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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화

Author: 필루사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4-09 21:28:19

석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피할 새도 없이 석호의 커다란 손이 은성의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아악!"

고개가 뒤로 꺾여 하얀 목줄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찰나, 석호가 은성의 두 눈 위로 차가운 검은 실크 안대를 단단히 동여맸다. 시야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완전한 암흑. 시각이 끊어지자, 그 빈자리를 끔찍한 공포와 함께 다른 감각들이 미친 듯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거실을 채운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젖은 셔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맨살을 헤집었다. 은성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은성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을 옭아맨 석호의 짙은 우드 향과,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석호의 구두 발소리뿐이었다.

또각, 또각.

포식자의 발소리가 은성의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은성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방어하려 했지만, 언제 어디서 석호의 손길이 닿을지 모른다는 극도의 긴장감이 그의 피를 말렸다.

"어디 있어, 윤석호! 당장 이거 풀지 못해!"

"쉿. 시끄럽습니다, 도련님. 짐승이 주인 허락 없이 짖으면 곤란하죠."

귓바퀴를 핥고 지나가는 서늘한 숨결. 은성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린 순간, 석호의 뜨겁고 거친 손이 은성의 젖은 셔츠 앞섶을 움켜쥐었다.

찌익―!

고급스러운 실크 셔츠가 섬뜩한 파열음을 내며 양옆으로 완전히 찢겨 나갔다. 단추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차가운 공기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은성의 마르고 하얀 상체가 잘게 경련했다.

석호의 커다란 두 손이 셔츠의 잔해를 벗겨내며 은성의 젖은 어깨와 쇄골을 노골적으로 쓸어내렸다. 얼음장 같은 피부에 델 듯이 뜨거운 체온이 닿자, 은성의 몸이 제멋대로 펄떡였다. 시야가 차단된 상태라 그 작은 터치조차 수십 배의 자극으로 뇌리에 박혔다.

석호는 은성의 바지 버클마저 거침없이 풀어내렸다. 젖어 무거워진 천 쪼가리들이 허벅지를 타고 바닥으로 속절없이 추락했다. 은성은 완벽한 알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무릎이 꺾일 뻔했지만, 석호가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올려 지탱했다.

두 사람의 틈새 하나 없는 밀착. 석호의 수트 너머로 느껴지는 단단한 근육과 뜨거운 열기가 은성의 헐벗은 맨살을 빈틈없이 지져댔다.

은성이 발버둥 치며 석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석호는 한 손으로 은성의 두 손목을 가볍게 결박해 등 뒤로 꺾어버렸다. 완전히 무방비해진 은성의 목 위로, 무언가 차갑고 무거운 가죽이 둘러졌다.

찰칵.

서늘한 금속 버클이 맞물리는 소리. 상자에 있던 가죽 초커였다. 목젖을 압박하는 가죽의 뻣뻣한 감촉과, 정중앙에 달린 은색 링이 차갑게 피부에 닿았다.

"아주 잘 어울립니다, 도련님. 아니, 이제 제 개가 되셨으니 이름표라고 해야겠네요."

석호의 손가락이 초커의 금속 링을 툭툭 건드리며 은성의 목덜미를 진득하게 쓰다듬었다. 도망칠 수도, 가릴 수도 없는 완벽한 굴복의 증표였다. 은성의 눈을 가린 검은 안대 밑으로 뜨거운 눈물이 속절없이 배어 나와 뺨을 타고 흘렀다.

곧이어 은성의 맨몸 위로 얇디얇은 검은색 실크 가운이 걸쳐졌다. 가운이라기보다는 피부의 질감과 붉게 달아오른 흔적들을 드러내기 위한 얄팍한 포장지에 불과했다.

석호는 은성의 초커에 달린 링을 거칠게 낚아채어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석호의 뜨거운 입술이 은성의 귓바퀴를 지그시 깨물며 짐승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얌전히 기어, 은성아. 내가 네 목줄을 놓고 싶어지지 않게."

목줄이 아래로 강하게 끌어당겨졌다. 압박감과 함께 은성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거칠게 부딪혔다. 쾅, 하는 둔탁한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평생 누군가의 발밑에 무릎을 꿇어본 적 없는 도련님이, 자신이 벌레 취급하던 비서의 구두코 앞에 엎드려 헐떡이고 있었다.

"호칭부터 고치겠습니다. 주인님이라고 부르세요."

석호의 손가락이 초커의 금속 링에 걸려 위로 서서히 끌어 올렸다. 가죽이 은성의 기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는 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산소가 부족해지자 은성의 뇌리가 하얗게 점멸했다.

