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은성은 뒷덜미가 잡힌 채 짐짝처럼, 혹은 사냥감처럼 벤틀리의 뒷좌석으로 처박혔다.
억지로 쑤셔 넣어진 뒷좌석은 지나치게 안락하고 포근했다. 덜컹, 차 문이 잠기는 소리가 은성의 사형 선고처럼 울렸다. 은성은 구정물을 뒤집어쓴 자신의 몸이 수억 원대에 달하는 베이지색 가죽 시트를 시커멓게 적시고 있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기묘한 흥분을 동시에 느꼈다.
"...더러워질 텐데."
은성이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척 애써 날을 세웠지만, 석호는 룸미러로 은성의 젖은 눈과 흠뻑 젖어 발딱 선 가슴팍을 빤히 응시하며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다 제 소유니까요. 이 차도, 제 차를 적시고 있는 도련님의 몸도."
차는 매끄럽게 출발했다. 빗줄기 사이로 서울의 야경이 유리창 위를 물감처럼 번져 흘렀다. 정지 신호에 걸린 벤틀리가 부드럽게 멈춰 섰을 때, 석호가 조수석 콘솔 박스에서 깨끗한 하얀 수건을 꺼내 은성을 향해 던졌다. 수건이 은성의 젖어 있는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닦으시죠. 도련님이 제 집 바닥에 구정물을 흘리며 돌아다니는 건 좀 곤란해서요."
은성은 무릎 위에 떨어진 수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핏기가 가신 입술을 비틀어, 처연하게 젖은 아름다운 얼굴에 독기 어린 미소를 피워 올렸다. 바닥까지 추락하고도 꺾이지 않는 오만함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해줄게. 네 침대 밑이든 화장실 바닥이든 기어 다녀 줄게. 대신, 돈은 제때 입금해. 내가 다리 벌려주는 값은 확실히 받아야겠으니까."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핸들을 쥐고 있던 석호의 굵은 뼈마디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모든 것을 다 잃은 주제에, 여전히 석호를 '비서' 취급하며 창부처럼 몸으로 거래하려는 저 알량한 자존심. 그 오만함이 석호의 내부에서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강하게 흔들어 깨웠다.
"좋습니다. 아주 비싸게 쳐드리죠."
석호는 낮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 서늘한 웃음소리에 은성의 심장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벤틀리는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거대한 마천루의 지하에 멈춰 섰다. 전용 엘리베이터가 80층 펜트하우스에 도착하자, 은성의 눈앞에 화려하고 차가운 무채색의 공간이 펼쳐졌다. 아득할 정도로 높은 천장과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유리창. 서울의 야경이 보석을 쏟아놓은 듯 발아래 깔려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은성에게 어떤 위안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화려한 공간이 자신을 삼키려는 거대한 짐승의 입속처럼 느껴졌다.
석호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졌다. 그러고는 젖은 채로 벌벌 떨고 있는 은성에게 다가왔다.
"앞으로 도련님이 갇혀 지내실 곳입니다. 그리고 규칙이 하나 있죠."
석호의 커다란 손이 은성의 젖은 셔츠 단추를 거칠게 뜯어내듯 풀었다. 투둑, 툭. 단추가 대리석 바닥에 튕겨 나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이 집 안에서 도련님은 제 부름에 꼬박꼬박 대답하고, 제가 시키는 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제 발밑의 짐승이죠."
석호가 거실 한편에 놓인 검은 상자를 발끝으로 밀었다. 그 안에는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검은색 실크 가운 하나와, 안쪽에 은색 링이 박혀 있는 두꺼운 가죽 초커가 들어 있었다.
은성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친, 새끼야. 내가 저딴 걸... 입을 것 같아?"
은성이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빗물에 젖은 구두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마찰하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었다. 거대한 펜트하우스의 육중한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고, 눈앞에는 자신을 파멸시킨 포식자가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석호는 도망치려는 은성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상자 안으로 손을 뻗어 맨 밑바닥에 깔려 있던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최고급 검은색 실크로 만들어진, 길고 부드러운 안대였다.
"직접 벗겨 드릴까요, 아니면 스스로 기어들어갈래."
