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6화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5 10:35:16

욕실 문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거친 샤워 물소리가 거실의 적막을 날카롭게 갈랐다.

소율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소파 위 재킷 주머니에서 반쯤 드러난 남편 최민우의 스마트폰 화면.

그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 이름과 메시지가 망막을 사납게 난도질했다.

[윤세라 : 대표님, 오늘 호텔에서 너무 좋았어요. 내일 오전 레슨 전에 잠깐 오피스텔로 오실 수 있죠?]

손끝이 감각을 잃은 듯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쳤다.

‘호텔……? 내일 레슨 전에 또 만나겠다고?’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불길한 조각들이 단숨에 하나의 잔인한 그림으로 맞춰졌다.

결혼기념일이라며 자정이 넘도록 들어오지 않던 남편.

몸에서 풍기던 낯설고 달콤한 플로럴 향기.

그리고 아내에게 던져주었던 회당 30만 원짜리 프라이빗 짐 회원권.

모든 것이 자신을 조롱하고 밀어내기 위한 역겨운 기만이었다.

‘울지 마. 지금은 주저앉을 때가 아니야.’

소율은 입술을 짓이기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카메라 렌즈를 민우의 화면에 가져다 댔다.

찰칵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무음 카메라 앱을 켠 채 화면 속 윤세라의 이름과 메시지를 연속으로 촬영했다.

그 순간,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뚝 끊겼다.

소율은 재빨리 자신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테이블에서 서너 걸음 물러섰다.

달칵.

가운을 걸친 민우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민우는 거실 한가운데 꼿꼿이 서 있는 소율을 흘끗 보더니, 아무런 의심 없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켜 알림을 확인한 민우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슬쩍 올라갔다.

소율의 시선이 그 비열한 입매에 가닿았다.

“물은? 아직 안 떠놨어?”

민우가 턱짓으로 묻자, 소율은 감정을 억누른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수기에서 직접 떠 마셔. 나 이제 잘 거야.”

민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참나, 오늘따라 유난히 뻣뻣하게 구네. 피곤하니까 얼른 들어가.”

민우는 스마트폰을 쥔 채 안방 서재로 쏙 들어가 문을 닫아걸었다.

소율은 닫힌 문을 묵묵히 응시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분노와 오기가 서슬 퍼런 칼날처럼 곧추서고 있었다.

***

다음 날 오전 9시 30분, 강남구 삼성동의 최고급 주상복합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은색 켈브란 세단이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차에서 내린 최민우는 익숙한 걸음으로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18층으로 올라갔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자, 달콤한 바닐라 디퓨저 향이 코끝을 감쌌다.

“대표님-!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현관으로 달려 나온 윤세라가 민우의 목에 부드러운 두 팔을 감아왔다.

타이트한 실크 슬립 가운 차림의 세라는 매혹적인 눈웃음을 치며 민우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제도 봤잖아. 아침부터 또 부르고.”

민우의 말과 달리 허리를 감싼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세라는 그의 넥타이를 당겨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

“보고 싶다고 하면 안 돼요? 밖에서는 또 남처럼 굴어야 하잖아요.”

세라는 웃으면서도 민우가 대답할 때까지 넥타이를 놓지 않았다.

세라는 민우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애교 섞인 콧소리를 냈다.

민우는 소파에 털썩 앉아 세라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참, 대표님. 사모님한테 루미너스 PT 회원권 주셨다면서요?”

세라가 민우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 비싼 회원권을 왜 굳이 그 여자한테 끊어줘요? 애 낳고 몸 다 망가진 아줌마가 그런다고 뭐 달라져요?”

세라의 입에서 노골적인 비하가 쏟아져 나왔다.

민우는 피식 헛웃음을 터뜨리며 세라의 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쇼윈도야. 다음 달 리뉴얼 VIP 갈라 파티 때 내 옆에 세워둘 구색 맞추기 인형일 뿐이니까.”

“인형이요?”

“어깨 잔뜩 말고 다니는 꼴이 회사 이미지에 먹칠하잖아. 파티 때까지만 사람 꼴 갖추라고 던져준 거니까 질투하지 마.”

“그 사람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왜 자꾸 한소율 얘기를 해. 지금 너한테 와 있잖아.”

민우는 거리낌 없이 세라를 끌어안으며 탐욕스럽게 입을 맞췄다.

세라는 눈을 감았다가 먼저 떨어졌다. 그의 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온 지갑 끝을 보고서야 입가에 다시 웃음이 걸렸다.

소율이 6년간 잠을 줄여 만든 회사의 법인 카드가 그 안에 있었다. 세라는 어느 칸에 든 카드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대표님, 저 다음 달에 청담동에 제 이름으로 스튜디오 차리고 싶은데…… 도와주실 거죠?”

