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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부산 운영 매뉴얼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41:02

부산 2주 운영 매뉴얼 제1항. 매일 밤 9시 영상통화. 공수 30분. 초과 허용.

(작성: 차이현. 검토: 필요 없음. 그래도 갑은 첫날 밤 빨간 볼펜을 들었다.)

파란등대 스튜디오는 바다 앞에 있었다.

사무실 창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들렸다. 12층 창문을 열면 들리는 건 에어컨 실외기 소리였다. 서윤은 첫날 오전 내내 창밖만 봤다. 오태주가 커피를 들고 와서 옆에 섰다.

"좋지예."

"좋네요. 일이 안 될 것 같아요."

"첫 주는 다들 그래요. 둘째 주부터 파도 소리가 안 들려예."

오태주가 커피를 건넸다. 아이스 바닐라라떼. 시럽이 반만 들어 있었다. 얼음은 적었다. 컵 옆면에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였다. 반듯하지 않았다.

'1/2'.

"……이거 어떻게 아셨어요?"

"누가 메일을 보냈어예. 지난주에." 오태주가 웃었다. "'업무 협조 요청의 건'. 본문이 세 줄인데, 두 줄이 커피 얘기였어요. 한 줄은 '부산 바람이 차니 회의실 창문은 오후에 닫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윤은 컵을 내려다봤다. 매뉴얼 제3항이 떠올랐다. '제3항. 아침 커피는 현지 조달. 사전 협조 완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 뜻이었다.

"제가 개발 리드를 뺏어 오려다 실패한 이유를 이제 알겠어예." 오태주가 창문을 반쯤 닫았다. 오후도 아닌데. "업무 협조 요청을 이렇게 쓰는 사람은 못 데려와요. 딴 데 마음이 가 있어서."

일은 금방 궤도에 올랐다. 파란등대 팀은 여섯 명이었다. 다들 바다 게임을 5년 넘게 만든 사람들이었다. 세계관은 탄탄했고, 등대 불빛 연출은 이미 반쯤 만들어져 있었다. 서윤은 거기에 편지를 얹었다.

회의는 순조로웠다. 너무 순조로웠다.

"편지 글자 수는 80자로 할게요."

"네, 좋습니다."

"등대 불빛이 편지를 비추는 시간은 3초로요."

"네, 알겠습니다."

"색 개인화도 넣을게요."

"공수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마 될 거예요."

아마 될 거예요. 서윤은 그 문장에서 멈췄다. 12층이었으면 '아마'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안 돼요'가 먼저 나오고, 이유가 세 개 나오고, 서윤이 반박을 네 개 하고, 팀장이 두 손을 들고, 그다음에 '됩니다'가 나왔다. 그 과정에서 기획이 두 배로 단단해졌다.

"……반대 의견 없으세요?"

파란등대 개발자가 눈을 깜빡였다. "좋은데요?"

"좋은 건 아는데요. 안 되는 부분 없어요? 서버 부하라든가, 글자 수가 많으면 렌더링이 밀린다든가."

"아, 그건 저희가 알아서……."

"알아서 말고, 지금 말해 주세요."

회의실이 잠깐 조용해졌다. 오태주가 구석에서 웃음을 참았다. 서윤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기가 이현이 할 말을 대신 하고 있었다.

첫날 밤 아홉 시, 영상통화가 연결됐다.

화면 속 이현은 12층 자리에 앉아 있었다. 뒤로 불 꺼진 사무실이 보였다.

"아직 회사예요?"

"까치 2차요. 냅킨색 적용 테스트."

"매뉴얼 제6항. 야근 금지. 그거 이현 씨가 쓴 거잖아요."

"그건 서윤 씨용 매뉴얼이에요. 저는 적용 대상 아니에요."

"이중 잣대예요."

"개발자 특권이에요."

서윤은 숙소 침대에 엎드려 턱을 괴었다. 부산에서 첫 반박이었다. 이상하게 숨이 편해졌다.

"회의는 어땠어요?" 이현이 물었다.

"다들 착해요."

"좋네요."

"안 좋아요. 반대를 안 해요. 제 기획에 구멍이 있어도 '아마 될 거예요' 해요."

이현이 화면 너머로 웃었다. 소리 없이. "보고 싶었어요? 반박."

"……반박만요."

"그럼 오늘 몫 드릴게요. 80자는 너무 길어요. 등대 불빛 3초 안에 80자는 못 읽어요."

"다 읽으라는 게 아니에요. 불빛이 지나가면서 스치는 거예요. 한 줄씩."

"그럼 스치는 연출로 기획서에 명시하세요. 안 그러면 개발자가 3초 안에 80자 띄우려고 폰트를 줄여요."

서윤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그 말이 맞았다. 이현은 화면 너머에서 그녀가 타자 치는 소리를 30분 동안 듣고 있었다. 매뉴얼 제1항의 공수는 첫날부터 초과됐다.

둘째 날부터 하루가 비슷하게 흘렀다.

아침에는 '1/2'이라고 적힌 커피가 나왔다. 점심에는 오태주 팀과 돼지국밥을 먹었다. 오후에는 회의를 했고, 서윤은 파란등대 팀에게 반박하는 법을 가르쳤다. 셋째 날부터 파란등대 개발자 하나가 "안 됩니다"를 처음 말했다. 오태주가 박수를 쳤다.

저녁 아홉 시에는 화면이 켜졌다. 이현이 김치찌개를 끓이는 날도 있었고, 두부를 써는 날도 있었다. 두부를 써는 날에는 카메라를 도마 위로 돌렸다. 서윤은 그 화면을 캡처했다. 사진첩에 두부가 쌓였다.

수요일 저녁에는 오태주가 약속을 지켰다. 등대였다.

