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6화.

Author: 릴리박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4 08:50:00

6화.

다음날.

작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 은별은 카페로 향했다.

어리디어린 너에게 더는 수줍어하는 우스운 꼴은 보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런데 그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리디어린 여자가 은별을 맞았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한 발랄함이 물씬 풍기는 얼굴이었다.

“어서 오세요.”

은별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남자를 찾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가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있으니 걱정이 먼저 들었다.

“저기, 직원이 바뀐 건가요?”

“아, 아니요.”

다행이었다. 알고 보니 어리디어린 여자는 그와 함께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일 뿐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짧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은별은 새로 온 아르바이트생에게 저의 복잡한 커피 메뉴얼을 말하고 싶지는 않아 평범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테이블에 앉아 작업을 준비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을 때였다.

남자가 손에 봉투를 들고 카페로 들어왔다.

은별은 이어폰을 꽂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싱긋 웃는 싱그러운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이어폰을 귀에 꽂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그에게 인사하려는 순간,

“오빠, 밖에 많이 추웠지?”

어린 여자가 그에게 살갑게 다가가더니, 그의 손에 들린 봉투를 건네받았다.

그의 시선이 금세 어린 여자에게 향했다.

“아니, 괜찮았어. 배고플 텐데 커피랑 마셔.”

“내가 갔다 온다니까.”

“어차피 나도 편의점에서 살 것도 있었어. 그런데 넌 아침부터 그렇게 단 게 입에 들어가?”

“응.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이야.”

남자가 어린 여자의 말에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커피 그라인더를 작동시켰다. 어린 여자가 그의 행동에 반색했다.

“내 커피 내려주게?”

“응.”

“훗. 연하게 해줘. 진하게 마시면 심장 떨리니까.”

어린 여자의 말에 피식하고 웃는 남자의 모습이 무척이나 생동감 있어 보였다.

은별은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리는 게 괜히 싫었다. 이어폰을 마저 꽂고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언제나 부드럽게 고막을 두드리던 불어가 오늘따라 비명처럼 귀 안을 마구 때리는 듯했다.

여전히 불편한 손가락을 치켜들고 타이핑 치는 것에 몰두했다. 기필코 오늘은 이 작업을 마무리하리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두어줄 작성 했을까.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그가 저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 타이핑을 치던 그녀의 손이 잘게 떨리면서 방향을 잃었다.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타탁!

쓸데없이 방향키만 위아래로 누르고 있는 고은별. 심장이 방방 뛰었다.

탁탁!

엔터키를 사정없이 두드리며 떨리는 마음을 감추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 그녀 앞에 트레이가 놓였다.

에스프레소 더블, 얼음물, 스틱 설탕 2개, 초콜릿.

아침부터 단 게 입에 들어가냐며 어린 여자에게 묻던 그는, 저를 아침부터 설탕 속에 파묻혀 사는 여자로 아나 보다.

무엇보다 그녀는 조금 전 평범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었다. 그런데 에스프레소라니.

남자가 가져온 음료는 그녀의 주문을 깡그리 무시한 처사였다.

그녀의 시선에 초콜릿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다. 이곳에서 팔지 않는 초콜릿이 왜 항상 자신의 트레이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일까.

은별이 시선을 들어 제 앞에서 선 남자를 올려다봤다.

저를 향해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유리잔 안, 얼음처럼 청량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손, 괜찮아요?”

“아, 네. 덕분에. 고마워요.”

“타이핑 치기 불편하지 않아요?”

“조금.”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네? 뭘요?”

은별은 그의 말에 살짝 미간을 구겼다.

대체 뭘 도와준다는 거지?

“이어폰으로 듣고 말만 하세요. 타이핑은 제가 대신 쳐 드릴게요.”

은별은 잠시 고민했으나, 분명한 건 남자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요?”

“당연하죠. 그럼, 옆에 앉아도 될까요?”

은별은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카운터의 어린 여자에게 향했다.

