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저택 안.
문이 열리자, 바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왔다. 조용하고, 정돈되어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유지된 공간. 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를 귀족 부인이 따랐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림 하일드가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덜컥. 소리와 함께, 바깥의 일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인들은 멀리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정숙했다. 귀족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로이즈."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엘로이즈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 "네, 어머니." 짧은 대답. 부인은 그녀를 한 번 더 살폈다. 얼굴. 숨. 걸음. 그리고 묘지에서의 일. 사과나무. 떨어진 가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부인의 손이 아주 가볍게, 엘로이즈의 어깨에 닿았다. "괜찮니." 짧은 질문. 하지만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약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 부인은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 "많이 놀랐을 텐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전히 부드럽게, 하지만 조금 더 낮게. "들어가서 쉬렴." 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결정이었다. 엘로이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번도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순간, 그림 하일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로이즈의 걸음이 방향을 틀자마자— 한 발 먼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뒤로 붙었다. 반 걸음. 항상 유지하던 그 거리. 숨도, 발걸음도 맞춘 채— 조용히 그대로 따라갔다.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다. 이미 그 자리가 어디인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엘로이즈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림 하일드가 따라오고 있다는 걸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앞만 보고 걸었다. 그 뒤에서 귀족 부인의 시선이 아주 잠깐 움직였다. 조용히 그림 하일드를 향했다. 고개를 숙인 채, 완벽하게 거리를 맞춰 걷는 아이. 말이 없고, 흔들림도 없고, 이미 이 집의 일부처럼 움직이는 존재. 부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역시.' 그녀의 시선이 엘로이즈와 그림 하일드를 번갈아 스쳤다. 앞에서 걷는 딸. 그 뒤를 따르는 하녀. 두 사람의 걸음이 거의 같은 리듬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부인의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 '조금만 더—' 그 생각이 이어졌다. '조금만 더 맞추면...' 짧은 정적. '우리 애처럼— 보일 수 있어.' 그 결론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부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고, 두 사람의 발소리만 낮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아래에서, 이미 각자의 생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잠시 후, 엘로이즈의 방 안. 바깥의 기척은 이미 완전히 차단된 듯 조용해져 있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바닥 위에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방 안의 공기는 따뜻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엘로이즈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등을 곧게 세운 채,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상태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 톡, 톡. 엘로이즈의 시선이 문 쪽으로 움직였다. "들어와." 짧은 허락.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림 하일드가 들어왔다. 양 손에 작은 쟁반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 위에는 김이 옅게 올라오는 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따뜻한 우유였다. 그림 하일드는 숨을 죽인 채 안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시선은 바닥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 다가와 조용히 멈췄다. 그리고 쟁반을 천천히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가씨." 낮고 단정한 목소리. "따뜻한 우유... 가져왔습니다." 엘로이즈는 잠시 컵에서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잔을 들었다. "...고마워." 짧은 대답. 그림 하일드는 고개를 더 숙였다. 아주 잠깐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그리고..." 말을 고르듯 한 박자 멈췄다가— "한 시간 후에... 살롱 일정이 있습니다." 목소리는 변함없이 차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은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엘로이즈는 컵을 든 채,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 "...그래." 짧게 대답했다. "알고 있어."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김이 얼굴 앞으로 스쳤다. 그 순간, 그림 하일드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엘로이즈의 목. 그 위에 걸린— 진주 목걸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그러나 그림 하일드에게는 전혀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훔쳐야 하는 것. 그녀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얇게 흔들렸다. 시선이 아주 잠깐, 그 목걸이에 머물렀다. 그리고 곧바로 떨어졌다. 더 보면 안 된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속으로 아주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그 뒷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때, 엘로이즈의 시선이 움직였다. 조용히 그림 하일드를 향했다. 컵을 든 채, 그녀를 한 번 바라봤다.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그림 하일드는 그걸 느꼈다. 몸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그러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들면 모든 게 드러날 것 같아서. 방 안에는 다시 조용함이 내려앉았다. 컵에서 올라오는 김만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무도 모르게 하나의 선택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살롱을 준비하는 시간. 엘로이즈의 방 안에는 분주한 기척이 흐르고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커튼이 느리게 흔들렸다. 엘로이즈는 화장대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목을 향했다. 