세라가 도발적으로 속삭이며 민우의 지갑에서 법인 카드를 쏙 빼들었다.

민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해.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다 해줄 테니까.”

***

조금 전, 오전 9시 10분.

유치원 통학 버스에 딸 하린이를 태워 보낸 소율은 자신의 소형차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 소율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었다.

어젯밤 채증해 둔 사진.

[윤세라 : 대표님, 오늘 호텔에서 너무 좋았어요……]

소율은 화면을 빤히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한구석이 찢겨 나가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소율은 떨리는 턱을 단단히 치켜올렸다.

‘한소율, 정신 똑바로 차려.’

자신이 무너지면 하린이까지 저 파렴치한 인간의 손에 내맡겨지게 된다.

소율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목적지는 청담동, 프라이빗 짐 ‘루미너스’.

레슨을 취소하는 문자를 쓰다가 지웠다. 남편 때문에 오늘 해야 할 일까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소율은 루미너스로 향하는 길에 차를 올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사모님, 자세가 야합니다   제14화

    “수업?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매트 끝에 선 민우가 소율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남편의 거친 삿대질과 폭언이 고요하던 거실의 적막을 날카롭게 찢어발겼다.민우의 시선은 땀에 젖은 소율의 탄탄한 허리 라인과, 그 곁에 서 있는 거대한 체격의 젊은 남자에게 사납게 꽂혀 있었다.민우가 더 다가서려 하자, 도진이 소율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188cm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서늘한 어깨너머로 민우의 시야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도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물처럼 차분하고 단호했다.“루미너스 VVIP 전담 1:1 홈 트레이닝 정식 계약에 따른 방문 지도 중입니다.”“뭐? 루미너스?”민우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도진의 살기 어린 눈빛과 위압적인 체격에 본능적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전직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다운 단단한 골격과 묵직한 아우라는, 허세로 가득 찬 민우를 단숨에 짓눌렀다.“내가 분명 센터에 연락해서 회원권 환불하겠다고 통보했을 텐데? 당신들 강사들 수준이 이 따위야?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기어들어와서 불륜 수작질이야 뭐야!”민우가 자존심을 세우려 억지 고함을 질렀다.그때, 도진의 등 뒤에서 소율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소율의 어깨는 활짝 펴져 있었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주눅도 없었다.“최민우 씨. 착각하지 마.”소율의 낮고 또렷한 음성이 거실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내가 예약했고 내가 문 열어드렸어. 센터에도 내 의사부터 확인하라고 했고. 선생님한테 화풀이하지 마.”“뭐……? 너 지금 누구 돈으로 끊어준 건지 잊었어?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호사 누리면서 감히 남편한테 대들어?”민우가 삿대질하며 다가오자, 소율은 서늘한 비소를 머금었다.“당신 혼자 번 돈이라고? 내가 6년 동안 뭘 했는데. 우리 부모님이 대준 돈으로 회사 시작하고, 내가 밤새 그린 디자인으로 첫 물건 팔았잖아. 100회 회원권 끊어줬다고 그게 전부 당신 덕이 돼? 내 몸 돌보는 일까지 허락받을 생각 없어. 내가 계속

  • 사모님, 자세가 야합니다   제13화

    월요일 오후 2시, 청담동 최고급 펜트하우스 15층.남편 최민우가 지방 공장 출장을 떠나고 딸 하린이가 유치원에 간 시간.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깔린 거실의 현관 인터폰 벨이 고요한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띵동-.’소율이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자, 블랙 트레이닝복 차림의 차도진이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188cm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서늘한 존재감.소율의 심장이 기묘한 긴장감으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센터가 아닌, 남편의 집 안으로 그 몸을 들이는 일이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문을 열자, 도진의 서늘한 숲 향기와 시원한 바깥 공기가 거실 안으로 묵직하게 밀려들었다.“실례하겠습니다, 사모님.”도진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거실로 들어섰다.남편 최민우의 허세와 과시욕으로 꾸며진 넓고 삭막한 거실.벽면에는 민우의 수상 트로피와 언론 인터뷰 액자들만 요란하게 걸려 있었고, 6년간 헌신한 소율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그 차가운 공간 한가운데, 도진이 가져온 전문 운동 매트와 폼롤러, 저항 밴드들이 정갈하게 놓였다.“센터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사모님이 매일 숨 쉬고 생활하는 이 공간에서 척추와 골반 정렬을 유지하는 법을 몸에 각인시켜야 합니다.”도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파와 식탁, 그리고 소율의 일상적인 걸음걸이를 예리하게 훑었다.“소파에 앉으실 때 늘 오른쪽 골반에 체중을 싣고 기대어 계시는군요. 아이를 안거나 집안일을 할 때 생긴 비대칭 습관 때문에 요추 4번과 골반 경사가 틀어지는 겁니다. 일상의 사소한 틀어짐이 체형을 무너뜨리는 주원인입니다.”도진의 한 치 오차 없는 지적에 소율은 절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매트에 엎드리십시오. 오늘은 골반 심부 안정화 근육과 둔근 가동성을 집중적으로 잡겠습니다.”소율은 매트에 손바닥과 무릎을 대고 네발기기 자세를 잡았다.타이트한 기능성 레깅스와 탑 너머로 소율의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등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센터의 넓은 룸과 달리, 이 집의 매트는 안방 문과 너무 가까웠다. 남편

