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석호의 단단한 팔에 안긴 채 복도를 지나는 동안, 은성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비워져 있었다. 눈을 가린 검은 실크 안대 너머로는 오직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시각이 차단된 은성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을 안아 든 석호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과, 젖은 맨살에 스치는 고급스러운 수트 원단의 서늘한 마찰감, 그리고 숨이 막힐 듯 짙게 풍겨오는 묵직한 우드 향뿐이었다.
얇디얇은 실크 가운은 이미 빗물과 석호의 체온에 젖어 은성의 마른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석호의 너른 가슴팍에 가슴의 돌기가 스칠 때마다 예리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어디로 끌려가는 걸까. 침실이겠지. 침대에 던져져서, 이 수치스러운 꼴로 무슨 짓을 당하게 될까. 공포와 수치심에 은성의 마른 어깨가 잘게 떨렸다. 곧이어 육중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공간의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거실보다 훨씬 묵직하고 서늘한, 철저히 통제된 주인의 영역이 내뿜는 위압감이었다. 은성은 본능적으로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곧 푹신한 매트리스 위로 몸이 던져질 것이라 예상하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석호의 팔에서 벗어난 은성의 몸이 추락한 곳은, 안락한 침대 위가 아니었다. "아윽...!" 은성의 무릎과 어깨가 딱딱한 바닥에 부딪혔다. 최고급 양모 카펫이 깔려 있어 뼈가 부러지는 충격은 없었지만, 은성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이 던져진 곳이 침대 위가 아니라, 침대 발치 아래의 차가운 바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펫의 보풀이 땀에 젖은 맨살에 달라붙어 따끔거렸고, 바로 위에서 주인의 체중이 내려앉은 매트리스가 둔탁하게 끼익거리는 소리가 은성의 귀를 짓눌렀다. 머리 위에서 스프링이 가라앉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석호가 침대 끝자락에 여유롭게 걸터앉은 것이다. 시야가 가려진 은성에게는 그 위치의 격차가 주는 권력의 간극이 지독하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자신은 바닥을 기는 벌레고, 석호는 그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포식자였다. "어설프게 기대라도 한 모양이군요. 침대 위로 올려줄 줄 알았습니까?" 석호의 나직한 음성이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이 집의 규칙을 하나 더 알려드리죠. 제 허락 없이 짐승이 주인의 침대에 올라오는 일은 없습니다. 도련님의 자리는 거기, 제 발밑입니다." 석호의 커다란 구두코가 카펫 위를 뒹구는 은성의 턱을 툭, 치켜올렸다. 단단한 가죽의 질감이 연약한 턱선을 짓누르자 은성의 고개가 억지로 위를 향했다. 안대에 가려져 석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을지 뼛속까지 느껴졌다. 구두의 매끄러운 감촉이 턱 아래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은성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 "치워... 발, 치우라고."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십니까." 석호의 구두코가 턱을 벗어나, 은성의 목에 감긴 가죽 초커의 금속 링을 지긋이 짓눌렀다. 숨통이 미세하게 막혀오자 은성의 입에서 헐떡이는 숨소리가 샜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빗속에서 꽤 오래 떨지 않으셨습니까. 안 그래도 마른 몸이 아주 볼품없이 말라붙었군요. 주인이 짐승을 굶길 수는 없으니, 첫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찰랑. 어둠 속에서 맑은 액체가 찰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석호가 침대 협탁에 놓여 있던 크리스탈 유리잔을 집어 든 모양이었다. 은성은 마른침을 삼켰다. 빗속에서 떨다 온 탓에 갈증이 극심했지만, 석호가 주는 것을 얌전히 받아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안 먹어, 하아... 네놈이 주는 건 안 마셔." "손은 뒤로 하십시오." 석호는 은성의 반항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은성의 두 손목을 낚아채 등 뒤로 꺾어버렸다. 거칠게 비틀린 팔의 통증에 은성이 비명을 삼켰다. 한 손으로 은성의 두 손목을 틀어쥐어 꼼짝 못 하게 결박한 석호는, 남은 한 손으로 유리잔을 기울였다. 차갑고 투명한 물이 석호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조금씩 부어졌다. "손을 쓰지 못하는 짐승이 물을 마시는 방법은 하나뿐이죠." 석호의 서늘한 속삭임이 어둠을 가르고 은성의 귓전에 새겨졌다. "핥으세요." 그 한마디가 은성의 남은 존엄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망치처럼 울렸다.