졌을 때 무엇을 했는지.본인이 다시 같은 위험이 되었을 때 누가 막을 수 있는지.도진은 ‘제가 달라졌다’고 답하지 않았다. 대표의 지시도 기록과 감사를 거치게 하고, 친족 관련 결재에서는 대표가 빠지는 규정으로 막아야 한다고 설명했다.면접 결과와 반대 의견까지 주주들에게 공개된 뒤에야 1년 임기가 확정됐다.그는 1년 한시 임기의 대표이사로 복귀했다.‘황제의 귀환’ 같은 기사 제목이 붙었지만, 실제 첫 출근은 회의 세 건과 사과 한 번으로 끝났다.도진은 과거 자신이 묵인했던 비서실 정보수집 관행에 대해 임직원에게 공식 사과했다. 오너 가족 관련 업무를 별도 보안 명목으로 처리하던 팀은 해체했다.강태욱이 새 출입카드를 건넸다.“다시 오신 기분이 어떻습니까?”도진은 명패가 놓인 자리를 봤다.“예전 자리 같지 않군.”“집무실은 그대로인데요.”“제가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겠지.”첫 결재는 시우와 관련이 없었다.두 번째도 서연과 관련이 없었다.도진은 회사 복귀를 가족에게 보여줄 증거로 만들지 않았다.대표실 책상 위에 가족사진도 올리지 않았다.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우 사진을 회사 방문객에게 공개할지 아직 아이와 서연에게 묻지 않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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