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MELDEN라운지에서 지수를 마주한 이후, 수진의 행동은 한층 과감해졌다. 그녀는 마치 지수의 일과표를 훔쳐보기라도 한 듯, 지수가 산책을 나서는 시간에 맞춰 세 살 난 현지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수진은 지수와 스쳐 지나갈 때마다 보란 듯이 발걸음을 늦췄다. 그러고는 아직 완연하지는 않지만, 옷감 위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며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15주. 생명의 태동을 준비하는 그 손길은 지수에게는 그 어떤 비수보다 날카로운 조롱이었다. 지수의 말투와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우아한 척 현지를 챙기는 수진의 가증스러운 연기는 매일같이 지수의 안식처를 더럽혔다.지수는 그 천박한 도발에 반응하는 대신, 계획보다 빠르게 독립을 준비했다. ‘포스트 빌리지’는 지수에게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도진과의 신혼을 시작했고, 자신의 커리어를 묻었으며, 끝내 아이를 지키지 못한 채 홀로 앓아야 했던 애증의 공
수진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온기에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병원의 창백한 하얀 천장이었다. 그와 동시에 시향회 계단에서 허공으로 휘청였던 끔찍한 감각이 되살아났다.“내 아이……!”수진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왼손을 뻗어 자신의 아랫배를 다급히 움켜쥐었다. 손바닥 끝에 평소처럼 살짝 부풀어 오른 배의 감촉이 느껴졌다. 안도감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수진의 비명에 곁을 지키며 쪽잠을 자던 도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어 왔다.“수진아, 괜찮아. 아이도 너도 모두 무사해. 정말 천만다행이야.”수진은 마치 세상에 단 하나 남은 구원을 발견한 사람처럼, 떨리는 손으로 도진의 손등을 맞잡으며 그와 눈을 맞췄다. 눈물로 젖은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그럼 됐어요. 당신과 나의 아이가 무사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요.”자신의 안위보다 아이를 먼저 챙기는 수진의 헌신적인 모습에 도진의 가슴은 난도질당했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를 찔렀다.“내가 미안해. 내가 너를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어.”“아니에요, 도진 씨. 내가…… 내가 고집을 피워서 그곳에 갔기 때문에 생긴 일인걸요. 도진 씨 말을 안 들은 내 잘못이에요.”수진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도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가련함을 극대화하는 수진의 모습은 도진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도진의 의식 속에서 두 여자의 잔상이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아이의 생사조차 불투명했던 검사실 앞, 자신의 아이가 맞느냐며 매몰차게 다그치고 모든 책임을 도진의 방탕함으로 돌리던 지수의 서늘한 얼굴. 그와 반대로 자신의 품에 무너
시향회장에서 달려온 지수의 손발은 차게 식어 있었다. 하지만 손바닥만큼은 타는 듯 뜨거웠다. 지현이 준 하얀 손수건이 칭칭 감겨 있었지만, 그 너머로 번져 나온 선혈은 이미 붉은 꽃이 되어 하얀 천을 적시고 있었다.응급실 복도. 도진은 피 묻은 셔츠 차림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선고받은 사람처럼, 텅 비어버린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수진 씨는…….”지수의 목소리가 닿는 순간, 도진의 눈에 서려 있던 절망은 순식간에 증오의 불길로 타올랐다. 그는 짐승처럼 포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가 감히, 무슨 자격으로 수진이를 찾아!”도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지수의 어깨를 낚아챘다.“우리의 아이를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제 수진이 아이까지 죽이려고 해? 현지도 모자라서! 아직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아이였어, 이 독한 여자야!”날 것 그대로의 폭언이 지수의 얼굴에 쏟아졌다. 지수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려 했지만, 도진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진의 다이아몬드 반지에 찢겨 너덜너덜해진 지수의 손을 부서뜨릴 듯 꽉 쥐었다.“악!”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도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수의 상처 난 손바닥을 짓이기며 소리를 질렀다.“그런 임산부를 계단에서 밀어? 네가 아이를 못 갖는다는 질투를 이런 식으로 나타내면 안 되지! 만약, 만약에 그 애가 잘못되면 너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널 가만둘 줄 알아?”지수는 비명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통증 너머로 도진의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했다. 삐뚤어진 넥타이, 핏자국이 튄 셔츠, 그리고 비겁함으로 가득 찬 눈동자.“강도진, 네가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가 뭐야?”지수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얼음물이라도 끼얹은 듯 도진의 이성이 돌아왔다. 지수가 차갑게 말
