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마차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지 않은 채ㅡ 시선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장 위. 카일. 그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그림 하일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되살아났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걸음, 천천히 마차 옆으로 다가가 발을 올리고, 안장 위로 올라탔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시선은 다시 앞으로 고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옆에 있는 시선은 느껴지고 있었다. 카일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아주 잠시, 침묵.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씨익. 소리 없는 웃음. 짧지만 분명한 의미를 담은 웃음.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긴장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일은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찰싹. 짧은 소리. "...가자." 낮은 목소리. 말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ㅡ 바퀴가 굴러갔다. 자갈 위를 밟으며 일정한 리듬으로. 마차가 다시 길 위로 나아갔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마차는 조용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말들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고, 바람은 옆을 스치듯 흘러갔다. 안장 위의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히 굳어져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너." 짧은 한 음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굳었다. 숨이 한 번, 얕게 끊겼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아주 조금 돌렸다. 카일. 그가 옆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겁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눈. 조심스러운 시선. 카일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겠다." 말투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부탁...이요?" 말이 거의 숨처럼 흘러나왔다. 카일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대로 말했다. "넌—" 짧은 정적. "저 계집의 하녀니까."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마차 쪽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사이 아니냐." 그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말투. 그림 하일드의 손이 조금 더 굳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카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회를 봐서—" 말이 아주 느리게 이어졌다. "지금 저 계집이 목에 하고 있는 목걸이." 짧은 숨. 그의 눈이 다시 그림 하일드를 향했다. "...저 목걸이를 훔쳐와라." 그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하지만 그 무게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확실하게 흔들렸다. "그건..."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말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ㅡ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카일의 손이 고삐 위에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그림 하일드의 숨이 갑자기 막혔다. "...윽ㅡ!"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목이ㅡ 또 다시 보이지 않는힘에 조여들었다. 손이 본능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카일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못하겠다고 하면ㅡ" 주먹이 조금 더 단단히 쥐어졌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흔들렸다. 숨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될지ㅡ" 그가 아주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알지?" 그 말은 위협이 아니라, 이미 겪어본 사실의 확인이었다. 그림 하일드의 눈가가 아주 미세하게 젖었다. 고개가 작게ㅡ 아주 작게 끄덕여졌다. "...네..." 겨우 나온 소리. 숨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카일의 주먹이 천천히 풀렸다. 그 순간ㅡ 조이던 힘이 사라졌다. 그림 하일드가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카일은 그 모습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괜히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다. "넌 하녀잖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는 다시 앞을 보았다. 고삐를 가볍게 당겼다. 말들이 속도를 조금 올렸다. 덜컹ㅡ 마차가 더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카일의 마지막 말이 떨어졌다. "실수하지 마라." 그림 하일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숨을 고르며, 고개를 숙인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곳에 서 있다는 걸. "진정됐냐." 잠깐의 정적 후, 옆에서 아무렇지않게 떨어진 말. 그림 하일드는 대답을 해야하는지 잠시 망설였다. "...네." 결국 나온 건 짧은 한마디였다. 카일은 대답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삐를 쥔 손을 조금 더 조정했을 뿐이었다. 말들이 방향을 살짝 틀었다. 그리고ㅡ 다시 말했다. "잘 들어라." 목소리는 낮았고, 일정했다.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톤. 그래서 더 거부하기 어려운 톤. "지금 당장 하라는 게 아니다." 짧은 정적. "기회를 보라는 거다." 