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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난 강제 결혼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117 챕터

11화 기다림의 시작

 아침마다 현관을 나서면 정확한 시간에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은 별생각 없이 타고 갔지만 며칠 지나자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혼자 다니는 게 익숙한 지안에게는 어디를 가든 누군가 따라붙는다는 것 자체가 영 답답했다. 결국 그날 퇴근길. 서한그룹 본사 로비를 나서던 지안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유리문 너머로 익숙한 검은 세단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반듯하게 서 있는 하준까지. “……또 왔네.” 옆에 있던 민준이 지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누구십니까?” 지안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마침 잘됐다. “실장님.”  “네.” 지안이 유리문 너머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저 앞에 보이시죠?”  “네.”  “저분이 오늘 실장님 태워주실 거예요.” 민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를요?” “네. 가서 제 이름 말하고 집까지 태워달라고 하세요.”  “이사님은요?”  “저는 알아서 갈게요.”  “잠시만요. 그게 무슨…….”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지안은 민준의 등을 살짝 밀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사님.”  “내일 봐요!” 뒤에서 황당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지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얼른 반대쪽 출입구로 빠져나온 지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성공. 하준이 민준을 태워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혼자 갈 수 있었다. 밤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지안은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캄캄한 거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동안 집에 돌아와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며칠이면 된다던 출장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스쳤다. ……내가 있어서 불편한 건 아니겠지. 처음 며칠은 오히려 편했다. 애초에 각자 살기로 한 결혼이었다. 마주칠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이 집에 내려앉은 적막이 유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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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싱가포르의 밤

싱가포르 중심업무지구의 고층 빌딩 회의실. 통유리 너머로 마리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대형 스크린에는 태강그룹이 몇 년째 공을 들여온 ‘센트럴 베이 프로젝트’의 전체 조감도와 공정표가 나란히 떠 있었다. 호텔과 레지던스, 오피스, 상업시설을 한데 묶어 조성하는 대규모 복합개발 사업. 태강이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추진해온 사업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였다. 현지 컨설팅사 직원이 리모컨을 눌러 화면을 넘겼다. “We've completed the final review of the construction schedule.” (전체 공정 일정에 대한 최종 검토를 마쳤습니다.) 태호는 눈앞에 놓인 자료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And the approval timeline?” (인허가 일정은요?) 태강 싱가포르 법인장이 곧바로 말을 받았다. “현재까지는 예정대로 진행 중입니다. 다음 주에 마지막 서류가 접수되면 시공 일정에도 큰 차질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태호의 손끝이 공정표 한쪽에 멈췄다. “여긴 여유 기간이 너무 짧은데.” 해외사업본부장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쇼핑몰 쪽 공사와 병행하면 일정은 맞출 수 있습니다.”  “변수 생기면 바로 밀립니다.” 태호가 표시된 구간을 툭 짚었다. “완충 기간 잡아두세요.”  “알겠습니다.” 그 뒤로도 공정 일정과 인허가, 자금 집행, 현지 업체 계약까지 보고가 줄줄이 이어졌다. 사업은 전반적으로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규모가 큰 만큼 태호가 직접 확인하고 결정해야 할 사안이 적지 않았다. 원래라면 사흘이면 끝날 출장이었다. 현지 법인의 최종 보고와 주요 관계사 미팅만 마치면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최종 조율 단계에 들어가면서 투자사와 설계사, 시공사까지 직접 챙겨야 할 일정이 하나둘 늘어났다. 결국 사흘짜리 출장은 어느덧 열흘 가까이 길어져 있었다. 태호가 마지막 장까지 확인한 뒤 파일을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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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애기가 기다린다잖아

