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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응. 수업은 다 끝났어. 이제 논문만 마무리하면 조기 졸업도 가능해.”혜나는 동생 한나가 어릴 때부터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한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고등학교 전 과정을 마치고 수능까지 치렀다. 충분히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가족들은 한나가 너무 어린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염려가 컸다. 결국 한나는 대학 입학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좋아. 같이 가자.”자매는 함께 금빛정으로 향했다.두 사람은 약속 시간보다 5분 일찍 예약된 룸에 도착했다. 그리고 2분쯤 지나자 남자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한나는 그중 한 남자를 알아보고 순간 표정이 굳었다.기혁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절친인 차성모였다.성모는 줄곧 해외에서 생활했다. 예전에 잠시 귀국했을 때 기혁과 식사 약속을 잡은 적이 있었는데, 마침 같은 식당에 있던 한나도 두 사람과 함께 식사한 적이 있었다.한나의 기억 속 성모는 말수가 거의 없는 남자였다.그날도 성모는 기혁과 신재생에너지용 전고체 배터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았다.그사이 혜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한 대표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한지환은 정중하게 악수를 나눈 뒤 옆에 선 남자를 소개했다.“이쪽은 제 대학 동창인 CS그룹의 차성모 대표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보이더군요. 마침 사업적으로 연계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서 함께 왔습니다.”“차 대표님, 안녕하세요. YW그룹 사장 최혜나입니다. 이쪽은 제 동생 최한나고요. 두 분 모두 앉으시죠.”젊은 나이에 능력을 인정받은 지환은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금테 안경을 쓰고 있어 지적이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을 풍겼다.반면 검은 옷을 입은 성모는 표정부터 차갑고 무뚝뚝했다. 두 사람은 분위기부터 확연히 달랐다.모두가 자리에 앉으려는 사이, 한나가 혜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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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기혁이었다.한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언제부터 여기 있었지?’기혁이 문을 여는 손길에는 억눌린 분노가 묻어 있었다.‘설마... 다 들은 거야?’기혁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더니 곧장 한나에게 다가왔다.한나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세면대에 등이 닿고 말았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면 계획을 바꾸는 거 아닐까?’‘당장 그 영상을 공개해 버리면 어떡하지?’한나의 얼굴에 당혹감과 막막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기혁은 한나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다.“네가 나를 이렇게까지 못 믿는 줄은 몰랐네.”기혁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오빠...”한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부르며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다.“그런 거 아니야. 내가 설명할게.”기혁은 한나의 턱을 놓아주었지만, 오히려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는 한나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그래. 어디 한번 설명해 봐.”“지난 이틀 동안 언니한테 두 그룹의 사업 경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내가 회사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도, 어릴 때부터 두 집안이 경쟁 관계라는 얘기는 많이 들었잖아.”“언니가 이번에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 투자를 받으려고 HM테크를 만나러 왔다고도 했고.”한나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작년 가을 연휴 때 오빠가 해외 출장 갈 때 나도 따라갔잖아. 그때 오빠가 도현 씨랑 전고체 배터리 사업에 관해 얘기하는 걸 들었어.”“그런데 아까 룸에서 도현 씨를 만난 거야. 게다가 한 대표님이랑 대학 동창이라더라. 그러니까 언니 일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어.”한나는 기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차 때문에 언니가 우리 사이도 의심하고 있잖아. 두 집안이 경쟁 관계인 것도 사실이고.”“그래서 일부러 오빠를 나쁘게 말한 거야. 언니한테 내가 오빠랑 가까운 사이라는 걸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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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한나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안 되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기혁은 가늘게 떨리는 한나의 눈꺼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웃었다.“먼저 가. 난 조금 있다가 따라갈게.”“그럼 나 먼저 나갈게.”한나는 화장실을 나와 룸으로 향하면서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기혁의 입술이 닿았던 눈꺼풀을 꼼꼼히 닦아 낸 뒤, 사용한 물티슈를 휴지통에 버렸다.룸으로 돌아온 한나는 혜나의 옆자리에 앉았다.어느새 식탁에는 주문한 음식이 모두 차려져 있었다.혜나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지환이 한나를 보며 웃었다.“한나 씨, 마침 한나 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곧 약혼하신다면서요?”사실 지환은 한나에게 호감이 생겨 혜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던 참이었다.하지만 동생을 철저히 보호하려는 혜나는 한나가 곧 약혼할 예정이라고 선을 그었다.그 순간, 성모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나에게 향했다.한나는 순간 긴장했다. 성모는 자신과 기혁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자칫 그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줄 수도 있었다.그나마 지난번에 미리 해명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한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어느 집 아드님이 그렇게 복이 좋으신 걸까요?”