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회의가 시작되자 서연은 새로운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사고 당일 해당 항로를 통과했던 다른 항공편의 기상 관련 보고 자료였다.
"이번에 확보한 자료입니다."
서연이 화면을 가리켰다.
"사고 발생 약 25분 전, 인근 항로를 운항하던 항공편에서 강한 난기류를 경험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태준은 자료를 바라봤다.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기장님 항공편의 운항 기록에는 해당 보고를 전달받았다는 내용이 명확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모든 교신 내용을 운항 기록에 따로 기재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전달받으셨는지 확인이 필요하겠네요."
"그건 관제 교신 기록을 확인하면 됩니다."
"그래서 요청했습니다."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미요?"
"네."
서연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자료를 넘겼다.
"다만 그 기록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당시 기장님이 해당 정보를 알고 계셨는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태준은 팔짱을 꼈다.
"그럼 기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기다리는 동안 다른 자료도 검토할 수 있죠."
"정말 부지런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칭찬 아닙니다."
"알아요."
서연이 미소 지었다.
"그래도 감사하다고요."
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저 여자와 대화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비꼬면 받아치고. 화를 내면 차분해지고.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려 하면 오히려 자신이 곤란해졌다. 정말이지. 피곤한 여자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서연이 새로운 문서를 펼쳤다.
"사고 당시 운항통제 부서에서 해당 항로의 기상 위험 가능성을 검토한 내부 기록이 있습니다."
법무팀장의 표정이 굳었다.
"윤 변호사님, 그 자료는 아직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내부 문서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위와 작성 경위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태준은 자료를 내려다봤다. 처음 보는 문서였다.
"이게 뭡니까?"
서연이 그를 바라봤다.
"기장님은 처음 보세요?"
"그렇습니다."
"사고 발생 전날 작성된 운항 위험 검토 자료로 보입니다."
태준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 자료가 있었습니까?"
이번에는 법무팀장이 대답했다.
"아직 확인 중입니다. 초안일 가능성도 있고요."
태준은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만약 실제로 사고 전날 해당 항로의 위험 가능성이 검토되었다면. 그리고 그 내용이 운항 승무원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면. 그건 자신도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였다.
"원본 확인해 주십시오."
태준이 말했다. 법무팀장이 그를 바라봤다.
"강 기장님."
"저도 확인해야겠습니다."
서연은 조용히 태준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날카롭게 굴던 남자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자신의 책임을 피하려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얼굴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서연이 말했다.
태준이 그녀를 돌아봤다.
"뭐가요."
"원본을 확인해야 한다는 거요."
"……."
"그 부분은 의견이 같네요."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별로 반갑지는 않군요."
서연이 웃었다.
"저도요."
회의는 예상보다 길어졌다. 추가 자료의 제출 범위를 두고 법무팀과 서연 사이에 의견 차이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윤 변호사님, 해당 문서는 회사 내부 검토 자료입니다."
법무팀장이 말했다.
"그렇다고 사고와 관련된 자료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죠."
"아직 정식 문서인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확인해 달라는 겁니다."
"그 과정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언제까지요?"
"그건……."
서연은 펜을 내려놓았다.
"팀장님. 저는 지금 당장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자료의 존재 여부와 작성 경위를 확인해 달라는 거예요.“
태준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낮게 말했다.
"확인하면 되잖습니까."
법무팀장이 그를 돌아봤다.
"강 기장님."
"있는 자료면 있는 거고, 없는 자료면 없는 거 아닙니까."
"회사 내부 절차가 있어서……."
"그럼 절차대로 확인하시죠."
서연의 시선이 태준에게 향했다. 뜻밖이었다. 그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할 줄은 몰랐다. 태준은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왜 그렇게 봅니까?"
서연이 대답했다.
"아니요. 의외라서요."
"뭐가."
"기장님이 제 의견에 동의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네?"
"변호사님 편드는 거 아닙니다."
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웃었다.
"알아요."
"……."
"저도 기장님 편 들어 달라고 한 적 없어요."
태준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 말 한마디를 지지 않는 여자였다.
