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주연은 현관문을 열고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 같으면 밝게 "다녀왔어." 하고 인사를 했을 텐데 오늘은 아무 말도 없었다. 신발을 벗는 손끝에도 힘이 없었다. 가방조차 내려놓지 못한 채 한동안 현관에 멍하니 서 있었다.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지혜는 그런 주연의 모습을 보자마자 이상함을 느꼈다. "...주연아."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 있었어?" 주연은 겨우 고개만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지혜는 속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함께 지내며 누구보다 주연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아어색한 침묵. 진성은 찻잔을 들었다. 시아도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차를 마셨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진성이었다. “미안합니다.” 시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오늘 자리 말입니다.” 진성은 숨길 생각이 없었다. “저는 자의로 나온 게 아닙니다.” 시아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알아요.” 진성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압니까?” “네.” 시아가 작게 웃었다. “들어오실 때부터 얼굴에 쓰여 있었는데요.” 진성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정도였습니까?” “조금요.” 시아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천천히 만지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 “저도 오늘 당장 누구하고 결혼할 사람을 결정하러 나온 건 아니니까요.” 진성이 처음으로 그녀를 조금 길게 바라보았다. 시아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좋은 분들이라고 하셔서 그냥 식사하러 나온 거예요.” 그리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맛있는 것도 사주신다고 했고요.” 진성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그게 이유입니까?” “중요한 이유죠.” 시아도 웃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밥 한번 같이 먹었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괜찮고요.” “그건 황시아 씨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죠.” 시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저도 이진성 씨가 마음에 안 들 수 있으니까요.” 진성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은 그런 말을 남자 앞에서 바로 합니까?” “왜요?” 시아의 맑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아직 서로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진성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아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알면 되죠.” “싫으면 여기까지고.” 너무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진성의 마음을
서울의 한 고급 한정식집. 검은 세단이 조용히 입구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먼저 내린 이창수 회장의 뒤를 고미혜 여사가 따랐고, 마지막으로 진성이 무거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진성은 고개를 들어 한정식집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전통 한옥을 현대적으로 꾸민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마당 한쪽에는 소나무와 작은 연못이 어우러져 있었고, 돌길을 따라 은은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하지만 진성에게는 그 어떤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 자리. 정확히 말하면 선택권조차 없는 자리였다. 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다. 진성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그때 앞서 걷던 이창수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진성아.” “네.” “표정 관리해라.” 진성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제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고 그러십니까?” “오늘은 네가 싫든 좋든 어른들끼리 약속해서 만든 자리다.” 이창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상대에게 예의 없이 행동하지 마라.” 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던 고미혜가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잡았다. “진성아.” 진성이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냥 편하게 밥 먹는다고 생각해.” “누가 오늘 당장 결혼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니.” 진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 “아버지가 그냥 밥이나 먹으라고 절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을 것 같습니까?” 고미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이창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고 들어가자.” 진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얌전히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세 사람이 별실로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황태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회장!” “황 장관, 오래
아버지 이창수 회장이 내민 선택지는 거절할 수 없는 단단한 족쇄였다. 명문가 규수와의 정략결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가 저지른 공금 횡령과 사생활의 추태는 순식간에 수면 위로 드러나 모든 것을 앗아갈 터였다 그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 이창수 회장은 진성이 손댄 회사 자금을 자신의 돈으로 메워 주기로 했다. 적어도 횡령 문제로 감옥에 가는 것만큼은 막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진성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자신의 인생인데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정략결혼을 치르기 위해서는 유하를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떠나버릴까 봐, 혹은 이 모든 비밀을 폭로해 버릴까 봐 기묘한 불안감이 진성의 목을 조여왔다. 결국 진성은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 유하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현관문이 열리자 유하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진성 씨.” 그녀는 진성의 얼굴을 살피더니 곧 표정을 바꾸었다. “무슨 일 있어요?” “왜 얼굴이 이렇게 안 좋아?” 진성은 대답하지 않은 채 거실로 들어갔다. 유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의 코트를 받아 걸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앉아요. 차라도 가져올게.” “유하야.” 그녀가 돌아보았다. 진성은 소파에 앉지도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성이 갑자기 물었다. “너 나 사랑하니?” 유하의 눈빛이 아주 잠깐 멈췄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남자를 상대해 온 유하는 이런 순간에 절대로 당황한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다가가 진성의 앞에 섰다.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그냥 대답해.” 진성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무거웠다. “나 사랑해?” 유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걸 꼭 말
