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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구겨진 냅킨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5 08:42:13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

(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

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

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

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

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

"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

"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

"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

"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

"……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

"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

"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

"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

"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

"누가 그래요?"

"제가 그래요."

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

"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

"네."

"네."

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에 계약서를 썼다. 1년이 거의 다 됐다.

씨름 방에 공지가 올라왔다.

[방장: 시즌3 제1회. 40자 대전 리매치. 발의자와 반대자가 서로 바뀜. 방장은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민지: 방장님 그건 서로 닮아 간다는 뜻이에요]

[윤재하: 부방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방장: 부방장은 일시 정지 중이다. 그리고 너는 발언권이 없다.]

그 주부터 이상한 일들이 생겼다.

첫째. 수요일 저녁, 서윤은 회사 앞 편의점에 들렀다. 복숭아 맛 맥주를 사려고 했다. 계산대 앞에서 직원이 반갑게 말했다.

"아, 그분 여자친구분이시죠. 키 크고 반듯하신 분."

"……네."

"어제 오셔서 냅킨을 사 가셨어요."

"냅킨을요?"

"냅킨은 원래 공짜잖아요. 근데 한 묶음 사고 싶다고 하셔서요. 파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럼 커피 열 잔 사 갈 테니 냅킨 좀 넉넉히 달라고 하셨어요." 직원이 계산대 옆 냅킨 통을 가리켰다. "이걸로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제일 좋대요. 색이 따뜻하다고."

서윤은 냅킨 통을 봤다. 아이보리색. 조금 누렇고, 따뜻하고, 오래된 종이 같은 색. 까치 2차 업데이트 13번째 색.

"……커피 열 잔은요?"

"아메리카노 뜨거운 걸로 열 잔이요. 다 드시고 가셨어요. 파라솔에서. 저녁 내내."

"열 잔을 혼자요?"

"네. 뭘 계속 쓰시다가 구기시고, 또 쓰시다가 구기시고. 제가 치우려고 하니까 가져가신대요. 쓰레기도 반듯하게 접어서요." 직원이 웃었다. "시험공부 하시는 줄 알았어요."

서윤은 복숭아 맛 맥주를 계산하는 것도 잊고 서 있었다. 직원이 봉투를 내밀 때까지.

둘째. 금요일, 둘째 이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서윤한테 온 건 아니었다. 가족 단톡방도 아니었다. 이현의 휴대폰이 서윤 옆에 놓여 있을 때, 미리보기로 떴다.

[둘째 이모: 확인했냐 11]

이현이 휴대폰을 뒤집었다. 너무 빨리.

"……이모랑 개인 톡 해요?"

"가끔요. 둘째 이모님이 동그랑땡 뒤집는 법 물어보셔서요."

"이모가 이현 씨한테 뒤집는 법을 물어요? 이모가 가르친 거잖아요."

"……복습이요."

서윤은 그날 저녁 떠보기로 했다. 퇴근길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추석 전날 반차 쓰셨던데요."

"네."

"왜요?"

"……짐 싸려고요. 솔뫼리 가기 전에."

"출발은 연휴 첫날 아침이잖아요."

"짐이 많아요. 선물 상자도 있고요. 배, 한과, 막걸리."

"그거 작년엔 전날 밤에 두 시간 만에 쌌다면서요."

"올해는 복실이 새끼들 것도 있어서요. 부칙 간식이요."

"부칙 간식 싸는 데 반나절이요?"

"개껌이 반듯하게 안 들어가요."

서윤은 엘리베이터 숫자를 올려다봤다.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느라. 이 사람은 5년 동안 회의실에서 한 번도 말이 막힌 적이 없었다. 공수든, 리스크든, 일정이든. 그런데 거짓말만 시키면 개껌이 나왔다.

"그렇군요." 서윤이 말했다. "부칙이 좋아하겠네요."

"네." 이현이 엘리베이터 문만 봤다. 귀가 빨갰다. "아주요."

셋째. 토요일, 이현의 집.

서윤은 김치찌개를 먹고 설거지를 헹궜다. 이현이 씻고 서윤이 헹구는 합의는 여덟 달째 유지되고 있었다. 이현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 사이, 서윤은 부엌 쓰레기통에 휴지를 버리려고 뚜껑을 열었다.

쓰레기통 안은 반듯했다. 쓰레기조차 반듯하게 쌓여 있었다. 그런데 맨 위에 구겨진 종이가 여러 장 있었다. 이 집에서 구겨진 걸 본 건 처음이었다.

