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방금 일만 해도 예전 같았으면 진후의 상처를 걷어찼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찍 퇴원한 걸 후회하게 만들었을 터였다.마음을 가라앉힌 주예는 침실 문을 열어보려고 했다. 열리지 않았다. 전협이 구하러 와 주기를 바라기 시작했다. 진후와 다투는 사이에 핸드폰을 아래층에 두고 왔다.한 시간이 지났다. 전협은 주예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서 주예에게 전화했다....집 안 거실이었다.진후는 상처를 다시 드레싱하는 중이었다. 의사에게 진통제 주사를 맞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상태가 한결 나아졌고, 이성도 돌아왔다.문득 테이블 위에서 핸드폰이 진동하자 눈길이 갔다. 주예의 핸드폰이었다.진후가 집어 들었다. 발신자 이름은 ‘오빠’였다.진후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차 안에서 주예가 잠결에 중얼거린 말이 떠올랐다. 주예에게는 정말로 오빠가 있었다.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진후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더 말하기를 기다렸다.[주예야?]다시 목소리가 들렸다.‘주예야? 저렇게 다정하게 부르다니. 대체 누구야?’진후는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세요. 제 아내에게 무슨 볼일이십니까?”정재는 막 비행기에서 내리자 주예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진후가 전화를 받을 줄은 몰랐다.아내라는 말을 듣자 정재의 얼굴에 짙은 먹구름이 내려앉았다.진후가 다시 물었다. “누구십니까?”정재는 비웃듯 웃었다.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주예는 어디 있습니까? 전화기 넘겨주시죠.]말에 소유욕이 짙게 묻어났다.진후도 물러서지 않았다. 목소리가 차가웠다.“찾으시는 사람은 제 아내입니다. 용건이 있으시면 제가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선을 넘으시는 건 아닙니까?”정재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아내요? 이미 이혼했다고 들었습니다만...]‘이혼한 걸 알고 있네. 정말
주예가 진지하게 물었다. “잠깐, 확인 좀 할게. 친남매는 아니지?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닌 거지?”진후는 말문이 막히면서 표정이 굳어졌다. “당연히 아니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주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는 오빠가 정재 하나면 충분했다.또 다른 오빠까지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여동생과 아내도 구별하지 못하는 이런 오빠는 사양이었다.그제야 표정을 가다듬고 진후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한참 뒤 고개를 저었다. “어릴 때 일은 잘 기억 안 나. 당신을 만난 기억도 없어.”진후의 얼굴에 실망이 드러났다.주예가 바로 덧붙였다.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당신도 나를 못 알아봤잖아. 아니면 왜 이제야 내가 누군지 알았겠어?”맞는 말이었다. 그 말이 진후의 가슴 한가운데를 바로 찔렀다.주예는 더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서 바로 물었다. “내 친부모가 누군지 말해 줄래?”이번에는 진후가 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주예야, 우리 방은 다 정리해 뒀어. 너 없는 동안 이모님하고 다른 분들이 매일 청소했어.” “시트도 새로 갈았고, 네가 좋아하는 색이야. 오늘 밤은 여기 있어 주면 안 돼?”“거절하지 마. 오늘 밤 여기 있으면 친부모가 누군지 말해 줄게.”진후의 말투가 강해졌다. 그러다 한발 뒤로 물러섰다. “나는 손님방에서 자도 돼. 너만 안 가면 돼.”주예는 어이가 없었다.“내 친부모 소식을 알 수 있으면 물론 좋겠지. 하지만 몰라도 괜찮아. 지난 20년 동안 모르고도 잘 살았어.”“그걸로 날 협박할 거면 더 얘기할 필요 없어. 누가 날 낳았든 고경란하고 임필수는 영원히 내 엄마 아빠야. 그건 달라지지 않아.”주예는 곧바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가지 마! 못 가!”진후가 미친 사람처럼 거칠게 붙잡았다. 다쳤어도 주예가 이길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겨우 ‘진짜 규나’를 되찾았는데 다시 떠나게 둘 수는 없었다.“놔!”임신한 걸 아는 주예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칠 수가 없었다. 진후는
진후의 눈에 아쉬움이 스쳤다. 먼저 내려서 주예 쪽 문을 열었다.혹시라도 머리를 부딪칠까 봐 문 위쪽에 손을 가볍게 댔다.전협의 차도 뒤따라 들어왔다. 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는 밖에 주차해서 주예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입구의 경비가 막으려고 하자, 진후가 손짓으로 들여보내라고 했다.전협의 의도는 진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먹고 주예를 붙잡아 두려고 한다면 전협 한 명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하늘빌 입구에 선 주예의 표정은 복잡했다.주예가 멈춰 서자 진후가 다정하게 물었다. “왜 안 들어가?”주예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늘빌까지 왔잖아. 이제 말해.”“네 집이잖아. 들어가서 좀 앉아. 돌아온 지 오래됐잖아. 이모님하고 다른 분들도 많이 보고 싶어해.”진후는 답을 피하며 다른 말을 했다.지금의 진후는 주예에게 낯설었다.