진주 목걸이. 조용히 걸려 있던 그것을 천천히 풀어냈다. 찰칵—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그 목걸이를 화장대 위에 내려놓았다. 빛이 닿으며 진주 표면이 아주 미세하게 반짝였다. 그 순간 그림 하일드의 시선이 멈췄다. 숨이 얇게 흔들렸다. '...지금.' 머릿속이 아주 조용해졌다. 다른 생각이 사라졌다. 그저 하나만 남았다. 목걸이. 엘로이즈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드레스를 갈아입기 위해 등을 보인 채. 시선은 거울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이 아니면...' 카일의 목소리가 스쳤다. —'기회를 봐서.'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될지 알지?' 목이 다시 조여오는 느낌. 숨이 짧아졌다. 그림 하일드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발 움직였다. 소리가 나지 않게, 발끝으로. 화장대 쪽으로. 시선은 여전히 낮았지만,의식은 전부 그 위에 있었다. 목걸이로.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 그녀의 손이 조금씩 올라갔다. 손끝이 진주에 거의 닿을 듯한 순간— "그림 하일드." 엘로이즈의 목소리. 부드러웠다. 하지만 너무 가까웠다. 그림 하일드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심장이 쿵.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뒤로 물러섰다. "...네, 아가씨." 목소리는 겨우 유지됐다. 엘로이즈는 뒤를 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잠깐..." 아주 자연스럽게. "이 장갑 좀 받아줄래?" 그녀의 손이 뒤로 뻗어졌다. 보지 않아도 그 자리에 하일드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그림 하일드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네." 짧게 대답하며 급히 앞으로 다가갔다.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장갑을 받아들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곧 멈췄다. 엘로이즈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다시 자신의 준비를 이어갔다. 방 안에는 다시 조용함이 내려앉았다. 하지만그림 하일드의 시선은 더 이상 화장대로 가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채 장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못 했다.' 그 짧은 말이 안쪽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무거운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화장대 위 진주 목걸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그리고, 기다리는 것처럼. 살롱시간. 넓은 창으로 들어온 빛이 방 안을 부드럽게 채우고 있었다. 얇은 커튼이 바람에 아주 느리게 흔들렸고, 테이블 위에는 정갈하게 놓인 찻잔과 다과가 차분하게 빛을 받았다. 엘로이즈는 중앙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자세는 곧았고, 표정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몇몇 귀족 가문의 영애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재무대신 가문의 딸, '이네스 드 몽브랑'도 앉아 있었다. 오늘도 단정하고 절제된 차림으로. 겉으로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계산이 담겨 있었다. 그림 하일드는 엘로이즈의 뒤, 조금 떨어진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은 가지런히 모여 있었지만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때 이네스 드 몽브랑이 찻잔을 들었다. 차를 한모금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잔을 입술에서 떼며, 아주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드 로베르 영애, 오늘은..." 말을 고르듯 한 박자 멈춘 뒤ㅡ "영애의 동생의... 기일이라.. 들었습니다." 살롱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멈췄다.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어갔다. "묘지에 다녀오셨다고요. 동생 많이 그립고, 생각 나시겠어요." 말은 부드러웠다. 완벽하게, 예의를 갖춘 위로. 하지만 그 안에는 온기가 없었다. 형식처럼, 정해진 자리에 맞춘 문장처럼. 엘로이즈는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잠시 정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네." 짧은 대답. 그녀는 조용히 덧붙였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애." 이네스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 순간— 손목이 아주 미세하게 꺾였다. 흔들림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정확한 각도. 찻잔의 바닥이 탁자에 닿기 직전— 손끝이 살짝 밀렸다. 툭—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 찻잔이 중심을 잃고 기울었다. 차가 한쪽 방향으로만 흘러내렸다. 천천히 번지는 것이 아니라, 딱 엘로이즈 쪽으로 향해 정확하게. 그녀의 손가락이 아주 짧게 멈췄다. 마치 '아, 실수했다'는 타이밍을 기다린 사람처럼. 그리고 그제야— "어머." 작은 숨 섞인 소리. 늦게 올라온 반응. 그녀는 찻잔을 붙잡으려는 시늉만 했다. 이미 엎질러진 뒤에 고개를 살짝 숙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드 로베르 영애, 죄송해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들었다. "제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그만..." 말은 자연스러웠다. 표정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동자 안에는, 단 한 순간도 당황이 담겨 있지 않았다. 엘로이즈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부드러운 목소리. "괜찮아요." 짧은 한마디. 그녀의 시선이 아주 자연스럽게 뒤로 움직였다. "그림 하일드." 그림 하일드의 몸이 즉시 반응했다. "네, 아가씨." "새 찻잔으로 바꿔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여기는 정리해주고." "...네." 짧은 대답. 그림 하일드는 곧바로 앞으로 나와 손수건으로 흘러내린 차를 빠르게 정리했다. 동작은 정확했고 지체가 없었다. 정리를 마친 뒤, 그녀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새 것으로 준비해오겠습니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 그림 하일드는 문 쪽으로 향해 조용히 나갔다. 문이 닫혔다. 그 순간 이네스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문, 그림 하일드가 사라진 방향으로. 잠시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다시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조용히 올라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틈에서.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 눈빛은 이미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문밖에서 그림 하일드의 발소리가 사라져가고, 이네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아이..." 말투는 가볍고, 자연스러웠다. "영애의 말씀대로 행동도 빠르고, 손도 야무진 것 같네요." 칭찬처럼 들리는 말. 엘로이즈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그래요." 이네스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애의 동생이랑...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네요." 공기가 아주 얇게 멈췄다. 