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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서다윤은 어두운 얼굴로 안효민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안효민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손을 들어 힘껏 뺨을 때렸다.안효민은 표정이 단번에 굳더니 곧바로 전화를 끊고 자신의 화끈거리는 뺨을 만지며 차가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왜 때려?”“네가 어떤 비열한 수작을 부렸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며칠 전에는 딸을 시켜서 성인용품으로 나를 모함하더니, 어젯밤에는 그런 함정을 파놓고 내가 함정에 빠지기만을 기다렸지? 어제 네 뜻대로 됐더라면 나는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외간 남자랑 몸을 섞은 여자가 됐겠네? 며칠 전 성인용품 사건까지 있었는데 어제 다른 남자와 잠자리까지 가졌으면 무슨 말을 해도 오해를 풀 수 없었겠어.”서다윤의 거센 질타에도 안효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웃음을 흘렸다.“서다윤, 너를 함정에 빠뜨릴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만약 너를 함정에 빠뜨린 사람이 승현 씨라고 한다면 엄청 충격받겠네.”서다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순간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원래도 창백하던 서다윤의 얼굴에서 얼마 남지 않았던 핏기가 서서히 가시기 시작했다.서다윤은 떨리는 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말도 안 돼!”“승현 씨가 너한테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만약 승현 씨가 네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를 만들 생각이었다면? 그래야 앞으로 네가 나랑 승현 씨의 비밀을 알게 되더라도, 이미 너도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으니 싫어도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을 거 아니야? 그 정도면 이유가 충분하지 않겠어?”서다윤은 순간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그때 마침 임가온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서다윤은 분노와 슬픔을 애써 억누르며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가온아, 무슨 일이야?”“다윤아, 나 방금 알게 됐는데 우리 편집장님이 갑자기 나한테 회사로 돌아오라고 한 이유가 일 때문이 아니었어. 내가 계속 이유를 캐물으니까 그제야 청수 그룹 대표님 뜻이라고 하는 거야. 지승현 정말 너무 역겨운 거 아니야? 내가 처음에 너희 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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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고개를 돌린 서다윤은 시어머니 김선영이 가정부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았다.서다윤은 곧바로 안효민을 놓아주고 얼굴에 드리워졌던 살기를 거두어들이며 평소와 같은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오셨어요, 어머님.”서다윤이 이혼하기 전까지 크게 소란을 일으키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순조롭게 이혼 절차를 마친 뒤 지승현과 안효민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기 위해서였다.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시어머니 김선영 때문이었다.지승현과 결혼한 뒤 3년 동안, 김선영은 서다윤을 마치 자신의 친딸처럼 아껴주고 챙겨주었다.김선영은 아들의 병 때문에 늘 며느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었다.그리고 아들에게 절대 서다윤을 속상하게 하면 안 된다고, 지씨 가문은 서다윤에게 미안해해야 하니 더 잘해주고 아껴줘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었다.두 달 전, 김선영은 폐암 중기 판정을 받았고 이번 달 말에 수술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만약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추잡한 일들을 알게 된다면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서다윤은 시어머니에게 부담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우선 순조롭게 수술을 받게 하고 위험한 고비를 넘긴 뒤에 지승현과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다윤아, 너랑 안 선생님...”김선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며느리를 바라봤다.수술을 받기 전에 먼저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던 김선영은 최근 계속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고 있었기에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장난 좀 친 것뿐이에요.”안효민은 김선영이 안으로 들어오자 곧바로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김선영은 안효민의 뺨에 남은 손자국을 보지 못했다.서다윤이 대충 얼버무리자 김선영도 더 이상 깊이 캐묻지 않았다.