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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매끈한 장난감과 엘리트 소위 1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06 12:35:55

​띠링-.

​나른한 봄햇살이 거실 유리창을 넘어오던 오후.

소파에 길게 누워 귤을 까먹고 있던 내 바지 주머니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짧게 울렸다. 온수 매트의 열기에 취해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비비며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입금 알림: 아크 부대 특수 작전 대금 및 위약금 정산]

[입금자: (주)화이트 타이거 길드]

[금액: 34,500,000,000원]

​"......오호라."

​화면에 찍힌 0의 개수를 세어보던 나는 절로 실소를 터뜨렸다.

삼백사십오억.

서울 한강 둔치에서 내 벼락 한 방에 오줌을 지렸던 최무진 이사, 놈이 아주 영혼까지 끌어모아 계좌를 털어 넣은 모양이었다. 아마 화이트 타이거 길드의 올해 순이익 절반은 족히 날아갔으리라.

​"이 맛에 특근 뛰는 거지.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선 금융 치료만 한 게 없어."

​도망친 죗값을 돈으로 토해낸 그 깍쟁이 놈들의 창백해진 얼굴을 상상하니, 입안의 귤이 유난히 더 달게 느껴졌다. 이 돈이면 하숙집 옥상에 그릴을 새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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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격할 때 공기 저항은 둘째치고 무게 중심이 쏠려서 비행 밸런스가 다 박살 날 텐데요."​내 말에 철수가 퀭한 눈으로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태블릿의 버튼을 틱 눌렀다.​카가가각- 철컹!!​순간, 20미터에 달하던 그 무식한 파일벙커의 거대한 챔버와 쐐기가 여러 겹으로 겹쳐지며 안으로 접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형상 기억 합금으로 이루어진 부품들이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리며 부피를 줄이더니, 이내 레비아탄의 오른쪽 팔뚝을 감싸는 두툼하고 매끄러운 흑색 건틀릿(Gauntlet) 형태로 완벽하게 압축 수납되었다.​"봤냐? 평소에는 저렇게 압축 폼으로 대기하다가, 니가 빙정 에너지를 때려 박으면 실전 폼으로 전개되는 기믹이야. 기체 밸런스 붕괴? 내 S급 두뇌를 무시하지 마라."​철수의 의기양양한 대답에 나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크하하하! 형님! 이거 장착감 개쩌는데? 폼 미쳤다, 진짜!]​스마트워치 속 레비아탄도 흉악한 새 무장과 기믹에 단단히 도파민이 돈 모양이었다. 마력의 효율성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오직 '파괴력' 하나에 몰빵한 로망의 결정체.​"물건 하나 기가 막히게 뽑았네요. 5월 가정의 달 보너스 벌러 가기 딱 좋은 타이밍입니다."​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때, 격납고 측면의 자동문이 열리며 굳은 표정의 사령관이 브리핑용 태블릿을 들고 성큼성큼 다가왔다.​"새 장비 구경은 잘 했나, 하 준위."​"예. 마침 손맛 좀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내 가벼운 물음에 사령관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태블릿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화면에 떠오른 위성 사진을 본 순간, 나는 미간을 팍 구길 수밖에 없었다.파란 바다가 굽이치는 태평양이나 베링해협의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진 짙은 녹색의 숲.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아마존 밀림' 한복판이었다.​문제는, 그 끝없는 녹색의 정글 중앙에 마치 종양 덩어리처럼 거대하고 시뻘건 구역이 퍼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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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4월 하순.진해에서 그 흐드러지던 벚꽃비도 며칠 전 내린 봄비에 싹 다 쓸려 내려가고, 이제는 제법 푸릇푸릇한 새잎들이 나뭇가지마다 돋아나기 시작했다. 낮에는 반팔을 입고 돌아다녀도 될 만큼 기온이 훌쩍 올랐다.​평화롭다. 괴수 새끼들의 알짱거림도 없고, 하늘도 맑고.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 완연한 봄기운과는 정반대로 쌩쌩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하아..."​마당 평상에 쭈그리고 앉은 나는, 스마트폰 뱅킹 앱 화면에 찍힌 잔고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 맘대로 비상금 통장: 345,000원]​분명 지난달에 서울 깍쟁이 화이트 타이거 놈들한테서 뜯어낸 345억짜리 합의금 덕분에, 사령관님이 내 개인 계좌로도 수십억 단위의 두둑한 특별 수당을 꽂아주셨건만. 그 돈은 내 통장에 며칠 머물지도 못하고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이유는 간단했다. 이모님이 평생 남의 집 셋방살이하며 설움 겪으신 걸 알기에, 내 몫으로 떨어진 그 거액의 수당을 탈탈 털어 남포동 교차로 노른자위에 있는 7층짜리 상가 건물을 이모님과 성배 아저씨 공동 명의로 시원하게 일시불로 긁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남은 잔돈은 철수네 연구소에 레비아탄 새 무기 깎는 데 보태 쓰라고 법인 후원금 명목으로 때려 박았고.​덕분에 우리 식구들은 이제 남부럽지 않은 떵떵거리는 건물주가 되었지만, 정작 내 개인 용돈은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쥐꼬리만 한 군인 월급이 전부였다.​"이러면 곤란한데."​내가 입술을 씹으며 달력을 째려보았다.달력의 다음 장, 대망의 5월. 대한민국 모든 가장과 어른들의 등골이 실시간으로 박살 난다는 잔인한 '가정의 달'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5월 5일 어린이날. 중2병에 단단히 걸린 희선이는 요새 툭하면 최신형 VR 게임기 팸플릿을 내 방 문틈으로 밀어 넣고 있었고, 얌전한 히나마저 검술 훈련에 쓸 [S급 티타늄 합금 특수 제작 전술용 장우산]을 검색하며 은근슬쩍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거기다 5월 8일 어버이날. 이모님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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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 사람 진짜 많네. 손 꼭 잡고 다녀라. 길 잃어버린다."​나는 할머니를 업은 채로 한 손에는 아이스박스를 낑낑대며 들고 걸었다.그리고 본격적인 Z급 영웅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괴수를 썰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은 임무, 바로 '히로인들의 전담 사진사' 역할이었다.​"태수야! 여기, 여기! 다리 위에서 길어 보이게 밑에서 위로 찍어줘! 알지? 비율 8대 2!"​미혜 누나가 다리 난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한쪽 다리를 살짝 꼬며 요염한 포즈를 취했다. 나는 군말 없이 무릎을 꿇고 아스팔트 바닥에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스마트폰 카메라 앵글을 잡았다.​찰칵, 찰칵!​"하루 씨! 거긴 그늘지니까 오른쪽으로 반 보만 이동합시다! 그렇지, 바람 불 때 머리카락 살짝 넘기는 타이밍!"​찰칵!​군주급 마수의 움직임도 꿰뚫어 보는 나의 Z급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은, 흩날리는 벚꽃잎이 하루 씨의 얼굴을 가리지 않는 완벽한 0.1초의 타이밍을 포착해 셔터를 누르는 데 아주 훌륭하게 낭비되고 있었다.​"햄! 나랑 히나도 점프 샷 찍어주라!"​양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폴짝폴짝 뛰는 중학생 콤비들까지.사람파도에 치이고, 무거운 짐을 들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나니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이그니스의 태양 불꽃을 막을 때보다 체력 소모가 세 배는 심한 기분이었다.​"아이고, 삭신이야. 이모님, 우리 이제 밥 좀 먹으면 안 됩니까?"​"오야. 마침 저기 벚나무 밑에 명당자리 하나 났네. 퍼뜩 가가 돗자리 깔아라."​천신만고 끝에 여좌천 둔치의 널찍한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다.머리 위로는 커다란 벚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완벽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은박 돗자리를 넓게 펴고, 최 여사님이 싸 온 4단 찬합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미쳤다. 이모님, 이건 예술인데요."​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참기름을 발라 통깨를 솔솔 뿌린 참치 김밥과 소고기 김밥. 그 옆에는 새콤달콤한 유부초밥이 정갈하게 담