은별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옆에 앉아도 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자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곧장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별은 설탕이 들어간 달콤한 에스프레소로 입을 한번 축이곤 남자를 힐끗 보았다.

“…!”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와 눈이 마주쳤다.

후우…. 속으로 숨을 쉬고 다시 한번 에스프레소로 입을 축였다.

진정하고 일을 해야 했다.

은별은 서둘러 오디오 파일 재생 버튼을 눌렀다.

조금 전까지 비명처럼 들리던 불어가 감미로운 재즈처럼 그녀의 귀를 휘감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포화 상태인 유럽 시장을 벗어나서 중국 및 시장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한국을 주요 타겟으로 하는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다. 단순한 마케팅이 아닌 고객의 개인별 니즈를 파악해….”

남자의 타이핑 치는 속도가 속기사처럼 빨랐다.

은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타이핑 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

“왜요? 제가 너무 느려요?”

“아, 아니요. 그 반대로 너무 빨리 쳐서 사실 좀 놀랐어요.”

“아… 저 평일엔 타이핑 치는 게 일이에요.”

“네?”

그럼 혹시 너도 나처럼 이런 일 하니? 묻고 싶었다.

“평일엔 시나리오 쓰거든요. 저 시나리오 작가예요.”

“시나리오? 와, 멋지다!”

그녀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은별의 반응이 흡족했는지 남자가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전, 손님이 더 멋진데요? 기자잖아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하는 남자를 보며 은별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율주행 차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 소비자를 위한 우리 기업의 목표입니다.”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은별이 번역을 마쳤다.

“끝났어요.”

“또 할 거 없어요?”

“없어요.”

“난, 있는데. 불어로 ‘당신 멋있어’를 어떻게 말해요?”

“뭐?”

남자의 질문에 순간 놀라서 튀어나온 반말이었다.

은별은 그에게 답할 대답보다, 이 순간 어린 남자에게 홀리지 않으려면 강력한 각성제가 필요했다.

즉, 카페인이 필요했다.

이미 에스프레소는 다 마셔버렸고, 눈앞에 초콜릿이 보여 입에 넣었다. 진한 달콤함이 뇌를 자극하며 혼란했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나 그것도 잠시.

머릿속은 금세 복잡해졌고, 간신히 잠재워 놓았던 심장은 빨리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빨리 뛰다니, 대체 무엇 때문에?

그래, 이 모든 것은 갑자기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하는 초콜릿 때문이리라.

남자의 시선이 제 입술에 머무는 착각이 들었다.

“당신 멋있어.”

“쿠, 쿨럭!”

“어? 괜찮아요?”

“쿨럭! 괘,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심장이 떨리다 멎을 지경이다.

찐득한 액체로 녹아든 초콜릿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다 걸려버렸다.

은별은 정신을 차리려 얼음물을 마시곤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흠흠. Tu es superbe.”

“네?”

“불어로 말해 달라면서요. ‘당신 멋있어’.”

“와… 방금 목소리, 너무 섹시했어요.”

“…!”

은별이 잠시 당황하고 있던 그때, 남자가 그녀를 향해 몸을 정면으로 틀었다.

이윽고 그 촉촉한 입술을 천천히 벌린다.

“Tu es superbe.”

분명, 이 남자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요물이 아닐까.

은별은 바보처럼 넋이 나가버렸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4화.