엘로이즈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나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짧은 숨. "참 개구쟁이였어요." 미소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말도 많고... 웃는 것도 좋아하고." 그리고 조금 더 낮게 말했다. "저 아이는..." 시선이 아주 잠깐 내려갔다. "말도 없고, 잘 웃지도 않아요." 말은 부드러웠지만 선을 긋는 느낌이었다. 이네스는 그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 저는 성격이 아니라..." 그녀의 눈이 엘로이즈를 향했다. "외모가요...많이 흡사해 보여서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서..." 잔을 손끝으로 가볍게 굴리며 말했다. "왜 영애께서 저 아이에게 잘해주시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해서요." 엘로이즈의 손이 찻잔 위에서 미세하게 멈췄다. 이네스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 사고가 났던 날..." 공기가 한 번 더 가라앉았다. "동생 대신... 영애께서 살아남으셨고..."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문장. "자신 대신 동생이 죽었다는 생각에..." 그녀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깊어졌다.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계셨을 텐데..." 살롱 안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말을 끼어들지 않았다. 이네스는 마지막으로 아주 부드럽게 덧붙였다. "동생과 얼굴이 닮은 저 아이를 볼 때마다..." 짧은 미소. "동생 생각이 나시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엘로이즈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찻잔 위에 얹혀 있던 손가락이 조금 힘을 받았다. 그리고 조용히,보이지 않을 정도로 잔을 조금 꽉 쥐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저녁빛이 그녀의 얼굴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흔들리던 커튼 끝이 천천히 가라앉고, 방 안에는 아주 옅은 바람 소리만 남았다.엘로이즈는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래전의 햇빛이 다시 떠올랐다.몇 년 전.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햇빛이 눈부시게 맑던 오후였다. 테라스 한쪽에는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식어가는 차와 펼쳐진 책 한 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엘로이즈는 테라스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세는 이미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조차 조용했다.정원에는 바람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언니이이!!"멀리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의 눈썹이 움직였다. 곧이어 작은 발소리가 잔디를 가로질러 빠르게 가까워졌다.타다닥. 그리고 다음 순간,"언니!! 이것 좀 봐!!"클레르가 그대로 테라스까지 뛰어 올라왔다.엘로이즈는 책에서 눈을 들었다. 잠시 말이 없었다."...클레르."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드레스. 연한 크림빛 드레스 자락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치맛단은 흙투성이였고, 소매 끝에도 풀잎이 엉겨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에도 작은 잎사귀 하나가 걸려 있었다.엘로이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너 또 무슨 짓을 한 거야."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이미 익숙하다는 듯한 체념이 묻어 있었다. 클레르는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나 후레지아 꺾어왔어!"그녀가 양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노란 후레지아 꽃들.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레르의 눈도 그 꽃만큼 반짝이고 있었다."엄청 예쁘지?!"엘로이즈는 꽃다발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너 또 정원사 아저씨 몰래 꺾어온 거야?"클레르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아닌데?"대답이 너무 빨랐다. 엘로이즈는 가만히 그녀를
살롱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 같았다. 엘로이즈는 그림 하일드의 손을 천천히 놓아 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아주 낮게 울렸다.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단정하고, 우아하고, 흐트러짐없는 미소. 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아까와 달랐다.엘로이즈는 천천히 이네스 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급하지도 않았고, 화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더 숨 막히는 걸음.엘로이즈는 이네스의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하인들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넘치시는 우리 영애께서..."말은 웃으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끝음은 아주 얇게 차가웠다."왜 제 하녀에게 사과하라는 말에는 그렇게 당황하시는 걸까요?"이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엘로이즈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웃었다."아, 아니에요."그녀는 손끝으로 자기 드레스 소매를 아주 가볍게 정리했다."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서늘했다."하인, 평민들을 향한 영애의 사랑은 이미 유명하니까요."엘로이즈는천천히 이어갔다."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하신다는 얘기는 저도 자주 들었습니다."살롱 안 공기가 순간 흔들렸다. 다른 영애들의 시선이 조용히 움직였다. 이네스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엘로이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이번 달만해도... 일자리 없는 평민들을 위해 직접 하인들을 3명이나 들이셨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다 남자로요."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했다. 귀 끝이 먼저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 위로 열이 번졌다.살롱 안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다른 영애들도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인을 들였다.'귀족 사회에서는 때때로 다른 뜻으로도 쓰이는 말.특히 젊은 남자