살고 싶다. 이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본능이 자존심을 짓누르는 순간이었다.

"...주, 주인... 님. 잘못, 했어... 잘못했어요, 주인님...!"

석호의 입가에 짙은 만족감이 그려졌다. 그는 대리석 바닥에 웅크려 떠는 은성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참 잘했습니다. 자, 그럼 착한 개가 되었으니... 벌을 받을 시간입니다."

석호가 은성을 번쩍 안아 들고 펜트하우스의 깊고 어두운 침실을 향해 느릿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완벽한 지옥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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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호가 자란 도시에는 번듯한 이름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두 번 다시 파헤치고 싶지 않은 무덤과도 같았다.핏기 잃은 짐승처럼 지방 국도변에 위태롭게 기대어 선 낡고 병들어 가는 공단 도시.새벽마다 거대한 굴뚝에서는 폐부를 검게 찌르는 짙은 회색 연기가 토사물처럼 피어올랐고, 기름때에 절어 퇴근한 국적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 편의점 앞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아 맥주 캔을 따는 것이 그 도시의 유일하고도 비참한 황혼이었다.거리 어디를 걸어도 쇳가루와 썩은 오수가 뒤엉킨 눅진한 냄새가 끈적한 진물처럼 배어 있었다. 재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코끝을 맴도는 그 역겨운 냄새를 뼛속 깊이 혐오했다. 거창한 이유가 있다기 보단, 재호는 어린 짐승의 본능처럼 그저 직감했을 뿐이다.그것이 사람의 뼛속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하고도 지긋지긋한 가난의 냄새라는 것을.그리고 가난이란, 재호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조차 갖지 못하고 평생을 발밑에서 기어야 한다는 완벽한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어머니는 공단 인근의 허름한 함바집에서 일했다. 새벽이슬을 맞고 나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진흙탕에 구른 것처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귀가할 때면 언제나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유령처럼 소리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재호가 방문을 열고 건조한 시선으로 내다보아도, 먼저 다가와 온기를 건네는 법이 없었다. 단순히 고된 노동으로 육체가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가난이라는 무거운 형벌에 짓눌려,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는 언어 자체를 거세당한 사람이었다. 재호 역시 그 지독하게 메마른 무감각함만큼은 제 어미를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빼닮아 있었다.재호는 공부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 일반 학생과 그 궤를 달리하는 압도적인 1등이었다.이유는 간단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이 세상의 목줄을 쥘 수 있는 무기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이 썩어가는 시궁창 같은 도시를 벗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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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수첩의 절반 가까이가 빼곡한 글자로 채워진 어느 날 밤, 석호는 처음으로 태성그룹 외부의 선에 연락을 취했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였다. 태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에 몸담은 사람. 기업의 복잡한 재무 구조를 해체하고 치부를 발라내는 데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진 전문가. 석호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패로 분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제 검증은 끝났다.통화는 짧았다."만날 수 있겠습니까.""무슨 일입니까.""태성입니다."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놀라움을 소리로 내뱉는 대신 침묵으로 갈음했다. 이내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언제가 좋겠습니까."석호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겨울의 서울은 거대하고 차가운 불빛들의 군락이었다. 저 무수한 빛의 중심에 채은성이 존재했다.시작이었다.밤의 석호가 은성의 세계를 해체할 도면을 그리는 동안, 낮의 석호는 변함없이 완벽하게 작동했다.아니, 오차율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제로에 수렴했다. 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과를 장악하는 일은 비서의 단순 업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몰아넣기 위한 경로 설계였다. 은성이 삼키는 물의 온도, 마주치는 임원들의 동선, 결재 서류가 올라가는 타이밍. 그 모든 것이 석호의 손끝에서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은성은 자신이 걷는 길이 석호가 깔아둔 레일 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호흡하는 공기의 성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석호는 무해하고 완벽한 공기가 되어 은성의 주변을 감쌌다.어느 날 저녁이었다.유독 야근이 길어졌다. 43층의 모든 인력이 빠져나가고, 은성의 집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옅은 불빛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채은성이었다. 맞춤형 재킷을 한 손에 든 채,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리며 걸어 나왔다. 석호는 소리 없이 다가가 미리 준비해 둔 코트를 내밀었다. 은성

