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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Author: ddingjak30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4 23:50:41

병원 7층의 공기는 바깥의 소음과 먼지를 단번에 차단한 채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발소리를 집어삼키는 두터운 카펫과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라벤더 향은 이곳이 결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의료 공간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돈으로 불안을 유예하고 결함을 지워내려는 자들만이 조용히 드나드는 은밀한 요새였다.

안내 데스크에 서류를 건네자 단정하게 머리를 묶어 올린 간호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운 태도였다.

명찰에는 '윤해린'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차서린 님, 원장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간호사의 하이힐 소리를 따라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서린은 코트 주머니 속에 든 손을 단 한 순간도 펴지 못했다.

벽면에 걸린 거대한 추상화와 차가운 조명들은 마치 수술대 위의 무영등처럼 서린의 숨을 턱 끝까지 죄어왔다.

간호사가 육중한 원목 문을 노크하고 조용히 열어젖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등을 돌린 채 커다란 창밖의 신도시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의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흰 가운의 깃 아래로 드러난 단정한 턱선과 서늘할 정도로 맑은 눈동자가 서린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의 왼쪽 가슴에 달린 은색 명찰에 또렷하게 새겨진 석 자가 서린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원장 서우진.

순간 서린의 발밑이 허공으로 푹 꺼져 내리는 듯한 지독한 현기증이 일었다.

호흡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고 귓가에서는 날카로운 이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우진.

그것은 서린이 지난 십 년간 의식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봉인해 두었던 이름이었다.

흙먼지가 날리던 학교 운동장, 쉬는 시간마다 헐레벌떡 매점으로 달려가 빵과 음료수를 사 오던 마르고 창백했던 소년.

무릎에 늘 피딱지가 앉아 있던 그 아이의 뺨을 서린은 손쉽게 내리치곤 했다.

돈 몇 푼을 받아들고 비웃음을 날리던 자신의 서늘한 손끝과 그 손끝을 피해 옥상 난간으로 몰리던 소년의 겁에 질린 눈망울.

그리고 난간 너머로 맥없이 떨어져 내리던 그 끔찍한 장면이 찰나의 순간에 서린의 기억을 생생하게 뒤흔들었다.

죽었거나 혹은 평생 폐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 여겼던 기억 속 소년이, 이제는 완벽한 남성의 모습을 한 채 제 눈앞에 서 있었다.

"서린 씨?"

우진이 서린의 차트를 가볍게 넘기며 나지막하게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음성은 지극히 건조했고 어떤 감정의 동요도 묻어나지 않았다.

과거의 원망이나 분노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의사와 환자 사이의 정형화된 어조일 뿐이었다.

"이쪽에 앉으시죠."

우진의 손짓에 서린은 마치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가죽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무릎을 모으고 손을 쥐어짜는 서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우진은 그런 서린의 상태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만년필을 굴리며 차트를 읽어 내려갔다.

"결혼 3년 차, 만 30세. 남편분의 검사 결과는 정상. 특별한 피임 없이 3년간 임신 실패."

차트를 읊는 그의 목소리는 차분해서 더 잔인하게 들렸다.

서린의 온몸을 옥죄고 있던 수치스러운 결함이 우진의 입술을 통해 공기 중으로 낱낱이 해체되고 있었다.

"강민석 씨께서 특별히 부탁을 하셨더군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임신을 시켜달라고."

민석의 이름이 우진의 입에서 나오자 서린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남편이 말했던 ‘실력 좋은 원장’이 자신이 파멸로 몰아넣었던 서우진이라니.

그 잔혹한 우연 앞에서 서린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진은 턱을 괸 채 서린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차갑고 깊은 눈동자에는 서린의 수치심과 공포를 관조하는 기이한 여유가 서려 있었다.

"너... 날 기억 못 하는 거야?"

서린의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비어져 나왔다.

그것은 확인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향한 마지막 발버둥에 가까웠다.

우진은 만년필을 책상 위에 딱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것이 미소인지 냉소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기억이라. 차서린 씨, 여긴 옛날이야기를 나누러 오는 찻집이 아닙니다. 병원 진료실이죠."

우진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키의 그가 드리운 그림자가 서린에게 드리워졌다.

그는 서랍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내 손가락 하나하나에 끼워 넣기 시작했다.

가죽처럼 팽팽하게 조여드는 장갑의 마찰음이 진료실의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

우진은 벽 한쪽에 쳐진 두꺼운 벨벳 커튼을 걷어 올렸다.

그 너머로 은빛으로 번쩍이는 금속성 산부인과 진료대가 그로테스크한 자태를 드러냈다.

환자의 하체를 결박하듯 벌려 고정하는 차가운 발걸이와 푸른 시트가 서린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서늘하게 번뜩이는 스테인리스 골조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침대라기보다는  중세의 고문대에 가까워 보였다. 

허공을 향해 기괴한 각도로 솟아오른 두 개의 금속 발걸이는 짐승의 뿔처럼 굽어 있었고, 그 끝에 달린 가죽 받침은 올라오는 이의 수치심과 저항을 단번에 짓이기기 위해 벌려진 채 굳어 있었다.

여자의 가장 은밀하고 나약한 부위를 강제로 열게 만드는 구조는 보기만 해도 뼛속까지 시린 한기를 내뿜었다.

푸른색 비닐 시트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머리 위에 매달린 무영등의 둥근 렌즈는 진료대 중앙의 텅 빈 공간을 집요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가운 금속 진료대 위에서는 자신의 존엄마저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았다.

서린은 숨이 막힐 듯한 공포 속에서 그곳을 바라보았다.

"차트만 봐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가 없네요. 직접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우진은 장갑 낀 손을 가볍게 털며 서린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상대의 약점을 노리는 냉혹한 사냥꾼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속옷까지 전부 탈의하시고, 저기 올라가서 다리 벌리세요."

그것은 진료를 빙자한, 완벽한 지배의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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