***
오후 5시 38분. 회의가 끝났다. 법무팀 관계자들이 먼저 자리를 떠났고, 서연은 남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태준은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딱히 급한 연락은 없었다. 그런데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서연이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물었다.
"기장님은 안 가세요?"
태준이 고개를 들었다.
"갑니다."
"그런데 왜 안 가세요?"
"지금 가려고 했습니다."
"아."
서연은 별다른 관심 없이 가방을 멨다. 태준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득 물었다.
"윤 변호사님."
"네."
"원래 사람을 그렇게 못 믿습니까?"
서연이 멈췄다.
"무슨 뜻이죠?"
"오늘 회의 내내 의심부터 하시던데."
"확인하는 거예요."
"그게 그거 아닙니까."
"다르죠."
서연은 태준을 바라봤다.
"의심은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거고, 확인은 맞는지 틀린지 알아보는 거니까요."
태준은 짧게 웃었다.
"말은 참 잘하십니다."
"변호사니까요."
"그 직업 참 편리하네요."
"기장님도 직업 덕 많이 보시잖아요."
태준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뜻입니까?"
"기장님이 그렇게 오만하게 말씀하셔도 사람들이 대체로 참아 주니까요."
"……."
"제복 입고 계실 때는 특히 더 그럴 것 같고요."
태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나보고 오만하다는 겁니까?"
서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네."
"……."
"모르셨어요?"
태준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윤서연 씨."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변호사님도 아니고, 윤 변호사도 아닌. 윤서연 씨. 서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네, 강태준 기장님."
"원래 그렇게 재수 없습니까?"
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웃었다.
"기장님은 원래 그렇게 재수 없으세요?"
"……."
"저는 적어도 처음 만난 사람한테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거든요."
태준은 할 말을 잃었다. 서연은 가방끈을 고쳐 멨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녀가 문 쪽으로 걸어갔다. 태준은 이를 악물었다.
"윤서연 씨."
서연이 돌아봤다.
"또 왜요?"
"앞으로 나랑 만날 일 많을 텐데."
"그렇겠죠."
"그 성격 좀 고치시는 게 좋겠습니다."
서연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대답했다.
"기장님부터요."
문이 닫혔다. 태준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 동안.
"…와."
정말이지. 저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강태준은 세미나장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옆에서는 박지훈 부기장이 쉬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기장님, 어제 어디 가셨습니까?""호텔에 있었는데.""아니, 호텔 어디요.""왜.""어제 바에서 갑자기 사라지셨잖아요."태준은 걸음을 멈췄다."내가 언제 갑자기 사라졌어?""제가 화장실 갔다 왔더니 안 계시던데요.""먼저 올라왔다.""혼자요?""박지훈.""네.""오늘따라 질문이 많네."지훈이 씩 웃었다."아니, 어제 윤 변호사님도 안 보이시길래."태준의 발걸음이 아주 미세하게 느려졌다."…그래서.""두 분 또 어디서 싸우시나 했죠.""안 싸웠다."지훈이 눈을 크게 떴다."그럼 화해하셨어요?"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훈은 그 침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와, 드디어. 두 분 화해하셨으면 진짜 다행입니다. 제가 두 분 사이에서 얼마나 눈치를 봤는데요."태준은 한숨을 쉬었다."박 부기장.""네.""오늘 회의 자료는 다 봤나?""네, 봤습니다.""그럼 그 얘기나 하자."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물었다."근데 기장님.""또 뭐.""오늘 향수 바꾸셨어요?"태준이 멈칫했다."…뭐?""평소랑 향이 좀 다른데."태준의 표정이 굳었다. 순간. 어젯밤 자신의 셔츠에 얼굴을 묻던 윤서연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침에 샤워를 마친 뒤 객실을 나서던 그녀에게서 나던 향기까지. 태준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기분 탓이다."지훈이 고개를 갸웃했다."그런가."태준은 걸음을 재촉했다.'…진짜 미치겠네.‘***오전 11시 30분. 회의실 문이 열렸다. 서연은 노트북을 켜고 있었다. 항공사 운항 부문 관계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태준이 들어왔다. 서연의 손끝이 멈췄다.'왔다.'태준도 그녀를 발견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확히 삼 초. 서연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기장님."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정중하게 대답했다."안녕하십니까, 윤
