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
(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
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
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
"선배."
"응."
"제 친구 얘기인데요."
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응. 친구."
"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
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으세요."
"아니야. 계속해."
"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
"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
"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
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
"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
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
"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
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
"선배 어떻게 알아요!"
"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
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으로 밀었다. 메모장이었다. 제목은 '친구 관찰 일지'. 항목이 일곱 개 적혀 있었다. 체크 표시가 다섯 개.
"……제 친구가 쓴 거예요."
"친구가 참 체계적이네."
"선배 기준표 얘기 듣고 따라 한 거래요. 근데 항목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모르겠대요. 선배는 열두 개였다면서요."
서윤은 휴대폰을 꺼냈다. 메모장.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작년 11월에 만든 뒤로 한 번도 지우지 않은 파일. 파라솔 아래에서 일곱 번째 항목까지 읽고 멈췄던 파일.
그녀는 파일을 복사했다. 제목을 고쳤다.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양도용)'. 그리고 항목 옆의 체크 표시를 전부 지웠다. 빈 칸 열두 개가 남았다.
"보내 줄게. 친구한테 전해."
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파일을 열어 첫 항목부터 읽었다.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하나. 그 사람 말투를 따라 한 적이 있다."
민지가 멈췄다.
"……'안 됩니다'를 제가 요즘 집에서 해요. 엄마가 설거지하라고 하면요."
"체크."
"둘. 그 사람 없는 회의를 상상하면 편할 것 같은데, 편한 게 싫다."
"……체크요."
"셋. 메신저 알림이 오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한다."
민지는 대답 대신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봤다. 올해 들어 민지가 회의실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린 횟수를 서윤은 알고 있었다. 셋은 서윤과 이현 때문이었다. 나머지 넷은, 이제 생각해 보니 윤재하가 발언할 때였다.
"……선배."
"응."
"이거 다 체크하면 어떻게 돼요?"
서윤은 잠깐 생각했다. 작년의 자기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체크가 다 차는 게 무서워서 들키지 않기로 했다. 3주 동안 '계약이니까'만 말했다. 그러다 영하 오 도의 파라솔에서 겨우 말했다.
"다 체크할 필요 없어." 서윤이 말했다. "일곱 개쯤 체크되면 그냥 말해. 기다리지 말고. 나는 열두 개 다 채우고 나서야 말했어. 넉 달 걸렸어. 그 사이에 상대는 부산 갈 뻔했고."
민지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선배 얘기예요?"
"친구 얘기야."
"선배!"
같은 날 오후, 이현이 서윤의 메신저를 두드렸다.
[이현: 비상계단. 긴급.]
서윤이 비상계단 문을 열자 이현이 계단에 앉아 있었다. 사내 공개 이후로는 올 일이 없던 곳이었다. 그는 난처한 얼굴이었다. 회의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무슨 일이에요."
"윤재하 씨가요." 이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아까 저한테 와서 그러더라고요. '선임님, 제 친구 얘기인데요.'"
서윤은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웃음이 터졌다. 멈추지 않았다.
"웃을 일 아니에요. 저 이런 상담 처음 받아 봐요."
"뭐라고 했는데요, 친구가."
"회의 때 어떤 사람이 말하면 자기도 모르게 노트북을 덮는대요. 반쯤. 그게 왜 그런지 모르겠대요." 이현이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해야 돼요. 저도 5년 동안 왜 그러는지 알면서 덮었는데."
"뭐라고 했어요?"
"'공수 계산해 보세요'라고 했어요."
"……최악이에요."
"알아요. 말하고 나서 알았어요."
서윤은 계단에 앉았다. 이현 옆, 한 칸 위였다. 작년 11월, 제2조가 죽던 날과 같은 자리 배치였다.
"우리가 끼어들어야 할까요?" 이현이 물었다.
"아뇨."
"왜요."
"우리 때 누가 끼어들었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이현이 잠깐 생각했다. "……할머니요."
"할머니는 끼어드신 게 아니라 문자를 보내신 거예요. 사진 달라고."
"그게 끼어드신 거죠."
서윤은 웃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민지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정서윤: 친구한테 전해. 커피 쿠폰 마지막 한 장 있지? 그걸로 커피 사서, 컵에 뭐라도 써서 줘 보라고.]