  • EX급 빙신(氷神), 출근합니다   112화: 벚꽃비와 일상의 무게 1

    ​며칠 전, 아크 부대 근처 최고급 한우 전문점에서 있었던 회식은 여러모로 파멸적이었다.​새하얗고 매끈하던 자신의 '발뭉'이 그깟 구형 깡통 로봇의 손가락 하나에 얼음조각이 되어버린 충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입에서 살살 녹는 투플러스 살치살의 파괴적인 맛 때문이었을까.​깐깐하고 재수 없던 엘리트 소위 최유리는, 그날 고량주를 병나발로 불더니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결국 고깃값으로 자그마치 400만 원을 일시불로 긁은 그녀는, 술에 떡이 된 채 내 정복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제발 그 말도 안 되는 출력 조절의 비기를 전수해 주십시오!' 라며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었다.​"하아... 귀찮은 혹이 하나 더 붙었어."​2026년 4월 초, 화창한 주말 아침.나는 마당 평상에 앉아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로 최유리는 툭하면 사령부 내선망으로 전화를 걸어와 귀찮게 굴고 있었다. 엘리트 범생이들이 한 번 무언가에 꽂히면 얼마나 집요해지는지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다.​하지만 그런 군부대 내의 소란 따위는,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하숙집의 거대한 스케일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다.​"태수야!! 니 거기 멍하게 앉아가 뭐하노! 퍼뜩 들어와가 아이스박스 좀 안 나르고!"​"아, 예 예! 갑니다요!"​부엌에서 들려오는 최 여사님의 불호령에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오늘 하숙집은 새벽부터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이유인즉슨, 매년 4월 초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경남 최대의 봄 축제, '진해 군항제'로 온 식구가 총출동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부엌 바닥에는 4단짜리 거대한 찬합 세 개가 탑처럼 쌓여 있었고, 갓 튀겨낸 프라이드치킨 냄새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온 집안을 진동하고 있었다.​"이모님. 우리 식구 다 합쳐봐야 일곱 명인데, 김밥을 무슨 이십 인분이나 싸셨습니까. 군부대 식구들까지 다 먹이시려고요?"​"잔말 말고 나르기나 해라! 밖에 나가서 찬