정중함과 반말이 소름 끼치게 섞인 그 한마디. 석호의 손에 들린 검은 실크가 은성의 동공 위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재호가 자란 도시에는 번듯한 이름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두 번 다시 파헤치고 싶지 않은 무덤과도 같았다.핏기 잃은 짐승처럼 지방 국도변에 위태롭게 기대어 선 낡고 병들어 가는 공단 도시.새벽마다 거대한 굴뚝에서는 폐부를 검게 찌르는 짙은 회색 연기가 토사물처럼 피어올랐고, 기름때에 절어 퇴근한 국적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 편의점 앞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아 맥주 캔을 따는 것이 그 도시의 유일하고도 비참한 황혼이었다.거리 어디를 걸어도 쇳가루와 썩은 오수가 뒤엉킨 눅진한 냄새가 끈적한 진물처럼 배어 있었다. 재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코끝을 맴도는 그 역겨운 냄새를 뼛속 깊이 혐오했다. 거창한 이유가 있다기 보단, 재호는 어린 짐승의 본능처럼 그저 직감했을 뿐이다.그것이 사람의 뼛속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하고도 지긋지긋한 가난의 냄새라는 것을.그리고 가난이란, 재호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조차 갖지 못하고 평생을 발밑에서 기어야 한다는 완벽한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어머니는 공단 인근의 허름한 함바집에서 일했다. 새벽이슬을 맞고 나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진흙탕에 구른 것처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귀가할 때면 언제나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유령처럼 소리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재호가 방문을 열고 건조한 시선으로 내다보아도, 먼저 다가와 온기를 건네는 법이 없었다. 단순히 고된 노동으로 육체가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가난이라는 무거운 형벌에 짓눌려,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는 언어 자체를 거세당한 사람이었다. 재호 역시 그 지독하게 메마른 무감각함만큼은 제 어미를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빼닮아 있었다.재호는 공부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 일반 학생과 그 궤를 달리하는 압도적인 1등이었다.이유는 간단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이 세상의 목줄을 쥘 수 있는 무기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이 썩어가는 시궁창 같은 도시를 벗어날
펜트하우스의 육중한 현관문이 등 뒤로 닫히는 순간에도, 재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대기 중인 차량의 뒷좌석에 오르기까지. 재호의 보폭은 일정한 리듬을 유지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묻어나지 않는 서늘한 움직임. 방금 전까지 자신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윤석호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고서도, 이재호라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바깥이 먼저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덜컹-.두꺼운 차 문이 닫히고, 완벽에 가까운 방음이 외부의 소음을 단숨에 차단했다. 귓가를 맴도는 건 오직 재호 자신의 무거운 숨소리와 미세하게 빨라진 심장 박동뿐이었다.운전대를 잡은 기사는 그저 이 차의 일부에 불과했다.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그 독립적인 공간에서, 재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넥타이 매듭을 풀었다. 거칠게 잡아당기지 않았다. 한 올씩, 아주 정교하고 느릿하게. 팽팽하게 목을 조이고 있던 실크 천이 풀리며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풀어낸 넥타이를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지지 않고 자신의 손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눅눅하게 젖어 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서울의 야경이 쏟아지는 봄비에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차창을 때렸다."어디로 모실까요."운전기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앞좌석에서 넘어왔다.재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궤적을 서늘한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서로 다른 길을 타고 내리다 어느 지점에서 질척하게 엉겨 붙고, 이내 다시 갈라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빗물. 그것은 마치 방금 전 펜트하우스에서 목도했던, 얽히고설킨 기괴하고도 관능적인 관계성 같았다."블루."짧고 건조한 한마디.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 네비게이션 조작조차 없이 묵묵히 핸들을 꺾었다.창밖의 화려한 불빛들이 빗물에 번지며 붉고 푸른 궤적을 질질 끌며 흘러갔다. 재호는 푹신한 가죽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니, 정확
검은 수첩의 절반 가까이가 빼곡한 글자로 채워진 어느 날 밤, 석호는 처음으로 태성그룹 외부의 선에 연락을 취했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였다. 태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에 몸담은 사람. 기업의 복잡한 재무 구조를 해체하고 치부를 발라내는 데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진 전문가. 석호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패로 분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제 검증은 끝났다.통화는 짧았다."만날 수 있겠습니까.""무슨 일입니까.""태성입니다."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놀라움을 소리로 내뱉는 대신 침묵으로 갈음했다. 이내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언제가 좋겠습니까."석호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겨울의 서울은 거대하고 차가운 불빛들의 군락이었다. 저 무수한 빛의 중심에 채은성이 존재했다.시작이었다.밤의 석호가 은성의 세계를 해체할 도면을 그리는 동안, 낮의 석호는 변함없이 완벽하게 작동했다.아니, 오차율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제로에 수렴했다. 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과를 장악하는 일은 비서의 단순 업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몰아넣기 위한 경로 설계였다. 은성이 삼키는 물의 온도, 마주치는 임원들의 동선, 결재 서류가 올라가는 타이밍. 그 모든 것이 석호의 손끝에서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은성은 자신이 걷는 길이 석호가 깔아둔 레일 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호흡하는 공기의 성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석호는 무해하고 완벽한 공기가 되어 은성의 주변을 감쌌다.어느 날 저녁이었다.유독 야근이 길어졌다. 43층의 모든 인력이 빠져나가고, 은성의 집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옅은 불빛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채은성이었다. 맞춤형 재킷을 한 손에 든 채,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리며 걸어 나왔다. 석호는 소리 없이 다가가 미리 준비해 둔 코트를 내밀었다. 은성