이재호가 자란 도시에는 번듯한 이름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두 번 다시 파헤치고 싶지 않은 무덤과도 같았다.핏기 잃은 짐승처럼 지방 국도변에 위태롭게 기대어 선 낡고 병들어 가는 공단 도시.새벽마다 거대한 굴뚝에서는 폐부를 검게 찌르는 짙은 회색 연기가 토사물처럼 피어올랐고, 기름때에 절어 퇴근한 국적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공장 노동자들이 편의점 앞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아 맥주 캔을 따는 것이 그 도시의 유일하고도 비참한 황혼이었다.거리 어디를 걸어도 쇳가루와 썩은 오수가 뒤엉킨 눅진한 냄새가 끈적한 진물처럼 배어 있었다. 재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코끝을 맴도는 그 역겨운 냄새를 뼛속 깊이 혐오했다. 거창한 이유가 있다기 보단, 재호는 어린 짐승의 본능처럼 그저 직감했을 뿐이다.그것이 사람의 뼛속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하고도 지긋지긋한 가난의 냄새라는 것을.그리고 가난이란, 재호에게 단 하나의 선택지조차 갖지 못하고 평생을 발밑에서 기어야 한다는 완벽한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어머니는 공단 인근의 허름한 함바집에서 일했다. 새벽이슬을 맞고 나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진흙탕에 구른 것처럼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는 귀가할 때면 언제나 현관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유령처럼 소리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재호가 방문을 열고 건조한 시선으로 내다보아도, 먼저 다가와 온기를 건네는 법이 없었다. 단순히 고된 노동으로 육체가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가난이라는 무거운 형벌에 짓눌려, 타인과 감정을 교류하는 언어 자체를 거세당한 사람이었다. 재호 역시 그 지독하게 메마른 무감각함만큼은 제 어미를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빼닮아 있었다.재호는 공부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단순히 잘하는 수준을 넘어, 일반 학생과 그 궤를 달리하는 압도적인 1등이었다.이유는 간단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이 세상의 목줄을 쥘 수 있는 무기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이 썩어가는 시궁창 같은 도시를 벗어날
펜트하우스의 육중한 현관문이 등 뒤로 닫히는 순간에도, 재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대기 중인 차량의 뒷좌석에 오르기까지. 재호의 보폭은 일정한 리듬을 유지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묻어나지 않는 서늘한 움직임. 방금 전까지 자신을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윤석호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고서도, 이재호라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바깥이 먼저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덜컹-.두꺼운 차 문이 닫히고, 완벽에 가까운 방음이 외부의 소음을 단숨에 차단했다. 귓가를 맴도는 건 오직 재호 자신의 무거운 숨소리와 미세하게 빨라진 심장 박동뿐이었다.운전대를 잡은 기사는 그저 이 차의 일부에 불과했다.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그 독립적인 공간에서, 재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넥타이 매듭을 풀었다. 거칠게 잡아당기지 않았다. 한 올씩, 아주 정교하고 느릿하게. 팽팽하게 목을 조이고 있던 실크 천이 풀리며 서늘한 공기가 맨살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풀어낸 넥타이를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지지 않고 자신의 손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눅눅하게 젖어 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서울의 야경이 쏟아지는 봄비에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차창을 때렸다."어디로 모실까요."운전기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앞좌석에서 넘어왔다.재호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의 궤적을 서늘한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한 방울, 두 방울. 서로 다른 길을 타고 내리다 어느 지점에서 질척하게 엉겨 붙고, 이내 다시 갈라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빗물. 그것은 마치 방금 전 펜트하우스에서 목도했던, 얽히고설킨 기괴하고도 관능적인 관계성 같았다."블루."짧고 건조한 한마디.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 네비게이션 조작조차 없이 묵묵히 핸들을 꺾었다.창밖의 화려한 불빛들이 빗물에 번지며 붉고 푸른 궤적을 질질 끌며 흘러갔다. 재호는 푹신한 가죽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눈을 감았다. 아니, 정확