사무실에서 방파제를 따라 십오 분을 걸으면 빨간 등대가 나왔다. 해가 막 지고 있었다. 등대 꼭대기에서 불빛이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또 한 바퀴. 바다 위로 하얀 띠가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저 불빛이 등대 편지 원본이에요." 오태주가 말했다. "배한테 여기 있다고 알려 주는 거. 말은 못 하니까 빛으로."

서윤은 한참 불빛을 봤다. 말은 못 하니까. 커피 컵의 글씨, 반으로 자른 지우개, 냉장고 속 시럽 병. 그녀는 등대를 향해 휴대폰을 들었다. 불빛이 지나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찍었다. 찰칵.

사진을 보냈다. 설명은 붙이지 않았다.

답은 일 분 만에 왔다.

[이현: 불빛 주기 몇 초예요?]

[정서윤: 그걸 왜 물어요.]

[이현: 등대 편지 연출에 쓰려고요. 실제 주기랑 맞추면 좋잖아요.]

[정서윤: 낭만이 없어요.]

[이현: 사진 저장했어요. 사진첩 맨 위에.]

[이현: 저장하는 게 제 낭만이에요.]

서윤은 휴대폰을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오태주가 옆에서 모른 척 바다만 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 오태주가 말했다. "10초예요. 주기. 전해 주세요."

그리고 매일 밤 열 시 즈음, 두 사람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할머니: 부산 바람 차다]

[할머니: 목도리 해라]

[할머니: 이현이는 밥 먹엇나]

[할머니: 둘다 답해라]

할머니는 두 사람에게 동시에 보내는 법을 완벽하게 익히셨다. 답을 한 사람만 하면 다음 날 아침에 전화가 왔다.

목요일이었다.

아홉 시가 됐다. 화면은 켜지지 않았다.

서윤은 휴대폰을 침대 위에 놓고 기다렸다. 아홉 시 오 분. 아홉 시 십 분. 메신저를 열었다. 마지막 메시지는 저녁 여섯 시였다. '오늘 두부 없어요. 된장만.' 사진은 없었다.

아홉 시 반, 서윤은 먼저 걸었다. 신호가 가다가 끊겼다.

열 시에 할머니 문자가 왔다. '이현이는 밥 먹엇나. 둘다 답해라.' 서윤은 답했다. '저는 먹었어요, 할머니.' 이현 쪽 답은 오지 않았다.

열한 시. 서윤은 창밖을 봤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첫날에는 좋았던 소리가 오늘은 시끄러웠다. 12층 실외기 소리가 그리웠다.

그녀는 매뉴얼을 펼쳤다. 제1항. 매일 밤 9시 영상통화. 공수 30분. 초과 허용. 미달에 대한 조항은 없었다. 작성자가 미달을 상상하지 않은 매뉴얼이었다.

별일 아닐 것이다. 야근일 것이다. 냅킨색 테스트가 밀렸을 것이다. 기획자의 머리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런데 기획자 말고 다른 쪽 머리가 자꾸 다른 문장을 꺼냈다. 설 전에 3주 동안 '계약이니까'만 반복하던 그 사람. 할 말이 있다고 하면 야근이라고 피하던 자기 자신.

그때는 서윤이 피했다. 피하는 쪽은 편했다. 기다리는 쪽이 이런 기분인 줄은 몰랐다. 이 사람은 그 3주를 이렇게 보냈다.

열한 시 사십 분, 휴대폰이 울렸다.

[이현: 서버 장애였어요. 까치 2차 테스트 서버가 본 서버를 건드렸어요. 방금 복구했어요.]

[이현: 미안해요. 제1항 위반.]

[이현: 할머니한테도 답했어요. 된장 먹었다고.]

서윤은 그 메시지를 세 번 읽었다. 숨이 한 번에 빠져나갔다.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가 들었다.

[정서윤: 괜찮아요. 고생했어요.]

그렇게 보내고 나서, 한 줄을 더 썼다가 지웠다. 다시 썼다. 또 지웠다. 결국 보냈다.

[정서윤: 기다렸어요.]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대신 읽음 표시가 떴다. 한참 뒤에야 짧은 한 줄이 왔다.

[이현: 알아요.]

그게 다였다. 서윤은 조금 서운했다. 아주 조금. 더 길게 말해 줄 줄 알았다. 5년 11개월 치를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두 글자였다.

금요일 서윤은 일부러 늦게까지 일했다. 등대 불빛 연출 회의가 길어졌고, 파란등대 개발자가 드디어 두 번째 "안 됩니다"를 말했다. 오태주가 이번에는 박수 대신 치킨을 시켰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밤 열한 시였다. 바닷바람이 찼다. 할머니 말이 맞았다. 목도리를 했어야 했다.

숙소 앞에는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파란 간판. 가게 앞에 파라솔 하나. 테이블 하나, 의자 둘. 회사 앞 편의점과 같은 체인이었다. 서윤은 매일 밤 그 앞을 지나며 일부러 보지 않았다. 보면 서울 생각이 나서.

오늘은 봤다.

파라솔 아래, 의자 하나에 누가 앉아 있었다. 코트 깃을 세우고. 테이블 위에는 남색 텀블러 하나와 복숭아 맛 맥주 한 캔이 놓여 있었다.

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가로등 불빛이 파라솔 천에 번졌다. 서울 회사 앞과 똑같은 번짐이었다. 다른 건 바다 냄새뿐이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손을 들었다. 흔들지 않고, 그냥 들고만 있었다. 서울역 플랫폼에서처럼.

맥주 캔 옆에, 종이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매뉴얼 마지막 장의 사본이었다. 원본은 그녀 가방에 있었다. 공란이던 제7항 자리에 무언가 새로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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