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날 저녁, 도진은 드물게 약속 시간을 지켜 귀가했다. 그의 손에는 화려하게 포장된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여기 선물. 백화점 시찰 나갔는데 당신 생각이 나서 샀어."
도진이 꺼내놓은 것은 해외 명품 브랜드의 한정판 가방이었다. 지수는 가방을 받지 않은 채 그저 바라만 보았다.
도진은 정말 모르는 걸까. 며칠 전 수진이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다녀온 뒤, 자신의 SNS에 자랑스럽게 올렸던 사진 속 가방과 디테일 하나 틀리지 않은 동일 모델이라는 것을. 수진에게 던져준 가방을 아내에게도 건네며 ‘당신 생각’을 운운하는 도진의 뻔뻔함에 지수는 구역질이 올라왔다.도진은 지수가 가방을 받지 않자 머쓱한 표정으로 그것을 소파 위에 올려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지수는 거실에 홀로 앉아 그 화려한 가죽 뭉치를 응시했다.
수진과 도진이 저 가방을 고르며 얼마나 달콤한 밀어를 나누었을지,대표 집무실 문을 부서져라 닫고 나온 찰스는, 분노로 사정없이 씩씩거리며 사옥 복도를 걸어 나갔다.'강도진, 어린놈의 새끼가 감히 나한테 소리를 질러? 내가 누군데! 망해가던 CB 디자인팀을 기사회생시키고 명성을 다시 올려놓은 게 누구 덕인데!'찰스는 강도진이 자신을 벌레 보듯 바라보며 법무팀을 집결시켜 '꼬리 자르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오직 도진이 자신이라는 독보적인 거장을 감히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헛된 자만심과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도진의 차가운 경고를 이행하지 않았다간 자신의 입지나 성과급에 차질이 생길 것은 분명했기에, 찰스는 어떻게든 유현을 찾아내 사적으로 합의를 끌어내기로 결심했다.한편, 유현은 찰스의 난입 위험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정식 소장이 접수되면 코너에 몰린 찰스가 틀림없이 유현의 거처나 개인 작업실로 난입해 행패를 부릴 것이라 예견한 유진의 배려 덕분이었다. 유현은 예전에 유진이 운영하던 매장이자 현재는 유진의 개인 작업실로 탈바꿈한 안전한 공간에서 지내고 있었다.찰스는 유현의 집을 몇 번이고 찾아갔지만 번번이 헛걸음을 쳤다. 분노와 조급함 속에서 도진의 차가운 경고가 머릿속을 스치자 찰스의 피가 바짝바짝 말라갔다.'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내 발로 오지 않을 놈이라면…… 오게 만들면 되지.'간교한 꾀를 낸 찰스는 CB 디자인팀의 막내 디자이너를 포섭했다. 찰스의 악독한 압박을 받은 막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유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앤더슨 교수의 차가운 폭로가 연회장을 때린 직후, 파티장은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 뒤에 거대한 동요가 일렁였다."교, 교수님! 잠시만요!"강도진은 당황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급히 마이크를 틀어잡으며 스태프들에게 거칠게 손짓했다."여러분,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앤더슨 교수님께서는 학자로서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셨을 뿐입니다. 단상 위 화면을 봐주십시오!"도진은 급하게 자신이 원하는 최상의 결과만을 도출해 냈던 사설 지질 조사 기관들의 희망적인 분석 데이터와, 남미 현지 정부 관료들에게 뒷돈을 집어넣고 받아낸 관제 보고서들을 대형 스크린에 마구잡이로 띄웠다."보시다시피 현지 정부 공식 문서와 저명한 조사 기관에서는 매장량과 채굴 가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투자 가치는 이미 완벽하게 입증되었습니다!"그러나 목에 핏대를 세우는 도진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파티장의 분위기를 돌이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자산가들과 투자자들은 냉소적인 눈빛으로 내밀어진 서류를 툭 내팽개치거나 쯧쯧 혀를 차며 하나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공식 정부 문서? 어이구, 남미 관료들 호주머니에 돈 몇 푼 넣어주면 서류 만들어주는 건 일도 아닌데 누구를 바보로 아나.""그러게 말입니다. 앤더슨 교수가 불합격 보고서를 썼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요."
