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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화

作者: 영이
마당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변승현이 돌아온 것이다.

심지우가 임신 테스트기를 손에 쥔 채 욕실 문을 열자 아래층에서 변현민의 들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빠!”

심지우는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갔다.

소파 위에 서 있던 변현민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아빠, 안아줘요!”

변승현은 몸을 숙여 변현민을 안아 올렸다.

심지우는 그제야 변승현이 옷을 갈아입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 통의 부재중 전화까지 떠올리자 잔인한 현실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심지우는 마지막 계단에서 멈춰 섰다.

임신 테스트기를 쥔 그녀의 손가락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변현민이 변승현의 목을 끌어안은 채 심지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아빠가 나 데리고 놀러 간대요. 같이 갈래요?”

심지우는 잠시 변현민을 바라보다가 곧 변승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안경을 쓰지 않은 그의 깊고 뚜렷한 눈매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심지우를 향했지만 그의 표정은 늘 그렇듯 차가웠다.

“요 며칠 고생 많았어. 나 당분간 북성에 있을 거야. 현민이는 내가 데려갈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선 심지우를 향한 철저한 거리감이 묻어났다.

심지우는 그 말을 들으며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지금 상황이 우스웠다.

조금 전 욕실에서 선명한 두 줄의 선을 확인한 후 밀려왔던 기쁨이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우스웠다.

심지우가 아무 말 없이 있자 변현민은 점점 조급해졌다.

그는 심지우가 아까 카페에서 외출한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한 것도 어차피 심지우는 안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간다고 하면 어떡하지? 난 지금 아빠랑 진짜 엄마를 만나러 가려고 하는 건데...’

“엄마?”

변현민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심지우는 시선을 돌려 조금은 초조해 보이는 아이의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머릿속이 너무 어지러워서 아이의 감정까지 들여다볼 여유는 없었다.

“엄마는 안 갈래. 두 사람이 재밌게 놀다 와.”

사실 그녀도 변승현이 변승민을 데리고 주승희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변현민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엄마는 집에서 푹 쉬어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변승현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말했다.

“아빠, 우리 빨리 가요.”

변승현이 가볍게 대꾸하고 변현민을 안은 채 몸을 돌려 나가려던 순간 테이블 위에 놓인 이혼 합의서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만 서류 위 이혼이라는 두 글자는 변현민의 장난감 아래 깔려 있었다.

변승현은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심지우는 줄곧 그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의 시선이 이혼 서류에 닿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이혼 얘기를 꺼낼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심지우는 단 한 번도 이 서류를 변승현의 애인이자 변현민의 친모에게서 건네받게 될 줄은 몰랐다.

오늘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심지우는 이 결혼에 사랑은 없더라도 서로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있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자신이 감사와 애정으로 지켜온 이 결혼은 결국 변승현이 다른 여자를 위해 짜놓은 치밀한 함정일 뿐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변승현은 결혼을 도구로 이용하며 심지우를 가둬놓고 두 사람 사이의 아이에게 온 마음을 쏟게 했다.

무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말이다.

‘변승현은 단 한 번이라도 죄책감을 느끼긴 했을까?’

심지우는 주승희가 이혼 서류를 내밀던 장면을 떠올리자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감정에 휩싸였다.

그때 변승현이 고개를 숙여 이혼 서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손을 뻗으려던 찰나 심지우가 결국 참지 못하고 걸음을 내디뎠다.

손에 쥔 임신 테스트기는 거의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변승현...”

며칠 동안 쌓인 감정이 폭발하려는 순간 변현민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심지우의 말과 변승현의 행동을 끊어버렸다.

“아빠, 빨리 가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가자.”

말을 마친 변승현은 그대로 아이를 안고 집을 나섰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심지우를 돌아보지 않았다.

차가 멀어지자 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굳어 있던 몸에서 힘이 빠지자 심지우는 소파 등받이를 붙잡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고개를 떨구자 시야에 잡힌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이 점점 흐릿해졌다.

뜨거운 눈물이 그 두 줄 위로 뚝뚝 흘러내렸다.

변승현이 단 한 번이라도 그녀를 돌아봤다면 손에 들린 임신 테스트기를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과 그의 마음은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했던 적이 없었다.

심지우는 그 넓은 남호 팰리스 안에서 홀로 주저앉아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

30분 뒤 그녀는 친구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이거 정확도 높아. 내일 아침 공복에 검사하러 와.]

[그냥 바로 수술 예약하고 싶어.]

곧장 친구의 전화가 걸려 왔다.

심지우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은미라는 발신자명을 보고 심지우는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변승현은 알아?”

전화기 너머 고은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잘 생각해야 해. 이건 네 첫 아이야.”

“그 사람은 몰라.”

심지우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우리 이혼할 거야. 그 사람에겐 현민이가 있어. 아이가 생겼다고 해도 그 사람에겐 전혀 중요하지 않겠지.”

고은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심지우와 변승현의 결혼 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난 네가 변승현이랑 결혼할 때부터 불안했어. 근데 지난 5년 동안 너희 셋이 지내는 거 보면서 그럭저럭 평생 갈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끝나네. 이런 기분 알아? 열심히 정주행하던 드라마가 갑자기 막장으로 끝난 느낌이랄까?”

심지우는 시큰거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모든 사정을 고은미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은 자신이 잘못 사랑한 대가일 뿐이었다.

“내일 갈게.”

심지우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내일은 안 돼. 검사 먼저 해야 하니까 와서 다시 얘기하자.”

“알았어.”

전화를 끊은 심지우는 다시 짐 정리를 시작했다.

변승현이 남호 팰리스를 넘겨줬지만 더 이상 이곳에 남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변승현 역시 이 집을 탐내진 않을 테니 이혼하고 나면 팔아버릴 생각이었다.

5년을 살았던 집이었기에 짐도 꽤 많았지만 심지우는 일상적인 옷과 가방 몇 개만 챙겼다.

나머지는 변승현이 알아서 하든 귀찮으면 집 팔 때 정리해 버리든지 할 생각이었다.

짐 정리를 마치고 이혼 합의서에 서명한 그녀는 서류를 가장 눈에 띄는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두 캐리어를 끌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남호 팰리스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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