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희미하게 피 냄새가 났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굴었다. 어젯밤에 칼을 맞았는데, 급소는 아니었다고 해도 오늘 바로 퇴원해서 주예를 찾아다닐 기운까지 있다니.주예는 조금 떨어진 곳에 전협이 있는 걸 돌아보고 확인했다. 마음을 다잡고 안으로 들어갔다.현관에서 진후가 몸을 숙이며 말했다. “신발 갈아 신어.” 직접 실내화를 신겨 주려고 했다. 주예가 전에 신던 바로 그 실내화였다. 주예는 발을 뒤로 당겼다. “됐어. 내가 할게.”진후의 눈에 실망이 드러났다. 그래도 더 말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자기 실내화를 꺼내 신었다. 주예 것과 모양은 같고 색만 다른 커플 실내화였다.주예는 그걸 보고 눈길이 살짝 흔들렸지만 말하지 않았다. 전에 주예가 샀을 때는 진후가 한 번도 신지 않았다. 이제야 그걸 사용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집 안을 둘러봤다. 가구와 물건은 거의 그대로였다. 주예가 떠날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이제 말해 줄 수 있지?” 주예가 진후를 봤다. 쓸데없는 안부를 주고받기 싫어서 바로 본론을 꺼냈다.진후는 코트를 정리
그 말을 듣자 주예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진후가 이어서 말했다. “하늘빌에 오면 차근차근 설명할게. 너한테 한마디도 거짓말하지 않을게.”“나는 고씨 집안 사람이야. 내 부모님은 고경란하고 임필수야.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주예가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그 모습을 본 진후의 입가에 애틋하면서도 쓰린 웃음이 번졌다.어릴 때 규나는 거짓말을 하면 꼭 입술을 다물고 진후를 보지 않았다. 그 버릇은 여전히 그대로였다.가슴이 다시 욱신거리며 아팠다.주예에게는 곳곳에 어린 규나의 흔적이 있었다. ‘나는 대체 얼마나 눈이 멀어 있었던 거야. 이렇게 오랫동안 알아보지도 못하고.’진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5살 때 두 분한테 입양됐다는 거 알아. 맞지?”주예의 눈동자가 다시 수축되었다.원래는 진후에게 이야기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받을 치료 기회를 빼앗은 뒤로 진후를 완전히 믿지 못하게 됐다. 그 일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진후가 정말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한동안 말이 없던 주예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겠다는 뜻이었다.순순히 받아들이는 주예를 보자 진후의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뻗었다.하지만 손이 채 닿기도 전에 주예가 한 걸음 물러났다. 경계하는 눈으로 진후를 봤다. 진후는 씁쓸하게 손을 거뒀다. 눈에는 실망하는 기색이 가득했다.진후는 고집스럽게 주예를 자신의 마이바흐에 태웠다. 주예는 조금 떨어져 있던 전협에게 손짓했다. 전협이 차를 몰고 적당한 간격으로 뒤따랐다. 진후는 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자.’차 안에서 두 사람은 내내 말이 없었다. 깊은 정적만 흘렀다.진후는 애초에 상처가 낫지 않은 상태였다. 차에 앉고 나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등받이에 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많은 피를 흘린 탓에 자꾸 어지러웠지만, 마음만은 가득한 기분이었다.
진후는 일찌감치 카페에 가서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계속 작게 기침을 했다. 그때마다 등의 상처가 당겼지만 눈은 줄곧 창밖의 도로를 향했다. 익숙한 모습을 놓칠까 봐 시선을 떼지 못했다.주예가 입구에 나타나자마자 진후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움직임이 커서 상처가 당기자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한 걸음 다가서면서 탐욕스럽게 주예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주예는 많이 지쳐 보였다. 턱선이 더 가늘어졌고, 눈 밑에는 짙은 다크 서클을 감추지 못했다. 맑고 동그란 눈에는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었다. 한바탕 운 게 분명했다.진후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어젯밤에 많이 놀랐겠지.’앞서 확인한 흔적들이 다시 머릿속을 채웠다. 진후가 찾던 규나는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가 고경란 부부가 거두게 되었다.나중에는 홀로 가족을 부양했고, 아버지가 위독할 때는 수없이 절망적인 밤을 보냈다. 진짜 규나인 주예는 그동안 힘겹게 살아왔다.이 모든 건 규나의 거짓말 때문이었다.‘규나야, 오빠가 이제야 널 찾았어. 용서해 줄 수 있겠니?’규나를 빼고 진후가 가장 미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같았다. 가짜를 진짜 보물로 여기고, 정작 소중한 사람은 제 손으로 밀어냈으니.주예는 자신을 바라보는 진후의 눈에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다는 걸 알아챘다.진후가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전부터 주예를 되찾고 싶어 한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주예의 일이 잘 풀리는 걸 봤기 때문일 수도 있고, 고씨 집안의 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저 후회한 것일 수도 있었다.어느 쪽이든 주예는 알고 있었다. 진후가 주예에게 해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늘 많은 것들 뒤로 밀렸다. 어젯밤 납치됐을 때조차 진후는 규나 때문에 다시 주예를 버렸다.그런데도 주예 대신 칼을 맞았다.진후가 주예에게 느끼는 감정이 갑자기 달라진 게 분명했다. 거기에는 전과 다른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의문은 들었지만 그걸 알아보고