살롱 안에는 은은한 차 향이 퍼져 있었다.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작았고, 웃음소리도 지나치게 커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귀족 영애들의 다과 시간. 하지만 왕의 양쪽 팔이라 불리는 두 가문의 외동딸이 마주 앉아 있는 이상,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단순한 사교 모임이었던 적이 없었다.엘로이즈 드 로베르. 그리고 재무대신 가문의 영애, 이네스 드 몽브랑.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언제나 우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얇은 칼날 같은 긴장이 숨어 있었다.그래서인지 같이 차를 마시러 온 다른 영애들은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조용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찻잔을 괜히 더 천천히 들었고, 누군가는 시선을 애매하게 창밖으로 돌렸다.한 영애가 아주 작게 한숨을 삼켰다.또 시작이구나.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쥔 손끝에 들어간 힘만이 보이지 않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간신히 유지된, 그러나 완벽하게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였다."...글쎄요..."엘로이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게까지는..."말끝은 부드러웠다.하지만 이네스는 그 틈을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제가 영애였어도... 저 아이에게 잘해줬을지도 모르겠어요..."이네스는 천천히 이어갔다."아무리 고아원 출신의 하녀라지만... 동생분과 얼굴이 닮았다면..."이네스의 눈이 조금 휘어졌다."돌아가신 동생에게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저 아이에게 잘해주시는 것도 이해가 되거든요."말은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상대를 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기 위한 것이었다.다른 영애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찻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겠죠."그녀는 미소를 유지한 채
저택 안.문이 열리자, 바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왔다. 조용하고, 정돈되어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유지된 공간.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를 귀족 부인이 따랐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림 하일드가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덜컥. 소리와 함께, 바깥의 일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인들은 멀리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정숙했다.귀족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엘로이즈."부드러운 목소리였다.엘로이즈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네, 어머니."짧은 대답.부인은 그녀를 한 번 더 살폈다. 얼굴. 숨. 걸음. 그리고 묘지에서의 일. 사과나무. 떨어진 가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부인의 손이 아주 가볍게, 엘로이즈의 어깨에 닿았다."괜찮니."짧은 질문. 하지만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약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부인은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많이 놀랐을 텐데."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전히 부드럽게, 하지만 조금 더 낮게."들어가서 쉬렴."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결정이었다. 엘로이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번도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그 순간, 그림 하일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로이즈의 걸음이 방향을 틀자마자— 한 발 먼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뒤로 붙었다. 반 걸음. 항상 유지하던 그 거리. 숨도, 발걸음도 맞춘 채— 조용히 그대로 따라갔다.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묻지도
마차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지 않은 채ㅡ 시선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장 위. 카일.그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그림 하일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되살아났다."..."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걸음, 천천히 마차 옆으로 다가가 발을 올리고, 안장 위로 올라탔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시선은 다시 앞으로 고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옆에 있는 시선은 느껴지고 있었다. 카일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아주 잠시, 침묵.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씨익. 소리 없는 웃음. 짧지만 분명한 의미를 담은 웃음.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긴장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일은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찰싹.짧은 소리."...가자."낮은 목소리.말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ㅡ 바퀴가 굴러갔다. 자갈 위를 밟으며 일정한 리듬으로. 마차가 다시 길 위로 나아갔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마차는 조용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말들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고, 바람은 옆을 스치듯 흘러갔다.안장 위의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히 굳어져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너."짧은 한 음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굳었다. 숨이 한 번, 얕게 끊겼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아주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급하게 다가와 엘로이즈의 어깨를 붙잡았다."괜찮니? 어디 다친데는 없니?"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 자기 머리 위로 떨어졌어야 할 가지. 그리고 바로 옆에 박혀 있는 무게.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느렸다."맞지는 않았어요."부인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하마터면ㅡ"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대신 눈으로 가지를 확인했다. 굵기. 무게. 낙하 위치."...큰일 날 뻔했어."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떨어진 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이상하네."혼잣말처럼 낮게. 하지만 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표정은 다시 정리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뒤에 서 있던 그림 하일드의 손이 굳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방금 전. 나무의 움직임. 바람의 흐름. 그리고 철문 밖에서 느껴졌던 그 시선.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철문으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카일.'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목이 조여오던 감각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 숨이 막히던 순간.'...너도 죽는다. 이해했지?'그 목소리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림 하일드의 입술이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