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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제1조,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42:49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

(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

"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

"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

"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

"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

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

"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

"……저는 쓰레기통이요."

"네?"

"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

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

"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

"무슨 부칙이요."

"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

"……그건 인정해요."

"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

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

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

"청혼 기획서 v1.0입니다."

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

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보면서.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배경. 작년 이맘때, 이 자리. 을이 5년 반 동안 먼저 했다. 번호를 먼저 저장했고, 메시지를 먼저 보냈고, 괄호를 먼저 썼고, 좋아한다고 먼저 말했다. 이번엔 갑 차례."

"목표. 맞은편 말고, 옆자리. 계속."

"기간." 서윤이 한 박자 쉬었다. "정하지 않는다."

이현의 손이 셔츠 주머니 위에서 멈췄다.

"조항은 하나예요.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A4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이현은 그걸 내려다봤다. 한참. 파라솔 아래에서 제1조의 번진 '자정까지'를 보던 것처럼.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추석 밤 작은방에서 휴대폰을 보며 웃던 웃음. 서윤은 이제 그 웃음을 알았다.

"……왜 웃어요."

이현이 대답 대신 볼펜을 꺼냈다. 1년 전 '자정까지'를 쓰다 번진 그 볼펜. 그리고 아이보리색 냅킨을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썼다. 반듯하게, 천천히.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거기서 펜이 멈췄다. 서윤은 알았다. 쓰레기통 속 냅킨이 멈춰 있던 자리였다. 이현이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이어서 썼다.

'정하지 않는다.'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처럼.

이현이 냅킨을 돌려 서윤 쪽으로 밀었다. A4와 냅킨이 나란히 놓였다. 기획서 양식의 인쇄 글씨와 볼펜의 반듯한 손글씨. 같은 문장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서윤은 두 장을 번갈아 봤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알려 주셨어요." 이현이 말했다. "기간을 못 쓰겠다고 했더니, 안 쓰면 된다고. 아니면 정하지 않는다고 쓰라고. 할아버지랑 오십 년을 그렇게 사셨대요."

"……저는요." 서윤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이현 씨 거 베꼈어요."

"제 거요?"

"연애 기획서요. 이현 씨가 쓴 거. '기간: 정하지 않음. 자정 같은 거 없음.' 그거 보고 썼어요. 1월에 이현 씨가 먼저 써 놓은 거예요."

이현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럼." 서윤이 말했다. "이제 마지막 문장이요. 기획서에 안 적었어요. 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 2주 동안 못 정해서요."

서윤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냈다. 아이보리색 상자. 냅킨색. 테이블 위에, A4와 냅킨 사이에 놓았다. 그리고 뚜껑을 열었다.

가는 링 하나. 20호.

"그래서 둘 다 넣을게요." 서윤이 말했다. 이현을 똑바로 보고. 연수 강당에서 원고를 덮던 날처럼.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이현 씨가 이렇게 느낄 거라는 얘기예요."

이현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혼해요." 서윤은 한 박자 쉬었다. "……할래요?"

파라솔 위로 가로등 불빛이 번졌다. 편의점 유리창 안에서 직원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남색 상자였다. 그는 그걸 아이보리 상자 옆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가는 링 하나. 11호.

"……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스펙을 읽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5년 11개월, 아니 6년 반을 들고 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저도요. 결혼해요. 할래요?"

"……둘 다 넣었어요?"

"청유형이랑 의문형. 선택권도 드리고, 확신도 드리고."

"그거 제 거잖아요. 방금 제가 한 거."

"좋은 문장은 오래 가요. 방금 생겼지만."

서윤은 웃음이 터졌다. 터지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네."

둘은 반지를 바꿔 끼웠다. 이현이 서윤의 왼손을 잡았다. 넷째 손가락에 11호가 들어갔다. 딱 맞았다. 둘째 이모의 눈은 1밀리미터도 틀리지 않았다. 서윤은 이현의 왼손을 잡았다. 20호가 들어갔다. 역시 딱 맞았다.

서윤이 반지 안쪽을 봤다.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1/2'.

"……시럽이요?"

"네. 반만. 나머지 반은 제가 채울게요."

이현도 반지를 빼서 안쪽을 봤다. 멈췄다.

'식혀서'.

"……식도 걱정이에요?"

"평생이요." 서윤이 말했다. "아, 기간은 정하지 않는 거죠. 그럼 계속."

서명은 두 장에 다 했다. A4에도, 냅킨에도. 서윤은 크리스마스에 받은 검정 매직으로 썼다. '정서윤'. 굵고, 조금 삐뚤고, 번지지 않았다. 이현은 1년 전 그 볼펜으로 옆에 썼다. '차이현'. 반듯했다. 이번엔 번지지 않았다.