수진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위층 휴게실로 향하는 지수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파티장의 소음이 멀어지고 정적이 감도는 복도 끝, 지수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켜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수진은 샴페인 대신 노란 사과 주스가 담긴 잔을 쥔 채, 보석이 박힌 힐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성큼성큼 다가갔다."이지수 씨, 즐거워 보이시네요. 사모님들 비위 맞추는 솜씨가 아주 보통이 아니던데요?"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지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수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수진을 담아냈다. 그 무심한 시선이 수진의 열등감을 더 날카롭게 자극했다."비위를 맞춘 게 아니라 안목을 나눈 겁니다." "안목? 웃기지 마. 네가 가진 그 모든 게 다 도진 씨 덕분인 거 잊었어? 자기 새끼가 없어 남의 새끼 뺏으려는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마."수진은 한 발짝 더 다가가 지수를 몰아세웠다. 그녀는 일부러 비어 있는 왼손으로 자신의 배를 소중하게 감싸 쥐며, 지수의 가장 아픈 구석을 잔인하게 헤집었다. 하지만 지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수진의 위아래를 훑었다."역겨운 건 내가 아니라, 남의 자리를 가로채고도 불안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당신이죠. 당신이 입은 그 화려한 드레스가 오늘따라 참 무거워 보이네." "뭐…?" "도진 씨는 오늘 알았을 거야. 당신이 아무리 치장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천박함을. 그래서 당신이 아닌 나를 본 거고."지수의 말이 비수처럼 수진의 심장에 꽂혔다. 분노로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수진은 지수를 밀칠 듯 손을 뻗었지만, 지수는 가볍게 그 손을 피해 계단 위로 한 걸음 올라갔다."그만해. 여기서 더 추해지면 나도 도와줄 방법이 없으니까."지수가 등을 돌려 가려는 찰나, 수진은 제어할 수 없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지수의 어깨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급하게 몸을 틀던 수진의 높은 굽이
시향회 후, 본격적인 친목의 시간이 다가왔다. 파티장 내부에는 '러빙유'의 잔향과 최고급 샴페인의 기포가 뒤섞여 기묘하고도 화려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민수의 팔짱을 낀 채 도진을 흘깃거리던 수진은 서운함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도진은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물급 인사들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사업적 환담을 나누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결국 참다못한 수진이 샴페인 잔을 든 채 도진에게 다가갔다. 도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오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수진은 오히려 턱을 치켜세웠다. 저 멀리서 다른 부인들과 우아하게 대화를 나누는 지수의 시선을 의식한 탓이었다. 수진은 보란 듯이 도진의 곁으로 파고들어 그의 손에 샴페인 잔을 쥐여주었다."강 대표님, 오늘 시향 정말 좋았어요. 도진 씨의 감각은 역시 최고예요. 사실… 다음 제품은 저도 조향사로 참여하고 싶네요."도진은 곁에 있던 파트너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파트너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조향사였습니까? 제가 이 분야 인맥이 좁아서 몰랐군요." "디자이너가 본업이긴 하지만 조향에도 관심이 많거든요. 도진 씨 곁에서 돕고 싶은 마음이 커서요."수진이 도진의 팔뚝을 은근하게 쓸며 대화를 독점하려던 찰나, 여성치고는 낮으나 또렷한 발음과 부드러운 음색의 목소리가 흐름을 끊었다. "강 사장님, 오늘 시향회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화려한 드레스 일색인 파티장에서 홀로 은은한 광택이 도는 올 화이트 실크 수트를 입은 젊은 여성이 서 있었다. 날카롭게 재단된 실루엣은 냉철한 카리스마를 극대화했고, 소매 끝으로 살짝 드러난 골드 스퀘어 워치는 묵직한 자본의 위엄을 과시했다."싱가포르에서 '블루오션'이라는 투자사를 운영하는 사라 첸입니다."사라는 자신의 블루 티타늄 명함을 꺼내 도진에게 내밀었다. 레이저로 각인된 푸른 금속 명함
