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4화

작가: 금붕어
주민혁은 그 말을 듣고도 미간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는 최수빈의 감정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장수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최수빈은 결국 다시 돌아와서 주민혁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주시후는 자신이 원하는 우유 목욕을 하지 못했다. 결국엔 박하린이 찾아와서 주시후를 달래주었고, 주말에 같이 항공우주 전시회에 가겠다고 약속해서야 주시후는 겨우 투정을 멈추었다.

최수빈은 주시후가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게 했고 놀이공원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주시후는 최수빈이 가난해서 박하린만큼 돈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수빈이 돈이 많았더라면 생일 선물로 값싼 만년필을 줬을 리도 없고 못생긴 케이크를 손수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박하린은 그를 데리고 진짜 비행기와 전투기를 보러 가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주시후는 신나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다.

오늘 아침은 해물 죽이었다. 어젯밤 주시후는 장수미에게 해물 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최수빈이 그에게 해물을 먹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최수빈이 없는 지금 주시후는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한편, 최수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스레 아침을 만들어 주예린에게 먹인 뒤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주시후가 차에서 내렸다.

“하린 이모가 주말에 같이 진짜 전투기를 보러 가자고 했어. 그리고 친구들이랑 같이 가지고 놀라고 플레이도우도 엄청 많이 사주셨어.”

주시후는 거만한 태도로 자랑했다.

“네가 나한테 선물해 준 블록보다 몇천 배는 더 좋아. 너도 놀고 싶다면 나한테 부탁해. 그러면 내가 하린 이모한테 얘기해서 너도 데려가 달라고 해줄 수도 있어. 어때? 하린 이모랑 아빠가 없다면 엄마가 너를 데리고 전투기를 보러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주예린은 눈시울이 빨개지고 코끝이 찡했다. 그 블록들은 주예린이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 주민혁이 주시후를 아꼈기에 주예린은 주시후의 환심을 사면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예린은 주시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 내가 선물로 준 블록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어. 그런데 어떻게 엄마를 그렇게 무시할 수가 있어?”

“엄마는 촌스러운 사람이야. 그래서 너 같은 애들이나 좋아하는 거라고. 앞으로 너랑 엄마 둘 다 집에 돌아오지 마. 우리 주씨 집안은 너랑 엄마를 환영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내게는 곧 새엄마가 생길 거야. 어제도 하린 이모가 날 재워줬어!”

...

최수빈이 주예린을 어린이집에 보낸 뒤 하늘이 어두워졌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고개를 든 최수빈은 맞은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포스터가 하나 붙어 있는 걸 보았다.

[화국 항공전이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최수빈은 당황했다. 그녀는 지난 생에 이때쯤 은산시의 항공우주 전시회가 시작됐다는 걸 떠올렸다.

은산시의 항공우주 전시회는 세계 5대 항공우주 전시회 중 하나로 2년마다 개최되는데 이번 주말에 열리는 항공우주 전시회는 제15회 항공우주 전시회였다. 전시회에서는 아주 다양한 내용이 소개된다. 육해공뿐만 아니라 전기, 인터넷 등 여러 분야도 포함되고 각종 항공기, 미사일, 드론, 위성 등이 있으며 전투기 에어쇼까지 있었다.

최수빈은 그 포스터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만약 최수빈이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조강지처가 되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이번 전시회에 그녀가 설계한 항공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시회에서 사람들을 위해 비행기의 설계 과정과 의도를 직접 설명했을지도 모른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무한한 영광이었다.

최수빈은 시선을 거둔 뒤 휴대전화를 꺼내 전시회 티켓을 예매하려고 했으나 티켓은 이미 매진된 상태였다.

그녀가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자마자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주예린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때는 마침 출근 시간이라 교통 체증이 심했다. 특히 어린이집 앞은 차가 꽉 막혀서 택시를 타는 것이 불가능했다.

최수빈은 폭우를 무릅쓰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페로 달려갔다.

문을 여는 순간, 마침 밖으로 나오려던 남자와 부딪쳐 남자가 들고 있던 뜨거운 커피가 그의 옷 위로 쏟아졌다. 커피 때문에 흰색 셔츠에 얼룩이 선명하게 남았다.

“정말 죄송해요. 옷값은 따로 드릴게요.”

최수빈은 서둘러 고개를 들며 사과했다.

