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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쇼핑은 전투처럼 1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1 17:24:15

일요일 아침.

모처럼 늦잠을 자려던 계획은 방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산산조각 났다.

"햄! 일나라! 해가 중천이다!"

"으어... 누구세요..."

"내다! 희선이! 오늘 시내 나간다 안 캤나!"

방문이 벌컥 열리고,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 바지를 덧입은 김희선 양이 난입했다.

"아, 좀 더 자자... 군인은 주말에 자는 게 일과야..."

A급 헌터의 완력으로 이불을 확 걷어버리는데, 춥다기보다 무서웠다.

"웃기지 마라! 어제 삼억 벌었다매! 장비 쏘기로 했으면서 입 싹 닦나!"

쩌렁쩌렁한 고함과 함께 이불이 허공으로 날아간 직후였다.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하반신이 싸늘했다.

나는 잠결에 멍한 눈을 비비며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군 시절부터 애용해 온 국방색 드로즈 한 장.

그 게 내 몸에 걸친 전부였다.

"...어?"

희선의 고함 소리가 딱 멎었다.

씩씩하게 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뻗었던 하얀 손이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녀석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가슴팍을 지나, 아주 자연스럽게 그 아래… 국방색 밴드 라인에 꽂혔다.

정적은 짧았지만, 그 효과는 강렬했다.

"......"

"......"

평소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까지 챙겨 입으며 철벽 수비를 자랑하던 그 씩씩한 여고생의 얼굴이, 순식간에 잘 익은 토마토처럼 달아올랐다.

"희, 희선아?"

"꺄, 꺄아아악!!"

희선이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가 묘하게 벌어져 있는 건 내 착각일까.

"미, 미쳤어! 오빠 미쳤나 봐! 왜, 왜 다 벗고 있어! 이 변태 군바리야!"

"아니, 패, 팬티는 입었다! 그리고 니가 이불을 뺏어갔잖아…."

"몰라! 안 본 눈 삽니다! 으아아!"

평소의 걸걸한 목소리는 어디 가고, 잔뜩 삑사리가 난 하이톤의 비명이 방을 채웠다.

녀석은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뒷걸음질 치더니, 문틀에 쿵 하고 등을 부딪혔다.

그러고는 쥐고 있던 이불을 다시 내 쪽으로 힘껏 집어 던지고 밖으로 도망치듯 뛰쳐나가버린다.

"빠, 빨리 나와! 이, 이 노출광!"

"알았어, 알았어. 간다, 가."

세수하고 옷을 주워 입었다.

오늘의 목표는 쇼핑.

정확히는 희선이 녀석의 훈련 장비와, 내 개인 장비를 맞추러 가는 날이다.

출발하기 전 히나는 솔직히 언니와 조용히 살고싶어해서 굳이 장비는 없어도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런 히나의 기특한 대답을 들으며, 언제든지 필요한 게 생기면 편하게 말하라고 일러두었다.

[형님. 내 엔진 오일은? 최고급 합성유 사주는 거 잊지 않았지?]

손목에서 레비아탄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야, 니 정비는 군대에서 해주잖아. 어제 국방부 정비팀 들어와서 싹 뜯어고치는 거 못 봤냐? 세금 뒀다 뭐해."

[아니, 군용 오일은 뻑뻑하다고! 사제 오일이 부드럽단 말이야. 맛이 달라, 맛이.]

이놈이나 저놈이나 돈 쓸 궁리만 한다.

나는 투덜거리며 지갑(블랙 카드)을 챙겼다.

"가자. 자갈치로."

*

부산 자갈치 시장.

비릿한 바다 내음과 상인들의 활기찬 고함 소리가 뒤섞인 이곳은, 겉보기엔 평범한 수산물 시장이다.

하지만 진짜배기는 지하에 있다.

"이모! 여기 꼼장어는 C급 마석으로 굽는교?"

단골 횟집 구석진 테이블.

내가 암구호를 대자, 고무장갑을 낀 주인 할매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이다. 우린 국산 S급 참숯만 쓴다. 드가라."