그림 하일드는 고개를 더 숙였다. 말을 끊지 않겠다는 태도. 그대로 듣겠다는 자세. 카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침에 머리 손질할 때도 있고. 옷 갈아입을 때도 있고. 잠들었을 때도 있겠지." 하나하나ㅡ 가능한 상황을 짚듯이. "그 목걸이. 항상 목에 걸려 있는 건 아니다." 그림 하일드의 손이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매일 아침, 거울 앞. 엘로이즈의 머리를 빗겨주던 순간들. 리본을 매던 손. 그리고ㅡ 목. 그 위에 항상 걸려있던 진주 목걸이. "..." 입술이 약간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카일은 그걸 다 보고 있었다. "너라면ㅡ" 그의 시선이 아주 잠깐 옆으로 움직였다. 그림 하일드를 향해. "할 수 있다." 그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그저 조건을 확인하는 말. 그림 하일드의 가슴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그건.." 입이 열렸다. 아주 작게. 하지만 다시 닫혔다.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거절? 설명? 변명?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때, 카일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천천히 주먹이 만들어졌다. 그림 하일드의 숨이 다시 막혔다. "...!" 이번에는 신음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이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렸다. 조금 전보다 더 정확하게. 더 익숙하게. 그녀의 손이 다시 올라갔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카일은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눈도, 얼굴도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괜히 말 돌리지 마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시간 끌 생각도 하지 말고." 주먹이 조금 더 쥐어졌다. 그림 하일드의 눈이 흔들렸다. 숨이 끊어질 듯 흔들렸다. "너—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이미 봤잖아." 그 말은 설명이 아니었다. 확인. 그리고 경고. 그림 하일드의 고개가 아주 작게 끄덕여졌다. "...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제야 카일의 주먹이 풀렸다. 힘이 사라졌다. 그림 하일드가 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숨이 거칠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입을 다물었다. 소리를 줄였다. 다시 조용한 하녀로 돌아가기 위해. 카일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잘하네." 짧은 한 마디. 그 말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만 하면 된다." 그는 다시 앞을 보았다. 고삐를 한 번 더 당겼다. 말들이 조금 더 속도를 냈다. 마차가 더 크게 흔들렸다. 덜컹— 그림 하일드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ㅡ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끝까지ㅡ 무너지지 않으려 했다. 카일의 마지막 말이 조용히 떨어졌다. "잊지 마라." 짧은 숨. "넌— 이미 선택 된거다." 그 말 이후ㅡ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아까와 달랐다.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가 이미 결정된 뒤의 침묵이었다. 그림 하일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한 문장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아가씨...' 그리고 그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잠시 후. 마차는 저택 앞에서 천천히 멈췄다. 덜컹ㅡ 마지막으로 바퀴가 한 번 흔들리고, 말들이 고개를 낮췄다. 그림 하일드는 안장에서 내려섰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아주 잠깐 중심이 흔들렸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마차 문 앞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고, 숨을 한 번 고른 뒤— 문을 열었다. 덜컥. 안쪽의 어둠이 잠깐 드러났다. "아가씨, 마님."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먼저 귀족 부인이 몸을 내밀었다. 손을 가볍게 짚고 천천히 내려섰다. 검은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부드럽게 닿았다. 뒤이어 엘로이즈가 움직였다. 문가에 손을 짚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렸다. 햇빛이 그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림 하일드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목. 진주 목걸이.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아가씨.' 숨이 얇게 이어졌다. '정말—' 말이 막혔다. 목 안쪽이 조여왔다. 그래도 이어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말은 완전히 속으로만 흘러갔다.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그때, 엘로이즈의 시선이 내려왔다. 그림 하일드를 향해. 잠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림 하일드?" 부드러운 목소리. 하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닿는 톤. "너— 왜 그러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숨이 한 번 끊겼다. 그리고 바로 대답했다. "아—" 짧은 끊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은 빨랐고 조금 억지로 정리된 느낌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더 숙였다. 시선을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엘로이즈는 잠시 더 바라봤다. 그 얼굴을. 숨의 흐름. 말투. 아주 미세한 틈. 하지만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 짧은 대답. 그리고 시선을 거두었다. 그 순간ㅡ 옆에 있던 귀족 부인의 눈이 움직였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그림 하일드를 향했다.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아이.