지환이 웃으며 묻자 혜나는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약혼식 때 꼭 초대할게요. 그때 직접 확인하시면 되겠네요.”남자의 마음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날 때가 있었다.오랫동안 사업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 온 혜나는 지환이 한나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다.지환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해도 사업가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사업하는 사람들은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 능숙했다.최씨 집안 사람들은 한나가 사업가와 결혼하는 것을 그다지 바라지 않았다.혜나 역시 동생을 그런 집안으로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다.성격이 부드럽고 마음이 여린 한나에게는 학식과 교양을 갖춘 집안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그때, 밖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노크 소리가 세 번 울리더니 룸의 문이 열렸다.똑- 똑- 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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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한나는 겨우 중심을 잡자마자 기혁을 밀어내고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그녀는 일행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서둘러 룸을 빠져나갔다.동생이 무사히 떠나는 모습을 확인한 혜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한나가 나가고 나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혜나는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며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제 동생이 워낙 순진해서요. 게다가...”혜나는 복잡한 눈빛으로 기혁을 바라봤다.“송 대표가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건 밖에서도 워낙 유명하잖아요. 동생이 걱정돼서 저도 모르게 실례했습니다. 사과의 뜻으로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지환과 성모도 잔을 들어 올렸다.혜나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고, 동생을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그런데 기혁이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남을 깎아내리고 헐뜯는 게 네가 사과하는 방식이야?”“깎아내려? 헐뜯는다고?”혜나가 어이없다는 듯 냉소를 흘렸다.“송기혁, 너 정말 네 평판이 어떤지 몰라? 내 동생은 눈밭에 핀 꽃처럼 순수한 애야.”“너 같은 인간이 함부로 손댈 자격 없어. 아까 일부러 한나를 넘어뜨린 것도 내가 모를 줄 알아?”혜나는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한나 역시 오늘 만남이 기혁이 파 놓은 함정일 수 있다고 경고하지 않았던가.성모는 기혁의 오랜 친구였고, 지환은 그런 성모의 대학 동창이었다.어차피 혜나는 지환과 더 이상 프로젝트를 논의할 생각이 없었다.그러니 굳이 체면을 차리거나 예의를 지킬 필요도 없었다.지금 혜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혁이 한나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었다.착하고 순진한 동생이 기혁 같은 남자에게 상처받는 꼴만큼은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지환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성모를 바라봤다.그러자 성모는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자신에게 묻지 말고 직접 지켜보라는 뜻이었다.기혁은 혜나를 똑바로 응시했다.잠시 후, 그의 잘생긴 얼굴에 희미한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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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뭔데?”혜나는 한나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오늘 너도 봤지? 송기혁은 행동도 경솔하고 여자관계도 복잡해. 그러니까 절대 가까이하지 마. 알았지?”한나는 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당부였다.한나는 오래전에 기혁이 쳐 놓은 다정한 덫에 빠져 버렸다.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수습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혜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이번 프로젝트는 HM테크와 함께 진행하지 않는 게 좋겠어. 내일 아침 비행기도 예약해 뒀어. 난 먼저 들어가서 쉴게.”혜나는 말을 마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한나도 자기 방으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한동안 멍하니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지난 며칠 동안 한나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그런데 고작 검사 결과지 한 장조차 제대로 가져오지 못했다.오늘도 기회를 놓쳐 버렸다.이제는 다시 그곳에 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잠시 눈을 붙였다가 깨어난 혜나는 동생 방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한나가 불을 끄는 걸 깜빡한 줄 알고 방으로 향했는데, 뜻밖에도 동생은 여전히 깨어 있었다.“졸린다더니 왜 아직 안 자?”“마무리할 작업이 좀 있어서.”한나는 적당히 핑계를 댔다.“애니메이션 만드는 게 아무리 좋아도 너무 무리하지 마. 얼른 자.”혜나가 돌아서려던 순간, 한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언니.”“응? 왜?”“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뭔데? 물어봐.”한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언니는 왜 연애 안 해?”순간 혜나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평소처럼 웃으며 대답했다.“너도 알잖아. 난 시간 낭비하는 거 싫어해. 어차피 결혼도 사랑이랑 상관없이 할 생각인데, 굳이 연애에 시간을 쓸 필요가 있겠어?”혜나는 한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좀 멜랑꼴리해진 거야?”“그런가 봐. 그래도 언니가 연애를 한 번도 안 해 보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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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택시에서 내린 한나는 주차장에 세워진 기혁의 마이바흐를 단번에 알아봤다.