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 37화. 거사 준비위원회

Share

37화. 거사 준비위원회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42:25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

(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

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

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

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

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

[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

[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

[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

[큰이모: 기각]

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

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

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거기서 멈췄다.

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

'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

'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

'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

냅킨이 또 하나 구겨졌다. 반듯하게 접어서 구겼다. 구겨도 반듯한 게 그의 문제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준비위원회였다.

[막내 이모: 장소는 정했냐]

[이현: 네. 회사 앞 편의점 파라솔입니다.]

[막내 이모: 편의점?]

[막내 이모: 편의점????]

[둘째 이모: 막내야 물음표 줄여라. 서윤 엄마 닮아 간다]

[서윤 어머니: 나는 일곱 개다]

[막내 이모: 청혼을 편의점에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호텔 가라. 풍선 달고 현수막 달고]

[이현: 서윤 씨는 풍선 싫어합니다. 현수막 문구는 반드시 검토하려고 할 거고요.]

[둘째 이모: 맞다. 관찰 결과]

[막내 이모: 그럼 반지는. 반지 받을 때 편의점 불빛이 좋냐]

[이현: 편의점 불빛이 제일 좋습니다. 냅킨에 계약서 쓸 때 그 불빛이었어요.]

한참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메시지가 왔다. 할머니는 준비위원회에서 제일 말이 적었다. 대신 제일 무거웠다.

[할머니: 그게 맞다]

[할머니: 시작한 데서 다시 시작해야지]

막내 이모가 답했다. [막내 이모: 네 어르신]. 콩 동맹은 여전히 유효했다.

이현은 냅킨을 한 장 더 펼쳤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준비위원회가 아니라, 할머니와 둘만의 방에.

[이현: 할머니. 기간을 못 쓰겠어요.]

답은 오 분 뒤에 왔다. 할머니는 글씨를 크게 해 놓고 한 글자씩 누르셨다. 받침은 여전히 자주 빠졌다.

[할머니: 무슨 기간]

[이현: 계약서 기간이요. 끝이 없어야 하는데, 끝이 없는 걸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어요.]

[할머니: 바보]

[할머니: 안 쓰면 되지]

[할머니: 아니면 정하지 안는다고 써라]

[할머니: 니 할아버지랑 나는 그런 거 안 정했다. 안 정해서 오십 년 살앗다]

이현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냅킨을 봤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그 뒤의 빈자리.

정하지 않는다.

그는 한참 그 빈자리를 보다가 냅킨을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엔 구기지 않았다. 아직 쓰지 않았다. 쓰는 건 그날, 그 파라솔에서 할 생각이었다. 1년 전처럼. 미리 써 온 계약서는 계약서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써야 진짜였다.

토요일에는 방장 퀴즈가 있었다. 영상통화였다. 화면 일곱 칸에 준비위원회 여덟 명이 떴다. 서윤 부모님은 한 칸에 나란히 앉았다. 큰이모 칸에는 돋보기가 보였다. 할머니 칸에는 천장만 보였다. 카메라 방향을 모르셨다.

"자, 거사 자격 심사를 한다." 큰이모가 말했다. "틀리면 추석은 없다. 설로 미룬다."

"네."

"하나. 서윤이 커피."

"아이스 바닐라라떼. 시럽 반, 얼음 적게. 생각할 때 빨대를 씹어요. 요즘은 덜 씹어요."

"왜 덜 씹는데."

"……생각할 게 줄었대요. 저 때문에."

막내 이모 칸에서 "어머" 소리가 났다.

"둘. 서윤이 싫어하는 음식."

"고사리랑 콩송편이요. 콩자반도요. 깨송편만 먹어요."

"셋. 서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거."

이현은 잠깐 생각했다. "반려요. 기획서 반려. 그리고 누가 자기 일을 대신 해 주는 거요. 그걸 제일 싫어해요. 무시당한다고 생각해서."

화면 속 서윤 어머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옆에 앉은 서윤 아버지를 팔꿈치로 찔렀다. 아버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넷." 큰이모가 돋보기를 올렸다. "마지막 문제다. 서윤이가 먼저 하겠다고 하면 어떡할 거냐."

이현이 멈췄다.

그건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다. 5년 동안 그는 먼저 하는 쪽이었다. 번호를 먼저 저장하고, 메시지를 먼저 보내고, 괄호를 먼저 쓰고, 고백을 먼저 하고.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서윤은 반박하는 쪽이었다. 그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먼저 하겠다고 하면.

"……모르겠어요."

화면 일곱 칸이 조용해졌다. 둘째 이모가 턱을 괴었다.