작고, 조심스럽고, 자신을 최대한 지우고 있는 존재.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선. 얼굴의 윤곽. 눈의 위치. 자세. 부인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그리고 조용히 생각했다. '...이 아이.' 그녀의 시선이 조금 더 길어졌다. 관찰하듯. 재듯. '조금만 더—' 그 생각이 이어졌다. '조금만 더 맞추면...'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엘로이즈를 한 번. 그리고— 다시 그림 하일드를 한 번. '...우리 애처럼— 보일 수 있다.' 그 결론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그리고 다음 생각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더 낮고, 더 차갑게. '그럼—' 짧은 숨. '만약...' 시선이 아주 잠깐 멀어졌다. 과거를 스치는 듯. '누군가가—' 그 문장이 천천히 완성되었다. '우리 애를 또다시 암살하려 한다 해도—' 부인의 눈이 다시 그림 하일드에게 고정되었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서 있는 아이. '...이 아이를—' 다시 짧은 정적. 그리고 완전히 굳은 결론. '우리 애로— 보이게 만들면.' 그 생각은 조용했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미 계산이 끝난 사람의 눈이었다. 부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들어가자." 짧은 한마디. 엘로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두 사람은 먼저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림 하일드는 한 박자 늦게 그 뒤를 따랐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하지만 그녀의 뒤에서는, 또 다른 계획이 이미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쾅!! 번개가 밤하늘을 찢었다. 순간 모든 것이 하얗게 번쩍였다가,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돌. 무너져 내린 절벽 아래. 그 밑에 노파가 깔려 있었다. 숨이 가쁘게 끊어지고 있었다. "...하..." 갈라진 숨소리. 가슴 위에 얹힌 돌은 여전히 무거웠고, 몸은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노파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초점이 흐려졌다가, 다시 모였다. 그리고 기억이 흘러들어왔다. 마차. 묘지. 사과나무. 목걸이. 엘로이즈. 그리고 자신. 그 모든 장면들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아가씨..." 입술이 떨렸다.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만약...내가...' 숨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가슴이 눌린 채로 억지로 이어졌다. '그때...' 기억이 더 또렷해졌다. 그 때의 저택 앞. 마차. 진주 목걸이. 그리고 자신의 시선. '아가씨 대신...' 그 문장이 천천히 완성되었다. '내가 죽었다면...' 숨이 끊겼다.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랬다면...' 그 다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무언가가 목을 막았다. 말이 아니라, 감정이. 후회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이제 와서야 떠오른 선택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눈이 더 크게 떨렸다. 돌 위로 떨어진 빗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피와 섞였다. "...하..." 숨이 더 얕아졌다. '그랬다면...' 다시. 같은 문장. 같은 생각. 하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가지 못했다. 그녀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자신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걸. 하지 못했다는 걸.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걸. 그 결과로 여기까지 왔다는 걸. 노파의 눈이 아주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떴다. 어둠이 더 가까워졌다. "...늦었..." 말이 부서졌다.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돌은 여전히 무거웠고, 숨은 점점 더 짧아졌다. 하지만 기억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저녁빛이 그녀의 얼굴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흔들리던 커튼 끝이 천천히 가라앉고, 방 안에는 아주 옅은 바람 소리만 남았다.엘로이즈는 아주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오래전의 햇빛이 다시 떠올랐다.몇 년 전.드 로베르 저택의 정원.햇빛이 눈부시게 맑던 오후였다. 테라스 한쪽에는 작은 티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식어가는 차와 펼쳐진 책 한 권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엘로이즈는 테라스 의자 위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자세는 이미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등을 곧게 세운 채,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조차 조용했다.정원에는 바람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때,"언니이이!!"멀리서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엘로이즈의 눈썹이 움직였다. 곧이어 작은 발소리가 잔디를 가로질러 빠르게 가까워졌다.타다닥. 그리고 다음 순간,"언니!! 이것 좀 봐!!"클레르가 그대로 테라스까지 뛰어 올라왔다.엘로이즈는 책에서 눈을 들었다. 잠시 말이 없었다."...클레르."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드레스. 연한 크림빛 드레스 자락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치맛단은 흙투성이였고, 소매 끝에도 풀잎이 엉겨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에도 작은 잎사귀 하나가 걸려 있었다.엘로이즈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너 또 무슨 짓을 한 거야."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이미 익숙하다는 듯한 체념이 묻어 있었다. 클레르는 전혀 기죽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나 후레지아 꺾어왔어!"그녀가 양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번쩍 들어 보였다. 노란 후레지아 꽃들.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클레르의 눈도 그 꽃만큼 반짝이고 있었다."엄청 예쁘지?!"엘로이즈는 꽃다발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너 또 정원사 아저씨 몰래 꺾어온 거야?"클레르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아닌데?"대답이 너무 빨랐다. 엘로이즈는 가만히 그녀를