친구들의 질문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 이제 진짜 중요한 질문.” 한 친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주연이 웃으며 물었다. “뭔데요?” 그가 재혁을 한번 가리킨 뒤 말했다. “제수씨는 이 재미없는 인간 어디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맞아!” “이건 꼭 들어야 돼.” “재혁이가 공부밖에 모르데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했어요?” 재혁이 인상을 썼다. “너희는 꼭 표현을 그렇게 해야 하냐?” 하지만 주연은 웃지 못했다. 질문이 생각보다 깊게 가슴에 들어왔다. 재혁 씨 어디가 좋아요? 처음에는— 좋지 않았다. 아니, 싫었다. 돈이 필요해서 자신과 결혼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결혼식 날에도 그를 제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얼굴을 가리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아이들을 대하는 따뜻한 마음. 자신의 상처를 과장하지 않고 견뎌온 강인함.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되돌려주려는 자존심. 그리고 자신을 밀어내면서도 늘 지켜주었던 사람. 주연은 천천히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잠시 멀어진 것 같았다. 주연은 조금 망설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하나둘 조용해졌다. “잘 몰랐어요.” 재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주연은 작게 웃었다. “조금 차갑고.” 친구들이 동시에 웃었다. “그건 맞지.” “완전 맞아.” 주연도 따라 웃었다. 그러다 다시 재혁을 바라보았다. “말도 별로 없고.” “그것도 맞습니다.” 친구들이 또 웃었다. 재혁은 어이없다는 듯 주연을 바라보았다. “오늘 제 흉을 보러 나오신 겁니까?” 주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
“오늘만 제 아내인 척 부탁합니다.” 재혁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주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내인 척. 그 말이 이상했다. 자신은 원래 이 남자의 아내였다. 그런데 남편의 친구들 앞에서 남편의 아내인 척을 해야 한다니. 웃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이 재혁의 친구들은 이미 의자를 끌어다 두 사람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제수씨, 갑자기 합석해서 죄송합니다.” 한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이 자식이 동창 모임도 거의 안 나오거든요.” 옆 친구가 바로 말을 받았다. “맞아요. 결혼했다고는 하는데 아내 얼굴은 제대로 보여준 적도 없어서 우리끼리는 진짜 결혼한 거 맞냐고 했어요.” 주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요?” “그럼요.” 친구 하나가 재혁을 가리켰다. “얘 원래 대학 때부터 이랬어요.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 재혁이 한숨을 쉬었다. “너희는 오랜만에 만나서 할 이야기가 그것뿐이냐?” “오랜만이니까 더 해야지.”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던 주연도 차츰 그들의 편안한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재혁과 친구들은 서로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서로의 대학 시절 실수를 끄집어내고, 누가 더 공부를 못했는지, 누가 시험 기간에 가장 먼저 잠들었는지로 티격태격했다. 주연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웠다. 자신이 모르는 재혁의 시간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한 친구가 칵테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근데 제수씨.” “네?” “재혁이 대학 때 진짜 대단했던 거 아세요?” 주연의 눈이 반짝였다. “어땠는데요?” 재혁이 곧바로 끼어들었다.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마.” 친구가 웃었다. “왜? 좋은 이야기인데.” 다른 친구도 말을 보탰다. “우리 동기들 중에서는
조금 더 주연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왜 미국으로 떠났는지. 어쩌면 결혼 이야기도 꺼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재혁이 물었다. “그런데 주연 씨.” “네.” “처음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게 된 건…” 바로 그때였다. 바 입구 쪽에서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남자 서너 명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재혁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이쪽을 바라보다 걸음을 멈췄다. “어?” 잠시 후 눈이 크게 떠졌다. “야.” 옆 친구의 어깨를 툭 쳤다. “저기 최재혁 아니냐?” 재혁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표정에도 놀라움이 스쳤다. 대학 동창들이었다. “와!” 그들이 웃으며 다가왔다. “최재혁 대표님!” “야, 이게 얼마 만이냐?”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동창 모임도 맨날 안 나오고.” 재혁도 자리에서 일어나 웃었다. “오랜만이다.” 친구 하나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 지냈냐?” “그럭저럭.” “그럭저럭은 무슨. 뉴스에서 맨날 잘나가더만.” 그러다 친구들의 시선이 동시에 주연에게 향했다. 주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 당황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한 친구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재혁과 주연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었다. “잠깐.” 그리고 재혁을 향해 말했다. “설마?” 재혁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이었다. “제수씨?” 주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네?” 친구들은 이미 흥분했다. “야, 맞네!” "우리가 너 몰래 도둑결혼을 했다는 소문만 돌았지, 정작 제수씨 얼굴을 단 한 번도 못 봐서 다들 진짜 결혼한 거 맞냐고 의심했었거든. 오늘 이렇게 직접 보니 왜 그동안 꼭꼭 숨겨뒀는지 단번에 알겠네! 하하하!" "맞아, 제수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