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오전 10시, 청담동 프라이빗 짐 '루미너스'의 VIP 트레이닝 룸.
소율은 어제보다 한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네이비 컬러의 브라톱과 레깅스를 갖춰 입고 매트 위에 섰다.
불과 하루 만에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허리를 짓누르던 묵직한 결림이 확연히 덜해져 있었다.
발바닥 전체로 지면을 딛고 서는 감각 또한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또렷했다.
“매트에 바르게 누우세요.”
도진의 묵직한 지시에 소율은 천장을 바라보고 매트 중앙에 반듯하게 누웠다.
도진은 소율의 굳어 있는 장요근과 대퇴직근, 그리고 깊숙이 잠겨 있는 골반 심부 근육을 풀어내는 이완 스트레칭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진이 소율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무릎을 직각으로 굽힌 뒤, 자신의 단단한 어깨 위에 소율의 발목을 얹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소율의 허벅지 안쪽과 골반 전면을 지그시 누르며 고관절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읏……!”
고관절 안쪽에서부터 찢어질 듯한 통증이 척추 라인을 타고 찌릿하게 올라왔다.
소율은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내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매트를 움켜쥐며 온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힘 빼세요, 사모님. 사모님이 억지로 버티시면 근육이 아니라 관절과 인대가 다칩니다.”
도진은 소율이 매트를 움켜쥔 것을 보고 누르던 힘을 줄였다.
하지만 6년간 뼛속까지 굳어버린 방어기제는 쉽게 긴장을 풀어내지 못했다.
소율은 식은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죄송해요…… 제가 몸이 너무 뻣뻣해서 선생님께 민폐만 끼치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사과였다.
남편 최민우에게서 조금이라도 타박을 듣지 않기 위해 언제나 먼저 머리를 조아리던 비참한 습관이었다.
그 순간, 소율의 골반을 지압하던 도진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도진이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우더니, 깊고 서늘한 눈동자로 소율을 내려다보았다.
트레이닝 룸 안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모님.”
도진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제 말씀드렸죠. 아픈 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너무 버벅거려서 선생님을 힘들게 해 드리는 것 같아서…….”
“그게 왜 저한테 미안할 일입니까?”
도진이 소율의 곁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강렬하게 얽혀들었다.
“몸이 아프고 힘들면, 저한테 사과할 게 아니라 ‘아프다’, ‘싫다’고 말해야 하는 겁니다.”
“……네?”
“지금 저보다 사모님이 더 힘드십니다. 제 눈치 보지 마세요.”
도진이 눈높이를 더 낮췄다. 소율은 그렇게 가까운 데서 제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을 처음 보았다.
“집에서도 불편하다는 말부터 삼키십니까? 누구 기분 상할까 봐요.”
“……그건.”
소율의 목구멍이 콱 막혀왔다.
부정할 수 없었다.
민우는 늘 소율의 희생을 ‘당연한 내조’로 치부했고, 불만을 내비치면 ‘감사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여자’로 몰아세웠다.
도진은 소율의 다리를 받친 채 더 누르지 않았다.
“지금 이 자세는 어떻습니까?”
아직 남아 있는 당김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소율은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 보세요. 아프면 싫다고, 멈추라고 소리 내서 말씀하십시오.”
“읏…… 아…….”
‘싫다’는 그 평범하고 당연한 두 글자가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턱턱 막혀 나오지 않았다.
“듣고 있습니다.”
도진은 받쳐 든 다리를 더 움직이지 않았다. 소율이 말을 고르는 동안 수업 시간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소율은 질끈 눈을 감고,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숨을 쥐어짜 내었다.
“아파요……! 싫어요, 잠깐만 멈춰줘요……!”
마침내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습관처럼 사과를 덧붙이지 않은 거절이었다. 소율은 그 말을 뱉어놓고도 도진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 순간, 도진의 손이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풀리며 소율의 다리를 매트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도진의 입가에 찰나의 희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잘하셨습니다.”
도진이 소율의 곁에 수건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모님이 지켜야 할 건 남의 체면이 아니라, 사모님 자신입니다.”
소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가 걷히자 숨이 길게 나왔다. 싫다고 했는데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소율은 그 사실이 낯설어 한동안 천장을 보았다.
***
그날 밤 11시, 청담동 아파트 거실.
소율은 소파에 앉아 등을 곧게 펴고 잡지를 넘기고 있었다.
어제처럼 구부정하게 웅크린 채 남편의 눈치를 살피던 초라한 모습이 아니었다.
‘띠리링-.’
도어록이 풀리고 남편 최민우가 들어섰다.
