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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last update 게시일: 2026-07-01 14:41:56

택시는 한적한 주택가 골목에 멈췄다.

서린은 캐리어를 끌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갔다.

숫자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마음도 함께 정리되는 것 같았다.

아니, 정리되기를 바라는 쪽에 가까웠다.

문을 열자 작은 공간이 드러났다.

침대와 테이블, 최소한의 가구만 놓인 방이었다.

오래 머물 생각이 없는 사람의 집처럼 비어 있었다.

서린은 캐리어를 벽 쪽에 세워두고 신발을 벗었다.

흐읍—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다시 발을 옮겼다.

방 안의 적막이 생각보다 깊었다.

가끔씩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머물던 곳이었지만, 돌아갈 기한을 정하지 않고 들어오기는 처음이었다.

낯설지도, 그렇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공기가 몸을 감쌌다.

서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에 노트북을 올리고 전원을 켰다.

푸른 불빛이 그녀의 창백하고 서늘한 얼굴을 비췄다.

폴더 하나를 열었다.

지난 5년, 이탈리아에서 치료를 받는 틈틈이, 고통 속에서 악착같이 모아온 자료들이었다.

사고 당시의 기사, 경찰 조서, 그리고 엄마가 보내주는 그 남자의 근황.

화면 속의 남자는 웃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한때는 저 웃음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지금은 그 웃음이 가장 끔찍한 기억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차가운 물 속에서 죽어가던 그 시간, 그는 살아서 영웅이 되어 있었다.

사고는 ‘빗길 운전 부주의로 인한 추락’으로 종결되었고, 시신을 찾지 못한 그녀는 실종 후 사망 처리되었다.

“기다려요”

서린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내가 갈 때까지.”

노트북의 화면을 그대로 두고 일어섰다.

차가운 커피가 필요했다.

서린이 주방으로 가서 커피를 내리려고 할 때였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서린의 가슴이 저릿해졌다.

[엄마]

화면에 뜬 이름을 한참 바라봤다.

전화를 받을 용기보다 울음을 참을 용기가 더 필요했다.

죽은 딸을 가슴에 묻은 척하며 5년을 버텨온 사람.

매년 딸의 제사상을 차리면서도, 어딘가에 혼자 있을 딸을 위해 기도했을 사람.

서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목이 메어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응.”

— 집에 도착한 거야?

“방금.”

— 택시는? 불편하진 않았고?

엄마의 목소리는 늘 그랬다.

너무 많은 걸 묻지 않으면서도, 놓치는 게 없었다.

서린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괜찮았어. 길도 안 막혔고.”

— 오늘은 좀 쉬어. 무리하지 말고.

“… …”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 그래도… 이제는 얼굴 보여 줄 시간은 내는 거지?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로 엄마와 함께 다시 한 번,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거리를 걸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엄마가 만들어 주시는 파스타를 먹고, 내가 내린 커피를 함께 마시며 오늘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 알겠어. 괜한 말 했다.

엄마의 목소리에는 서운함보다 걱정이 먼저 묻어 있었다.

“엄마… 미안해.”

— 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야.

흔들림 없는 단단한 목소리였다.

— 아직 준비가 안 된 거잖아. 그럼 안 와도 돼.

— 엄마는 괜찮아. 네가 괜찮은 게 더 중요하지.

서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먼저 믿어주었다.

그 때도 그랬다. 다른 이름으로 살겠다 할 때도, 모든 것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랐을 때도.

변함없이 내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괜찮을 수 있었다.

아니, 괜찮아야 했다.

“응. 지금도 괜찮아, 엄마…”

서린이 말하지 않은 감정까지 먼저 헤아리는 사람.

이 곳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그 무엇도 정리하지 못한 상태라는 걸 알아본 것이었다.

— 목소리가 조금 떨리네.

“…그런가?”

— 응. 오늘은 특히 그래.

서린이 한 손으로 핸드폰을 가렸다.

후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전화기에 대놓고 울 뻔했다.

엄마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침묵이 위로가 되는 순간도 있다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 오늘은 그냥 쉬어. 따뜻한 물로 씻고.

— 그리고… 네가 이 땅에 있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충분해.

“응.”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한 음절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화면은 이미 꺼졌지만,

서린은 한참 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엄마도 아마 같은 모습일 것이다.

두 사람은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것처럼.

창밖으로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이 보였다.

서린은 커피를 마저 내렸다.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탁자 위에 올려둔 노트북을 정리했다.

커피에 얼음을 잔뜩 넣고 창가로 갔다.

서울의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저 사람들도 각자의 이유로 살아갈 것이다.

나도 나만의 이유로 이 곳에 서 있다.

낮과 밤의 경계가 사라진 시간.

서린은 커피를 손에 쥔 채 소파에 앉았다.

한 모금 마시니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서늘한 줄기가 가라앉은 마음까지도 씻어 주는 듯 했다.

서린은 의자에 앉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번엔… 도망치지 않아.”

어둠 속에서 서린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3년 만에 돌아온 악몽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친절하게도 내게 신호를 보냈다. 잊지 말라고.

차가운 물 속에서 그녀가 느꼈던 그 절망과 분노를, 절대 잊지 말라는 기억이었다.

그래, 그걸 어떻게 잊어.

왜 잊어.

그를 살리려고 했다.

그는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가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내 이름을 빼앗겼고,

내 삶도 빼앗겼다.

하지만 내 의지까지 가져가지는 못했다.

내 이름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고 당당하게 설 것이다.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갈대처럼.

뿌리 깊이 내린 나의 이름.

그 이름으로

다시, 이곳에 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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