“그건...”진후는 눈을 감았다. 마치 쓰레기를 치우듯 손을 놓았다. 이제 힘을 다 쓴 듯 눈을 감은 채 차갑게 말했다. “피곤해. 나가.”규나는 어디서 준비했는지 보온 용기를 꺼냈다. “오빠, 푹 쉬어. 그래도 이 국은 꼭 먹어. 어머님이 힘들게 끓이신 거야.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꺼져!”진후와 박효주가 보지 못하는 쪽으로 규나가 고개를 숙였다. 주머니 속의 무색 액체를 슬쩍 만지면서 입꼬리를 올렸다.병실 밖으로 나온 규나가 박효주에게 살갑게 말했다.“매번 오시려면 힘드시잖아요. 앞으로는 제가 매일 오빠를 돌보면 어떨까요? 회복하는 상태도 수시로 알려 드릴게요. 괜찮으세요?” 규나는 선을 잘 지켰다. 한씨 집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은 조금도 꺼내지 않았다.박효주는 눈치 있게 구는 규나가 마음에 들었다. 앞서 겪은 일까지 생각하니 한결 좋게 보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매일 상태를 알려줘.” 병실 안의 아들을 한번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쉰 뒤 떠났다.병실 앞에는 규나만 남았다. 경호원들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 규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안 가요. 다들 보셨잖아요. 어머님이 매일 진후 오빠 보러 오라고 하셨어요.”경호원들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 명만 곁에서 지키기로 했다.도망가지 못하게만 하면 대표도 문제를 삼지는 않을 것 같았다.오후에 규나가 국을 가져오자, 진후는 차가운 얼굴로 받아서 먹었다. 이제는 가까스로 침대에서 내려와 걸을 수 있었다.진후는 의사의 만류를 무시하고 퇴원하겠다고 고집했다. 비서 재영을 불러 검은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창백한 얼굴로 병실을 나섰다.떠나기 전에 경호원들에게 규나를 잘 감시하라고 다시 지시했다. 가장 중요한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규나에게 모든 책임을 묻겠다는 생각이었다.먼저 고씨 본가에 갔지만 주예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주예의 작업실에도 가 봤다. 역시 허탕이었다.그동안 진후는 겨우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장례식장은 온기가 완전히 걷힌 듯 차가웠다.빈소에는 정적만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고, 영정 사진 앞에는 하얀 국화들만 가득 놓여 있었다.임주예는 아버지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무릎은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손바닥 안을 파고들 정도로 손가락을 세게 쥐고 있었다.'지금 손을 놓아 버리면, 나까지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옆에서는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한 대표는 어디 갔대? 아직도 안 왔어?""아직도 몰라? 공항에 마중 나갔다더라. 기사도 떴잖아.""공항?
진후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마치 어디까지나 주예를 배려하는 사람처럼 들렸다.하지만 주예는 진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말들은 결국 진후 자신이 품고 있는 보잘것없는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진후는 주예가 늘 그랬듯 알아서 사양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그래.” 주예가 받아들였다.“응? 뭐라고 했어?” 진후가 멈칫했다. 뜻밖이라는 기색이 스쳤다.“좋다고. 이제 몸도 거의 다 나았고, 당신 친구들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주예는 가볍게 웃었다.‘어차피 앞으로는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다음
“사모님?”여주댁이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아직 안 주무셨어요?”“응...”주예는 대답하려 했지만 목이 잔뜩 잠겨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겨우 숨 섞인 소리만 흘러나왔다.여주댁은 급히 안으로 들어와 주예의 이마에 손을 대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어머, 이게 무슨 일이에요? 열이 너무 심하잖아요.”“비를 좀 맞아서 그런가 봐요.”주예는 힘겹게 웃어 보였다.“약은 먹었어요.”“이렇게 있으면 안 되죠.”여주댁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이대로 열이 더 오르면 큰일 나요.”여주댁은 곧장 핸드폰을
주예는 가슴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진후의 SNS 계정을 다시 열었다.화면이 넘어가자 진후가 기록해 둔 일정들이 줄줄이 떠올랐다.[규나 건강검진][규나 항공권, 호텔 예약][규나 생일][규나...]주예와 관련된 기록은 맨 아래까지 내려가서야 하나 나왔다. 3년 전, 혼인신고를 한 날이었다.주예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손끝이 조금씩 식어 갔다.‘정말 끝까지 이랬네.’주예는 올라오려는 감정을 꾹 눌러 삼킨 채 다른 폴더를 열고 나서, 진후가 최근에 사들인 부동산, 주식 거래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