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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파란등대 협업 제안서

Author: Jino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15 08:40:55

협업 제안서 제4조. 기획 담당자는 파란등대 스튜디오 부산 본사에서 2주간 상주한다.

(제안사: 파란등대 스튜디오. 지명 담당자: 정서윤. 개발 리드 지명: 없음. 그 칸만 비어 있었다.)

월요일 오전 열 시, 12층 대회의실.

파란등대 스튜디오 대표는 생각보다 작은 사람이었다. 짧은 머리에 남색 재킷. 악수할 때 손아귀 힘이 셌다. 이름은 오태주였다.

"반갑습니다. 정 기획자님이시죠. 까치 이벤트 잘 봤어예."

말끝에 부산 억양이 묻어 있었다. 서윤은 악수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태주가 다음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걸 봤다. 이현이었다.

"차 리드님." 오태주가 웃었다. "거절 메일 잘 받았습니다. 짧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짧아서 좋았어예. 긴 거절은 대부분 핑계거든요." 오태주가 이현의 손을 한 번 더 흔들었다. "'끝까지 맡아야 할 일'. 그게 뭔지 궁금했는데."

오태주의 눈이 서윤 쪽으로 한 번 미끄러졌다가 돌아왔다. 아주 짧게. 서윤은 그 시선을 봤다. 이현도 봤다.

"오늘 와 보니 알겠네요."

본부장이 헛기침을 했다. 회의가 시작됐다.

제안은 명료했다. 여름 합동 이벤트. 이름은 '등대 편지'. 유저가 편지를 쓰면 바다 건너 등대 불빛이 그 편지를 비춰 상대에게 전해 주는 연출. 파란등대의 바다 배경 게임과 이 회사의 편지 시스템을 잇는 기획이었다.

"편지 시스템은 여기가 제일 잘하시더라고요. 달토끼부터 까치까지. 그래서 기획 담당은 정 기획자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오태주가 서류를 넘겼다. "다만 초기 2주는 부산 본사 상주가 필요해요. 저희 팀이랑 세계관을 맞춰야 해서요. 4월 마지막 주부터."

회의실의 시선이 서윤에게 모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현에게 옮겨 갔다. 이제 이 회사에서 서윤을 볼 때는 이현을 같이 보는 게 습관이었다.

본부장이 서류를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정 선임, 어때?"

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2주. 부산. 좋은 기회였다. 기획자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개발 쪽 공수는?" 팀장이 이현에게 물었다. 시간을 벌어 주려는 질문이었다.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그리고 말했다.

"좋은 조건이면 가야죠."

회의실이 얼었다.

서윤은 그 문장을 알았다. 자기 문장이었다. 작년 12월, 퇴근길 신호등 앞에서 이 사람의 스카우트 얘기를 듣고 그녀가 한 말. '좋은 조건이면 가야죠. 계약은 설까지니까, 상관없고요.' 그 말 한마디에 이 사람은 3주 동안 수락 메일 초안을 붙들고 있었다. 나중에 파라솔 아래에서 들은 얘기였다.

민지가 테이블 밑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이번 분기 들어 세 번째였다.

이현도 알았다. 문장이 입에서 나가자마자 알았다. 그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그는, 5년 동안 회의실에서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했다. 자기 말을 스스로 반박했다.

"……라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작년 겨울에. 저는 그 말 듣고 부산 가는 메일까지 썼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취소할게요. 들으면 사람이 3주를 앓아요."

서윤이 이현을 노려봤다. 본부장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팀장을 봤다. 팀장은 물컵만 봤다.

"근데 이번엔 진짜로 가야 돼요." 이현이 서윤을 봤다. 회의실 한가운데서, 똑바로. "이건 정 선임 기획이에요. 편지 시스템은 정 선임이 처음부터 만들었어요. 다른 사람이 가면 깨져요."

"……그걸 왜 차이현 씨가 정해요."

"공수 판단이에요."

"까치 2차 업데이트 일정은요? 냅킨색 적용이 5월인데."

"제가 맡을게요. 기획서는 이미 있잖아요."

"디자인팀 검수는요?"

"민지 씨가 대리 검토할 수 있어요. 서윤 씨 기획서 양식 제일 잘 쓰는 사람이 민지 씨예요."

민지가 휴대폰을 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이 '저 이런 거 기다렸어요'였다.

"2주면 주간 회의 두 번 빠지는데요."

"영상으로 들어오시면 돼요."

"그럼 회의에서 누가 차이현 씨랑 싸워요."

말하고 나서 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 늦었다. 본부장이 웃음을 참느라 볼을 부풀렸다. 오태주는 대놓고 웃었다.

이현은 웃지 않았다. 담담하게 대답했다.

"2주 동안은 안 싸울게요. 모아 뒀다가 돌아오시면 한 번에 해요."

"……이자 붙여서요?"

"복리로요."

오태주가 서류 위에 펜을 올려놓았다. "소문대로네요. 두 분."

"무슨 소문이요?"

"업계에 다 났어예. 이 회사 기획이랑 개발이 5년째 씨름하는데, 그게 제일 좋은 결과물을 낸다고. 그래서 저도 작년에 차 리드를 뺏어 오려고 했던 거고요." 오태주가 이현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근데 지금 보니까 한 명만 데려가면 안 되는 거였네."