갑도 을도 없었다. 부칙도 없었다. 조항 하나, 이름 둘.

이현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냅킨과 A4와 반지 낀 두 손. 찰칵.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첩 맨 위죠."

"냅킨 사진 위에요. 다음 칸은 없어요."

답은 일 분도 안 돼서 왔다. 두 사람의 휴대폰이 동시에 울렸다.

[할머니: 인자 진짜 됏다]

받침은 끝까지 틀렸다. 뜻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이현의 휴대폰에서는 서윤이 모르던 방까지 폭발했다.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서윤은 그 이름을 보고 한참 웃었다.

[엄마: 상견례 확정?????????]

[큰이모: 물음표 줄여라]

[막내 이모: 반지 사진 올려라. 주선자로서 확인한다]

[둘째 이모: 11호 맞지. 관찰 결과]

[아빠: 막걸리 두 병]

다음 날 아침 씨름 방에 공지가 올라왔다. 방장은 처음으로 공지에 이름을 적었다.

[방장(팀장): '명절 특집 씨름 중계석' 시즌 종료. 최종 결과: 무승부. 둘 다 졌다. 서로한테. 방장은 운다. 방은 닫지 않는다. 신혼 편이 남았다.]

추석 연휴 첫날, 솔뫼리 대문 앞에는 이모 셋과 할머니와 이현 어머니가 나란히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면접관처럼. 다섯이었다.

복실이가 튀어나와 이현 앞에 벌러덩 누웠다. 그 뒤로 털뭉치 셋이 따라 나왔다. 제일 작은 부칙이 이현의 운동화 끈을 물었다.

아빠는 이현이 트렁크에서 꺼낸 막걸리 두 병을 받아 들었다. 한 병을 이현에게 돌려줬다. 그리고 자기 병을 땄다. 한 모금 마셨다. 그게 대답이었다.

"됐다."

점심상에서 막내 이모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제5조. 제출해라."

서윤은 지갑을 열었다. 카드칸에서 냅킨을 꺼냈다. 새것이었다. 아이보리색. 헌 냅킨은 그 옆에 그대로 두었다. 기획자는 이전 버전을 지우지 않았다.

큰이모가 돋보기를 코에 걸쳤다. 그리고 소리 내어 읽었다. 퀴즈를 낼 때의 목소리로. 올해 설에 헌 냅킨을 읽던 목소리로.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

마루가 조용해졌다. 둘째 이모의 젓가락이 멈췄다. 막내 이모가 할머니의 팔을 붙잡았다. 엄마가 행주를 떨어뜨렸다. 이현 어머니가 그 행주를 주워 들었다.

큰이모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돋보기 너머로 서윤을 봤다.

"……서윤아."

"네, 이모."

"이 계약, 언제까지냐?"

서윤은 이현을 봤다. 이현은 서윤을 봤다. 식탁 밑이 아니라서, 둘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로의 손을 찾았다. 반지 두 개가 부딪쳐 작은 소리가 났다.

"정하지 않았어요." 서윤이 말했다. "자정 같은 거 없어요."

큰이모가 돋보기를 벗었다. 그리고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고추장 가져와라!"

그날 밤, 서윤은 평상에 앉아 있었다. 이현이 담요를 들고 나왔다.

"어머님이 갖다 드리래요."

"작년에도 그 말 했어요."

"내년에도 할 거예요."

그는 담요를 서윤 무릎에 덮어 주고 옆에 앉았다.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복실이가 평상 밑에 엎드렸고, 부칙이 이현의 운동화 위에서 잠들었다.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었다. 1년 전 이 평상에서 본 달과 같은 달이었다. 설에는 완전히 비워졌다가, 한 해를 돌아 다시 꽉 찼다. 달토끼 이벤트의 달처럼. 편지 한 통에 한 칸씩.

서윤은 지갑을 꺼내 카드칸을 열어 봤다. 냅킨 두 장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기간이 있는 것 하나. 기간이 없는 것 하나. 카드칸이 꽉 찼다. 더 넣을 자리가 없었다.

더 넣을 필요도 없었다.

"이현 씨."

"네."

"다음 개정안은 언제 올릴 거예요?"

이현이 달을 올려다봤다. 공수를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그만두는 얼굴이 됐다.

"정하지 않았어요."

서윤은 웃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왼쪽 어깨였다. 이번엔 젖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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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 가짜 연애 계약서 제3조   35화. 친구 얘기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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