방사선 치료를 막 받고 돌아온 탓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더 묻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서다윤은 김선영을 부축해 방 안으로 데려갔다.“어머님,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배는 안 고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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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서다윤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자신도 욕망에 휘둘리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서다윤은 어렸을 때부터 보수적이고 고루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제약을 크게 받지는 않아서 지승현을 먼저 쫓아다닐 만큼 대담한 면이 있었다.그러나 이성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다.어젯밤처럼 격정적이고 뜨거운 순간은 지승현과도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샤워를 마친 뒤 서다윤은 기진맥진한 채로 잠이 들었다.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자 잠에서 깼고 눈을 뜨자 침대맡에 앉아 있는 지승현이 보였다.서다윤은 순간 분노가 치밀어올랐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모든 감정을 태연하게 감춘 채 서다윤은 덤덤히 물었다.“왜 여기 있는 거야?”“다윤아, 너 팔이 왜 이래? 어쩌다가 다친 거야?”지승현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사실 안효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서다윤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것처럼 꾸민 것은 분명 지승현이 벌인 짓이었다.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은 안효민이 말한 것과 달랐다.지승현은 카메라를 발견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최근 들어 달라진 서다윤의 태도에 더해 안효민의 계속된 부추김 때문에, 혹시라도 서다윤이 진실을 알게 된 뒤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그때 마침 안효민이 서다윤이 먼저 바람을 피우게 만들자고 제안했다.사람은 자신에게 잘못이 있을 때면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어려운 법이었기 때문이다.지승현은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시도해 보기로 했다.그렇다고 다른 남자가 서다윤에게 허튼짓을 하는 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임가온의 SNS를 보게 되었고, 두 사람이 그날 밤 바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순간 지승현의 머릿속에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지승현은 우선 임가온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몰래 서다윤의 술에 수면제를 탄 뒤 발기부전을 앓고 있는 남자를 한 명 구해 서다윤을 호텔로 데려가게 했다.남자가 서다윤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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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서다윤은 지승현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다.아무런 배경도 없는 지승현이 대기업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결코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오늘 아침 서다윤이 올린 게시글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지만, 겨우 몇 시간 동안만 퍼져 나갔을 뿐이었다.지승현은 곧바로 거침없이 반격에 나섰고, 신속하게 대응책을 내놓았다.오후 두 시, 청수 그룹은 빠르게 공지를 게시하여 상황에 대처했다.첫째, 온라인에 퍼진 구매 계약서는 퇴사한 직원이 위조한 것이며 이미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을 밝혔다.둘째, 은행 거래 내역 캡처본은 조작된 것이며, 이미 사법 감정서를 확보해 이를 반박할 증거를 갖추었다고 밝혔다.셋째, 녹음 파일은 분석 결과 편집된 것이라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다.동시에 최대 1000억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할 예정이며 외부감사를 통해 회사 재무 상태를 전면적으로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거침없고 맹렬한 대응에 상황은 순식간에 뒤집혔다.원래라면 하한가에 묶여 있어야 할 주식은 하한가는커녕 장 초반부터 반등하기 시작했고, 결국 장을 마감할 때는 무려 8%나 상승했다.서다윤은 태블릿을 끄고 차가운 눈빛을 했다.그리고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역시나 여자 문제를 제외하면 지승현은 꽤 쓸모가 있는 인간이었다.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을 줄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 지승현을 무너뜨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아래층으로 내려간 서다윤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김선영을 발견했다. 김선영의 옆에는 안효민의 영악한 딸 안지아도 있었다.안지아는 김선영의 다리를 정성스럽게 주물러 주고 있었다.