도윤은 이내 호텔에서 얼핏 들었던 호칭을 떠올렸다. “아, 사모님 말씀이십니까?”  “응.”  “임하준입니다. 수행팀 막내입니다.” 태호는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입술 사이로 연기를 천천히 흘려보냈다. “그럼 요즘 애기 뭐 하고 지내는지 알아봐 봐.”  “지금 말씀이십니까?” 태호의 시선이 느릿하게 도윤에게 향했다. “왜. 어려워?”  “아닙니다.” 도윤은 더 묻지 않고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하준과 짧게 통화를 주고받은 뒤 몇 가지를 더 확인했다. 잠시 후 전화를 끊은 도윤이 보고하듯 말했다. “평소대로 출퇴근하시고, 특별한 일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 도윤은 바로 말을 잇지 않고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다만 수행받는 건 상당히 불편해하시는 모양입니다.” 태호가 시선을 돌렸다. “왜.”  “하준이 말로는 자꾸 도망을 다니신답니다.” 태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서지안답네.” 순순히 차를 타고 다닌다기에 오히려 의외다 싶었던 참이었다. 담배를 다시 입에 문 태호가 건조하게 덧붙였다. “그래도 일을 못 하면 쓰나. 붙여놨으면 제대로 따라다니라고 해.”  “예. 전달하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도윤은 물러날 듯하다가 그대로 자리에 남았다. 태호가 옆눈으로 그를 훑었다. “왜. 뭐 더 할 말 있어?”  “그게…….” 도윤이 드물게 말을 머뭇거렸다. “사모님께서 부회장님을 찾으셨답니다.” 태호의 시선이 멎었다. “나를?”  “네. 아직도 싱가포르에 계시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래?” 짧게 되물은 태호는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연락 한 번 없기에 잘 지내는 줄 알았다. 애초에 누군가를 찾거나 기다리는 데 익숙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자신이 며칠 집을 비운다고 해서 딱히 아쉬워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먼저 자신을 찾았단다. 아직도 싱가포르에 있느냐고. 별것도 아닌 말인데 이상하게 그 한마디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을 못 본 지도 제법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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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사람 곤란하게 만드네

일정을 앞당기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태호는 쉴 틈 없이 미팅을 몰아붙인 끝에 예정된 일정을 모두 마쳤고,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한 시를 넘긴 뒤였다. 늦은 시각이라 인기척 하나 없는 집을 예상했다. 그런데 현관문을 열자 거실 한쪽에 불이 켜져 있었다. 태호의 걸음이 느려졌다. 소파 위에 지안이 잠들어 있었다. 무릎에는 펼쳐진 노트북이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고 옆 테이블에는 몇 장의 서류와 펜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일을 하다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코끝까지 흘러내린 얇은 안경 너머로 눈은 얌전히 감겨 있었다. “……자는 건지 일을 하는 건지.” 태호가 작게 실소했다. 그러고 보니 집 안 곳곳이 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쿠션이며 테이블 한구석에 놓인 머그잔까지. 늘 반듯하고 조용하기만 하던 공간에 어느새 사람 사는 기척이 배어 있었다. 저 조그만 애 하나 들어왔다고 집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태호의 눈매가 느슨해졌다. 그는 지안의 무릎 위에 걸쳐진 노트북을 먼저 치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코끝에 걸린 안경까지 조심스럽게 벗겨낸 뒤 한동안 잠든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내 허리를 숙여 한 팔은 등 뒤로, 다른 팔은 무릎 아래로 넣었다. 가볍게 힘을 주자 생각보다 작은 몸이 고스란히 품 안으로 들어왔다. 지안은 누가 자신을 안아 들었는지도 모르는 듯 태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몇 번 몸을 뒤척이기는 했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태호는 걸음을 늦춰 2층 복도를 지나 지안의 방문 앞에 멈췄다. 한 손으로 문고리를 눌러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 아래로 자신이 쓰는 방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방 안에는 벌써 지안의 흔적이 제법 묻어나 있었다. 화장대 위에는 향수와 자잘한 화장품이 놓여 있었고, 의자 등받이에는 벗어둔 카디건이 느슨하게 걸쳐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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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이런 거 좋아해?