검은 수첩의 절반 가까이가 빼곡한 글자로 채워진 어느 날 밤, 석호는 처음으로 태성그룹 외부의 선에 연락을 취했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자였다. 태성과는 일말의 접점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에 몸담은 사람. 기업의 복잡한 재무 구조를 해체하고 치부를 발라내는 데 기계적인 정확성을 가진 전문가. 석호가 그를 신뢰할 수 있는 패로 분류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제 검증은 끝났다.통화는 짧았다."만날 수 있겠습니까.""무슨 일입니까.""태성입니다."수화기 너머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상대는 놀라움을 소리로 내뱉는 대신 침묵으로 갈음했다. 이내 건조한 목소리가 돌아왔다."언제가 좋겠습니까."석호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책상 위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보았다. 한겨울의 서울은 거대하고 차가운 불빛들의 군락이었다. 저 무수한 빛의 중심에 채은성이 존재했다.시작이었다.밤의 석호가 은성의 세계를 해체할 도면을 그리는 동안, 낮의 석호는 변함없이 완벽하게 작동했다.아니, 오차율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제로에 수렴했다. 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과를 장악하는 일은 비서의 단순 업무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몰아넣기 위한 경로 설계였다. 은성이 삼키는 물의 온도, 마주치는 임원들의 동선, 결재 서류가 올라가는 타이밍. 그 모든 것이 석호의 손끝에서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은성은 자신이 걷는 길이 석호가 깔아둔 레일 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호흡하는 공기의 성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석호는 무해하고 완벽한 공기가 되어 은성의 주변을 감쌌다.어느 날 저녁이었다.유독 야근이 길어졌다. 43층의 모든 인력이 빠져나가고, 은성의 집무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옅은 불빛만이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채은성이었다. 맞춤형 재킷을 한 손에 든 채, 답답한 듯 넥타이를 거칠게 끌어내리며 걸어 나왔다. 석호는 소리 없이 다가가 미리 준비해 둔 코트를 내밀었다. 은성
아침의 햇살은 간밤의 어둠 속에서 내린 결론처럼 선명했다.43층 복도 끝, 석호는 자신의 책상 앞에 섰다.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한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 감정이 거세된 정갈한 몸가짐. 겉으로 보기에 윤석호라는 시스템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가동되고 있었다.하지만 그 견고한 시스템의 내부는 밤사이 완전히 다른, 단 하나의 명령어로 덮어씌워져 있었다.이제 석호에게 은성의 일정을 관리하고, 전화를 걸러내며, 문서를 검토하는 일은 단순한 '업무'가 아니었다.그것은 사냥감이 지나갈 길목을 파악하고, 사냥감의 호흡을 계산하며, 사냥감의 시야를 통제하는 정교한 조련의 과정이었다. 자신이 비서라는 위치를 핑계로 은성의 하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은성이 먹는 것, 만나는 사람, 머무는 공간, 심지어 그가 마시는 차의 온도조차 석호의 손끝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오전 10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출근했다.석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개를 숙였다 드는 찰나의 순간, 석호의 시선이 은성의 전신을 핥듯 훑고 지나갔다. 흐트러진 은발, 미세하게 구겨진 셔츠의 깃, 나른함을 넘어 짜증이 묻어나는 발걸음. 예전 같았다면 '오늘의 기상도'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 수집에 불과했을 그 모든 디테일들이, 이제는 망막에 화인처럼 찍혀 뇌리로 직행했다.“오전 결재 서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은성은 언제나처럼 석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무심한 뒷모습을 보며 석호는 묘한 해갈을 느꼈다. 저 오만함이, 저 무관심이 언젠가 자신의 발밑에서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그 무렵부터 석호는 은성이 남기는 '파편'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충동에 가까운, 아주 사소한 일탈이었다. 어느 날 오후, 은성이 외부 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두 번째로 함께 맞는 여름이었다.석호는 여전히 매일 아침 정각 8시, 43층 복도 끝 자신의 책상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성의 일정을 철두철미하게 관리했고, 걸려온 전화를 분류했으며, 완벽한 온도의 차를 준비했다.