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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간의 계약 연애
14일간의 계약 연애
مؤلف: 고독한포켓

​1화

مؤلف: 고독한포켓
last update تاريخ النشر: 2026-08-06 12:13:36

​"한소율 대리."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불리는 이름. 둔탁하게 울리는 남성의 음성은 낮고 명확했다.

​서울 도심 한복판, 태성그룹 사옥 18층 기획본부 TF팀장실. 유리창 너머로 석양이 지는 도심의 마천루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고, 널찍한 원목 책상 뒤에는 차도현 팀장이 앉아 있었다.

​칼같이 떨어지는 슈트 핏, 조금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상대를 단번에 압도하는 냉철한 눈빛. 그는 태성그룹 내에서 '걸어 다니는 성과급'이자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AI'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네, 팀장님. 부르셨습니까?"

​소율은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다잡으며 정갈하게 답했다. 그녀의 단정한 슬랙스 차림과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3년간 차도현의 완벽주의를 근거리에서 버텨낸 유일한 부하직원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현은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소율의 얼굴에 정면으로 닿았다. 보통의 직원들이라면 그 눈빛만으로도 절절매며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반성부터 했겠지만, 소율은 익숙하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단단해 보이는 표정 뒤로, 소율의 마음속에는 조용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3년이었다. 이 남자의 가장 근거리에서 그가 밤을 새워 만든 기안서를 검토하고, 그가 좋아하는 쓰디쓴 아메리카노의 취향을 맞추며, 그가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나누는 날 선 대화들을 백업해 온 시간이. 그리고 그 3년 동안, 소율이 단 한 번도 이 남자에게 티 내지 않고 차곡차곡 숨겨온 감정의 깊이가 딱 3년이었다.

​‘차도현을 향한 짝사랑.’

​그것은 소율에게 지극히 위험하고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스스로 완벽한 가면을 썼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일절 품지 않는, 오직 능력과 성과로만 대화하는 완벽한 부하직원의 가면. 덕분에 도현은 소율을 기획본부 내에서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로 꼽았고, 소율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리에 앉지."

​도현이 맞은편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소율은 조용히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례적인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퇴근 시간을 불과 10분 남겨둔 시점, 업무 보고가 아닌 개인 면담 형식의 호출이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규칙적인 타격 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소율의 예상을 완전히 비껴갔다.

​"한 대리. 혹시 지금 만나는 사람 있습니까?"

​"예?"

​소율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평소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던 도현이었기에 더욱 뜻밖이었다. 소율의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그녀는 이내 일정한 톤을 되찾았다.

​"없습니다. 업무에 지장을 줄 만한 개인적인 사정은 전혀 없습니다."

​"아니, 업무에 지장을 주는지가 궁금해서 물은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연애 여부를 묻는 겁니다."

​"…솔로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도현은 가만히 소율을 응시했다. 마치 가장 가치 있는 투자처를 물색하는 투자자의 눈빛이었다. 이내 그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이며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와 연애를 좀 해줘야겠습니다."

​"…예?"

​소율의 입에서 허망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현의 얼굴을 살폈지만, 거기에는 농담의 기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완벽하게 계산된 사업 제안을 할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잘못 들으신 게 아닙니다. 정확히는 '연애를 하는 척'을 해달라는 뜻입니다. 기한은 오늘부터 딱 14일 동안."

​"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도현은 서류 봉투 하나를 밀어냈다. 봉투 안에는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 예약 내역과 몇 장의 인적 사항 서류가 들어있었다.

​"회장님—내 할머니께서 마침내 시한폭탄을 터뜨리셨습니다. 이번 주말부터 매일같이 정략혼 맞선 자리를 잡아두셨더군요. 내가 거절할 수 없도록 이사회 안건까지 들먹이면서 말입니다."

​태성그룹 이혜민 회장. 그룹의 실권자이자 도현의 할머니인 그녀가 도현의 정략결혼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도현이 이렇게 몰려 있을 줄은 몰랐다.