상대가 최수빈임을 확인한 육민성은 잠깐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드러냈다.

“수빈아, 항공청에서 실험할 때도 내 몸에 시약을 쏟더니 오늘은 커피야? 너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최수빈은 당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육민성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

육민성은 그녀의 선배였고 박사 과정 때 같은 지도교수님을 두었었다.

한재준은 511연구원 원장으로 우리나라 항공우주 업계의 거물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도교수로 삼고 싶어 했다.

최수빈은 그의 셔츠를 보면서 말했다.

“선배도 여전하네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걸 보면 말이죠. 커피라서 얼룩 지우기 힘들 거예요. 옷값 드릴게요.”

육민성은 웃었다.

“괜찮아. 너 결혼하고 난 뒤에는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마주친 김에 얘기 좀 나눌까?”

“사실 안 그래도 선배한테 연락할 생각이었어요.”

육민성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면 연구원에 가서 얘기 나누자. 나도 옷 좀 갈아입어야겠어.”

...

최수빈은 연구원 외부 손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연구원을 찾았다.

익숙한 광경 때문에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모든 것이 그토록 생생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손님의 신분으로 응접실에 앉아 있으려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육민성은 최수빈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 여기 많이 달라진 것 같아?”

“과학 기술 발전이 빨라서 그런지 연구원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나한테는 무슨 일로 연락하려고 했어? 항공우주 분야에서 여성으로서 일인자가 되겠다고 했던 애가 갑자기 학업과 연구를 포기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겠다고 했잖아. 게다가 우리랑 연락도 끊고 말이야...”

최수빈은 미안한 마음에 시선을 들지 못했다. 그녀는 그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고 그들에게 아직 사과 한마디 못 했다.

“청운x7 이 이미 성공적으로 완성되어 이번 주말 전시회에서 선보이게 될 거라고 들었어요.”

최수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 갑자기 떠나서 미안해요. 그동안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네요.”

“너 소식 빠르다.”

육민성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때 네가 빠지고 나서 우리 프로젝트 한동안 진전이 없었어.”

“저...”

최수빈은 진심으로 미안했다.

“미안해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밖에 없었다.

최수빈이 갑작스럽게 빠지는 탓에 다른 사람들도 피해를 보았다.

지금은 과학 기술 발전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비록 최수빈은 그동안 조강지처로 지냈지만 전공 지식을 계속 공부하면서 그 분야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어도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사실 다들 네 사과를 바란 적은 없어. 대신 네가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라지.”

육민성은 최수빈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최수빈은 이곳에 있어야 빛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전시회에 직접 가봐도 돼요?”

“사실 청운은 네가 반쯤 완성한 거지. 우리는 그걸 마무리하는 데만 몇 년이 걸렸어. 너는 우리 업계 사람이야. 가정에 묶여있으면 안 돼. 그런데 왜 전시회를 보고 싶은 거야? 돌아오기로 마음먹은 거야?”

육민성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는 컵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거 티켓 예매하기 힘들어. 정말로 보고 싶다면 나한테 연락해. 내가 들여보내 줄게.”

최수빈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제가 항공우주 산업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최수빈은 어렸을 때부터 하늘과 우주를 동경했다.

그녀의 소망은 항공기를 설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소망은 우주에 닿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렸다.

지난 생에서 그녀는 항공전이 열릴 때 주예린과 함께 집에서 주시후의 숙제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때 최수빈은 주민혁이 주시후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들과 박하린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수빈은 당시 주예린이 직접 전투기 에어쇼를 본 그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생생히 기억했다. 그러나 주예린은 당시 부러운 티를 내지 않았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로서 실패했다.

최수빈은 앞으로 주예린이 주시후를 부러워할 일이 없게끔 할 것이다.

이번 생에 그녀는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고 주예린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자랑스러운 엄마가 될 것이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선생님이 더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으려고 해도, 전시회에 가서 옛 친구들을 만나거나 업계 거물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적어도 같은 업계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으니 말이다.

육민성은 싱긋 웃으며 흐뭇하게 말했다.

“우리 연구원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생각이야. 그래서 총괄 엔지니어랑 도와줄 친구들이 필요한데 아직 적임자를 찾지 못했어.”

최수빈은 육민성이 자신을 영입하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총괄 엔지니어는 감히 기대할 수도 없었으나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력서 넣을게요.”