술 냄새와 함께 여전히 낯설고 달콤한 플로럴 향기가 섞여 풍겼다.
민우는 평소처럼 거만하게 재킷을 벗어 소파로 던지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안 자고 뭐 해?”
“책 보고 있었어.”
소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가지 않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차분한 눈동자로 민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아내의 당당한 태도에 민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씻고 올 테니까 물이나 한 잔 떠놔.”
민우는 찝찝한 기색으로 넥타이를 풀며 안방 욕실로 들어갔다.
거센 샤워 물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소파에 던져 둔 민우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이 반쯤 빠져나와 있었다. 그 화면이 밝아졌다.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무음 화면 위로 팝업 메시지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윤세라 : 대표님, 오늘 호텔에서 너무 좋았어요. 내일 오전 레슨 전에 잠깐 오피스텔로 오실 수 있죠?]
소율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남편의 추악한 불륜이 마침내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낸 순간이었다.
소율은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욕실 안에서는 아직 물소리가 나고 있었다.
“수업?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매트 끝에 선 민우가 소율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남편의 거친 삿대질과 폭언이 고요하던 거실의 적막을 날카롭게 찢어발겼다.민우의 시선은 땀에 젖은 소율의 탄탄한 허리 라인과, 그 곁에 서 있는 거대한 체격의 젊은 남자에게 사납게 꽂혀 있었다.민우가 더 다가서려 하자, 도진이 소율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188cm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서늘한 어깨너머로 민우의 시야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도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물처럼 차분하고 단호했다.“루미너스 VVIP 전담 1:1 홈 트레이닝 정식 계약에 따른 방문 지도 중입니다.”“뭐? 루미너스?”민우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도진의 살기 어린 눈빛과 위압적인 체격에 본능적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전직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다운 단단한 골격과 묵직한 아우라는, 허세로 가득 찬 민우를 단숨에 짓눌렀다.“내가 분명 센터에 연락해서 회원권 환불하겠다고 통보했을 텐데? 당신들 강사들 수준이 이 따위야?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기어들어와서 불륜 수작질이야 뭐야!”민우가 자존심을 세우려 억지 고함을 질렀다.그때, 도진의 등 뒤에서 소율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소율의 어깨는 활짝 펴져 있었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주눅도 없었다.“최민우 씨. 착각하지 마.”소율의 낮고 또렷한 음성이 거실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내가 예약했고 내가 문 열어드렸어. 센터에도 내 의사부터 확인하라고 했고. 선생님한테 화풀이하지 마.”“뭐……? 너 지금 누구 돈으로 끊어준 건지 잊었어?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호사 누리면서 감히 남편한테 대들어?”민우가 삿대질하며 다가오자, 소율은 서늘한 비소를 머금었다.“당신 혼자 번 돈이라고? 내가 6년 동안 뭘 했는데. 우리 부모님이 대준 돈으로 회사 시작하고, 내가 밤새 그린 디자인으로 첫 물건 팔았잖아. 100회 회원권 끊어줬다고 그게 전부 당신 덕이 돼? 내 몸 돌보는 일까지 허락받을 생각 없어. 내가 계속
월요일 오후 2시, 청담동 최고급 펜트하우스 15층.남편 최민우가 지방 공장 출장을 떠나고 딸 하린이가 유치원에 간 시간.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깔린 거실의 현관 인터폰 벨이 고요한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띵동-.’소율이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자, 블랙 트레이닝복 차림의 차도진이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188cm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서늘한 존재감.소율의 심장이 기묘한 긴장감으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센터가 아닌, 남편의 집 안으로 그 몸을 들이는 일이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문을 열자, 도진의 서늘한 숲 향기와 시원한 바깥 공기가 거실 안으로 묵직하게 밀려들었다.“실례하겠습니다, 사모님.”도진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거실로 들어섰다.남편 최민우의 허세와 과시욕으로 꾸며진 넓고 삭막한 거실.