​"저는 회장님의 뜻대로 오너가 간의 결탁으로 이뤄지는 정략혼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무작정 거절하기엔 현재 추진 중인 신사업 건으로 이사회의 지지가 절실한 상황이죠. 그래서 회장님의 시선을 돌릴 확실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도현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내가 이미 마음에 둔 여자가 있고, 그 여자와 심각하게 교제 중이라는 명분. 그렇다면 회장님도 강제로 맞선을 추진하진 못할 겁니다. 어설픈 배우를 고용했다간 5분 만에 회장님 정보망에 걸려 넘어갈 테고, 내 사생활과 성향을 잘 알면서도, 입이 무겁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망치지 않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도현은 손가락으로 소율을 가리켰다.

​"그게 바로 한소율 대리입니다."

​소율은 목구멍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을 받았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망치지 않을 사람.'

​도현의 그 평가가 가슴을 찌릿하게 파고들었다. 자신이 그를 3년 동안 짝사랑해 왔다는 사실을, 이 남자는 정말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지극히 완벽하게 감정을 숨겨온 대가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팀장님, 저는 팀장님의 부하직원입니다. 사적인 일로 직원을 동원하시는 건—"

​"물론 공짜로 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도현이 소율의 말을 끊었다. 그는 서류 봉투 옆에 또 다른 기안서 한 장을 올려놓았다. 그 서류의 제목을 본 소율의 눈이 크게 그어져 열렸다.

​[태성그룹 유럽 지사(프랑스 파리) 신규 프로젝트 기획안 - 담당 팀장: 한소율]

​소율의 오랜 숙원이자 꿈. 입사 이래 그녀가 밤낮없이 준비해 왔던 유럽 지사 파견 및 프로젝트 총괄 기안서였다. 실력은 충분했으나, 기수와 나이 때문에 상부에서 번번이 승인을 미루고 있던 건이었다.

​"한 대리가 이 프로젝트에 얼마나 공을 들여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사회 결의가 필요한 건이지만, 내 권한과 승인으로 이번 달 내에 파견 발령을 확정 지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수고비 명목으로 별도의 보상금도 지급하죠."

​소율의 호흡이 가빠졌다.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함정이었다.

​파리 지사 파견. 그것은 소율의 커리어에 있어 엄청난 도약이 될 기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남자를 향한 헛된 짝사랑을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완전히 끊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명분이기도 했다.

​'14일.'

​딱 보름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이 14일 동안 그와 연인인 척 지내고 나면, 소율은 미련 없이 이 남자의 곁을 떠나 파리로 갈 수 있다. 3년간 숨겨왔던 내 마음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어쩌면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소율은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 떨림이 도현에게 들릴까 두려울 정도였다. 소율은 입술을 침으로 적신 뒤, 도현을 직시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도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거절이 아닌 조건 제시. 도현의 입꼬리가 호의적으로 올라갔다.

​"말해봐요."

​"첫째,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계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회사 내에서는 기존과 동일하게 팀장과 부하직원으로 행동합니다. 둘째, 할머니 회장님이나 외부 시선이 있는 곳에서만 최소한의 연기를 합니다. 셋째… 계약이 끝나는 14일 차가 되는 날, 즉시 파리 지사 파견 발령을 발령해 주십시오."

​도현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합리적인 조건이군요."

​도현은 서랍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서류 두 장을 꺼냈다. 그 서류의 상단에는 정갈한 폰트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14일간의 계약 연애 합의서]

​"미리 작성해 두었습니다. 한 대리가 말한 조건도 추가하도록 하죠."

​도현은 펜을 들어 서류에 몇 가지 조항을 즉석에서 수정해 적었다. 그리고 그 계약서를 소율 쪽으로 밀어주었다. 소율은 계약서의 조항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본 계약은 차도현(갑)과 한소율(을) 간의 14일간 위장 연애 관계를 규정한다.

