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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싶었나 봐요.""떠나고 싶다는 뜻이야?"곧바로 긴장하는 목소리에 소율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가 원하는 건 다른 회사가 아니에요."도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태성에서 더 큰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시작한 유럽 사업을 끝까지 키우고, 현지 전략을 본사의 승인만 기다리지 않고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얻고 싶어요. 차도현의 연인이어서 받는 자리가 아니라, 한소율의 성과로 만든 자리요."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불안해질 때쯤 그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그래서 사흘 동안 뭘 썼어?"소율은 가방에서 두꺼운 기획안을 꺼냈다."유럽 전략 기능 확대안이에요. 기획팀 독립 결재권과 프로젝트별 인력 선발권, 현지 예산 조정 범위를 정리했어요."도현은 문서를 받아 첫 장을 훑었다."연인으로서는 당장 승인하고 싶네.""본부장으로서는요?""근거가 부족해."소율이 그의 어깨에서 바로 몸을 뗐다."아직 제대로 읽지도 않으셨잖아요.""첫 장의 목표는 좋은데, 권한 확대에 따른 책임 구조가 빠졌어. 기존 지역 책임자들과의 충돌을 어떻게 조정할지도 모호하고.""그건 뒤에 있습니다.""뒤에 있으면 안 되지. 승인권자가 첫 장에서 필요성을 이해해야 해."조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게 선택권을 내주던 남자는 순식간에 냉정한 본부장으로 돌아가 있었다.소율은 어이가 없어 그를 노려봤다."다음 주 월요일까지 수정해서 정식으로 제출해.""오늘 월요일이에요.""일주일이면 충분하잖아.""휴가 내내 작성한 사람한테 너무하시네요.""좋은 자리를 원한다며. 그럼 누구도 특혜라고 말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가져와."그 말에 소율은 입술을 다물었다.까다롭고 얄미웠지만 옳은 말이었다.도현은 연인으로서 붙잡되, 본부장으로서는 길을 쉽게 깔아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소율이 가장 원했던 방식이기도 했다."좋아요. 완벽하게 수정해서 제출할게요.""기대하지."소율은 기획안을 다시 빼앗듯 받아 가방에
잠금 화면 위로 프랑스어 메시지 일부가 떠올랐다.[Lucien Marceau: 한 팀장님께서 제안서를 확인하셨기를 바랍니다. 직접 만나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전적으로 팀장님께 맞추겠습니다.]소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하필이면 지금이었다.도현은 메시지를 읽은 기색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명함을 소율의 책상 위에 정갈하게 내려놓고, 펼쳐진 보고서로 시선을 돌렸다."비용 절감 예상치는 확인했습니다.""본부장님, 이건….""지금은... 업무 시간입니다, 한 팀장."건조한 존댓말이 소율의 말을 막았다."외부 기업과의 접촉은 본인의 권리입니다. 다만 현 직무와 관련된 이해 충돌 가능성이 있으니 정식 면담이 잡히면 인사 담당자에게 알리십시오.""네, 알겠습니다.""보고서는 오늘 안으로 승인하겠습니다."도현은 그 말만 남기고 기획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문이 닫히자 참았던 숨소리가 곳곳에서 터졌다.쥘리앙이 조심스럽게 소율의 책상 가까이 다가왔다."한 팀장님.""왜요?""본부장님, 화나신 것 아닙니까?""표정은 평소와 같았잖아요.""그래서 더 무섭습니다. 내려오실 때 들고 계시던 커피를 한 모금도 안 드시고 그대로 가져가셨습니다. 본부장님께서 카페인을 포기하신 건 심각한 시스템 오류가 생긴겁니다."소율은 웃어야 할지 한숨을 쉬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회사에서는 단 한마디도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은 도현이었다. 소율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완벽하게 지킨 셈이었다.하지만 그 무표정 아래에서 무엇이 끓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퇴근 시간이 되자 도현에게서 짧은 메시지가 도착했다.[차도현 본부장: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겠습니다.]평소처럼 함께 퇴근하자는 말이었다.소율은 벨루아의 제안서와 밤새 작성한 기획안을 가방에 넣었다.지하 주차장에 내려가자 검은 세단의 뒷문이 열려 있었다. 도현은 안쪽 좌석에 앉아 태블릿으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소율이 옆에 타도 그는 한동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차가 주차장을