할매가 주방 옆 냉동창고 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우리는 익숙하게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생선 상자들 뒤에 숨겨진 녹슨 철문.

레버를 당기자,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아래로 꺼졌다.

위이이잉- 쿵!

비밀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순간, 훅 끼쳐오는 매캐한 담배 연기와 습한 공기.

그리고 눈을 찌르는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Jagalchi Underground]

부산 최대의 헌터 암시장.

지상은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이곳은 거친 헌터들과 브로커들이 괴수의 부산물과 불법 개조 무기를 거래하는 무법지대다.

"와... 햄, 여기 냄새 쥑이네."

"붙어 다녀라. 길 잃어버리면 코 베어 간다."

희선이가 신기한 듯 두리번거렸다.

천장에는 굵은 파이프들이 얽혀있고, 바닥은 항상 물기가 고여 있어 질척거렸다.

좌판에는 갓 잘라낸 해귀(Sea Demon)의 이빨, 심해어의 가죽, 정체불명의 마석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이, 거기 학생. 여긴 롯데월드 아인데."

험상궂게 생긴 상인 하나가 희선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었다.

얼굴에 칼자국이 난 B급 헌터 출신 브로커였다.

"교복 입고 올 데가 아니다. 가서 우유나 더 먹고 온나."

주변의 헌터들이 킬킬거렸다.

하지만 희선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녀석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툭 던지듯 보여줬다.

[헌터 라이센스: Class A]

[성명: 김희선]

금색으로 빛나는 라이센스를 본 상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았다.

"아재요. 내 나이가 몇인데 우유 타령입니까."

희선이가 짝다리를 짚으며 껌을 딱 씹었다.

"물건이나 보이주소. 돈은..."

희선이가 엄지로 뒤에 있는 나를 가리켰다.

"이 오빠야가 낸다."

나는 한숨을 쉬며 지갑을 꺼냈다.

두툼한 블랙 카드.

"그래, 내가 물주다. 애 기죽이지 말고 좋은 거 꺼내 보쇼."

상인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 금융 치료는 어디서든 통한다.

*

시장을 한바퀴 돌고 도착한 곳은 구석진 곳에 있는 허름한 공방이었다.

간판도 없다. 하지만 이곳 주인장은 부산 바닥에서 알아주는 아티팩트 장인이다.

"어서 옵셔. 뭘 찾나?"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 우리를 맞았다.

"쓸만한 건틀릿 하나, 그리고 제어구(Controller) 하나요."

노인은 말없이 진열장에서 물건을 꺼냈다.

첫 번째, 희선이 것.

[충격 증폭 건틀릿 (A급)].

심해 게(Crab)의 갑각을 가공해 만든 붉은색 장갑.

타격 시 내장된 마석이 공명하며 2중 충격파를 발생시킨다.

"와! 햄! 이거다! 딱 내 스타일이다!"

희선이가 건틀릿을 끼고 섀도복싱을 했다.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묵직했다. 육탄전을 선호하는 녀석에게 딱이었다.

두 번째, 내 것.

[청옥 팔찌 (S급 아티팩트)].

심해 2,000m 아래에서만 채취된다는 '빙해석'을 깎아 만든 팔찌.

내 뱃속의 EX급 빙정은 출력이 너무 강해서, 기체 밖에서 맨몸으로 쓸 때는 폭주할 위험이 있다.

이 팔찌는 그 냉기를 미세하게 조절해 주는 역할을 한다.

능력폭주의 제어구로서도 필요힌지만 혼자일때는 기체 탑승 시와 달리 무한 동력이 불가능(플렉소 일렉트릭 미작동)하여 비축된 에너지가 소모되면 빙정이 굳어버리는 제약이 있다.

그래서 사용량 제어도 필요 해서 고른 필수적인 장비였다.

[오, 형님. 그거 좋아. 파장이 아주 안정적이야. 사자, 사.]

레비아탄도 합격점을 줬다.

"얼맙니까?"

"두 개 합쳐서 8천."

"일시불로 하죠."

카드를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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