​'을'은 '갑'의 정략혼 피하기 위한 연인 대행 업무를 충실히 수행한다.

​'갑'은 그 대가로 '을'의 유럽 지사 파견을 보장하고 성과급을 지급한다.

​[핵심 조항] 상호 간에 사사로운 감정 과입을 금지하며, 공사 구분을 엄격히 준수한다. 계약 기간 중 물리적·감정적 선을 넘지 않는다.

​계약 만료일(14일 차) 이후, 양사는 아무런 미련 없이 본래의 상하 관계 및 파견 절차를 진행한다.

​4번 조항, '사사로운 감정 과입 금지.'

​그 글자가 소율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이 계약서를 직접 작성한 도현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만년필을 소율에게 건넸다.

​"서명하시죠, 한 대리."

​소율은 도현이 건넨 만년필을 받아 들었다. 그 만년필은 소율에게 지극히 익숙한 촉감을 선사했다. 3년 전, 소율이 TF팀에 정식 발령받던 날 도현이 팀원 전체에게 나눠주었던 저가형 브랜드 만년필이었다. 다른 팀원들은 진작에 버리거나 잃어버렸지만, 소율만큼은 3년 내내 필통 속에 소중히 품고 다니며 손때가 묻도록 써온 바로 그 만년필.

​도현은 당연하게도 자신이 3년 전에 준 펜이라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소율은 만년필을 꽉 쥐었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한소율. 이걸로 끝내는 거야.'

​3년 동안 혼자 태우고, 혼자 아파했던 짝사랑. 이 14일 동안의 가짜 연애를 끝으로, 내 모든 미련을 이 계약서와 함께 태워버리자. 그리고 미련 없이 파리로 떠나는 거야.

​쓱, 쓱.

​정막을 가르는 펜촉 소리와 함께, 소율의 정갈한 서명이 계약서 하단에 새겨졌다.

​자신의 서명이 적힌 계약서를 확인한 도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 한 부를 챙겼다.

​"협조해 줘서 고맙습니다, 한 대리."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켓을 걸쳤다. 그리고 소율에게 계약서 사본을 건네며, 단호하고도 철저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기억해요, 한 대리. 계약서 4번 조항. 감정 과입은 금지입니다. 서로 감정 소모 없이, 딱 비즈니스답게 깔끔하게 끝냅시다."

​도현은 먼저 팀장실 문을 열고 나갔다.

​홀로 남겨진 팀장실. 유리창 너머로 완전히 어둠이 내린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소율은 손에 쥔 계약서 사본과 오래된 만년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감정 과입 금지….'

​그녀는 나지막하게 읊조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도현 씨. 당신이 말 안 해도… 이미 내 마음은 부서질 대로 부서져서, 더 이상 과입될 감정도 없으니까요."

​14일간의 시한부 가짜 연애.

그 아슬아슬하고 잔인한 비즈니스의 첫 번째 톱니바퀴가, 그렇게 소리 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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أحدث فصل