  • EX급 빙신(氷神), 출근합니다   111화: 매끈한 장난감과 엘리트 소위 3

    레비아탄의 오른손 장갑판 전체가 내 빙정의 통제를 받아, 고주파 진동검의 주파수와 정확히 '반대되는 위상'의 미세 진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플렉소 일렉트릭을 응용한 카운터 파동.​파지지직!!검과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쇳소리가 아니라 마치 고무공이 튕겨 나가는 듯한 둔탁한 파열음이 울렸다. 발뭉의 고주파 진동이 완벽하게 상쇄되며, 오히려 그 반발력이 놈의 팔 관절을 타고 역류해 들어갔다.​"큭...! 기체 자세 제어!"​발뭉이 비틀거리며 스러스터를 뿜어 뒤로 물러섰다.놈의 오른팔이 과부하로 인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최유리의 데이터 속에는 '맨손으로 고주파 검을 튕겨내는 장갑판' 따위의 계산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어유, 솜방망이네. 형님, 그냥 한 대 쥐어박자니까.]"기다려 봐. 저쪽 콧대가 아직 덜 꺾였잖아."​내 예상대로, 최유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자존심이 패배를 용납하지 못하는 듯했다.​"에너지 실드 전개! 숄더 캐논, 최대 출력으로 차징!"​위이잉-!발뭉의 어깨 장갑이 열리며 두 문(門)의 플라즈마 캐논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기체가 눈부신 파란색 마력의 빛으로 휩싸이며 거대한 에너지를 응축하기 시작했다. 한 방 제대로 맞으면 연병장 벽면이 통째로 날아갈 정도의 무식한 화력이었다.​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교과서에 적힌 대로 순서를 밟아가는 답답한 수싸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실전의 괴수들은 캐논이 충전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너무 뻔하잖아, 소위님."​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단전의 냉기를 레비아탄의 오른손 끝으로 쭈욱 끌어올렸다.​슈우우웅- 콰아아앙!!​발뭉의 어깨에서 두 줄기의 굵직한 플라즈마 빔이 굉음을 내며 뿜어져 나왔다. 공기를 태우는 열기가 콕핏 안쪽까지 스며들 정도의 일격.​나는 피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오른손을 들어 올려, 날아오는 광선의 궤적 한가운데를 향해 손바닥을 쫙 펼쳤다.​쩌저저적-!!​순간, 레비아탄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연병장 안의 수분이 급

  • EX급 빙신(氷神), 출근합니다   110화: 매끈한 장난감과 엘리트 소위 2

    ​"반갑습니다. 하태수 준위입니다. 그쪽이 저 새하얀 장난감 주인이군요."​내 나른한 대답에, 최유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장난감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엘리트 적인 자존심을 단단히 긁은 모양이었다.​그녀가 턱을 살짝 치켜들며, 내 등 뒤에 서 있는 레비아탄을 곁눈질했다.​"장난감이라뇨. 발뭉은 삼천 그룹의 최신 마력 공학이 집약된 결정체입니다. 오히려 제 눈에는... 하 준위님의 저 기체가 당장 폐기장으로 가야 할 구형 고철로 보입니다만."​"야야! 최 소위! 말조심해라!"​옆에서 기겁한 철수가 최유리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하와이에서 군주를 잡고, 며칠 전 서울에서도 맹활약하셨다고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파일럿의 변칙적인 '이능력'에 의존한 결과물 아닙니까? 정규 군사 교육도 받지 않은 민간인 출신이, 저렇게 안정성 떨어지는 구형 껍데기를 몰고 다닌다는 건 현대 전술의 수치입니다."​따박따박 쏘아붙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오만함이 절반씩 섞여 있었다.명문 사관학교에서 수천 시간의 시뮬레이션을 거치며 오직 '데이터'와 '통제된 스펙'만을 진리로 믿고 자란 범생이의 시선. 그 시선에서 나라는 존재는, 근본도 없이 운 좋게 강력한 장비를 얻어걸린 양아치쯤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나는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픽 웃었다.​"그래서요. 수치스러운 고철 덩어리한테 뭘 원하시는데요, 최 소위님."​"실전 데이터입니다. 제 발뭉의 스펙이 저 구형 기체를 상대로 얼마나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는지, 모의 대련을 통해 증명하고 싶습니다."​최유리가 장갑을 낀 손으로 발뭉을 가리키며 당당하게 선언했다.​"만약 제가 이긴다면, 하 준위님이 가진 그 비합리적인 특권들... 독립적인 작전권이나 보급 우선순위 등을 정규군인 저희 발뭉 부대 쪽으로 일부 양도해 주셨으면 합니다."​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람.나는 황당하다는 듯 옆에 선 신수지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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