파티장 로비의 눈부신 역광을 뚫고 들어선 두 사람을 보며, 강도진은 한참 동안 이지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혼 후 공식 석상에서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그 지수가 CB의 연말 갈라 파티장에 직접 발을 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까닭이다.도진의 시선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지수의 우아한 딥 네이비 실크 드레스뿐만이 아니었다. 지수가 가볍게 클러치를 쥐고 있는 왼손 손가락, 그곳에서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였다.'영원한 사랑'과 닮은 듯하면서도 완벽하게 다른 디테일.희귀한 핑크 다이아몬드를 중심으로 촘촘한 세공이 보석의 입체감을 극대화한 독보적인 반지는, 얼마 전 지수가 SNS에 사진을 올려 사교계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던 바로 그 디자인이었다. 마침내 그 반지가 실물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멍하게 반지를 내려다보던 도진의 신경을 사정없이 깨운 것은 모친 김미자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냐!"김미자의 히스테릭한 목소리에 이어, 그 곁에 서 있던 부친 강수한 회장의 묵직하지만 조심성 없는 호통이 날아들었다."넌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어디서 못된 버릇이냐!"그러나 지수는 그들의 거친 고함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 그들을 차갑게 지나쳐, 연회장 안쪽에서 지수를 반갑게 바라보고 있던 강인주 여사에게로 걸어갔다. 제이아우라 시크릿
김미자의 고집과 독단은 파티 준비 단계부터 스태프들과 정지상 팀장의 머리를 사정없이 쥐어뜯게 만들었다.정지상이 기획했던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미니멀리즘 연출안은 김미자의 손에 들어간 지 단 10분 만에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미자는 호텔 대연회장 입구부터 촌스러운 대형 금빛 아치와 요란한 원색 조명을 도배했고, 사교계 사모님들의 눈길을 사로잡겠다며 CB의 신상 드레스와 보석들을 조잡하게 나열한 초대형 디스플레이 존을 강행했다."사모님, 제발 재고해 주십시오. 겉으로는 CB의 연말 갈라 파티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이 자리의 본질은 남미 광산 유치를 위한 거액 투자자들을 위한 자리라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정지상의 절박한 건의에도 김미자는 명품 클러치를 쥔 손끝을 까딱거리며 비웃음을 날렸다."내가 설마 그것도 모를까 봐 그래? 어휴, 답답하긴! 투자가들도 우리가 가진 재력과 세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안심하고 선뜻 투자할 마음이 생기지 않겠어? 그리고 또! 그 투자가들이 혼자 오니? 다 자기 마누라나 파트너 손 잡고 와. 생각보다 그 안사모님들 입김이 사업 결정에 얼마나 센지 네가 잘 몰라서 그래!""하지만 사모님, 이건…….""토 달지 마! 어디서 감히 대표 모친이 지시하는 일에 일일이 토를 달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해!"결국 파티장은 품격 있는 명품 투자설명회의 무대가 아닌, 억지로 자본력을 과시하려 애쓰는 기괴하고 조잡한 삼류 연회장으로 변질되어 갔다.
"강 대표님, 내밀어 주신 사업계획서 상의 남미 광산 매장량 추정치만 보면 정말 대단합니다. 성공만 하면 그야말로 대박이겠어요."고급 한정식집의 프라이빗 룸. 묵직한 정적 속에서 자산운용사의 이 이사는 도진이 내민 서류를 손끝으로 넘기며 감탄사를 내뱉었다.도진은 속으로 긴장의 끈을 조이며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상대의 표정이 꽤나 긍정적으로 보였기에, 이번만큼은 기류가 흐뭇하다고 믿고 싶었던 까닭이다."그렇습니다, 이 이사님. 이미 1차 지질 조사와 현지 브로커 선점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입니다. 초기 개발 자금만 빠르게 확보된다면 내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인 채굴과 대대적인 유통망 확보가 가능해집니다."도진은 기회를 놓칠세라 품속에서 정식 투자 계약서를 꺼내 들고, 차분한 태도를 가장하며 테이블 위로 스르륵 밀어 넣었다."오늘 이 자리에서 확약서에 도장만 찍어주신다면, 자금 집행 및 수익 배분 조건은 운용사 측의 요구에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그러나 도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흐르던 방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이 이사는 허허 싱거운 실소를 흘리며 슬그머니 찻잔을 내려놓더니, 도진이 밀어 넣은 계약서를 손끝으로 슬쩍 당겨 다시 도진 쪽으로 밀어냈다."아이고, 강 대표님. 마음이 너무 급하시네. 이렇게 수백억 원이 들어가는 초대형 사업인데, 우리가 서류 몇 장 보고 오늘 당장 인감도장을 찍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수혁은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애초에 현지 하나만을 노리고 들어갔던 계획과 달리, 얼떨결에 두 명의 아이를 양팔에 껴안고 튀어나온 탓이었다.뒷좌석에 구겨 넣어진 현지와 예인이는 목이 터져라 "아빠! 엄마!"를 부르짖으며 오열하다가, 차의 거친 흔들림 속에서 끝내 지쳐 깊은 잠에 떨어졌다.