 운동을 막 끝낸 모양이었다. 넓게 벌어진 어깨부터 단단하게 잡힌 가슴과 복부까지 옅은 땀이 맺혀 있었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잘 다듬어진 몸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던 눈길이 문득 태호의 왼팔 안쪽에서 멈췄다. 길게 이어진 흉터 하나가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깊었던 상처였는지 흔적이 꽤 뚜렷했다. 무심코 시선을 오래 두고 있던 순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애기, 이런 거 좋아해?” 지안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거든요!” 뒤늦게 자신이 한참 동안 그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지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태호의 입매가 느슨하게 휘었다. “아닌 사람이 그렇게 빤히 봐?”  “제가 언제 빤히 봤다고 그래요.”  “꽤 오래 보던데.”  “아니…….” 지안은 억울하다는 듯 돌아보려다가 다시 시선이 마주칠 것 같아 얼른 얼굴을 틀었다. 그러다 뒤늦게 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근데 왜 여기 계세요?”  “여기가 내 집인데.” 너무도 당연한 대답에 지안이 잠시 말문을 잃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왜 그렇게 옷을 벗고 계시냐고요!”  “내가 내 집에서 벗고 다니지도 못해?”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기가 원래 태호의 집인 것도 맞고, 자신이 뒤늦게 들어온 사람인 것도 맞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아침부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주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안은 한 손으로 시야를 가리듯 얼굴 옆에 세웠다. 그 모습을 본 태호가 작게 웃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 가려.”  “안 보여서 좋아요.”  “아까는 잘만 보더니.”  “진짜 아니거든요!” 지안이 발끈해 돌아서는 순간 태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서야 지안도 제 차림을 떠올렸다.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 몸에 얇게 감기는 실크 잠옷 차림에 발에는 슬리퍼만 대충 끌고 나와 있었다. 지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더 붉어졌다. 더 서 있을 수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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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착한 아이는 남편 말 잘 듣는 거야

샤워를 마친 태호는 옷을 갈아입고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아침 식사가 준비된 긴 테이블 한쪽에서 식기를 정리하던 박 여사가 태호를 발견하자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부회장님.” “예.” “출장이 꽤 길어지셨다면서요.” “생각보다 확인할 게 많았습니다.” 짧게 대답한 태호가 자리에 앉았다. 그때 계단 쪽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지안이었다. 아까와 달리 옷도 갈아입고 머리도 말끔히 정리했지만 식탁 쪽으로 다가오는 걸음이 어딘가 어색했다. 박 여사가 먼저 그녀를 발견했다. “사모님, 일어나셨어요? 아침 드시게요?” “아…… 네.” 지안은 대답하면서도 태호 쪽은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저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으며 접시와 수저만 괜히 한 번씩 정리했다. 아침에 거실에서 봐버린 광경이 자꾸 생각났다. 넓은 어깨와 단단하게 잡힌 몸선. 무엇보다 문제는 자신이 너무 빤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뒤늦게 떠올릴수록 얼굴이 뜨거워졌다. 박 여사가 지안 앞에 아침상을 차려주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사모님은 평소에 아침을 거의 안 드세요. 준비해놔도 손을 잘 안 대시고.” 태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맞은편으로 향했다. “아침 잘 안 먹어?” 지안은 숟가락으로 죽을 천천히 저었다. “네. 안 먹다 버릇하니까 잘 안 먹게 되더라고요.” 태호는 대답 대신 지안을 한 번 훑었다. 아까 잠옷 차림으로 봤을 때도 느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마른 편이었다. 허리도 가늘고 손목도 얇았다. 몸의 선은 분명했지만 군살이라곤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저렇게 먹으니 그렇지. “앞으로는 먹어.” 지안이 못마땅한 듯 입술을 내밀었다. “싫은데요.” “왜.” “그냥요, 별로 먹기 싫어요.” “먹다 보면 익숙해져.” “굳이요?” 태호는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착한 아이는 남편 말 잘 듣는 거야.”지안의 손이 멈췄다. “…….” 순식간에 귓가가 붉어졌다. 어머나, 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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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눈을 보고 하는 거야