살롱 안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는 것 같았다. 엘로이즈는 그림 하일드의 손을 천천히 놓아 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아주 낮게 울렸다.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남아 있었다. 단정하고, 우아하고, 흐트러짐없는 미소. 하지만 그 안의 온도는 아까와 달랐다.엘로이즈는 천천히 이네스 쪽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급하지도 않았고, 화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차분해서 더 숨 막히는 걸음.엘로이즈는 이네스의 앞에 멈춰 섰다.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하인들에 대한 사랑과 공감이 넘치시는 우리 영애께서..."말은 웃으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끝음은 아주 얇게 차가웠다."왜 제 하녀에게 사과하라는 말에는 그렇게 당황하시는 걸까요?"이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엘로이즈는 그녀를 바라보며 아주 조용히 웃었다."아, 아니에요."그녀는 손끝으로 자기 드레스 소매를 아주 가볍게 정리했다."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부드러운 말투.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서늘했다."하인, 평민들을 향한 영애의 사랑은 이미 유명하니까요."엘로이즈는천천히 이어갔다."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하신다는 얘기는 저도 자주 들었습니다."살롱 안 공기가 순간 흔들렸다. 다른 영애들의 시선이 조용히 움직였다. 이네스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가늘어졌다.엘로이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이번 달만해도... 일자리 없는 평민들을 위해 직접 하인들을 3명이나 들이셨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다 남자로요."순간. 이네스의 얼굴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했다. 귀 끝이 먼저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 위로 열이 번졌다.살롱 안 공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다른 영애들도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인을 들였다.'귀족 사회에서는 때때로 다른 뜻으로도 쓰이는 말.특히 젊은 남자
살롱 안에는 은은한 차 향이 퍼져 있었다.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작았고, 웃음소리도 지나치게 커지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귀족 영애들의 다과 시간. 하지만 왕의 양쪽 팔이라 불리는 두 가문의 외동딸이 마주 앉아 있는 이상, 이 자리는 단 한 번도 단순한 사교 모임이었던 적이 없었다.엘로이즈 드 로베르. 그리고 재무대신 가문의 영애, 이네스 드 몽브랑.두 사람의 대화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언제나 우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늘 얇은 칼날 같은 긴장이 숨어 있었다.그래서인지 같이 차를 마시러 온 다른 영애들은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조용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찻잔을 괜히 더 천천히 들었고, 누군가는 시선을 애매하게 창밖으로 돌렸다.한 영애가 아주 작게 한숨을 삼켰다.또 시작이구나.말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잔을 쥔 손끝에 들어간 힘만이 보이지 않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간신히 유지된, 그러나 완벽하게 흐트러지지 않은 미소였다."...글쎄요..."엘로이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게까지는..."말끝은 부드러웠다.하지만 이네스는 그 틈을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제가 영애였어도... 저 아이에게 잘해줬을지도 모르겠어요..."이네스는 천천히 이어갔다."아무리 고아원 출신의 하녀라지만... 동생분과 얼굴이 닮았다면..."이네스의 눈이 조금 휘어졌다."돌아가신 동생에게 속죄한다는 생각으로... 저 아이에게 잘해주시는 것도 이해가 되거든요."말은 다정했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상대를 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기 위한 것이었다.다른 영애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찻잔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네...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겠죠."그녀는 미소를 유지한 채
저택 안.문이 열리자, 바깥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공기가 밀려왔다. 조용하고, 정돈되어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유지된 공간.엘로이즈가 먼저 들어섰다. 걸음은 일정했고,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뒤를 귀족 부인이 따랐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그림 하일드가 문턱을 넘었다. 문이 닫혔다. 덜컥. 소리와 함께, 바깥의 일은 완전히 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 모두 잠시 말이 없었다. 하인들은 멀리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고, 복도는 여전히 정숙했다.귀족 부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엘로이즈."부드러운 목소리였다.엘로이즈의 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네, 어머니."짧은 대답.부인은 그녀를 한 번 더 살폈다. 얼굴. 숨. 걸음. 그리고 묘지에서의 일. 사과나무. 떨어진 가지.