벽면에는 민우의 수상 트로피와 언론 인터뷰 액자들만 요란하게 걸려 있었고, 6년간 헌신한 소율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그 차가운 공간 한가운데, 도진이 가져온 전문 운동 매트와 폼롤러, 저항 밴드들이 정갈하게 놓였다.“센터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사모님이 매일 숨 쉬고 생활하는 이 공간에서 척추와 골반 정렬을 유지하는 법을 몸에 각인시켜야 합니다.”도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파와 식탁, 그리고 소율의 일상적인 걸음걸이를 예리하게 훑었다.“소파에 앉으실 때 늘 오른쪽 골반에 체중을 싣고 기대어 계시는군요. 아이를 안거나 집안일을 할 때 생긴 비대칭 습관 때문에 요추 4번과 골반 경사가 틀어지는 겁니다. 일상의 사소한 틀어짐이 체형을 무너뜨리는 주원인입니다.”도진의 한 치 오차 없는 지적에 소율은 절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매트에 엎드리십시오. 오늘은 골반 심부 안정화 근육과 둔근 가동성을 집중적으로 잡겠습니다.”소율은 매트에 손바닥과 무릎을 대고 네발기기 자세를 잡았다.타이트한 기능성 레깅스와 탑 너머로 소율의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등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센터의 넓은 룸과 달리, 이 집의 매트는 안방 문과 너무 가까웠다. 남편
몇 주간의 레슨이 지나고, 브랜드 리뉴얼 VIP 갈라 파티를 사흘 앞둔 토요일 오후.남편 최민우는 소율에게 청담동 명품 거리에 위치한 최고급 하이엔드 드레스 살롱 피팅 일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파티 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제일 얌전하고 몸 꽁꽁 가리는 걸로 골라 놔. 애 엄마 티 팍팍 내며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아침 출근길에 차가운 눈빛으로 내뱉었던 남편의 역겨운 폭언이 귓가를 맴돌았다.아내를 무대 위의 동반자가 아닌, 흠을 가려야 할 결격 상품 취급하는 비열하고 얄팍한 태도.지난 6년간 임신과 출산, 고된 독박 육아를 거치며 남편의 회사를 위해 밤낮없이 디자인을 쏟아부었던 대가가 고작 이런 모멸과 기만이었다.소율은 딸 하린이를 친정어머니께 잠시 맡긴 뒤, 등을 곧게 펴고 단정한 걸음으로 살롱 문을 열고 들어섰다.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 살롱의 수석 디자이너가 소율을 정중하게 맞이했다.“어서 오세요, 최민우 대표님 사모님 맞으시죠? 대표님께서 가장 단정하고 노출 없는 라인으로 특별히 준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디자이너가 내민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칙칙한 회색빛 무채색에 온몸을 헐렁하게 덮어버리는 통자 실루엣뿐이었다.아내를 철저히 ‘초라하고 무기력한 그림자’로 가두어두려는 남편의 추악한 통제욕이자 가스라이팅의 흔적이었다.소율의 붉은 입술이 서늘하게 호선을 그렸다.“아니요. 그 옷들은 전부 치워주세요.”“……네? 사모님, 하지만 대표님께서 직접 지정하신 가이드라인인데요…….”소율은 살롱 안쪽 중앙 쇼케이스 마네킹에 걸려 있는 에메랄드빛 실크 드레스를 손끝으로 우아하게 가리켰다.“저걸로 입어보겠습니다.”그것은 쇄골과 목선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등 라인이 깊게 U자로 파여 척추 기립근과 견갑골의 곡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과감한 딥 백리스 실크 드레스였다.디자이너가 당황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만류했다.“사모님, 이 드레스는 체형이 조금만 무너져 있거나 굽은 등이 있으면 단점이 극명하게
호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민우는 콘솔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힐끔거리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윤세라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세 통, 그리고 거친 항의 문자가 화면을 쉼 없이 채우고 있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며 서재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소율은 닫힌 서재 문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한 뒤, 안방으로 들어가 박지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소율아! 만찬 잘 끝났어?“응. 지은아, 오늘 대명인베스트 강혜란 이사장님을 만났어.”소율은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일과 강 이사장이 제안한 재단 총괄 디렉터 자리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다.수화기 너머로 지은의 감탄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박이다, 한소율! 강혜란 이사장은 정재계와 문화계에서 영향력이 엄청난 거물이야. 그 프로젝트를 맡으면 네 커리어 복귀는 물론이고, 이혼 소송에서 경제적 자립 능력과 양육권 확보에 결정적인 무기가 돼!“나, 정말 잘해보고 싶어. 하린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거든.”- 당연하지. 넌 원래 최고였어. 참, 그리고 내가 요청했던 최민우 대표 법인 자금 추적 결과가 1차로 나왔어.지은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최민우가 회사 돈으로 윤세라 오피스텔 보증금 3억 원을 냈어. 매달 400만 원씩 켈브란 리스료도 나갔고. 백화점에서 수천만 원 긁은 전표까지 있어. 이건 바람피운 문제로만 끝날 일이 아니야. 횡령·배임 혐의도 검토할 수 있어.“……고마워, 지은아. 차근차근 전부 모아둘게.”통화를 마친 소율은 가슴을 깊게 쓸어내렸다.남편의 파렴치한 범죄와 배신의 증거들이 하나씩 소율의 손아귀로 들어오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식탁에 마주 앉은 민우의 눈 밑은 퀭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어젯밤 세라의 히스테리를 달래느라 밤새 진을 뺀 모양이었다.민우는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켜며 소율을 노려보듯 말했다.“어제 강 이사장이 제안한 문화재단 프로