  • 사모님, 자세가 야합니다   제12화

    몇 주간의 레슨이 지나고, 브랜드 리뉴얼 VIP 갈라 파티를 사흘 앞둔 토요일 오후.남편 최민우는 소율에게 청담동 명품 거리에 위치한 최고급 하이엔드 드레스 살롱 피팅 일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파티 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제일 얌전하고 몸 꽁꽁 가리는 걸로 골라 놔. 애 엄마 티 팍팍 내며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아침 출근길에 차가운 눈빛으로 내뱉었던 남편의 역겨운 폭언이 귓가를 맴돌았다.아내를 무대 위의 동반자가 아닌, 흠을 가려야 할 결격 상품 취급하는 비열하고 얄팍한 태도.지난 6년간 임신과 출산, 고된 독박 육아를 거치며 남편의 회사를 위해 밤낮없이 디자인을 쏟아부었던 대가가 고작 이런 모멸과 기만이었다.소율은 딸 하린이를 친정어머니께 잠시 맡긴 뒤, 등을 곧게 펴고 단정한 걸음으로 살롱 문을 열고 들어섰다.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 살롱의 수석 디자이너가 소율을 정중하게 맞이했다.“어서 오세요, 최민우 대표님 사모님 맞으시죠? 대표님께서 가장 단정하고 노출 없는 라인으로 특별히 준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디자이너가 내민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칙칙한 회색빛 무채색에 온몸을 헐렁하게 덮어버리는 통자 실루엣뿐이었다.아내를 철저히 ‘초라하고 무기력한 그림자’로 가두어두려는 남편의 추악한 통제욕이자 가스라이팅의 흔적이었다.소율의 붉은 입술이 서늘하게 호선을 그렸다.“아니요. 그 옷들은 전부 치워주세요.”“……네? 사모님, 하지만 대표님께서 직접 지정하신 가이드라인인데요…….”소율은 살롱 안쪽 중앙 쇼케이스 마네킹에 걸려 있는 에메랄드빛 실크 드레스를 손끝으로 우아하게 가리켰다.“저걸로 입어보겠습니다.”그것은 쇄골과 목선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등 라인이 깊게 U자로 파여 척추 기립근과 견갑골의 곡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과감한 딥 백리스 실크 드레스였다.디자이너가 당황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만류했다.“사모님, 이 드레스는 체형이 조금만 무너져 있거나 굽은 등이 있으면 단점이 극명하게

  • 사모님, 자세가 야합니다   제11화

    호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민우는 콘솔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힐끔거리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윤세라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세 통, 그리고 거친 항의 문자가 화면을 쉼 없이 채우고 있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며 서재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소율은 닫힌 서재 문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한 뒤, 안방으로 들어가 박지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소율아! 만찬 잘 끝났어?“응. 지은아, 오늘 대명인베스트 강혜란 이사장님을 만났어.”소율은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일과 강 이사장이 제안한 재단 총괄 디렉터 자리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다.수화기 너머로 지은의 감탄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박이다, 한소율! 강혜란 이사장은 정재계와 문화계에서 영향력이 엄청난 거물이야. 그 프로젝트를 맡으면 네 커리어 복귀는 물론이고, 이혼 소송에서 경제적 자립 능력과 양육권 확보에 결정적인 무기가 돼!“나, 정말 잘해보고 싶어. 하린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거든.”- 당연하지. 넌 원래 최고였어. 참, 그리고 내가 요청했던 최민우 대표 법인 자금 추적 결과가 1차로 나왔어.지은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최민우가 회사 돈으로 윤세라 오피스텔 보증금 3억 원을 냈어. 매달 400만 원씩 켈브란 리스료도 나갔고. 백화점에서 수천만 원 긁은 전표까지 있어. 이건 바람피운 문제로만 끝날 일이 아니야. 횡령·배임 혐의도 검토할 수 있어.“……고마워, 지은아. 차근차근 전부 모아둘게.”통화를 마친 소율은 가슴을 깊게 쓸어내렸다.남편의 파렴치한 범죄와 배신의 증거들이 하나씩 소율의 손아귀로 들어오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식탁에 마주 앉은 민우의 눈 밑은 퀭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어젯밤 세라의 히스테리를 달래느라 밤새 진을 뺀 모양이었다.민우는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켜며 소율을 노려보듯 말했다.“어제 강 이사장이 제안한 문화재단 프로