냅킨이었다. 아이보리색. 회사 앞 편의점 냅킨.

서윤은 손을 멈췄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았다. 남의 쓰레기통이었다. 송년회 때 남의 휴대폰을 본 뒤로 그녀는 이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 조심하기로 했다. 그런데 맨 위 냅킨의 구겨진 틈으로 글씨가 보였다.

반듯한 글씨. 볼펜.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거기서 줄이 그어져 있었다. 두 줄로.

서윤은 냅킨을 꺼내지 않았다. 그 아래 냅킨들도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쓰레기통 뚜껑을 천천히 닫았다. 그리고 싱크대 앞으로 돌아가 이미 헹군 그릇을 한 번 더 헹궜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막내 이모의 제5조. 1년 뒤 추석, 이런 걸 새로 써 와라. 냅킨이든 뭐든. 이번엔 기간 없이.

이 사람은 기간에서 막혀 있었다. '본 계약의 기간은' 다음을 못 쓰고 있었다. 그래서 줄을 긋고, 구기고, 다시 쓰고 있었다. 반듯한 사람이 냅킨을 구겼다. 몇 장이나.

현관문이 열렸다. 이현이 돌아왔다. 서윤은 그릇을 세 번째로 헹궜다.

"그거 아까 헹구신 거 아니에요?"

"깨끗하게 하려고요."

"……세 번이요?"

"기획자는 검수를 세 번 해요."

그날 밤 오피스텔로 돌아온 서윤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휴대폰 검색창에 쳤다. '반지 호수 재는 법'.

실로 손가락 둘레를 재는 방법이 나왔다. 서윤은 반짇고리에서 실을 꺼냈다. 왼손 넷째 손가락에 한 바퀴 감았다. 표시를 하고, 자로 쟀다. 표와 맞춰 봤다.

11호.

서윤은 실을 쥔 채 한참 앉아 있었다.

결혼식 뷔페. 둘째 이모의 속삭임. '11이다. 틀림없다.' 열한 번째 접시. 달력 11월에 쳤던 동그라미. 틀린 곳을 보고 있었다. 이현의 생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었다.

둘째 이모는 이현의 키를 눈으로 보고 1센티미터도 틀리지 않았다. 그 눈이 결혼식 내내 그녀의 왼손을 보고 있었다.

반차. 추석 연휴 전날 오후. 이번엔 부산 아닙니다. 편의점 냅킨 한 묶음. 뜨거운 아메리카노 열 잔. 쓰레기통의 구겨진 제1조. 11호.

기획자의 머리가 모든 조각을 한 장의 표로 맞췄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 사람은 추석 전날, 그 편의점 파라솔에서, 냅킨으로 뭔가를 할 생각이었다.

서윤은 실을 내려놓았다. 가슴이 너무 뛰어서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그리고 두 번째 생각이 왔다. 첫 번째보다 조금 늦게, 조금 더 단단하게.

5년 동안 이 사람이 먼저였다. 번호를 먼저 저장했다.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먼저 괄호를 썼다. 먼저 좋아한다고 했다. 먼저 새 계약서를 썼다. 먼저 개정안을 올렸다. 서윤은 늘 받는 쪽이었다. 반박하는 쪽. 검토하는 쪽. 빨간 볼펜을 드는 쪽.

그녀는 노트북을 켰다. 사내 공용 양식을 열었다. 3년 차에 자기가 만든 기획서 양식. 이현이 3년 동안 반려하고, 여덟 달 동안 연애 기획서로 쓴 그 양식.

문서명 칸에서 커서가 한참 깜빡였다. 작년 11월, 기준표 제목 칸에서 그랬던 것처럼. 참고용이라는 말을 붙이면 덜 창피했었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다.

'청혼 기획서 v1.0'.

작성자 칸에 이름을 적었다. 정서윤. 검토자 칸은 비워 뒀다. 이번 기획서는 검토받을 생각이 없었다. 반려당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배경 칸에 커서를 옮겼다.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였다.

'배경: 작년 이맘때, 회사 앞 편의점. 을이 5년 반 동안 먼저 했다. 이번엔 갑 차례.'

그녀는 그 문장을 한참 봤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 사람이 추석 전날 파라솔을 잡았다면, 그녀는 그보다 먼저 가야 했다. 같은 날, 같은 곳에서. 한 발 먼저.

5년 동안 회의실에서 그녀는 이 사람을 이기기 위해 발표를 준비했다. 이번에는 이기려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는, 딱 한 번만 먼저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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