차 자체가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지만, 번호판만큼은 달랐다.저 차번이라면 틀림없이 기혁의 차일 것이다.‘언니가 송기혁을 만나러 온 거야?’한나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라운지 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화려하게 번쩍이는 조명과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이 거슬렸지만, 한나는 애써 참았다....그 시각, 혜나는 예약된 룸으로 들어갔다.룸 안에는 성모와 기혁, 단 두 사람만 있었다.한나의 말이 사실이었다.두 사람은 분명 가까운 사이였다.혜나는 망설임 없이 기혁의 옆자리에 앉았다.기혁은 다리를 꼰 채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의 주변을 맴도는 자욱한 담배 연기는 가뜩이나 잘생긴 얼굴에 묘한 신비로움을 더했다.혜나가 앉자 기혁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몸을 일으켜 와인 한 잔을 건넸다.혜나는 와인잔을 받아 들고 기혁과 성모를 차례로 바라봤다.하지만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동생에게서 들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두 사람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오늘 낮 식사 자리가 끝나자마자 기혁과 성모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 봐도 둘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었다.게다가 혜나가 오늘 따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성모는 실제로 해외에서 신재생에너지용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고 있었다.그가 이번에 귀국한 목적도 국내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그렇다면 성모가 국내에서 처음 손잡을 협력자로 기혁을 선택할 가능성이 컸다.성모는 지환과도 친분이 있었다.만약 두 사람이 YW그룹의 프로젝트 기획 내용을 알게 된다면, 오랫동안 이어진 두 집안의 경쟁 관계를 생각할 때 기혁이 먼저 사업을 추진할 것이 뻔했다.하지만 혜나는 성모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그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는 것 따위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그녀는 곧장 기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내가 어제 분명히 경고했지? 그런데 오늘 네 행동은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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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혜나는 원래 결단이 빠른 만큼 걸음걸이도 거침없었다.라운지 홀 한쪽에 앉아 있던 한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오는 언니를 발견했다.그런데 기혁이 곧바로 혜나의 뒤를 따라 나왔다.기혁은 혜나가 차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혜나를 차체 쪽으로 밀어붙였다.“오늘 굳이 나를 찾아와 경고까지 한 게 정말 내가 네 동생을 건드릴까 봐서야? 아니면 아직도 나를 사랑해서야?”기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혜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혜나는 기혁을 거칠게 밀어내며 냉소를 흘렸다.“예전에도 너한테 관심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혼자 착각하지 마.”멀리서 지켜보던 한나에게는 두 사람의 움직임만 보일 뿐, 대화 내용까지 들리지는 않았다.하지만 기혁이 언니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반면 혜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밀어냈다.그 모습을 보자 한나는 더 확신하게 됐다.언니야말로 기혁이 끝내 손에 넣지 못한 여자가 맞았다.기혁이 아무리 다정한 말과 행동으로 유혹해도 혜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에 비하면 자신은...한나는 언니와 감히 비교할 수도 없었다.한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아탔다.차에 올라탄 한나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깊은 밤, 화려한 네온사인이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한나가 집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혜나도 돌아왔다.‘역시 언니는 다르구나.’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을 보면 기혁도 더는 언니를 붙잡지 못한 모양이었다....한편, 혜나가 떠난 뒤 기혁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그는 소파에 앉자마자 와인잔을 집어 들고 술을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그 모습을 본 성모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얼굴에 와인까지 뒤집어쓰고도 또 쫓아갔다가 결국 차인 거야? 그런데 너, 최한나 만나는 거 정말 최혜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기혁은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술만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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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유삼순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사람 몇 명 불러서 이 소파 좀 옮겨 주세요.”그 말을 듣는 순간, 한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소파를 옮기면 그 아래 숨겨 둔 검사 결과지가 드러날 터였다.그러면 기혁이 한나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네, 대표님. 바로 사람을 부르겠습니다.”유삼순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한나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기혁에게 물었다.“커프스 찾으려고 소파까지 옮기게?”“응.”“그냥 단추 하나잖아.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되는데...”한나는 어떻게든 소파를 옮기는 일을 막고 싶었다.하지만 기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어떻게 신경을 안 써? 네가 생일 선물로 준 건데. 소파 밑으로 들어간 것뿐이니까 옮기면 금방 찾을 수 있어.”한나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어떡하지?’그사이 직원 몇 명이 금세 안으로 들어왔다.기혁은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커프스가 소파 밑으로 굴러 들어갔어요. 