며느리가 내려오는 것을 본 김선영이 서다윤을 반갑게 맞이했다.“다윤아, 어서 이리 와서 앉아.”서다윤은 김선영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어머님, 몸은 좀 괜찮아지셨어요?”“한숨 자고 나니 훨씬 좋아졌어. 이것 좀 봐. 안 선생님 딸인데 정말 세심해.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굳이 내 다리를 주물러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안지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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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엄마, 엄마가 방사선 치료를 받는 동안 저랑 남편은 미국에 있는 딸을 보러 가느라 엄마를 찾아뵙지 못했어요.”김선영은 딸을 흘겨보며 말했다.“너도 참, 정훈이는 일 때문에 많이 바쁠 텐데 이렇게 다짜고짜 끌고 오면 어떡해?”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내심 기뻤다.“괜찮아요, 장모님. 당연히 뵈러 와야죠.”심정훈이 말했다.지민희는 올해 서른넷이고 지승현의 누나였다. 자애롭고 인자한 시어머니와 달리 시누이인 지민희는 까칠하고 정이 없었다.“너도 우리 집안이 너한테 미안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지민희는 자리에 앉자마자 서다윤에게 시비를 걸었다.서다윤은 잘 관리된 지민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민희는 높이 솟은 광대뼈와 칼날처럼 얇은 입술,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의 소유자였다.그리고 서다윤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경멸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서다윤은 덤덤하게 대꾸했다.“서로에게 미안할 건 없죠. 모든 건 하늘의 뜻이니까요.”“하늘의 뜻은 무슨. 개소리하지 마.”지민희가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었다.“내 동생이 이렇게 된 데 네 책임은 없는 것 같아? 네가 그때 고결한 척만 안 했어도 내 동생이 운전하다가 산 아래로 차를 처박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지민희! 다윤이한테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김선영이 화를 내며 딸을 꾸짖었다.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기침을 심하게 해댔다.옆에 있던 심정훈은 그들의 일에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김선영을 부축했다.“장모님, 제가 방까지 부축해 드릴게요. 들어가서 쉬세요.”“민희야, 내가 누누이 얘기했지. 다윤이 탓하지 말라고. 승현이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벌인 짓인데 누구를 탓해...”“됐어요. 그만하시고 얼른 들어가 쉬세요. 다른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어요?”지민희는 못마땅한 듯 눈을 흘기며 말했다.김선영은 기침을 하면서 사위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그때 눈치를 살피던 안지아가 얼른 물 한 잔을 가져와 지민희 앞에 내려놓으며 아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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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지민희는 제 눈을 의심했다. 손에 든 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사진 속에는 서다윤이 다른 남자와 열렬히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상대 남자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체형만 봐도 동생 지승현이 아님이 분명했다.“서다윤, 너 내 동생 몰래 딴 놈이랑 바람피운 거야?”지민희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서다윤 역시 사진을 마주한 순간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어차피 이 모든 게 지승현이 꾸며낸 자작극 아닌가.그러니 죄책감을 느끼거나 위축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서다윤은 태연한 태도로 사진을 낚아채듯 가져가 훑어보더니, 퉁명스럽게 다시 돌려주었다.“이런 조잡한 합성 사진을 믿으시다니 참 어이가 없네요.”“합성? 바람피운 증거가 똑똑히 찍혔는데 아직도 발뺌이야? 어디서 이 천박한 게...”지민희가 손을 치켜들며 뺨을 후려치려던 순간, 서다윤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 손목을 매섭게 낚아챘다.“지금 둘이 뭐 하는 거야?”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속에서 지승현이 때마침 돌아왔다.방으로 돌아간 김선영이 딸이 며느리를 잡아먹을 듯 괴롭힐까 봐 불안한 마음에 결국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지승현은 누나 앞으로 다가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다윤이한테 왜 손을 댄 거야?”“내가 왜 그랬겠어? 이게 뭔지 똑똑히 봐! 겉으로는 조신한 척 온갖 내숭은 다 떨더니, 뒤로는 딴 놈이랑 바람피우며 너 몰래 호박씨 까고 있잖아! 넌 그것도 모르고 여태 속고 있었던 거라고!”지민희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남동생에게 사진을 내던지듯 건넸다.사진을 받아 든 지승현의 동공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눈빛 속에는 충격과 불신,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격노가 서려 있었다.