육민성은 최수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우리 연구원에서는 결혼 생활이 안정적인 사람들만 고용해.”

최수빈은 뜸을 들였다. 예전에 없던 새로운 규정이 생긴 걸 보니 그녀 때문에 생긴 규정인 듯했다.

“저 이혼하려고요.”

육민성은 당황했다. 한때 사랑을 위해서 커리어를 포기했던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이때 최수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시후 어머님, 시후가 갑자기 온몸에 발진이 생겼고 배도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보내야 할 것 같거든요. 이곳으로 와주시겠어요?”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214화

    마이바흐 운전석 쪽 창문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려운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내밀었다.“빨리 타세요. 이러다 늦겠습니다.”최수빈의 발걸음이 뚝 멈춰버렸다.차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았지만 최근 감기에 걸려 비를 맞는 게 내키지 않았다.그럼에도 이내 그녀는 차가운 바람과 빗줄기를 뚫고 달려갔고 차가운 습기가 전신을 스며들자 너무 추워졌다.주민혁이 뒷좌석에 앉아 있다는 걸 아는 최수빈은 곧장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빗방울을 털어내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본 려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최수빈이 이렇게 태연히 조수석에 앉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어... 이건...”려운은 본능적으로 백미러를 흘깃 보았다.뒷좌석에 있는 주민혁은 올블랙 차림에 냉철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곧 늦는다면서요? 어서 출발하세요.”최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하루라도 빨리 이 자리가 끝나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뒤로 와 앉아.”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뒷좌석에서 흘러나왔다.“앞자리도 괜찮은데요.”최수빈의 대답 역시 차가웠지만 남자의 인내심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했던 말은 반복하지 않을게. 결과는 네가 잘 알잖아.”아직 이혼은 끝나지 않았다.만약 주민혁이 아이의 양육권을 무기로 나선다면 지금의 최수빈에겐 대적할 힘이 없었다.불필요한 자존심 때문에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그녀는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차 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은 채, 조용히 박씨 저택으로 향했다.비에 젖은 대문 앞, 하얀 천과 흰 등롱이 걸려 있었고 침울한 분위기가 빗줄기와 함께 짙게 내려앉았다.주씨 가문의 차가 연이어 도착했고 진서령과 원금영, 그리고 주나연이 우산을 들고 내렸다.“수빈아!”최수빈을 발견한 원금영은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이리 와서 나랑 같이 들어가자.”오랜만에 본 최수빈이 반가운 듯 목소리엔 애정이 가득했고 당연히 그녀도 순순히 따랐다.적어도 주민혁 곁보다는 할머니 옆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213화

    “오늘 김재환 씨한테서 전화가 왔어.”육민성의 말에 최수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쪽에서 뭐라던가요? 협력에 관한 말이었어요?”“협력은 한다고 했어. 다만, 신세계 그룹이랑 운상 그룹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고 아직 세부 조율이 남아 있어서 확정되면 계약서에 사인할 거야.”정부 쪽에서 직접 나서 대기업과 중소 연구소를 연결해 주는 방식이었다.천공 연구원 같은 신생 연구소에 젊은 아이디어를 더하고 큰 기업들이 뒷받침해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결국 두 그룹과의 협업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최수빈은 들고 있던 자료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허락하셨어요?”“아직.”육민성이 대답했다.“네가 불편해할까 봐 고민 중이야.”최수빈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시선을 창밖에 던질 뿐이었다.아까까지만 해도 햇살이 환했는데 이젠 먹구름이 몰려와 하늘을 짓누르고 있었다.곧 폭풍우가 터질 듯한 분위기.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미소 지었다.“선택의 여지가 없죠.”신세계 그룹과 손잡는 건, 마치 파리라도 삼킨 듯 역겹겠지만 정부의 안목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사실 전 그렇게까지 소심하지 않아요.”최수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이혼도 곧 할 거고요. 며칠만 지나서 서류에 도장 찍으면 끝이죠.”그녀는 이미 이 관계를 거쳐 가는 ‘디딤돌’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육민성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네가 신분을 숨길 필요만 없었다면.”최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지나간 성취는 그냥 그걸로 충분해요. 지금은 새로운 제가 있으니까.”육민성은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차갑고 담백한 기운, 그리고 어딘가 기품 있는 그 얼굴, 아름다우면서도 쉽게 다가설 수 없는 기운.최수빈은 한때 국가 군수 산업에서 손꼽히는 업적을 남긴 소피아였다.아직 그 누구도 뛰어넘지 못한 성과.만약 그때부터 업계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국책 핵심 연구팀의 주축이 되어 있었을지도 몰랐다.최수빈이 말하는 과거를 내려놓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212화