  • 14일간의 계약 연애   94화

    "그 말을 듣고 싶었나 봐요.""떠나고 싶다는 뜻이야?"곧바로 긴장하는 목소리에 소율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가 원하는 건 다른 회사가 아니에요."도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태성에서 더 큰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시작한 유럽 사업을 끝까지 키우고, 현지 전략을 본사의 승인만 기다리지 않고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싶어요. 차도현의 연인이어서 받는 자리가 아니라, 한소율의 성과로 만든 자리요."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불안해질 때쯤 그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사흘 동안 뭘 썼어?"소율은 가방에서 두꺼운 기획안을 꺼냈다."유럽 전략 기능 확대안이에요. 기획팀 독립 결재권과 프로젝트별 인력 선발권, 현지 예산 조정 범위를 정리했어요."도현은 문서를 받아 첫 장을 훑었다."연인으로서는 당장 승인하고 싶네.""본부장으로서는요?""근거가 부족해."소율이 그의 어깨에서 바로 몸을 뗐다."아직 제대로 읽지도 않으셨잖아요.""첫 장의 목표는 좋은데, 권한 확대에 따른 책임 구조가 빠졌어. 기존 지역 책임자들과의 충돌을 어떻게 조정할지도 모호하고.""그건 뒤에 있습니다.""뒤에 있으면 안 되지. 승인권자가 첫 장에서 필요성을 이해해야 해."조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게 선택권을 내주던 남자는 순식간에 냉정한 본부장으로 돌아가 있었다.소율은 어이가 없어 그를 노려봤다."다음 주 월요일까지 수정해서 정식으로 제출해.""오늘 월요일이에요.""일주일이면 충분하잖아.""휴가 내내 작성한 사람한테 너무하시네요.""좋은 자리를 원한다며. 그럼 누구도 특혜라고 말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가져와."그 말에 소율은 입술을 다물었다.까다롭고 얄미웠지만 옳은 말이었다.도현은 연인으로서 붙잡되, 본부장으로서는 길을 쉽게 깔아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소율이 가장 원했던 방식이기도 했다."좋아요. 완벽하게 수정해서 제출할게요.""기대하지."소율은 기획안을 다시 빼앗듯 받아 가방에

  • 14일간의 계약 연애   93화

    잠금 화면 위로 프랑스어 메시지 일부가 떠올랐다.[Lucien Marceau: 한 팀장님께서 제안서를 확인하셨기를 바랍니다. 직접 만나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전적으로 팀장님께 맞추겠습니다.]소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필이면 지금이었다.도현은 메시지를 읽은 기색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명함을 소율의 책상 위에 정갈하게 내려놓고, 펼쳐진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비용 절감 예상치는 확인했습니다.""본부장님, 이건….""지금은... 업무 시간입니다, 한 팀장."건조한 존댓말이 소율의 말을 막았다."외부 기업과의 접촉은 본인의 권리입니다. 다만 현 직무와 관련된 이해 충돌 가능성이 있으니 정식 면담이 잡히면 인사 담당자에게 알리십시오.""네, 알겠습니다.""보고서는 오늘 안으로 승인하겠습니다."도현은 그 말만 남기고 기획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문이 닫히자 참았던 숨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쥘리앙이 조심스럽게 소율의 책상 가까이 다가왔다."한 팀장님.""왜요?""본부장님, 화나신 것 아닙니까?""표정은 평소와 같았잖아요.""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내려오실 때 들고 계시던 커피를 한 모금도 안 드시고 그대로 가져가셨습니다. 본부장님께서 카페인을 포기하신 건 심각한 시스템 오류가 생긴겁니다."소율은 웃어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회사에서는 단 한마디도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은 도현이었다. 소율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완벽하게 지킨 셈이었다.하지만 그 무표정 아래에서 무엇이 끓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퇴근 시간이 되자 도현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차도현 본부장: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평소처럼 함께 퇴근하자는 말이었다.소율은 벨루아의 제안서와 밤새 작성한 기획안을 가방에 넣었다.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자 검은 세단의 뒷문이 열려 있었다. 도현은 안쪽 좌석에 앉아 태블릿으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소율이 옆에 타도 그는 한동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차가 주차장을