  • 개였던 당신에게   제 76 화 : 수집

    아침의 햇살은 간밤의 어둠 속에서 내린 결론처럼 선명했다.43층 복도 끝, 석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섰다.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한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감정이 거세된 정갈한 몸가짐. 겉으로 보기에 윤석호라는 시스템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가동되고 있었다.하지만 그 견고한 시스템의 내부는 밤사이 완전히 다른, 단 하나의 명령어로 덮어씌워져 있었다.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정을 관리하고, 전화를 걸러내며, 문서를 검토하는 일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그것은 사냥감이 지나갈 길목을 파악하고, 사냥감의 호흡을 계산하며, 사냥감의 시야를 통제하는 정교한 조련의 과정이었다. 자신이 비서라는 위치를 핑계로 은성의 하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성이 먹는 것, 만나는 사람, 머무는 공간, 심지어 그가 마시는 차의 온도조차 석호의 손끝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오전 10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출근했다.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개를 숙였다 드는 찰나의 순간, 석호의 시선이 은성의 전신을 핥듯 훑고 지나갔다. 흐트러진 은발, 미세하게 구겨진 셔츠의 깃, 나른함을 넘어 짜증이 묻어나는 발걸음. 예전 같았다면 '오늘의 기상도'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 수집에 불과했을 그 모든 디테일들이, 이제는 망막에 화인처럼 찍혀 뇌리로 직행했다.“오전 결재 서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은성은 언제나처럼 석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무심한 뒷모습을 보며 석호는 묘한 해갈을 느꼈다. 저 오만함이, 저 무관심이 언젠가 자신의 발밑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그 무렵부터 석호는 은성이 남기는 '파편'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충동에 가까운, 아주 사소한 일탈이었다. 어느 날 오후, 은성이 외부 임

  • 개였던 당신에게   제 75 화 : 이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두 번째로 함께 맞는 여름이었다.석호는 여전히 매일 아침 정각 8시, 43층 복도 끝 자신의 책상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성의 일정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했고, 걸려온 전화를 분류했으며, 완벽한 온도의 차를 준비했다.마치 기계처럼, 완벽하게.달라진 것이 없다는 석호의 생각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은성을 볼 때 일어나는 이상한 감정. 석호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고, 자신이 정의하지 못한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어느 눈부신 오전이었다.은성이 평소보다 한참 늦게 출근했다. 전날 밤 요란한 파티가 있었다는 것을 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석호가 은성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은성은 알지 못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43층으로 들어왔다. 실내인데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재킷도 걸치지 않은 채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걸음이 느렸다. 평소에도 은성의 걸음걸이는 느린 편이었지만, 그 속도보다 훨씬 더 느리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석호는 아무 말 없이 은성에게 시원한 물 한 잔과 미리 준비해 둔 숙취 해소제를 내밀었다.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석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성은 아무 말 없이 석호가 건넨 물과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털썩,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아 약을 삼키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어떻게 알았어?""어제 일정을 보고 짐작했습니다."은성은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쓸모는 있네."칭찬이 아니었다. 그저 도구의 효용 가치를 확인하고 읊조리는 건조한 언어였다. 은성에게 석호는 그저 도구였다. 아주 쓸모 있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석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물과 약을 내밀었던 석호의 손끝은, 그것을 받아쥐는 은성의 손을 찰나의 순간 동안 따라가고 있었다."감사합니다."은성이 피식,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깊게 눈을 감았다.석호는 은성의

  • 개였던 당신에게   제 74 화 : 잔상

    석 달이 지났다.석호는 매일 아침 정각 8시,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43층 복도 끝에서 업무를 시작했다.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성실함이라기보다 잘 세팅된 기계의 작동 방식에 가까웠다.석호는 은성의 모든 일정을 조율했고, 쏟아지는 전화를 걸러냈으며,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제된 요약본으로 탈바꿈시켰다. 은성이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차를 내놓았고,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원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배치했다.감정이 거세된 행동, 말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석호 역시 스스로 업무 능력에 오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왔으니까. 하지만 칭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부터 결벽에 가까운 실력과 절제로 살아온 석호에게 이런 완벽함은 그저 기본값이었다. 당연한 것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진리였다.실제로 채은성은 단 한 번도 석호를 칭찬하지 않았다. 고마워하지도, 그 유능함을 특별히 인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석호는 그 당연함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여기에서 살아남기에는 훨씬 수월했으니까.어느 오후였다.예정된 회의가 두 시간을 훌쩍 넘기며 길어졌다. 복도에는 정적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았지만, 석호는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필요할 때 곁에 없는 것보다,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석호만의 방식이었다.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은성이 나타났다. 석호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태를 읽어냈다. 복도를 딛는 구두 소리의 날카로운 강도, 미세하게 굳은 미간의 각도. 예측하지 못하면 통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석호의 무능을 의미했다."차 가져와.""준비되어 있습니다."은성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석호 쪽으로 흘리듯 던졌다. 석호는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채듯 받아냈다. 자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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