    수많은 일들.박하린이라면 이미 주민혁에게 충분히 설명했을 터였다.그런데도 그는 굳이 모르는 척, 확답을 쥔 채 질문을 던졌다.어차피 최수빈이 뭐라 말해도 믿어줄 리 없었다.그저 박하린을 위해 대신 화내주고 대신 따져주고 싶을 뿐.신혼집을 다시 사들인 것도 결국 같은 이유였다.주민혁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차갑게 휘어진 눈꼬리, 그 냉랭한 기운이 말해주고 있었다.‘그래. 잘 알고 있네. 넌 중요하지 않아.’그의 세상에서 중요한 건 오직 박하린뿐이었다.최수빈을 향한 질문도 결국은 그녀를 위해 따져 묻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주민혁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한쪽 소매를 아무렇지 않게 걷어 올리고는 느릿하고 무심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최수빈, 감정만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아.”그는 시선을 다시 최수빈에게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모레 보자.”최수빈이 아무리 거절 의사를 밝혀도 주민혁은 여전히 강압적이었기에 그녀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사랑받는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두려움이 없지.’한때는 주민혁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그런데 지금 그는 이렇게 잔인하게 최수빈을 짓밟아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최수빈은 너무 잘 알았다.주민혁은 한번 정한 건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자 냉혹하게 단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지금은 이혼 합의서를 무기로 최수빈을 붙들고 있으니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과는 같을 터였다.굳이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몸을 돌려 떠났다.그 뒷모습은 냉담하고도 무심했다.하지만 주민혁의 눈에는 그저 투정 부리다 문 닫고 나가는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한편, 천공 연구원의 프로젝트는 요즘 유난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최수빈은 창가에 앉아 짙은 녹음으로 가득한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오늘따라 햇살은 따사롭고 매미 소리마저 유난히 선명했다.시끄럽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211화

    “그리고 계약 외에도 할 말이 있어.”뚝!...전화를 끊는 소리가 들리자 최수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마음속으로는 수천 번도 더 거절하고 싶었지만 결국 택시를 잡아타고 신혼집으로 향했다.어쨌든 지금 그 집의 주인은 주민혁이었고 게다가 그는 두 배의 금액을 지급했다.무엇과도 맞설 수 있지만 돈과는 맞설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렇게 오래 내놓아도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던 집이 아니던가.집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연 건 장수미였다.거실 한편에서 주시후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아이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제가 말했죠. 여긴 내 집이라고.”어린아이 특유의 미숙한 억양 속에도 또렷한 배척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주시후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마치 최수빈이 공기라도 된 듯.“왔어?”이층 난간에 서 있던 주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실크 소재의 홈웨어 차림, 느긋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서재로 와. 계약서는 준비돼 있어. 사인하면 바로 계좌로 입금할 거야.”그의 눈빛에는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지 않았다.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린 채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탁자 위에 놓인 계약서를 집어 들자 주민혁은 가죽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담담히 던졌다.“확인해.”그녀는 고개를 숙여 계약서를 훑었다.이 상황이 참 우스웠다.한 번은 최수빈 앞으로 넘어왔던 집은 이제 다시 주민혁의 이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결국 이 모든 건, 박하린과 주시후의 체면을 세워주려는 복수에 지나지 않았다.최수빈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서명했다.“박하린이 천공 연구원에서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평범한 대화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 속엔 명백한 추궁이 담겨 있었다.“그건 회사 고위진의 결정이에요. 이미 해고된 일에 대해 저한테 따져 묻는 건 상대를 잘못 찾은 거겠죠.”최수빈은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차라리 직접 물어보시죠. 회사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주민혁은 잠시 최수빈을 쳐다봤으나 끝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210화