서다윤은 그의 연기력에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쩜 저리 감쪽같이 모르는 척을 할까.하기야,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했다. 자작극을 꾸미며 매수해 둔 인물이 이 남자는 아니었을 테니까.그녀가 이 남자와 엮인 것 자체가 그의 계획에 없던 변수였다.하지만 그게 무슨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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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안효민은 사진을 받아 들고 몇 초간 유심히 살펴보는 척했다.“언니, 이거 합성 사진 같은데요.”그러고는 서다윤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다윤 씨는 승현 씨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절대 딴마음을 먹을 분이 아니에요. 분명 무슨 오해가 있을 거예요.”“사랑은 무슨 개뿔! 진짜 사랑하면 그렇게 오랫동안 연애하면서 손끝 하나 못 대게 했겠어요?”“스킨십을 거부하면 사랑하지 않는 건가요?”서다윤이 차갑게 맞받아쳤다. “당연하지! 진짜로 좋아하면 당장이라도 살을 맞대고 싶어 안달하는 게 인지상정이야!”“그렇다면 전 형님을 따라갈 재간이 없네요. 결혼하기도 전에 애부터 덜컥 가지셨으니.”“서다윤...”지민희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늘 고분고분 고개만 숙이고 있던 여자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뼈 있는 말을 던지며 대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지민희는 서다윤에게 딴 놈이 생긴 게 확실하다고 단정 지었다. 독수공방하는 신세가 길어지다 보니, 차마 제 입으로 이혼하자는 말은 못 하겠고 자기들이 먼저 이혼 얘기를 꺼내게 만들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서다윤의 속셈을 간파한 지민희는 더 이상 그녀의 외도 문제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서다윤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놓아줄 마음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제 동생을 발기부전으로 만들어 놓고 이혼이라니? 평생을 이 집에 묶어두고 피를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지민희는 끓어오르는 분통을 꾹 누르며 서다윤을 증오스럽게 째려본 뒤, 안효민의 손을 다정하게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됐다, 너처럼 교양 없는 애랑 말씨름해 봐야 내 입만 아프지. 수준 차이가 나도 이렇게까지 날 줄이야. 우리 지씨 가문에 복이 없어서 저런 막돼먹은 걸 들였나 보네.”“안 선생님처럼 배울 만큼 배우고, 자기 몸 귀한 줄 알고, 능력까지 좋아서 승승장구하는 사람을 들였어야 했는데 말이죠. 난 안 선생님이 참 마음에 들어요.”“어머, 언니, 그렇게 치켜세워 주시니 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형님이 안 선생님을 예뻐하는 건 당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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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안효민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그녀는 잔뜩 긴장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남자를 밀쳐냈다.“정훈 오빠, 집 안에 오빠 와이프가 있잖아. 이러지 마.”“정훈 오빠라니,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네. 갑작스레 들으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데...”안효민은 남자를 힘껏 밀쳐냈다. 여전히 눈빛에는 불안함이 서려 있었지만 말투만큼은 날카롭게 서 있었다.“심정훈, 본인 신분을 잊지 마. 부적절한 관계라도 들켜서 꼬투리 잡히면 어쩌려고 그래? 옛날 일은 이미 지난 지 오래야. 지금은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으니 더더욱 행동거지를 조심해야지.”심정훈은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다시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춤을 느슨하게 매만졌다.“오래 지나긴 했지. 하지만 남자를 딛고 기어오르던 그 버릇만큼은...”그의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여전하네.”...한편, 침실 안.지민희는 어머니의 침대 곁에 앉아 서다윤의 온갖 흉을 늘어놓으며 서다윤이 바람을 피워 동생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고 악다구니를 썼다.김선영은 그런 딸의 모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쓸데없이 승현이 일에 참견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 정훈이 자리가 높아질수록 남편 단속을 철저히 해야지, 넋 놓고 있다가 딴 살림 차린 것도 모른 채 바보 되는 수가 있어.”그러자 지민희는 콧방귀를 뀌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세상 남자들이 다 바람을 피워도 우리 정훈 씨는 절대 그럴 리 없어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딴 여자는 눈길조차 안 주는 사람이라고요.”“너무 장담하지 마라. 예전에 여대생 스폰서 문제 터졌던 것도 그렇고...”지민희의 안색이 순간 싹 가라앉았다.“엄마, 내가 몇 번을 말해요? 그건 다 헛소문이라니까요. 여대생을 스폰했느니, 유학을 보내줬느니 하는 거 전부 정훈 씨 라이벌들이 깎아내리려고 날조한 소문이에요. 