  • 사모님, 자세가 야합니다   제10화

    저녁 7시, 서울 시내 최고급 호텔 38층에 위치한 프라이빗 한정식 VIP 룸.소율은 군더더기 없이 단아한 네이비 정장 원피스를 입고 룸 앞에 섰다.도진에게 배운 대로, 소율은 아랫배를 단단히 끌어당기고 굽어 있던 양어깨를 활짝 폈다.정수리가 천장에 닿을 듯 꼿꼿하게 세운 척추.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남편 최민우가 소율을 돌아보았다.순간 민우의 눈동자에 찰나의 당혹과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늘 구부정한 자세로 주눅 들어 있던 아내의 초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 아래 드러난 목선과 편안하게 펴진 어깨. 소율은 민우가 당겨주는 의자를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뭐야, 왜 저렇게 멀쩡해 보여?’민우는 불쾌한 위기감을 털어내듯 헛기침을 하며 퉁명스럽게 턱짓했다.“왔어?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앉아 있어.”잠시 후, 룸 문이 열리며 중후한 노신사와 기품 있는 여성이 들어섰다.국내 굴지의 투자사 대명인베스트의 박진우 대표와 그의 아내인 강혜란 문화재단 이사장이었다.민우는 즉시 비굴할 정도로 깍듯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박 대표님, 강 이사장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최 대표, 오랜만입니다. 옆에는…… 사모님이신가요?”박 대표의 물음에 민우가 짐짓 자랑스러운 척 소율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네, 제 아내 한소율입니다. 집에서 내조만 하느라 이런 자리는 낯설어해서요.”아내를 ‘세상 물정 모르는 무능한 가정주부’로 깎아내리며 자신의 입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얄팍한 술수.하지만 강혜란 이사장의 시선은 민우의 손길을 넘어 소율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식사가 시작되자 민우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브랜드의 모든 디자인과 브랜딩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온 양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이번 신제품 라인업도 제가 직접 밤을 새워가며 디렉팅했습니다. 소비자들의 감성을 관통하는 미니멀리즘과 타이포그래피의 조화, 그게 바로 제 경영 철학이자 디자인 철학이죠.”민우가

  • 사모님, 자세가 야합니다   제9화

    도진의 서늘한 일갈이 트레이닝 룸의 벽을 날카롭게 때렸다.세라는 도진의 살기 어린 눈빛에 압도당해 뒷걸음질을 쳤다.“도, 도진 쌤…… 전 그냥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리려고 한 건데, 왜 그렇게 정색을 하세요?”세라는 억지 눈웃음을 지으며 도진의 탄탄한 팔에 손을 얹으려 했다.하지만 도진은 닿기도 전에 세라의 손목을 서늘하게 피해 버렸다.“루미너스 VVIP 전담 룸은 담당 트레이너와 예약 회원 외에는 센터 대표조차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최고 등급 보안 구역입니다. 센터 규정 잊었습니까?”도진은 지체 없이 벽면에 설치된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네, VVIP 인포데스크입니다.“차도진입니다. 3번 룸에 타 파트 프리랜서 강사가 무단 침입해 회원 레슨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데스크 매니저 즉시 올려보내서 강사 퇴실 조치 및 계약 위반 징계 절차 밟으십시오.”- 아, 넷! 죄송합니다, 팀장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인터폰 너머로 당황한 총괄 매니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세라의 얼굴이 수치심과 공포로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센터 내 최고 에이스이자 전 국가대표 출신 VVIP 총괄 팀장인 차도진의 말 한마디면, 프리랜서 강사에 불과한 자신의 계약은 당장 내일이라도 파기될 수 있었다.“……두 분, 정말 너무하시네요.”세라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소율과 도진을 번갈아 쏘아보고는 하이힐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달칵.문이 닫히고, 트레이닝 룸 안에는 다시 깊고 차분한 정적이 찾아왔다.도진은 천천히 소율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불미스러운 일로 레슨에 방해를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모님. 센터 차원에서 확실하게 재발 방지 및 징계 처리를 진행하겠습니다.”그러나 소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녀의 입가에는 엷지만 단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예?”“고마워요. 혼자 있으면 괜히 내가 잘못했나 싶었을 거예요. 방금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했네요.”소율의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