 “이사장님!” 혜성병원 이사장 정민석이었다. 정도현과 정윤재 형제의 아버지이기도 한 정민석은 지안의 주변에 있는 몇 안 되는 가까운 어른이었다. 정민석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고?” “네, 이사장님도 잘 지내셨죠?” 정민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 지안아. 기사 봤어. 결혼 축하해.” “아…… 감사합니다.” 지안이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한 뒤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던 태호를 소개했다. “아, 그리고 강태호 부회장님이세요.” 정민석의 시선이 태호에게 향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부회장님께서 직접 와주시고, 정말 영광입니다.” 태호가 예의 있게 손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좋은 일에는 와야죠.”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눴다. 정민석은 만족스럽다는 듯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태강까지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들한테 정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필요한 부분 있으면 더 말씀하십시오.” “말씀만으로도 든든합니다.” 짧은 인사가 끝나자 정민석은 다른 병원 관계자의 부름을 받고 자리를 비웠다. 다시 둘만 남자 지안은 괜히 어색해져 시선을 행사장 안쪽으로 돌렸다. “곧 시작할 것 같은데 저희도 슬슬 들어갈까요?”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애기야.” 지안의 걸음이 멎었다. “네?” 반사적으로 돌아본 순간 태호와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제야 태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제 보네.” “……뭘요?” “내 얼굴.” 지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침부터 자신이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는 걸 들킨 모양이었다. 뭐라고 둘러댈 새도 없이 태호가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지안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굳었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숨결이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검은 눈동자가 지안을 느슨하게 붙잡았다. “사람이랑 얘기할 때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가까운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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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밤에 보자. 우리 집에서

잠깐의 적막을 깬 건 도현이었다. 도현이 먼저 손을 내밀자 태호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 느릿하게 맞잡았다. 짧은 악수가 끝나고 도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지안이, 정말 좋은 애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신 건 아니시겠지만, 예뻐해 주세요.” 우리 지안이. 태호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저 남자는 아무래도 제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태호는 잠시 도현의 얼굴을 일별한 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지안은 품에 안긴 한결을 고쳐 안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태호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안의 허리로 팔을 둘렀다. 갑작스럽게 끌어당겨진 지안의 몸이 그의 옆에 바짝 붙었다. “……!” 한결을 안고 있던 탓에 자세까지 어정쩡해졌다. 지안은 놀란 눈으로 태호를 올려다봤지만 정작 태호의 낯은 여전히 건조했다. “물론.” 태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차고 넘치게 잘해주죠.” 허리를 감싼 팔에 아주 조금 힘이 들어갔다. “우리 애기가 얼마나 예쁜데.” 지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태호는 그런 지안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렇지?” “…….” 지안은 대답 대신 시선만 이리저리 굴렸다. 괜히 자신을 가운데 두고 기 싸움이나 하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제 심장이었다. 싫다고 생각하면서도 허리를 감싼 팔이 자꾸 의식돼 가슴 안쪽이 쿵쿵 울렸다. 간신히 가라앉혀놓은 감정이 또다시 엉망으로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걷혔다. 그때 가운 주머니에서 호출음이 울렸다. 도현은 곧바로 화면을 확인했다. “지안아. 나 응급이라 먼저 가봐야겠다.” 도현이 짧게 숨을 내쉬고 지안을 바라봤다. “응, 오빠. 얼른 가. 한결이는 내가 데려다줄게.” “응. 고마워.” 도현은 지안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태호에게 짧게 인사를 건넸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태호가 가볍게 턱을 당겼다. 도현이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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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사진 한 장