우리 결혼 생활 십 년이 넘었어요.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를까 봐요?”“에휴, 그래. 네 귀에 대고 잔소리해 봐야 입만 아프지.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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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다음 날 저녁.해운시의 한 7성급 호텔 앞, 어둠 속에 고급 롤스로이스 한 대가 조용히 서 있었다.뒷좌석에는 맞춤 제작한 블랙 슈트를 빼입은 남자가 군림하듯 앉아 있었다. 셔츠 소매 끝으로 살짝 드러난 백금 커프스링크가 미약한 불빛 아래 우아하게 빛났다.창문 틈새로 스며든 미약한 빛이 그의 입체적인 옆얼굴을 스치며 그림 같은 실루엣을 완성했다.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다른 한 손은 팔걸이에 얹은 채, 길고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툭, 툭 무심히 박자를 맞추는 중이었다.“현우야, 너 육체적 본능에만 이끌려 본 적이 있어? 아무런 감정적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오직 상대의 몸에만 강렬한 자극을 느끼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운전석에 앉아 있던 진현우는 이 뜬금없는 질문을 들은 순간 머리가 아득해졌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 똑같은 질문을 대체 몇 번째 듣는 건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대체 어젯밤 어디서 나타난 요물이기에, 평소 여자라면 쳐다보지도 않고 오직 일밖에 모르던 냉혈한 대표님을 이토록 혼을 쏙 빼놓았단 말인가.흡사 사랑에 눈이 먼 허당이 된 꼴이었다.어젯밤 전까지만 해도 냉철하고 금욕적이던 대표님이 이런 주책맞은 질문을 던지실 줄 누가 알았겠는가.덕분에 경험이라곤 없는 순진한 총각 진현우는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진현우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했습니다. 욕망이란 원래 부질없고 허무한 법이지요.”자신의 고민에 푹 빠져 있던 조세혁은 뜬금없는 헛소리가 들려오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진현우를 째려보았다.“조사하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진현우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그 호텔 뒤편에는 CCTV가 없어서 조사가 불가능합니다. 대표님 방 위층에 묵었던 투숙객들을 샅샅이 뒤져봤는데, 말씀하신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여자가 한 명도 없었어요. 나이대가 비슷한 여자가 딱 한 명 있긴 했는데, 그분은 밤새 제 남자친구와 격정적인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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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연회가 열리는 운채홀은 수백 평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였다. 조세혁이 걸음을 들여놓자마자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조 대표님,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평소 자선 만찬에는 일절 참석하지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한 재력가가 한껏 아양을 떨며 인사를 건넸다.이내 다른 사람들도 줄지어 합세했다.하지만 조세혁은 그들을 상대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서다윤의 실루엣만을 끈질기게 좇고 있을 뿐이었다.어젯밤에는 조명이 너무 어두워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지만, 눈 부신 불빛 아래 있는 지금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뜯어볼 수 있었다.피부는 유난히 하얗다 못해 조명 아래서 투명하게 빛났고 드러난 쇄골과 어깨선, 가녀린 팔 라인은 우아하고 매끄러웠다. 밝은 갈색의 긴 머리는 어깨 위로 내추럴하게 흘러내렸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입술만 은은한 말린 장미색으로 생기를 더했을 뿐이었다.서다윤은 누구에게나 차가운 이슬 같은 미인으로 기억되곤 했다.그녀의 아름다움은 요란하지 않고 정제되어 있으며 약간의 거리감을 두는 매력이 있었다.마치 겨울날 소리 없이 조용히 내려앉아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바꿔놓는 눈처럼 말이다.한편, 서다윤은 누군가 자신을 맹렬히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원래 이런 가식적인 자리를 질색했다.지승현이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과 부호들 사이를 오가며 비굴하게 명함을 돌리고 겉과 속이 다른 아첨을 떨며 인맥을 쌓는 꼴은 정말이지 보고 있기 고역일 만큼 지루하고 지긋지긋했다.“다윤아.”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둘째 삼촌 서준호가 서 있었다.서다윤은 조금 놀란 기색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사방을 기민하게 살피며 서준호 외에 다른 친척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의아하다는 듯 조용히 물었다.“삼촌, 여기 비즈니스 만찬회잖아요. 삼촌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서다윤은 뼈대 있는 학자 집안 출신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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