[민지: 매직으로요?]
[정서윤: 매직으로.]
[민지: 선배 그거 경험담이에요?]
[정서윤: 친구 얘기야.]
다음 날 아침 일곱 시 오십 분. 서윤이 탕비실 문을 열자 민지가 커피 머신 앞에 서 있었다. 한 손에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손에 검정 매직. 매직 뚜껑은 열려 있었고 컵은 아직 하얬다.
"선배, 뭐라고 써요?"
"네 친구가 쓰는 거잖아."
"선배 제발요. 삼십 분째 이러고 있어요. 매직 말라 가요."
서윤은 민지 손에서 컵을 받아 들여다봤다. 하얀 종이컵.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옆면. 작년 가을, 그녀의 컵에 처음 반듯한 글씨가 적혀 있던 아침이 떠올랐다. '시럽 1/2, 얼음 조금'. 그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주문 메모인 줄 알았다. 5년 치의 관찰이라는 걸 안 건 한참 뒤였다.
"길게 쓰지 마."
"왜요?"
"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 짧아야 계속 생각나."
탕비실 문이 다시 열렸다. 이현이 달토끼 머그컵을 들고 들어오다 멈췄다. 매직을 든 민지, 컵을 든 서윤. 그는 상황을 삼 초 만에 파악했다. 공수 계산보다 빨랐다.
"……짧게 쓰세요." 이현이 말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그 사람이 매일 하는 말로요. 자기 말이 컵에 적혀 있으면, 그게 제일 오래 가요."
민지가 이현을 봤다. 서윤도 봤다. 이현은 모른 척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선임님도 경험담이세요?"
"친구 얘기예요."
민지가 매직을 쥐었다. 그리고 컵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서윤은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대신 이현의 머그컵을 봤다. 달토끼가 그려진 컵. 작년 추석 이벤트 기념품이었다. 둘이 편지 글자 수 40자를 두고 제일 크게 싸운 이벤트. 그 싸움의 기념품을 이 사람은 1년째 매일 쓰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요." 이현이 물었다.
"컵이요. 안 바꿔요?"
"안 바꿔요. 기념이라서요."
"싸운 기념이요?"
"싸움 중에 제일 좋았던 싸움이요. 그날 끝나고 편의점에 갔잖아요."
민지가 매직 뚜껑을 닫는 소리가 났다. 탁. 다 쓴 것이었다.
여덟 시 십 분, 윤재하의 책상 위에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놓였다. 개발팀 막내는 이현과 같은 커피를 마셨다. 선임을 따라 하다가 입맛이 굳었다고 했다. 컵 옆면에 둥글둥글한 매직 글씨가 적혀 있었다. 민지의 글씨였다.
'안 됩니다, 저한테는 조금만 덜 해 주세요.'
씨름 방 정보원들에 따르면, 윤재하는 그 컵을 들고 삼 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민지 책상 위에 컵이 하나 놓였다. 아이스티. 컵 옆면에 삐뚤삐뚤한 글씨.
'됩니다.'
서윤은 파티션 너머로 그걸 봤다. 이현도 봤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봤다. 그리고 동시에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서윤의 메신저가 울렸다.
[이현: 두 글자네요.]
[정서윤: 짧은 게 좋은 거예요. 누가 그랬어요, 긴 거절은 핑계라고.]
[이현: 저 부산에서 '알아요' 두 글자 보냈다가 혼났는데요.]
[정서윤: 그건 거절이 아니었잖아요.]
씨름 방 공지가 바뀐 건 그날 저녁이었다.
[방장: 부방장 한민지, 개인 사정으로 부방장직 일시 정지. 본인이 관찰 대상이 됐기 때문.]
[방장: 시즌3 예고. 제목 미정.]
[민지: 방장님!!!]
서윤은 퇴근 전에 팀 공유 일정표를 열었다. 등대 편지 오픈 일정을 확인하려던 거였다. 그런데 9월 칸에 새 일정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차이현. 반차. 추석 연휴 전날 오후.'
사유 칸에는 '개인 사정'. 그 아래 팀장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사유 칸에 개인 사정이라고 쓴 사람은 대부분 부산 가던데.'
그 아래 이현의 답글.
'이번엔 부산 아닙니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