‘러빙유’ 시향회 전날, 수진의 거실에는 리버파크에서 공수해 온 ‘밤바다’ 드레스가 위용을 자랑하며 걸려 있었다. 드레스를 확인하러 온 도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우리 옷이 아닌 건 아쉽지만, 이제 이 정도는 알아서 잘 준비하네. 내가 따로 챙길 필요가 없겠어.”그의 말투에는 자신의 안목을 닮아가는 수진에 대한 기특함과, CB의 옷이 아니라는 점에 대한 미묘한 불쾌감이 공존했다. 수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진의 허영심을 영리하게 파고들었다.“필요 없다니 무슨 말이야. 전부 도진 씨가 가르쳐 준 것들이잖아. 그리고 나도 디자이너야. 설마 내게 드레스 보는 안목이 없겠어? 그리고 CB의 드레스는…… 평소에 당신이 직접 골라서 보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게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까.”도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수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수진은 그의 품에 안겨 달콤하게 미소 지었지만, 도진의 어깨 너머를 응시하는 눈빛만은 얼음처럼 차갑게 빛났다.시향회 당일. 수진은 아침부터 전쟁을 치르듯 자신을 가꿨다. 오늘 시향회의 주인공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어야 했다. 시간 맞춰 도착한 민수는 다이아몬드 세트와 밤바다 드레스로 무장한 수진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오늘 너무 힘준 거 아냐? 누가 봐도 주인공은 너겠어.”민수는 짙은 밤색 벨벳 재킷에 타이를 매지 않은 여유로운 차림으로 수진을 에스코트했다. 파티장에 들어서는 순간, 수진은 승리를 확신했다. 입구에서 손님을 맞던 지수가 먼저 수진을 발견하고 도진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카키 그레이 드레스를 입은 지수의 수수한 모습에 수진은 더욱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지수의 손짓에 고개를 돌린 도진의 안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진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수진의 팔을 다정하게 감싸 안는 척하며 그녀를 전시장 구석의 어두운 복도로 끌고 갔다.
서재의 공기는 무겁고도 달콤했다. 도진은 일주일 뒤로 다가온 신상 향수 ‘러빙유’ 시향회 준비를 위해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수진이 얇은 슬립 차림으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훅 끼어드는 진한 장미 향에 도진의 펜 끝이 멈췄다."이 파티, 나도 가면 안 돼? 당신이 만든 작품, 나도 제일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도진은 고개를 돌려 수진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이어진 목소리는 비즈니스만큼이나 냉정했다."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임원들부터 거래처까지 전부 지수가 내 부인인 걸 알아. 너를 데려가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어? 망신당하고 싶지는 않아."수진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물러나려는 찰나, 도진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 제 무릎 위에 앉혔다."대신 파티 끝나고 열리는 경매, '블레싱 나이트'에 가자."도진이 건넨 것은 블랙과 골드가 조화된 우아한 초대장과 한도 없는 카드 한 장이었다."이번 드레스 코드는 '미드나잇 블루 앤 실버(Midnight Blue & Silver)'야. 잊지 마."수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평생 손에 쥐어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최상류층의 전유물.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서운함은 카드 한 장에 눈 녹듯 사라졌다. 하지만 문을 닫고 나오는 수진의 눈빛은 이내 독기로 번뜩였다. 도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아이까지 가진 건 자신인데, 공식적인 옆자리는 언제나 지수의 것이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수진은 곧장 도진의 친구이자 바람둥이로 유명한 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민수야, 파티에 나 좀 데려가 줘. 앞으로 도진 씨랑 그런 자리 자주 다닐 것 같아서 미리 익혀두려고." "너를? 도진이 아내는 지수 제수씨잖아. 나 도진이한테 뒤지게 혼나는 거 아냐? ...뭐, 네가 책임진다면야. 나도 혼자 가기 심심하던 차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