회의는 서윤의 '가겠습니다'로 끝났다.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이현을 보지 않았다.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류를 봤다. 제4조 아래, 개발 리드 지명 칸이 비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오태주를 배웅한 건 서윤이었다. 이현은 본부장에게 붙잡혀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오태주가 문득 말했다.

"정 기획자님. 하나 말씀드려도 될까예."

"네."

"차 리드가 거절 메일 보낸 날, 제가 전화했거든요. 섭섭해서. 이직 제안 네 번 거절한 사람이 다섯 번째에 처음으로 고민하는 것 같았는데, 결국 거절이라서." 오태주가 엘리베이터 숫자를 올려다봤다. "그래서 물었죠. 무슨 일이 남았냐고. 끝까지 맡아야 할 일이 뭐냐고."

"……뭐라고 했어요?"

"까치 2차 업데이트래요. 색 추가."

서윤은 웃음이 나올 뻔했다. 똑같은 대답을 그녀도 들었다. 김치찌개 앞에서.

"근데 목소리가 달랐어예." 오태주가 서윤을 봤다. "색 추가 얘기를 그렇게 하는 개발자는 처음 봤어요. 무슨 결혼 발표하는 것처럼. 그래서 알았죠. 색 추가가 아니구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태주가 타면서 한 손을 들었다.

"부산 오시면 등대 보여 드릴게요. 차 리드는 그 등대 못 봤어요. 안 왔으니까."

문이 닫혔다. 서윤은 닫힌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씨름 방은 한 시간 만에 백 개의 메시지를 넘겼다.

[시즌2 연애 편 제2부: 장거리 편 개막]

[민지: 선배 부산 가신대요 2주]

[개발팀 막내: 차 선임님 오늘 점심 안 드셨습니다]

[디자인팀 신입: 2주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방장: 5년 동안 하루도 안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다. 주말 빼고.]

그날 저녁, 서윤의 오피스텔. 이현이 캐리어 앞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옷을 이렇게 넣으시면 안 돼요."

"안 구겨지는 옷이에요."

"다 구겨져요. 세상에 안 구겨지는 옷은 없어요."

이현이 서윤이 던져 넣은 셔츠를 꺼내 다시 접었다. 세 번. 반듯하게. 그리고 돌돌 말았다. 서윤은 침대에 앉아 그걸 구경했다. 반박하려다 말았다. 말린 셔츠가 캐리어에 가지런히 들어가는 게 이상하게 보기 좋았다.

"이현 씨."

"네."

"아까 회의에서요. 가라고 한 거."

"네."

"진짜 괜찮아요?"

이현이 셔츠를 말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말았다.

"안 괜찮아요."

"……그럼 왜 가라고 했어요."

"안 괜찮은 거랑 가야 되는 거는 다른 문제니까요." 이현이 셔츠를 캐리어에 넣었다. "제가 작년에 부산 안 간 건, 서윤 씨가 가지 말라고 해서예요. 그때 저는 제 일보다 서윤 씨가 중요했어요. 지금도 그래요. 그러니까 이번엔 서윤 씨 일이 중요한 거예요."

서윤은 침대 이불을 쥐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반박할 데가 없는 말은 대답하기가 제일 어려웠다.

"……셔츠 그렇게 말면 부산 가서 펼 때 못 펴요."

"펴는 법 적어 드릴게요."

"그런 것까지 적어요?"

"적는 거 좋아해요."

이현이 캐리어를 닫으려다 멈췄다. 바퀴를 봤다. 왼쪽 뒤 바퀴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 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었다.

"……이거." 이현이 서윤을 올려다봤다. "그 캐리어예요?"

"버리기 아까워서요. 테이프 감아서 여행 몇 번 더 다녔어요."

"6년 동안요?"

"……네."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꺼내 바퀴 자리를 찍었다. 치수를 쟀다. 손가락 마디로.

출발 전날 밤, 캐리어에 새 바퀴가 달려 있었다. 왼쪽 뒤. 원래 바퀴들과 색이 조금 달랐다. 이현이 공구 가게를 세 군데 돌았다고 했다. 서윤은 캐리어를 거실에서 한 바퀴 굴려 봤다. 드르륵거리지 않았다.

4월 마지막 월요일 아침, 서울역.

기차 플랫폼에서 이현이 서윤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하얀 서류 봉투. 앞면에 반듯한 글씨.

'부산 2주 운영 매뉴얼. 작성: 차이현. 검토: 필요 없음.'

"검토 필요 없음은 뭐예요."

"이번엔 반려하지 마시라고요."

"읽어 보고 정할게요."

기차가 출발했다. 창밖에서 이현이 손을 들었다. 흔들지 않고, 그냥 들고만 있었다. 기차가 플랫폼을 벗어날 때까지.

서윤은 자리에 앉아 봉투를 열었다. 종이 세 장. 항목이 번호대로 적혀 있었다.

'제1항. 매일 밤 9시 영상통화. 공수 30분. 초과 허용.'

'제2항. 셔츠 펴는 법. 그림 참조.'

그림은 정말로 있었다. 셔츠를 펼치는 손이 화살표와 함께 세 단계로 그려져 있었다. 손가락 마디까지 반듯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 제7항 자리.

'제7항. (공란. 필요 시 추가.)'

서윤은 그 공란을 오래 봤다. 여섯 항목이 빼곡한 매뉴얼에서, 비워 둔 한 칸이 제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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