마치 기계처럼, 완벽하게.달라진 것이 없다는 석호의 생각과는 달리,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었다. 은성을 볼 때 일어나는 이상한 감정. 석호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몰랐고, 자신이 정의하지 못한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어느 눈부신 오전이었다.은성이 평소보다 한참 늦게 출근했다. 전날 밤 요란한 파티가 있었다는 것을 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석호가 은성의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은성은 알지 못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성이 43층으로 들어왔다. 실내인데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재킷도 걸치지 않은 채 얇은 셔츠 차림이었다. 걸음이 느렸다. 평소에도 은성의 걸음걸이는 느린 편이었지만, 그 속도보다 훨씬 더 느리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석호는 아무 말 없이 은성에게 시원한 물 한 잔과 미리 준비해 둔 숙취 해소제를 내밀었다.선글라스 너머의 시선이 석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은성은 아무 말 없이 석호가 건넨 물과 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털썩,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아 약을 삼키고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어떻게 알았어?""어제 일정을 보고 짐작했습니다."은성은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쓸모는 있네."칭찬이 아니었다. 그저 도구의 효용 가치를 확인하고 읊조리는 건조한 언어였다. 은성에게 석호는 그저 도구였다. 아주 쓸모 있는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석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물과 약을 내밀었던 석호의 손끝은, 그것을 받아쥐는 은성의 손을 찰나의 순간 동안 따라가고 있었다."감사합니다."은성이 피식, 짧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깊게 눈을 감았다.석호는 은성의
석 달이 지났다.석호는 매일 아침 정각 8시, 단 1분의 오차도 없이 43층 복도 끝에서 업무를 시작했다.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성실함이라기보다 잘 세팅된 기계의 작동 방식에 가까웠다.석호는 은성의 모든 일정을 조율했고, 쏟아지는 전화를 걸러냈으며, 산더미 같은 서류를 정제된 요약본으로 탈바꿈시켰다. 은성이 필요를 느끼기도 전에 차를 내놓았고,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원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배치했다.감정이 거세된 행동, 말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석호 역시 스스로 업무 능력에 오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항상 최선의 결과를 내왔으니까. 하지만 칭찬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밑바닥부터 결벽에 가까운 실력과 절제로 살아온 석호에게 이런 완벽함은 그저 기본값이었다. 당연한 것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세상에서의 진리였다.실제로 채은성은 단 한 번도 석호를 칭찬하지 않았다. 고마워하지도, 그 유능함을 특별히 인정하지도 않았다. 마치 공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석호는 그 당연함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무색무취한 존재가 되는 것이 여기에서 살아남기에는 훨씬 수월했으니까.어느 오후였다.예정된 회의가 두 시간을 훌쩍 넘기며 길어졌다. 복도에는 정적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만이 감돌았지만, 석호는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필요할 때 곁에 없는 것보다, 필요하지 않을 때조차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석호만의 방식이었다.마침내,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은성이 나타났다. 석호는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상태를 읽어냈다. 복도를 딛는 구두 소리의 날카로운 강도, 미세하게 굳은 미간의 각도. 예측하지 못하면 통제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석호의 무능을 의미했다."차 가져와.""준비되어 있습니다."은성은 걷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들고 있던 서류 더미를 석호 쪽으로 흘리듯 던졌다. 석호는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채듯 받아냈다. 자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