    “네?”진승우는 깜짝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하지만 곧 차분히 생각한 뒤, 그는 이미 답은 뻔하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분명 최수빈 씨 짓이에요.”박하린의 얼굴은 내내 굳어 있었다.천공 연구원이 정말 자신을 잘라낼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고 이 모든 게 입사 첫날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저 맡겨진 일에 불만을 표시했을 뿐인데, 자기 같은 인재를 보조로 쓰는 건 능력 낭비라고 느꼈을 뿐인데 결국 돌아온 건 해고였다.“하린아, 그렇게 기분 상해할 필요 없어.”주민혁의 목소리는 차분했다.“네 능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다만 어떤 사람에게 괜히 찍혔을 뿐이지. 육 대표님도 결국 오늘 결정을 후회하게 될 거야.”그의 말은 단호했다.“최수빈 때문에 널 내친 건 정말 어리석은 수야. 네가 빛날 무대는 다른 데 얼마든지 있어. 천공 연구원 따위에 얽매일 필요 없어. 그런 불공평한 조직은 애초에 그릇이 작을 수밖에 없지.”진승우 역시 얼굴을 찌푸리며 맞장구쳤다.“맞아요. 저 회사는 더 이상 높은 곳에 올라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기껏해야 이 정도가 한계일 거예요.”박하린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천공 연구원은 실력보다 ‘배경’이 지배하는 곳이었다.최수빈이 등에 업은 건, 다름 아닌 회사의 최대 주주.그렇다면 진 건 능력이 아니라 그 뒷배였다.그리고 그녀의 자존심은 무릎 꿇고 돌아갈 만큼 낮지 않았다.박하린의 입꼬리는 서서히 올라갔다.“천공 연구원은 저를 잃은 대가가 얼마나 큰지 곧 알게 될 거야.”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닫으며 담담히 말했다.“능력이 아닌 관계로 돌아가는 회사라면 오래 못 가. 나는 잘린 게 아니라 스스로 나온 거야.”주민혁이 고개를 들어 박하린을 보며 물었다.“정말 후회 안 해?”“응.”박하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민혁 오빠, 나 때문에 천공 연구원에 따질 필요 없어. 그런 분위기 속에서라면 나도 머물 이유가 없어.”그러자 진승우가 옆에서 피식 웃음을 터뜨

  •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제209화

    “죄송하지만 이렇게 비전문적인 일은 제 능력에 대한 모욕이에요. 저는 못 합니다.”박하린은 최수빈의 말을 잘라버리더니 아예 일을 거부해 버렸다.지각으로 시작해 회의에서의 태도, 그리고 이제는 업무 자체를 거부까지 더해 최수빈은 이미 세 번이나 참고 넘겨왔다.하지만 참을 인도 세 번만 새기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만족하지 못하시겠다면 그만두시면 됩니다.”최수빈은 서류를 도로 뺏어 들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박하린을 마주 봤다.“여기 오는 걸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기술부엔 인재가 넘쳐나요. 당신이 있든 없든 아무 상관 없습니다.”잠시 멈췄던 그녀의 목소리가 이번엔 더 단호하게 떨어졌다.“당신의 태도를 근거로 전 박하린 씨를 해고할 권한이 있습니다.”박하린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이 회사 대표는 육민성 씨 아닌가? 왜 최수빈 씨가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거지?’“뭐라고요? 최수빈 씨는 무슨 권한으로 저를 해고하는 거죠?”박하린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노려봤다.“최수빈 씨 따위가 감히 저를요? 앞으로 누가 이 회사에 더 큰 기여를 할지... 육 대표님이 잘 아실 겁니다.”그렇지만 최수빈은 담담히 서류를 옆 동료에게 건네며 손목에 있는 시계를 가볍게 확인했다.“그렇게 생각한다면 두고 보죠. 제가 자를 수 있는지 없는지.”짧고 단호한 말과 함께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회의실을 나갔다.지금은 프로젝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일부러 박하린을 괴롭힐 겨를도 없었다.괜한 잡음으로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으니까.박하린은 그런 최수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인맥을 통해 들어왔으면서 되게 당당하네.”그녀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 시각, 육민성은 막 협력사와의 화상 회의를 끝낸 참이었다.그때 최수빈의 전화가 걸려 왔다.짧고 간단하게 상황을 전한 뒤,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박하린 씨는 자존심만 높아요. 제가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맡긴 일마다 대충 흘려보내고 기술부장이 아니면 만족 못 하는 태도, 그건 조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