윤서연은 잠결에 이상한 온기를 느꼈다. 평소보다 무거운 이불. 익숙하지 않은 베개의 감촉. 그리고 코끝에 닿는 낯선 향기.'…뭐지.'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젯밤 호텔 바에서 와인을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국제 항공안전 세미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강태준과의 말다툼. 그리고.서연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그녀는 눈을 뜨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자신의 팔이 누군가의 허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잠깐.'서연은 천천히 손끝을 움직였다. 단단한 몸. 따뜻한 체온. 그리고 가까이서 들려오는 숨소리.'설마.'그녀는 아주 조금 눈을 떴다. 강태준이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아. 미친.'강태준. 그 강태준. 지난 반년 동안 자신을 가장 짜증 나게 만들었던 남자. 말끝마다 시비를 걸고, 자신이 하는 말은 무조건 반박부터 하던 남자.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의 옆에 누워 있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우리 진짜 잤네.'서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기억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선명했다. 호텔 바. 마지막 와인잔. 엘리베이터.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강태준의 눈. 서연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어젯밤의 강태준은. 정말 이상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던 손. 조심스럽게 뺨을 감싸던 손바닥. 몇 번이나 자신이 괜찮은지 확인하던 낮은 목소리. 그리고.'서연아.'그 목소리가 떠오르는 순간 서연은 이불 속에서 발끝을 움츠렸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허락하지 않았을 호칭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자신은. 그 이름을 듣고 웃었다. 심지어.'응.'그렇게 대답했다.'미쳤어. 완전히 미쳤어.'서연은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그때였다. 옆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태준이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서연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지금 눈을 뜨면. 저 남자와 눈을 마주쳐야 한다. 그것도 같은 침대에서.'안 돼. 일단 정신부터 차리자.'서연은 속으로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서로를 싫어한다는 말을 너무 오래 해 온 탓이었을까. 강태준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윤서연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호텔 객실 앞에서.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몇 번이나 놓을 수 있었던 손이었다. 그런데 놓지 않았다.서연도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에도, 객실 번호를 확인할 때도, 태준이 카드키를 꺼내는 동안에도 그녀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삑. 문이 열렸다. 태준은 먼저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서연을 돌아봤다. 조금 전 호텔 바에서 마신 술 때문에 두 사람의 뺨에는 희미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서연의 눈매는 평소보다 느슨했고, 태준 역시 평소처럼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는 문을 잡은 채 물었다."…들어올래요?"서연은 그를 올려다봤다. 늘 자신만만하던 남자가 이상하게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여기까지 와서 그걸 물어요?"태준이 작게 웃었다."그러게요."서연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들어가요."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찰칵. 객실 안은 조용했다. 커튼 너머로 싱가포르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태준은 카드키를 꽂고 돌아섰다. 서연은 문 앞에 서 있었다.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평소였다면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누군가 먼저 비꼬는 말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작게 웃었다."왜 그렇게 봐요?"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다가왔다. 서연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 가까이 올라왔다. 그러다가 잠시 멈췄다.서연은 그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들어 그의 손등을 감쌌다. 따뜻했다. 태준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아주 천천히 쓸었다. 서연의 눈이 가늘게 감겼다. 그 작은 반응에 태준의 숨이 느려졌다."…서연 씨."그녀가 눈을 떴다
'…미쳤군.'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윤서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여자. 말 한마디만 해도 짜증이 나는 여자. 그런데. 지금은. 그 입을 막고 싶었다. 말로가 아니라. 입술로. 태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하."서연이 물었다."왜요?“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연이 다시 물었다."기장님?"태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지금 나한테서 좀 떨어지십시오."서연의 표정이 굳었다."…네?""떨어지라고요."서연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기장님이 제 앞으로 오셨잖아요.""…….""왜 저한테 그러세요?"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 다가왔다. 그런데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야."그녀가 돌아서려 했다. 그때. 태준이 불렀다."