 “남양주 세인트힐 컨트리클럽입니다.” 태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협약식이 한창이던 중간, 도윤이 조용히 곁으로 다가와 앉아 있던 태호에게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또 어디로 오라는 건지. 태호는 답답하다는 듯 넥타이 매듭을 거칠게 풀어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린 차가 남양주 세인트힐 컨트리클럽 앞에 멈춰 섰다. 도윤이 먼저 내려 뒷문을 열자 태호는 느슨해진 넥타이를 그대로 둔 채 차에서 내렸다. 정장 차림 그대로 필드 쪽으로 향하던 태호는 멀리 보이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걸음을 늦췄다. 강덕수. 그 옆에는 한영백화점 윤 회장과 윤세림이 함께 앉아 있었다. 필드가 내려다보이는 클럽하우스 테라스에서 세 사람은 차를 앞에 두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도 저쪽과 자신을 엮을 생각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호의 낯이 싸늘하게 굳었다. 태호를 발견한 강덕수가 태연하게 손짓했다. “왔냐. 온 김에 골프나 한 게임 치고 가.” 태호는 자리에 앉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 눈에는 제가 얼마나 등신처럼 보이십니까?” 강덕수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사람 불러놓고 이게 뭡니까.”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때 세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부회장님. 제가 부회장님 보고 싶다고 해서…… 회장님께서 불러주신 거예요.” 태호는 세림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태강이 국내 건설업계 정점까지 누워서 올라간 줄 아십니까?” 낮고 서늘한 음성이 그대로 강덕수에게 향했다. “저도 할 일 많습니다.” “강태호.” “다시는 이런 일로 저 부르지 마십시오.” 말을 끝낸 태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뒤에서 강덕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클럽하우스를 빠져나오려던 순간 급한 발소리가 뒤따라왔다. “부회장님!” 윤세림이었다. 태호가 귀찮다는 듯 걸음을 멈추자 세림이 숨을 고르며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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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이런 건 남편 앞에서만 입는 거야

 뒤쪽에서 일정을 확인하던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굳었다. “…….” 평소 회사에서는 단정한 정장이나 블라우스 차림이 대부분이었던 지안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짙은 네이비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슴께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살짝 파여 있었고, 허리부터는 몸선을 따라 매끄럽게 붙다가 아래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퍼지는 디자인이었다. 노골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가느다란 목선과 반듯한 쇄골,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까지 단정한 옷차림에 가려져 있던 선이 한눈에 드러났다. “실장님?” 지안이 다시 부르고 나서야 민준이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진짜 이상하지 않아요?” “전혀요.” 대답은 단호했다. 하지만 지안은 영 못 미더운 얼굴로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몸을 옆으로 살짝 틀어보더니 이내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아까 입었던 게 더 괜찮지 않았어요? 이건 살짝…….” 옆에서 핏을 살피던 스타일리스트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사님. 제가 봐도 이게 훨씬 예뻐요.” “너무 붙는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예쁜 거예요.” 스타일리스트는 지안의 허리께에 잡힌 미세한 주름을 손끝으로 정리하며 거울 속 모습을 살폈다. “이사님은 몸매가 워낙 예쁘셔서 오히려 다 가리는 디자인이 아까워요. 허리도 이렇게 가느신데 이런 선은 살려주셔야죠.” “이런 옷은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어서……. 너무 어색한 것 같아요. 안 어울리는 것도 같고.” 지안이 또다시 가슴께를 가리자 스타일리스트가 웃으며 손을 내려주었다. “자꾸 가리시면 더 눈에 띄어요.” “안 가리면 제가 너무 신경 쓰여서요.” “정말 과하지 않아요. 이사님한테 딱 어울리는 정도예요.” 옆에서 머리를 손보던 직원도 거울 너머로 웃었다. “진짜 예쁘세요. 오늘 행사 들어가시면 다들 이사님만 볼 것 같은데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더 가기 싫어져요.” 지안이 진심으로 난감한 얼굴을 하자 주변에서 작은 웃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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