    164화.진료실을 나온 두 사람은 집으로 향했다.시간은 오후를 훌쩍 넘어있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은별은 곧장 2층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많이 피곤해?”재훈이 누워있는 은별을 살피며 물었다.“조금….”피곤하다기보다 반짝이의 심장 소리를 듣지 못해선지 기운이 없었다.“잘래?”“응. 그런데 여보는 내일부터 회사 출근하는 거지?”은별이 졸린 표정으로 물었다.“당신이 원하면 당분간 회사 안 나가려고.”“그래도 돼?”“안 될 게 뭐 있나. 회사 망하면 또 차리면 되지.”“뭐야, 훗. 이상한 말 할 거면 나 잘래.”은별은 재훈의 장난말에 빙긋 웃고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그래, 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2주 뒤에 반짝이가 쿵쾅쿵쾅하며 인사할 거야, 분명히.”재훈은 은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가 깊은 잠이 들 때까지 그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늦은 저녁.은별이 눈을 떴을 때 재훈은 제 옆에서 몸을 엎드린 채로 자고 있었다.고개는 은별을 향해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오늘 산부인과에서 받은 반짝이의 초음파 사진이 있었다.그 초음파 사진이 그의 얼굴 쪽에 놓인 것을 보니, 아마도 한참을 들여다보다 그도 모르게 잠이 든 것 같았다.은별은 몸을 일으켜 앉아 재훈의 얼굴에 있는 안경을 살며시 빼내었다. 그러곤 안경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자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순둥이 강아지 같았다.26살에 아이 아빠가 된 정재훈을 은별이 찬찬히 훑었다.일주일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은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씻고, 입고, 먹는 것- 며칠 못가 재훈은 아주머니 앞에서도 은별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심지어 그녀가 잠드는 순간까지 함께하면서 은별을 보살폈다.반짝이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잘 때는 자장가를 불러줬는데, ‘반짝반짝 작은 별’만 끊임없이 불러대 종국엔 은별이 귀를 막는 사태까지 다다랐다.그제야 재훈은 자장가를 바꿨다.그 바뀐 자장가가 ‘Twinkle Twinkle Little Star’였다.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3화.

    163화.“방금 너도, 아니 여보도 쓰레기통에 치약 던졌잖아. 그거 다 내 눈을 통해서 반짝이가 보는 거야.”“아… 미안, 앞으론 나도 안 그럴게.”쪽, 재훈의 입술이 은별의 볼에 닿았다 떨어졌다.재훈이 은별을 돌려세워 저를 보게 했다.그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맞닿았다.재훈이 그윽한 눈으로 은별을 내려다보았다. 은별 또한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은별아.”“응.”“좋은 남편 되도록 노력할게. 간혹 실수할 때가 있겠지만, 내 진심은 아니야. 내가 당신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알지?”“응, 나도 이제 여보한테 거짓말 안 할 거야.”“진짜?”재훈은 못 믿겠다는 얼굴로 일부러 과장되게 눈을 키우며 물었다.“진짜야. 좋은 아내, 좋은 엄마 되도록 노력할게. 약속해.”“와, 밥 안 먹도 배부르다.”“사랑해, 여보.”은별이 재훈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사랑을 고백했다.“갑자기 훅 들어오지.”재훈이 은별의 허리를 감쌌던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담았다.이번엔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두 입술이 부드럽게 뭉개지며 하나가 되었다.재훈의 혀가 은별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한데 은별은 좀처럼 입술을 다문 채 열어주지는 않았다.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재훈이 은별에게서 입술을 뗐다.“왜 안 열어줘?”“키스하다가 구역질하면 어떡해.”걱정과 부끄러움이 섞인 얼굴로 은별이 말했다.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재훈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더니, 다시 제 손안에 은별의 얼굴을 가뒀다.“깊게 안 들어가. 살짝만 넣을 거야.”그 말과 동시에 다시금 재훈이 은별의 입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다행히도 이번엔 은별이 문을 열어주었다.재훈은 정말 달아오르는 혀를 살짝만 넣었다 빼고는 은별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골고루 혀로 핥더니, 아쉬운 듯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짝 집어넣었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간질 맛 나는 모닝 키스를 마무리했다.짧은 키스만으로도 은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재훈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2화.