윤서연."서연의 걸음이 멈췄다."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뭐 어쩔 겁니까?"태준이 물었다. 서연이 돌아봤다."네?"태준은 그녀를 내려다봤다."나한테 뭘 어쩔 건데요."서연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기장님.""네.""지금 시비 거세요?""그런가 봅니다.""…….""그쪽이랑 있으면 자꾸 그렇게 되네요."서연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정말."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재수 없는 남자예요."태준은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서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조금 들어 올렸다. 태준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낮게 물었다."그렇게 싫습니까?"서연이 대답했다."네.""나도 그쪽 싫습니다.""알아요.""정말."태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미치도록."그의 시선이 서연의 입술로 내려갔다. 서연은 그 시선을 알아차렸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이상했다. 분명 저 남자가 싫었다. 말투도. 성격도. 자신을 보는 저 거만한 눈빛도.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기장님."서연이 낮게 불
"그럼 기장님은요?"서연이 물었다. 태준은 잔을 내려놓았다."뭐가요.""어떤 여자가 취향이세요?"태준은 망설이지 않았다."조용한 여자."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준의 눈썹이 올라갔다."왜 웃습니까?""아니요. 계속하세요.""말을 예쁘게 하는 여자.""네.""사사건건 따지지 않는 여자.""아하.""그리고."태준은 서연을 똑바로 바라봤다."사람 피곤하게 안 만드는 여자."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완벽하네요.""뭐가요.""저랑 정반대라서요."태준은 잔을 들었다."그러게 말입니다."서연도 와인을 마셨다."다행이에요."태준의 손이 멈췄다."뭐가.""서로 취향이 아니라서요.""…….""괜히 엮일 일은 없겠네요."태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느리게 대답했다."그러게요."이상했다. 분명 자신도 원하던 결론인데. 왜 저 여자가 먼저 말하면 기분이 나쁜지.밤 11시 46분. 바의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났다. 서연은 잔을 내려놓았다."저 이제 올라갈게요."태준은 시계를 확인했다."벌써요?"서연이 눈썹을 올렸다."벌써라뇨?""…….""거의 자정인데요."태준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그러네요."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기장님도 너무 늦게까지 마시지 마세요."태준이 고개를 들었다."걱정합니까?"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예의상요.""…….""기장님이 맨날 하시는 거."태준은 할 말을 잃었다. 서연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안녕히 주무세요."그녀가 돌아섰다. 태준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윤서연 씨."서연이 멈췄다. 한숨부터 나왔다."또 왜요."태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왜 불렀지. 자신도 몰랐다. 그냥. 저 여자가 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내일 오전 세션."그가 아무 말이나 꺼냈다."아홉 시부터죠?"서연은 눈을 깜빡였다."네.""그렇군요."서연은 한참 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밤 10시 38분. 서연은 호텔 로비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윤 변호사님."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봤다. 강태준이었다. 호텔 로비 한쪽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검은색 셔츠에 슬랙스.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서연은 그를 바라봤다."기장님?"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제 들어옵니까?"서연의 눈썹이 올라갔다."네?""시간이 늦었는데."서연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 38분. 그리고 다시 태준을 바라봤다."기장님.""네.""혹시 저 기다리셨어요?"태준의 표정이 굳었다."…뭐라고요?""아니, 여기 계시길래요.""착각하지 마십시오.""…….""나도 방금 내려왔습니다."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렇군요."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저녁은 잘 먹었습니까?"서연은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아주 천천히 웃었다."기장님.""네.""우리 아까 무슨 얘기했죠?"태준의 미간이 구겨졌다."무슨 얘기.""서로 사생활에 관심 끄기로 했잖아요.""…….""그런데 또 저녁을 물어보시네요."태준은 입을 다물었다. 서연은 팔짱을 꼈다."기장님. 진짜 저 좋아하세요?"정적. 태준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윤서연 씨.""네.""내가 그쪽을 왜 좋아합니까?"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게요.""…….""저도 이해가 안 돼서요."태준의 턱이 굳었다. 서연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럼 앞으로는 헷갈리게 하지 마세요.""헷갈리다니.""자꾸 관심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시니까요."태준은 한 걸음 다가섰다."관심 없습니다."서연도 물러서지 않았다."네. 저도 없어요.""…….""그러니까 서로 신경 끄자고요."태준은 그녀를 바라봤다. 서연은 태연하게 덧붙였다."그리고 기장님