이것 좀 옮겨 주세요.”“네, 대표님.”직원들은 곧바로 소파를 옮기기 시작했다.쿵- 쿵- 쿵-한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이제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어차피 기혁은 아이를 원하지 않잖아.’‘임신한 걸 들키더라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지우면 돼.’한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잠시 후, 직원들이 소파를 옆으로 밀어냈다.그리고 그 아래에서 한나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검사 결과지가 모습을 드러냈다.순간 한나는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평소 청결에 유난히 예민한 기혁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발견하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는 곧바로 직원에게 말했다.“저 쓰레기도 좀 치워 주세요.”다행히 검사 결과지는 글씨가 적힌 면이 바닥을 향한 채 뒤집혀 있었다.기혁은 종이의 내용을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기혁의 깔끔한 성격을 잘 아는 직원은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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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지금 한나가 바라는 것은 벌여 놓은 일들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자기에게 상처만 남긴 이곳을 떠나는 것뿐이었다.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인지, 결국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가족뿐이라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았다.“그때는 어려서 바깥세상이 궁금했어. 그런데 이제는 집이 제일 좋다는 걸 알겠어.”“괜찮아. 이제 졸업도 얼마 안 남았잖아.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야. 그동안 보고 싶으면 휴가 내고 집에 와. 엄마 아빠도 너 많이 보고 싶어 하셔.”한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모든 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돌아가야 했다.마침내 한나는 손을 흔들며 언니를 배웅했다.혜나는 그동안 집안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 온 사람이었다.앞으로는 한나도 언니와 가족들을 위해 더 많이 신경 쓰고 싶었다.공항에서 나온 한나는 곧바로 공항고속도로에 올라 병원으로 향했다.그런데 임신중절 수술을 받으러 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운전대에서 한 손을 떼어 아랫배 위에 올렸다.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팠다.고속도로를 빠져나온 한나는 안전하게 차를 세울 만한 곳을 찾았다.차를 세운 뒤에는 운전대에 이마를 묻었다.한나의 손가락이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가죽 커버를 깊숙이 파고들 정도였다.한나는 한때 기혁의 아이를 간절히 갖고 싶었다.자기 집안에서는 혼전 임신을 알게 되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터였다.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되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악연도 자연스럽게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기혁의 생각은 달랐다.결국 뱃속의 두 아이에게 남은 것은... 비극뿐일 것이다.한나는 평소 다인이 남자들을 두고 이 사람도 쓰레기, 저 사람도 쓰레기라며 욕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하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의 남자를 자신이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한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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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기혁이었다.한나는 순간 온몸이 굳어 버렸다.요즘은 어째서인지 어디를 가든 기혁과 마주치는 것 같았다.기혁은 한나의 어깨를 붙잡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어디 아파?”“요즘 심장이 좀 불편해서 순환기내과에서 검사받았어. 다행히 별문제는 없대. 그런데 오빠는 여기 왜 왔어?”“나는...”“오빠!”기혁이 대답하려던 순간, 누군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말이 끊겼다.한나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예쁜 혜나’가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검사 결과지를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녀는 곧장 기혁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더니 환하게 웃었다.“오빠, 초음파 봐 주신 선생님이 아기 건강하대. 심장도 벌써 뛰고 있대.”그 말을 듣는 순간, 한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다행히 기혁이 재빨리 한나의 팔을 붙잡아 몸을 지탱해 주었다.‘예쁜 혜나’는 그런 한나를 보고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오빠, 아는 사람 만났어?”“응.”짤막한 대답에 한나의 입가에 씁쓸한 비웃음이 스쳤다.법적으로 아내가 된 여자 앞에서 자신은 그저 아는 사람에 불과했다.게다가 ‘예쁜 혜나’의 아이도 이제 막 심장박동이 확인됐다면, 두 사람의 임신 시기도 비슷하다는 뜻이었다.순간 한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이제는 기혁과 관련된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이런 광경을 마주하니 여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그때 ‘예쁜 혜나’가 한나를 향해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나우혜예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최한나예요.”한나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이렇게 정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언젠가 이 관계가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기혁은 우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아직 채혈 하나 더 남았지? 같이 가자.”“응.”우혜는 다시 한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한나 씨, 다음에 또 봬요.”그녀의 미소는 눈부실 만큼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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