저녁 7시, 서울 시내 최고급 호텔 38층에 위치한 프라이빗 한정식 VIP 룸.소율은 군더더기 없이 단아한 네이비 정장 원피스를 입고 룸 앞에 섰다.도진에게 배운 대로, 소율은 아랫배를 단단히 끌어당기고 굽어 있던 양어깨를 활짝 폈다.정수리가 천장에 닿을 듯 꼿꼿하게 세운 척추.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남편 최민우가 소율을 돌아보았다.순간 민우의 눈동자에 찰나의 당혹과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늘 구부정한 자세로 주눅 들어 있던 아내의 초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 아래 드러난 목선과 편안하게 펴진 어깨. 소율은 민우가 당겨주는 의자를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뭐야, 왜 저렇게 멀쩡해 보여?’민우는 불쾌한 위기감을 털어내듯 헛기침을 하며 퉁명스럽게 턱짓했다.“왔어?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앉아 있어.”잠시 후, 룸 문이 열리며 중후한 노신사와 기품 있는 여성이 들어섰다.국내 굴지의 투자사 대명인베스트의 박진우 대표와 그의 아내인 강혜란 문화재단 이사장이었다.민우는 즉시 비굴할 정도로 깍듯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박 대표님, 강 이사장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최 대표, 오랜만입니다. 옆에는…… 사모님이신가요?”박 대표의 물음에 민우가 짐짓 자랑스러운 척 소율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네, 제 아내 한소율입니다. 집에서 내조만 하느라 이런 자리는 낯설어해서요.”아내를 ‘세상 물정 모르는 무능한 가정주부’로 깎아내리며 자신의 입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얄팍한 술수.하지만 강혜란 이사장의 시선은 민우의 손길을 넘어 소율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식사가 시작되자 민우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브랜드의 모든 디자인과 브랜딩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온 양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이번 신제품 라인업도 제가 직접 밤을 새워가며 디렉팅했습니다. 소비자들의 감성을 관통하는 미니멀리즘과 타이포그래피의 조화, 그게 바로 제 경영 철학이자 디자인 철학이죠.”민우가
도진의 서늘한 일갈이 트레이닝 룸의 벽을 날카롭게 때렸다.세라는 도진의 살기 어린 눈빛에 압도당해 뒷걸음질을 쳤다.“도, 도진 쌤…… 전 그냥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리려고 한 건데, 왜 그렇게 정색을 하세요?”세라는 억지 눈웃음을 지으며 도진의 탄탄한 팔에 손을 얹으려 했다.하지만 도진은 닿기도 전에 세라의 손목을 서늘하게 피해 버렸다.“루미너스 VVIP 전담 룸은 담당 트레이너와 예약 회원 외에는 센터 대표조차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최고 등급 보안 구역입니다. 센터 규정 잊었습니까?”도진은 지체 없이 벽면에 설치된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네, VVIP 인포데스크입니다.“차도진입니다. 3번 룸에 타 파트 프리랜서 강사가 무단 침입해 회원 레슨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데스크 매니저 즉시 올려보내서 강사 퇴실 조치 및 계약 위반 징계 절차 밟으십시오.”- 아, 넷! 죄송합니다, 팀장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인터폰 너머로 당황한 총괄 매니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세라의 얼굴이 수치심과 공포로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센터 내 최고 에이스이자 전 국가대표 출신 VVIP 총괄 팀장인 차도진의 말 한마디면, 프리랜서 강사에 불과한 자신의 계약은 당장 내일이라도 파기될 수 있었다.“……두 분, 정말 너무하시네요.”세라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소율과 도진을 번갈아 쏘아보고는 하이힐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달칵.문이 닫히고, 트레이닝 룸 안에는 다시 깊고 차분한 정적이 찾아왔다.도진은 천천히 소율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불미스러운 일로 레슨에 방해를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모님. 센터 차원에서 확실하게 재발 방지 및 징계 처리를 진행하겠습니다.”그러나 소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녀의 입가에는 엷지만 단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예?”“고마워요. 혼자 있으면 괜히 내가 잘못했나 싶었을 거예요. 방금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했네요.”소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