소율은 봉투를 개인 수첩 사이에 끼워 넣었다.잠시 후 서재 문이 열렸다."무슨 내용이야?"도현이 물었다.소율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 솔직하게 답했다."아직 제대로 못 봤어요. 생각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도현의 시선이 수첩 사이로 사라진 봉투에 잠시 닿았다."그래."그게 전부였다.왜 자신에게 바로 보여주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았고, 벨루아 그룹에 연락해 보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도현은 주방으로 향해 커피 머신의 전원부터 켰다."아침 못 먹었잖아. 뭐 먹을래?"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다.소율은 안도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남은 휴가 동안 도현은 단 한 번도 봉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소율이 창가에서 수첩을 펼쳐놓고 생각에 잠겨 있어도 방해하지 않았고, 벨루아 그룹의 최근 사업 기사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못 본 척 지나갔다.대신 끼니마다 음식을 챙겼고, 업무용 메일에 손을 대려 하면 약속 위반이라며 태블릿을 빼앗았다. 밤에는 소율이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그 침묵이 무관심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기에 소율은 더 오래 고민했다.제안받은 직책은 매력적이었다. 지금보다 큰 조직과 예산을 움직일 수 있었고, 누구의 연인이라는 설명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자리였다.하지만 소율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새 명함이 아니었다.태성에서 자신이 시작한 유럽 사업을 끝까지 키워보고 싶었다. 차도현의 보호 아래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성과를 발판으로 더 큰 권한을 얻고 싶었다. 다른 회사가 인정해 준 가치를 들고 떠나는 대신, 지금 있는 자리의 한계를 직접 바꿔보고 싶었다.사흘째 밤이 되어서야 마음의 모양이 분명해졌다.소율은 빈 노트 첫 장에 제목을 적었다.[유럽 전략 기능 확대 및 기획팀 독립 권한 제안]그리고 그 아래에 지금까지 태성 지사에서 느꼈던 구조적 한계와 필요한 권한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대체 휴가가 끝난 월요일 아침.소율은 평소보다 일찍 지사에 도착했다.며칠 비웠을 뿐인데 책상 위에는 결재 대기
크림색 봉투의 은빛 문장을 확인한 순간, 차도현의 눈매가 미세하게 좁아졌다."벨루아 그룹이네."도현의 목소리가 조금 전보다 낮아졌다.프랑스 대표 명품 브랜드인 메종 벨루아를 중심으로 패션과 뷰티, 유통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 태성그룹과 직접적인 경쟁 관계는 아니었지만, 최근 아시아 시장과 디지털 유통망 확장에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있다는 소식은 소율도 익히 알고 있었다.그런 회사가 왜 자신에게 극비 문서를 보냈을까.소율은 봉투를 빛에 비춰보았다. 두꺼운 종이 안쪽으로 여러 장의 문서가 겹쳐진 윤곽만 보일 뿐, 내용은 짐작할 수 없었다."열어봐."도현이 말했다."도현 씨도 궁금하죠?""궁금하지. 그래도 네 앞으로 온 문서니까 네가 먼저 봐."예전의 차도현이었다면 발신 부서부터 확인하고 비서실에 연락해 문서가 온 경위를 파악했을 것이다. 소율의 일을 자신의 통제 범위 안에 넣어야 안심하던 남자였으니까.하지만 지금 그는 팔짱을 낀 채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어젯밤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겠다고 했던 약속을, 고작 봉투 하나 앞에서부터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다.소율은 괜히 가슴이 간질거려 봉투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그때 도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화면에 뜬 서울 본사 전략실이라는 표시를 확인한 그의 미간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사흘간 모든 업무 연락을 끊겠다던 사람이었지만, 파업 후속 대응과 관련된 본사 전화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잠깐 통화하고 올게.""천천히 하세요."도현은 서재로 향하다가 다시 돌아봤다."나 없을 때 열어도 돼. 기다릴 필요 없어.""알겠어요."그가 문을 닫고 들어간 뒤에도 소율은 한동안 봉투를 내려다봤다.뜯지 않은 문서인데도 손끝이 묘하게 뜨거웠다.소율은 조심스럽게 봉인을 잘랐다.가장 먼저 나온 것은 벨루아 그룹 인재전략본부 명의의 공식 서한이었다. 그 아래에는 직무 기술서와 보상 조건표, 그룹이 새로 추진하는 유럽 통합 사업 계획서의 일부가 붙어 있었다.소율의 시선이 첫 장의 굵은 글씨에 멈췄