    162화.다음날, 아침.어제 은별이 쏟아냈던 눈물의 양이 작은 샘물을 이룰 정도로 많았다.퉁퉁 부운 눈으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은별은 혼자가 아니었다.재훈이 그녀를 고요하면서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깼어?”은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재훈이 말했다.그는 씻었는지 말끔한 모습이었다. 말끔한 얼굴과 다르게 옷은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어. 출근, 안 했어?”의아한 눈빛으로 은별이 물었다.“응, 당분간 안 하려고. 반짝이랑 당신 안정될 때까지.”“그래도 괜찮아? 요즘 계속 바빴잖아.”“내가 대표인데, 이 정도 시간 못 뺄까. 걱정 마.”재훈은 은별의 둥근 이마에 키스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그때.똑. 똑.“식사하세요.”김 여사가 두 사람에게 아침을 먹으라고 말했다.재훈은 곧 내려가겠다고 대답한 후 은별을 데리고 욕실로 향했다.“내가 당신 씻겨줄게.”은별의 목에 수건을 걸어주며 재훈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괘, 괜찮아. 내가 할게.”은별은 순간 네 살짜리 어린아이 대하듯 저를 대하는 재훈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허락해 줘. 어차피 다음 주부터는 나도 출근해야 해. 그러면 이런 시간 갖기 힘들잖아.”옆으로 길게 뻗은 눈가를 접으며, 정재훈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훗, 알겠어. 그 대신 세수까지만.”재훈의 즐거운 표정을 보니, 이러다간 그녀의 이까지 닦아줄 기세였다.“아쉽지만, 오케이.”곧이어 재훈은 부드러운 손길로 은별의 세안을 시작했다.은별이 자연스레 두 눈을 감았다.갓 태어난 아기를 다루듯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오른쪽으로 한번, 왼쪽으로 한번 훑고 지나갔다.그 순서를 두어 번 반복하더니, 수건이 묶여 있는 목 부분을 마지막으로 닦아내었다. 이윽고 재훈은 은별을 저를 보게 돌려세웠다.수건을 풀어 물기가 묻은 그녀의 얼굴을 톡톡 하며 가볍게 닦아냈다.그의 손길은 상당히 능숙하고 정성스러웠다.“다 됐다. 뽀송뽀송해졌어.”“고마워.”“어디 보자.”“눈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1화.

    161화.재훈이 은별을 부축하듯 껴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현관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김 여사가 반갑게 맞았다.병원을 나서면서 재훈은 김 여사에게 자신과 은별이 같이 들어가니 식사를 차려달라 미리 말한 터였다.“오셨어요? 제가 저녁밥 따뜻하게 지워놨어요.”“네, 잘 먹겠습니다. 아주머니, 오늘은 이만 퇴근하셔도 돼요.”재훈이 김 여사에게 말했다.“벌써요?”김 여사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퇴근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오늘 이래저래 수고가 많으셨잖아요.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아, 네, 사장님. 근데 사모님, 괜찮으세요? 안색이….”김 여사가 힘없이 재훈에게 기대어 있는 은별을 보며 물었다.분명 오후에 외출할 때까지만 해도 안색이 밝았던 은별이었다.한데 저녁이 다 된 시간에 들어온 은별은 멍한 시선으로 기운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이 사람이 좀 피곤해서 그래요.”재훈이 대신 대답했다.김 여사는 안쓰러운 얼굴로 은별을 보며 편히 쉬라는 말을 하고는 곧장 퇴근을 했다.재훈이 은별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음식 따뜻할 때 뭐 좀 먹을래?”“…응.”은별은 딱히 음식 생각이 없었으나,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잠시 뒤.두 사람이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재훈은 항상 하던 대로 은별의 밥 위에 반찬들을 올려주었다.그렇다고 예전처럼, 강요하지는 않았다.은별에게 먹고 싶은 반찬을 물어보고 괜찮다고 하면 밥 위에 올렸다.은별은 속이 좋지 않았으나, 그것 또한 아이가 제 안에 존재한다는 의미였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밥을 먹었다.그 모습을 재훈이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그 또한 초음파에서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이 큰 게 사실이었다.한데 의사에게 ‘유산’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그동안 자신이 은별의 몸을 함부로한 것에 대한 심한 죄책감이 몰려왔다.불과 어제만 해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양껏 은별을 가졌었다.아이가 놀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60화.