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부인의 손이 아주 가볍게, 엘로이즈의 어깨에 닿았다."괜찮니."짧은 질문. 하지만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약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부인은 그 대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많이 놀랐을 텐데."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여전히 부드럽게, 하지만 조금 더 낮게."들어가서 쉬렴."그 말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결정이었다. 엘로이즈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번도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그 순간, 그림 하일드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로이즈의 걸음이 방향을 틀자마자— 한 발 먼저,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그녀의 뒤로 붙었다. 반 걸음. 항상 유지하던 그 거리. 숨도, 발걸음도 맞춘 채— 조용히 그대로 따라갔다.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묻지도
마차 문이 닫히고,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은 가지런히 모아져 있었고, 시선은 낮아져 있었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 고개를 들지 않은 채ㅡ 시선만,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안장 위. 카일.그는 이미 그림 하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도 없는 얼굴.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눈. 하지만 그 시선이 닿는 순간, 그림 하일드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목이 아주 미세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되살아났다."..."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 걸음, 천천히 마차 옆으로 다가가 발을 올리고, 안장 위로 올라탔다. 움직임은 조심스러웠고,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시선은 다시 앞으로 고정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옆에 있는 시선은 느껴지고 있었다. 카일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림 하일드를 바라봤다. 아주 잠시, 침묵. 그리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씨익. 소리 없는 웃음. 짧지만 분명한 의미를 담은 웃음. 그림 하일드의 숨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긴장이 그대로 굳어졌다. 카일은 그 표정을 그대로 유지한 채,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실었다.찰싹.짧은 소리."...가자."낮은 목소리.말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ㅡ 바퀴가 굴러갔다. 자갈 위를 밟으며 일정한 리듬으로. 마차가 다시 길 위로 나아갔다. 바퀴가 자갈을 밟는 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졌다. 마차는 조용히 길을 따라 움직였다. 말들은 고개를 흔들며 걸었고, 바람은 옆을 스치듯 흘러갔다.안장 위의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림 하일드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히 굳어져 있었다. 그때,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너."짧은 한 음절. 그림 하일드의 어깨가 굳었다. 숨이 한 번, 얕게 끊겼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아주
쾅!!굵은 가지가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 짧게, 아주 짧게 엘로이즈의 목에 걸려 있던 진주 목걸이가 빛을 받았다. 햇빛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반응하듯, 한 점에서 번져 나오는 미세한 반짝임. 그 반짝임이 공기를 스쳤다. 그리고,툭. 가지의 낙하 궤도가 아주 미세하게 비틀렸다. 정확히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이 한 치 옆으로 어긋났다. 쾅!가지가 엘로이즈의 바로 옆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흙이 튀었고, 꽃잎 몇 장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엘로이즈!" 부인의 목소리가 터졌다. 그녀가 급하게 다가와 엘로이즈의 어깨를 붙잡았다."괜찮니? 어디 다친데는 없니?" 엘로이즈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 자기 머리 위로 떨어졌어야 할 가지. 그리고 바로 옆에 박혀 있는 무게.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괜찮아요."목소리는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느렸다."맞지는 않았어요."부인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하마터면ㅡ"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 대신 눈으로 가지를 확인했다. 굵기. 무게. 낙하 위치."...큰일 날 뻔했어."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엘로이즈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떨어진 가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이상하네."혼잣말처럼 낮게. 하지만 이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표정은 다시 정리되고 있었다. 그때, 조금 뒤에 서 있던 그림 하일드의 손이 굳었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방금 전. 나무의 움직임. 바람의 흐름. 그리고 철문 밖에서 느껴졌던 그 시선. 그녀의 눈이 아주 잠깐, 철문으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카일.'그 이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목이 조여오던 감각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 숨이 막히던 순간.'...너도 죽는다. 이해했지?'그 목소리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림 하일드의 입술이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