아침의 햇살은 간밤의 어둠 속에서 내린 결론처럼 선명했다.43층 복도 끝, 석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섰다.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한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감정이 거세된 정갈한 몸가짐. 겉으로 보기에 윤석호라는 시스템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가동되고 있었다.하지만 그 견고한 시스템의 내부는 밤사이 완전히 다른, 단 하나의 명령어로 덮어씌워져 있었다.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정을 관리하고, 전화를 걸러내며, 문서를 검토하는 일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그것은 사냥감이 지나갈 길목을 파악하고, 사냥감의 호흡을 계산하며, 사냥감의 시야를 통제하는 정교한 조련의 과정이었다. 자신이 비서라는 위치를 핑계로 은성의 하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성이 먹는 것, 만나는 사람, 머무는 공간, 심지어 그가 마시는 차의 온도조차 석호의 손끝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오전 10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출근했다.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개를 숙였다 드는 찰나의 순간, 석호의 시선이 은성의 전신을 핥듯 훑고 지나갔다. 흐트러진 은발, 미세하게 구겨진 셔츠의 깃, 나른함을 넘어 짜증이 묻어나는 발걸음. 예전 같았다면 '오늘의 기상도'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 수집에 불과했을 그 모든 디테일들이, 이제는 망막에 화인처럼 찍혀 뇌리로 직행했다.“오전 결재 서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은성은 언제나처럼 석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무심한 뒷모습을 보며 석호는 묘한 해갈을 느꼈다. 저 오만함이, 저 무관심이 언젠가 자신의 발밑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그 무렵부터 석호는 은성이 남기는 '파편'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충동에 가까운, 아주 사소한 일탈이었다. 어느 날 오후, 은성이 외부 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두 번째로 함께 맞는 여름이었다.석호는 여전히 매일 아침 정각 8시, 43층 복도 끝 자신의 책상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성의 일정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했고, 걸려온 전화를 분류했으며, 완벽한 온도의 차를 준비했다.마치 기계처럼, 완벽하게.달라진 것이 없다는 석호의 생각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은성을 볼 때 일어나는 이상한 감정. 석호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고, 자신이 정의하지 못한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어느 눈부신 오전이었다.은성이 평소보다 한참 늦게 출근했다. 전날 밤 요란한 파티가 있었다는 것을 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석호가 은성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은성은 알지 못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43층으로 들어왔다. 실내인데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재킷도 걸치지 않은 채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걸음이 느렸다. 평소에도 은성의 걸음걸이는 느린 편이었지만, 그 속도보다 훨씬 더 느리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석호는 아무 말 없이 은성에게 시원한 물 한 잔과 미리 준비해 둔 숙취 해소제를 내밀었다.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석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성은 아무 말 없이 석호가 건넨 물과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털썩,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아 약을 삼키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어떻게 알았어?""어제 일정을 보고 짐작했습니다."은성은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쓸모는 있네."칭찬이 아니었다. 그저 도구의 효용 가치를 확인하고 읊조리는 건조한 언어였다. 은성에게 석호는 그저 도구였다. 아주 쓸모 있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석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물과 약을 내밀었던 석호의 손끝은, 그것을 받아쥐는 은성의 손을 찰나의 순간 동안 따라가고 있었다."감사합니다."은성이 피식,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깊게 눈을 감았다.석호는 은성의
석 달이 지났다.석호는 매일 아침 정각 8시,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43층 복도 끝에서 업무를 시작했다.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성실함이라기보다 잘 세팅된 기계의 작동 방식에 가까웠다.석호는 은성의 모든 일정을 조율했고, 쏟아지는 전화를 걸러냈으며,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제된 요약본으로 탈바꿈시켰다. 은성이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차를 내놓았고,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원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배치했다.감정이 거세된 행동, 말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석호 역시 스스로 업무 능력에 오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왔으니까. 하지만 칭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부터 결벽에 가까운 실력과 절제로 살아온 석호에게 이런 완벽함은 그저 기본값이었다. 당연한 것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진리였다.실제로 채은성은 단 한 번도 석호를 칭찬하지 않았다. 고마워하지도, 그 유능함을 특별히 인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석호는 그 당연함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여기에서 살아남기에는 훨씬 수월했으니까.어느 오후였다.예정된 회의가 두 시간을 훌쩍 넘기며 길어졌다. 복도에는 정적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았지만, 석호는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필요할 때 곁에 없는 것보다,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석호만의 방식이었다.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은성이 나타났다. 석호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태를 읽어냈다. 복도를 딛는 구두 소리의 날카로운 강도, 미세하게 굳은 미간의 각도. 예측하지 못하면 통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석호의 무능을 의미했다."차 가져와.""준비되어 있습니다."은성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석호 쪽으로 흘리듯 던졌다. 석호는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채듯 받아냈다. 자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