"틀렸다." 큰이모가 말했다. 그리고 한 박자 쉬었다. "근데 모르겠다고 한 게 정답이다. 안다고 했으면 떨어뜨렸다. 서윤이는 아무도 모르게 움직인다. 우리 집 여자들이 다 그렇다."

서윤 어머니 칸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이현 어머니 칸에서도.

"합격. 추석 거사 허가한다."

퀴즈가 끝나고 서윤 아버지가 따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준비위원회에서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대신 가끔 전화를 했다. 짧게.

"자네."

"네, 아버님."

"여름에 평상에서 한 말."

"네."

"추석 첫날 솔뫼리 올 때, 막걸리 두 병 가져와라."

"두 병이요?"

"한 병은 자네 거. 한 병은 내 거." 아버지가 잠깐 말을 멈췄다.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는 소리가 났다. "대답은 그걸로 하겠다. 그 전에 결과부터 받아 와라."

"……네."

"서윤이는 쉽지 않다. 지 엄마 닮아서."

"알고 있습니다. 5년 동안 봤어요."

전화가 끊기기 직전, 아버지가 말했다. "그래서 자네가 맞다." 그리고 끊었다.

반지는 월요일 저녁에 찾았다. 회사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작은 공방이었다. 11호. 장식 없는 가는 링. 서윤은 반지를 불편해했다. 그래서 제일 얇은 걸로 골랐다. 안쪽에 글씨를 새겨 달라고 했다. 공방 사장님이 새길 문구를 물었을 때 그는 한참 망설이다 대답했다.

'1/2'.

"……이게 뭐예요? 절반?"

"시럽이요."

사장님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반지를 작은 상자에 넣어 줬다. 남색 상자였다.

그날 밤 이현은 집에 가지 않고 회사 앞 편의점으로 갔다.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았다. 첫날 밤 그가 앉았던 자리. 맞은편 빈 의자를 봤다.

주머니 속 남색 상자를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셔츠 주머니 속 냅킨을 한 번 만졌다가 놓았다. 입속으로 첫 문장을 굴려 봤다. 회의 전에 늘 하던 일이었다. 스펙을 읽듯 담담하게. 그런데 이번 문장은 스펙이 아니라서, 자꾸 중간에 걸렸다.

편의점 문이 열리고 직원이 나왔다. 지난달 커피 열 잔을 판 그 직원이었다. 온장고 캔 커피 하나를 테이블에 놓았다.

"오늘은 안 쓰세요? 냅킨."

"……오늘은 연습만요."

"시험 언제예요?"

"추석 전날이요."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파라솔 기둥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렸다. "그날 이 자리 비워 둘게요. 다른 손님 못 앉게. 합격하세요."

이현은 캔 커피를 땄다. 뜨거웠다. 식히지 않고 마셨다. 식혀 줄 사람이 없는 날이었다. 추석 전날부터는 그런 날이 없을 예정이었다.

화요일 아침, 이현은 팀장 자리 앞에 섰다. 반차는 이미 결재가 났다. 이번엔 다른 부탁이었다.

"팀장님. 추석 전날, 서윤 씨 여섯 시 반에는 퇴근하게 해 주세요. 회의 잡히면 빼 주시고요."

팀장이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한참 이현을 봤다.

"……일곱 시에 어디 가는데."

"편의점 파라솔이요."

팀장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봤다. 그리고 낮게 신음했다.

"알았다. 방장으로서 비밀 하나 맡는다."

이현이 돌아서자 팀장은 휴대폰을 열었다. 씨름 방이 아니었다. 개인 메신저였다. 어젯밤에 온 메시지 하나가 맨 위에 떠 있었다.

[정서윤: 팀장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추석 전날 일곱 시요. 회사 앞 편의점 파라솔에 차 선임 좀 보내 주세요. 이유는 묻지 말아 주세요.]

팀장은 두 메시지를 번갈아 봤다. 3년 동안 판을 깔았다. 결말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두 개 올 줄은 몰랐다. 팀장은 책상에 이마를 댔다.

"……하필 같은 시간이냐."

Patuloy na basahin ang aklat na ito nang libre
I-scan ang code upang i-download ang App

Pinakabagong kabanata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40화. 제1조,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9화. 추석 연휴 전날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8화. 역제안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7화. 거사 준비위원회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6화. 구겨진 냅킨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5화. 친구 얘기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

Higit pang Kabanata
Galugarin at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Libreng basahin ang magagandang nobela sa GoodNovel app. I-download ang mga librong gusto mo at basahin kahit saan at anumang oras.
Libreng basahin ang mga aklat sa app
I-scan ang code para mabasa sa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