  • 14일간의 계약 연애   92화

    소율은 봉투를 개인 수첩 사이에 끼워 넣었다.잠시 후 서재 문이 열렸다."무슨 내용이야?"도현이 물었다.소율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 솔직하게 답했다."아직 제대로 못 봤어요. 생각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도현의 시선이 수첩 사이로 사라진 봉투에 잠시 닿았다."그래."그게 전부였다.왜 자신에게 바로 보여주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벨루아 그룹에 연락해 보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도현은 주방으로 향해 커피 머신의 전원부터 켰다."아침 못 먹었잖아. 뭐 먹을래?"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다.소율은 안도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남은 휴가 동안 도현은 단 한 번도 봉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소율이 창가에서 수첩을 펼쳐놓고 생각에 잠겨 있어도 방해하지 않았고, 벨루아 그룹의 최근 사업 기사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못 본 척 지나갔다.대신 끼니마다 음식을 챙겼고, 업무용 메일에 손을 대려 하면 약속 위반이라며 태블릿을 빼앗았다. 밤에는 소율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그 침묵이 무관심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기에 소율은 더 오래 고민했다.제안받은 직책은 매력적이었다. 지금보다 큰 조직과 예산을 움직일 수 있었고, 누구의 연인이라는 설명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자리였다.하지만 소율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새 명함이 아니었다.태성에서 자신이 시작한 유럽 사업을 끝까지 키워보고 싶었다. 차도현의 보호 아래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성과를 발판으로 더 큰 권한을 얻고 싶었다. 다른 회사가 인정해 준 가치를 들고 떠나는 대신, 지금 있는 자리의 한계를 직접 바꿔보고 싶었다.사흘째 밤이 되어서야 마음의 모양이 분명해졌다.소율은 빈 노트 첫 장에 제목을 적었다.[유럽 전략 기능 확대 및 기획팀 독립 권한 제안]그리고 그 아래에 지금까지 태성 지사에서 느꼈던 구조적 한계와 필요한 권한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대체 휴가가 끝난 월요일 아침.소율은 평소보다 일찍 지사에 도착했다.며칠 비웠을 뿐인데 책상 위에는 결재 대기

  • 14일간의 계약 연애   91화

    크림색 봉투의 은빛 문장을 확인한 순간, 차도현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벨루아 그룹이네."도현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낮아졌다.프랑스 대표 명품 브랜드인 메종 벨루아를 중심으로 패션과 뷰티, 유통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 태성그룹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는 아니었지만, 최근 아시아 시장과 디지털 유통망 확장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는 소식은 소율도 익히 알고 있었다.그런 회사가 왜 자신에게 극비 문서를 보냈을까.소율은 봉투를 빛에 비춰보았다. 두꺼운 종이 안쪽으로 여러 장의 문서가 겹쳐진 윤곽만 보일 뿐, 내용은 짐작할 수 없었다."열어봐."도현이 말했다."도현 씨도 궁금하죠?""궁금하지. 그래도 네 앞으로 온 문서니까 네가 먼저 봐."예전의 차도현이었다면 발신 부서부터 확인하고 비서실에 연락해 문서가 온 경위를 파악했을 것이다. 소율의 일을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넣어야 안심하던 남자였으니까.하지만 지금 그는 팔짱을 낀 채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어젯밤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겠다고 했던 약속을, 고작 봉투 하나 앞에서부터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다.소율은 괜히 가슴이 간질거려 봉투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그때 도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서울 본사 전략실이라는 표시를 확인한 그의 미간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사흘간 모든 업무 연락을 끊겠다던 사람이었지만, 파업 후속 대응과 관련된 본사 전화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잠깐 통화하고 올게.""천천히 하세요."도현은 서재로 향하다가 다시 돌아봤다."나 없을 때 열어도 돼. 기다릴 필요 없어.""알겠어요."그가 문을 닫고 들어간 뒤에도 소율은 한동안 봉투를 내려다봤다.뜯지 않은 문서인데도 손끝이 묘하게 뜨거웠다.소율은 조심스럽게 봉인을 잘랐다.가장 먼저 나온 것은 벨루아 그룹 인재전략본부 명의의 공식 서한이었다. 그 아래에는 직무 기술서와 보상 조건표, 그룹이 새로 추진하는 유럽 통합 사업 계획서의 일부가 붙어 있었다.소율의 시선이 첫 장의 굵은 글씨에 멈췄