도현의 입술이 소율의 이마에, 눈가에, 마지막으로 입술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급하게 빼앗는 키스가 아니었다. 긴 파업과 불면의 시간을 씻어내듯 다정하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밤이 깊어진 뒤, 두 사람은 침실의 커다란 창 앞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에펠탑의 불빛이 센강 위로 길게 번졌고, 열린 창틈으로 늦은 여름의 서늘한 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소율은 도현의 팔을 베고 누운 채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평온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도현이 소율의 손가락을 하나씩 만지작거리다 문득 입을 열었다. "협상장에 네가 혼자 들어간 날." 소율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네." "밖에서 기다리는 세 시간이 내 인생에서 제일 길었어." 도현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소율의 손을 감싼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파업이 절정에 달했던 날, 노조 측은 외부인이 대거 동행하면 대화를 거부하겠다며 실무 대표 한 명만 협상장에 들여보냈다. 도현은 끝까지 자신이 들어가겠다고 맞섰지만, 소율이 현지 실무와 노조 요구를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이유로 직접 나섰다. 그날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 도현의 얼굴은 분노와 불안으로 굳어 있었다. "무서웠어요?" "미칠 것 같았어." 그가 숨김없이 인정했다. "협상이 실패할까 봐가 아니야. 네가 험한 말을 듣거나,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데 내가 바로 들어가지 못할까 봐 무서웠어. 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싶은 걸 수십 번 참았어." "그래도 기다려줬잖아요." "네가 믿어달라고 했으니까." 도현은 소율의 손을 들어 입술에 댔다. 깊은 눈동자에 아직 가시지 않은 두려움이 비쳤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렇게 보내줄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해." 소율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손바닥으로 도현의 뺨을 감쌌다. "다음에도 보내줘요." 도현의 미간이 즉시 좁아졌다. "싫어." "방금 장담 못 한다면서 벌써 거절이에요?" "솔직하게 말한 거야." "저도 솔직하게 말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입술을 포갰다. 가볍게 닿았다 물러날 생각이었으나 도현의 손이 뒷목을 감싸는 순간 계획은 무너졌다. 입술이 비스듬히 맞물리고, 뜨거운 숨이 뒤섞였다. 며칠 동안 업무에 쫓겨 서로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했던 갈증이 늦게 터진 둑처럼 한꺼번에 쏟아졌다.도현은 소율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머금었다가 놓아주었다. 다시 각도를 바꿔 깊숙이 파고드는 키스에 소율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움켜쥐었다. 단단히 조여 있던 넥타이가 손끝에 걸렸다.소율은 매듭을 느슨하게 풀어내며 숨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이것도 포상에 포함돼요?""아니."도현의 입술이 턱선을 따라 내려왔다."이건 내가 받는 포상이야."목덜미의 여린 피부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소율이 고개를 젖히자 도현은 쇄골 위를 오래 어루만지듯 입 맞췄다. 치아가 아주 약하게 스친 자리마다 붉은 열기가 번졌다.그의 손이 허리선을 따라 올라와 홈드레스의 가느다란 어깨끈에 걸렸다. 당장이라도 끌어내릴 수 있는 거리였지만 도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두워진 눈으로 소율을 올려다보며 낮게 물었다."여기서 멈출까? 피곤하면 말해."도현의 몸에 선명하게 느껴지는 욕망과 달리,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손길은 억지로 침착했다.소율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느슨해진 넥타이를 양손으로 잡아당겼다. 입술이 다시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끌어내린 뒤 또렷하게 대답했다."싫어요. 오늘 포상, 끝까지 받을래요."도현의 눈동자에서 마지막 이성의 빛이 끊어졌다.도현은 소율을 안아 들고 소파에 눕혔다. 놀란 숨이 웃음으로 변하기도 전에 입술이 다시 겹쳤다. 홈드레스의 어깨끈 하나가 느슨하게 흘러내리고, 그의 입술은 드러난 어깨와 쇄골을 천천히 따라갔다."예뻐."그 짧은 감탄이 노골적인 말보다 더 뜨거웠다.소율은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손끝이 드러난 가슴을 따라 내려가자 도현의 복부가 단단하게 긴장했다. 소율은 느슨해진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 소파 아래로 떨어뜨리며 장난스럽게 올려다봤다."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