수혁은 룸미러를 통해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오히려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는 어린 여자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 다니는 성인 남자는 길거리나 휴게소에서 사람들의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에 십상이었던 까닭이다.한참을 정처 없이 국도를 돌아다니던 수혁은 룸미러 속 아이들을 보다가, 아까 별장 마당에서 자신의 차를 미친 듯이 쫓아오다 허망한 눈으로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고 망연자실 서 있던 박진우의 모습이 떠올랐다.'크하하, 박진우 네놈이 아무리 잘나봤자 내 손아귀 안이다.'마치 자신이 전능한 승자가 된 듯한 짜릿한 승리감이 전신을 감쌌다. 처음엔 현지의 몸값만 뜯어낼 생각이었지만, 제이아우라 이지수의 딸인 예인이까지 덤으로 끌고 왔으니 몸값을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뜯어낼 수 있다는 헛된 탐욕이 솟구쳤다.수혁은 차를 몰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음습한 동네로 들어섰다. 예전에 사촌 누나인 수진이 궁상맞게 살았던 곳과 흡사한 낡은 반지하 방. 수혁은 거칠게 아이들을 안아 들고 어두운 반지하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아이들이 깨어나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준비해 온 덕테이프로 아이들의 조그만 손과 발, 그리고 입까지 꼼꼼하게 막아버렸다.하지만 입을 막아놓고 가만히 아이들을 바라보던 수혁의 머릿속에 순간 나쁜 생각이 스쳤다.'잠깐, 이러다 혹시 코까지 막혀서 숨이라도 못 쉬어 죽으면 어쩌지? 그럼 거액이고 뭐고 다 날아가는 건데.'겁이컥 난 수혁은 급히 아이들의 입을 막고 있던 덕테이프를 거칠게 떼어냈다. 그 순간, 입가에 붙어 있던 테이프가 떨어져 나가는 쓰라린 통증에 잠들어 있던 예인이가 헉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아
아침에 일어난 지수는 싸늘하게 식어있는 옆자리를 보았다. 몇일 집에 잘 들어오던 도진은 어젯밤 들어오지 않았다.생리가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익숙한 배의 묵직한 불편감에 불안감이 든 지수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살 만지며 제발 이번에는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과 편하게 강도진을 떠나기 위해 이번에도 실패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양가적인 생각에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오랫만에 슬비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던 중 가정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이번에는 사장님께서 가출하신 것 같아요. 집에 안들어 오시네요. 아마 작은
진우가 근무하는 HN은행 근처의 조용한 카페. 진우는 초조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슬비를 바라보았다. 슬비는 지현의 비서답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갑작스러운 연락에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진우씨"진우는 서류를 열어보려다가 멈칫하며 슬비를 응시했다."저를 어떻게 아시는지, 그리고 이지현태표님의 비서께서 왜 저를 찾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은행은 GS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슬비는 차갑지만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며 서류봉투를 눈짓했다. 거기에는 슬비가 미리 준비한
지수는 사무실 문 앞에서도 도진과 수진의 적나라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도진의 목에 팔을 감으며 지수를 반히 쳐다봤다. 도진은 그런 수진을 보며 한 번 씩 웃고는, 손으로 수진의 허리를 쓸며 차갑게 지수를 쳐다봤다" 왜 왔어? 여기가 니가 오고 싶으면 오는 놀이터야?"지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진이 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지수는 도진의 물음에 대답대신 들고 온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툭 던져두고 차갑게 돌아서려했다. 그런 지수
A국에 도착한 슬비는 K국과 다른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박진우씨 맞으신가요? 저는 GS그룹의 박슬비라고 합니다. 제안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런데 만날수 있을까요?"갑작스러운 전화에 진우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GS? 내가 아는 그 GS 맞아? 그 큰 회사에서 나를 왜?'라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피싱 아닌가요? 요즘도 이런 사기에 걸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하며 거칠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슬비는 황당한 표정으로 끊어진 전화를 한참 보다가 진우에게 메세지와 자신의 명함을 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