  • 14일간의 계약 연애   90화

    도현의 입술이 소율의 이마에, 눈가에, 마지막으로 입술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급하게 빼앗는 키스가 아니었다. 긴 파업과 불면의 시간을 씻어내듯 다정하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밤이 깊어진 뒤, 두 사람은 침실의 커다란 창 앞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에펠탑의 불빛이 센강 위로 길게 번졌고, 열린 창틈으로 늦은 여름의 서늘한 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소율은 도현의 팔을 베고 누운 채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평온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도현이 소율의 손가락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다 문득 입을 열었다. "협상장에 네가 혼자 들어간 날." 소율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네." "밖에서 기다리는 세 시간이 내 인생에서 제일 길었어." 도현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소율의 손을 감싼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파업이 절정에 달했던 날, 노조 측은 외부인이 대거 동행하면 대화를 거부하겠다며 실무 대표 한 명만 협상장에 들여보냈다. 도현은 끝까지 자신이 들어가겠다고 맞섰지만, 소율이 현지 실무와 노조 요구를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이유로 직접 나섰다. 그날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도현의 얼굴은 분노와 불안으로 굳어 있었다. "무서웠어요?" "미칠 것 같았어." 그가 숨김없이 인정했다. "협상이 실패할까 봐가 아니야. 네가 험한 말을 듣거나,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데 내가 바로 들어가지 못할까 봐 무서웠어. 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싶은 걸 수십 번 참았어." "그래도 기다려줬잖아요." "네가 믿어달라고 했으니까." 도현은 소율의 손을 들어 입술에 댔다. 깊은 눈동자에 아직 가시지 않은 두려움이 비쳤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렇게 보내줄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해." 소율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손바닥으로 도현의 뺨을 감쌌다. "다음에도 보내줘요." 도현의 미간이 즉시 좁아졌다. "싫어." "방금 장담 못 한다면서 벌써 거절이에요?" "솔직하게 말한 거야." "저도 솔직하게 말

  • 14일간의 계약 연애   89화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입술을 포갰다. 가볍게 닿았다 물러날 생각이었으나 도현의 손이 뒷목을 감싸는 순간 계획은 무너졌다. 입술이 비스듬히 맞물리고, 뜨거운 숨이 뒤섞였다. 며칠 동안 업무에 쫓겨 서로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던 갈증이 늦게 터진 둑처럼 한꺼번에 쏟아졌다.도현은 소율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머금었다가 놓아주었다. 다시 각도를 바꿔 깊숙이 파고드는 키스에 소율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움켜쥐었다. 단단히 조여 있던 넥타이가 손끝에 걸렸다.소율은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내며 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이것도 포상에 포함돼요?""아니."도현의 입술이 턱선을 따라 내려왔다."이건 내가 받는 포상이야."목덜미의 여린 피부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소율이 고개를 젖히자 도현은 쇄골 위를 오래 어루만지듯 입 맞췄다. 치아가 아주 약하게 스친 자리마다 붉은 열기가 번졌다.그의 손이 허리선을 따라 올라와 홈드레스의 가느다란 어깨끈에 걸렸다. 당장이라도 끌어내릴 수 있는 거리였지만 도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두워진 눈으로 소율을 올려다보며 낮게 물었다."여기서 멈출까? 피곤하면 말해."도현의 몸에 선명하게 느껴지는 욕망과 달리,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손길은 억지로 침착했다.소율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느슨해진 넥타이를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입술이 다시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끌어내린 뒤 또렷하게 대답했다."싫어요. 오늘 포상, 끝까지 받을래요."도현의 눈동자에서 마지막 이성의 빛이 끊어졌다.도현은 소율을 안아 들고 소파에 눕혔다. 놀란 숨이 웃음으로 변하기도 전에 입술이 다시 겹쳤다. 홈드레스의 어깨끈 하나가 느슨하게 흘러내리고, 그의 입술은 드러난 어깨와 쇄골을 천천히 따라갔다."예뻐."그 짧은 감탄이 노골적인 말보다 더 뜨거웠다.소율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손끝이 드러난 가슴을 따라 내려가자 도현의 복부가 단단하게 긴장했다. 소율은 느슨해진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 소파 아래로 떨어뜨리며 장난스럽게 올려다봤다."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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