    160화.“당신이 무슨 말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 당신도 아이도 절대 포기 안 해.”“재훈아, 그런 거 아니야.”“아니야? 진짜야?”은별의 말에 재훈은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화색이 돌았다.그는 은별이 아이를 포기한다고 말할까 봐, 더는 말을 하지 못하게 끊어냈었다.그 말을 듣게 되면,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도 무슨 짓을 할지 몰랐으니까.재훈은 스스로가 두려웠다.“정말 그런 거 아니야. 나, 아이 포기하지 않아. 그런 걱정, 하지 마.”은별의 확답을 듣자, 재훈은 솟구치는 안도감에 와락, 은별을 껴안았다.“하아, 다행이다. 다행이야, 하아….”은별은 재훈의 어깨 위로 턱이 들린 채 그가 연신 쏟아내는 안도의 숨을 느꼈다.사실 그녀는 재훈에게 어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고백하려 했었다.어제부터 임신을 알고 있었다고.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서 너에게 잠시 숨긴 것뿐이라고.아이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재훈아.”“어….”그가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로 대답했다.“파리에서 일, 숨기고 사라져 버렸던 거 미안해.”“….”“너랑 결혼한 사실,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네가 아이 빨리 갖길 원했었는데, 같은 마음이 아니었어서 미안해.”“….”“여보, 아무래도 나, 아이 가진 것 같아.”“…!”은별을 품에 안고 있던 재훈은 그녀의 마지막 고백에 놀란 눈으로 그녀와 마주 보았다.안경 너머 수려하게 뻗은 아름다운 재훈의 눈이 은별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가, 이내 흐릿해졌다.멈출 줄 모르는 눈물이 흘러내려 그녀의 얼굴을 순식간에 적셨다.이 고백이 이리도 어려웠을까.은별은 더는 제 남편, 정재훈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아이를 위해서라도.좋은 엄마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제 뱃속의 아이에게 문제 앞에 회피하고 거짓을 말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아이의 아빠인,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정재훈을 위해서라도.재훈아, 우리가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사실

  • 가지 마, 내 허락 없이   159화.

    159화.재훈은 은별을 찾기 위해, 일부러 편의점에 차를 주차해 놓고 집으로 가는 인도를 빠르게 올라갔다.고급 빌라의 주택 단지라도 중간중간 골목들이 있었다. 그 골목 곳곳을 매의 눈으로 살피며 올라갈 때였다.그의 눈에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인도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을 묻고 우는 여자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자신의 아내, 고은별이었다.왜 저렇게 세상이 다 무너진 것처럼 울고 있는 것일까.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가 임신한 상태일 수도 있다는 것을.그래서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일까.원하지 않은 아이가 생겨서….엄마도 저를 가졌을 때 저렇게 울었을까.원하지 않은 아이, 정재훈을 가져서.우느라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도 모르는 아내, 고은별을 보며 재훈은 자신의 엄마를 덧씌웠다.아버지랑 살면서 평생 행복하지 못했던 엄마.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엄마가 원하는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서였다.결국에 엄마는 자신이 원하는 사랑의 모양을 찾아 떠났고, 사랑을 잃은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었다.그리고 자신은 미운 오리 새끼가 되었다.미운 오리 새끼는 나 하나로 충분해.내 아이에겐 절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할 거야.그렇다면 지금 그가 해야 할 것은, 아버지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이다.아내의 의사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휘둘렀던 남편이 아닌, 아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억압하지 않는 남편.내가 그런 남편이 된다면, 은별은 엄마와 다르게 내 옆에서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우리의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키우면서, 평생 헤어지지 않고 사랑하며 살지 않을까.지금처럼 전혀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고 거짓말하는 행동은 이제 안 하지 않을까.“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거짓말이지.”재훈은 쭈그려 앉아 있는 은별을 일으켜 세웠다.은별은 재훈에게 어깨가 붙들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꽤 오랫동안 앉아 있었기에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윽.”“하아, 안 되겠다. 이러다가 기절하지.”순식간에 재훈은 은별을 들어 옆으로 안았다.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